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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하의 한국인 레지스탕스
작가 : 아라누리
작품등록일 : 202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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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회 프라하의 레지스탕스들
작성일 : 21-05-08     조회 : 304     추천 : 0     분량 : 63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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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적 망명이란, 독일인들 사이에서 유행하던 말이라고 그는 전했다. 제 3제국의 통치 이념과 정책에 겉으로는 찬성하는 척 따라가면서도, 속으로는 강하게 부정하고 반대하는 심리 상태를 말한다는 설명까지 덧붙였다.

 

 “나는 그 내적 망명자 중 하나야.”

 

 “....................”

 

 “나치 군인이라고 다 나쁘게 보지 말았으면 좋겠어.”

 

 “그래, 알겠어. 그런데 왜 나를 네 방에 데리고 왔어?”

 

 “넌 클럽 가수 같지 않았으니까. 호기심도 들었고, 대화 해보고 싶었지.”

 

 “대화 말고도 뭔가 더 원하는 거 같았는데?”

 

 “......................”

 

 “내가 쥐새끼라고 교육 받았다면서...”

 

 그는 나를 확 잡아끌어 가슴에 안았다. 내 몸에서 즙이라도 짜 낼 듯, 꽉 끌어안은 그의 팔 안에서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그의 목과 가슴에서 오데콜론 향이 난다. 코끝에 실리는 남자의 좋은 향에, 마음이 두근거렸다.

 

 키스를 할 듯 다가오는 그의 얼굴을 느끼고 나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는 내 이마에 키스를 하는 정도로 그쳤다.

 

 나를 안은 팔을 풀고, 그는 침상의 베개를 탁, 탁, 털어 네모 반듯이 각을 잡았다. 침대 시트와 이불도 다시 가지런히 놓았다.

 

 그는 호텔 방 수화기를 들어 이불과 베개 하나를 추가로 주문했다. 잠시 후 방문이 열리고 종업원이 해당 물건을 건네주자, 그는 이불과 베개를 바닥에 깔았다.

 

 그는 당황한 나를 번쩍 안아 올려 침대에 눕히곤, 이불을 턱 밑까지 끌어 올려 주었다.

 

 “여기서 자. 나는 바닥에서 잘 테니까.”

 

 “아니, 내가 바닥에서 잘게.”

 

 “여자를 바닥에 재우는 남자는 없어.”

 

 “루디...”

 

 “자꾸 말 많이 하면, 널 다시 덮칠 거야.”

 

 바닥에 몸을 뉘인 그는 잠시 후에 드르렁 거리며 단잠에 빠졌다. 규칙적인 코골이가 백색소음처럼 혼란스러운 내 마음을 진정시켰다.

 

 밀레나의 말은 맞았다. 그는 날 집어 삼키려 하지 않았고, 생각보다 말이 통하고 지성이 있는 양심적인 인물이었다. 그런 사람이 나치 장교라는 것은 시대적인 비극이다.

 

 내적 망명.... 그 시대를 살아간 양심적인 독일인들의 유일한 심리적 탈출구였을 것이다.

 

 

 *******************

 

 

 환한 아침 햇살에 눈을 비비며 몸을 일으켰다. 어젯밤부터 커피 외에 아무것도 먹지 못해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들렸다. 바닥에서 곤히 잠든 그를 발견하고, 나는 침대의 이불을 하나 더 끌어서 그의 몸에 덮었다.

 

 주린 배를 참으며 욕실에 들어가 세면대 물을 최대한 약하게 틀고, 고양이 세수를 했다. 1942년에 치약은 매우 비싼 귀중품이었다. 그의 것을 쓰기가 미안했지만, 손가락 끝에 치약을 살짝 짜서 내 치아와 혀에 문지른 뒤, 세 번 정도 헹궈냈다.

 

 옷을 다 입고서, 바닥에 누워 있는 그의 다리를 건너 방문을 나서려는데,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침 식사 하고 가지 않을래?”

 

 그 말은 너무도 달콤하게 들렸다. 염치가 없었지만 나는 내적 갈등에 휩싸였다. 그를 돌아보자, 민망하게도 알몸으로 누워 있다.

 

 “나도 배가 고파서. 같이 먹어줬음 해.”

 

 “알았으니까 옷을 좀 입어.”

 

 그가 모든 옷을 다 입을 때까지 나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내 손을 잡아 이끌어 탁자에 앉혔을 땐 재킷을 제외한 모든 군복을 다 입은 상태였다.

 

 룸서비스로 배달 된 구운 감자와 볶은 소시지, 볶은 아스파라거스와 빵, 버터, 잼이 쟁반에 그득했다. 말없이 그는 내게 소시지를 잘라 포크에 찍어 건넸다. 자신의 것은 먹지도 않고 빵에 버터와 잼을 반반 바르고 얌전히 접어서 내 접시부터 채웠다. 커피도 내 잔부터 따랐다.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이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넘쳐 올라왔다.

 이렇게 나에게 잘해준 남자는 전생에도 없었다.

 억지로 나를 가지려 하지 않았고, 푹신한 잠자리를 양보한 뒤 바닥에서 불편하게 잠을 청했다. 그리고 아침 음식까지 챙겨주었다.

 그런데 그게 하필 2차 대전 중의 나치 장교라니.

 

 다른 여자 같았으면 그의 호감을 적극 이용해서 뜨겁게 밤을 보내고,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의 일정을 우회적으로 물어서 정보를 캤겠지.

 

 ‘내 주제에 무슨 스파이 노릇을. 송인하, 네 천성으로 무슨.’

 

 약은 척, 기민한 척, 포커페이스를 써서 사람을 끝까지 이용해 먹는 스파이 노릇을 하기엔, 나는 너무 솔직하고 감수성이 예민했다. 두 눈을 질끈 감으며 속으로 자꾸만 암시를 걸었다.

 

 [나는 체코의 레지스탕스이고, 내적 망명자인 나치 장교의 친절에 혹하지 않는다.]

 

 정보를 캐내야 한다는 일말의 책임감으로 나는 그에게 넌지시 물었다.

 

 “그 높으신 분은 언제쯤 이 곳에 오는데?”

 

 “....알고 싶어?”

 

 “응.”

 

 “그럼 어제 나랑 잤어야지.”

 

 할 말이 없었다. 하나를 얻으면 하나를 주어야 하는 것은 동서고금의 진리다.

 이제 와서, 앞으로는 열심히 밤 상대 할 터이니 알려 달라고 말하는 것도 하수나 하는 짓이다. 먼저 마음을 얻었어야 했다. 체코인들에게 욕먹지 않으려고 잠자리를 하지 않았다는 것도 허울 좋은 핑계일 뿐이다.

 

 “그냥, 궁금해서. 체코 사람들이 다들 궁금해 하니까. 별 뜻 없어.”

 

 나는 포크를 내려 놨다. 스파이 노릇도 실패한데다가, 내 돈 한 푼 내지 않고 남의 아침 식사를 먹는 게 무척 양심에 찔렸다.

 

 “잘 먹었어, 루디. Danke schön.(정말 고마워)”

 

 문을 나서려는 데 루디가 내 등 뒤에서 조용히 입을 열었다.

 

 “4월에 기차를 타고 프라하에 갈 거야. 그는 항상 전용 오픈카를 타고 다녀. 메르세데스 벤츠 컨버터블 차량.”

 

 왜 이런 정보를 알려 주는 것인지 이해되지 않아서 잠시 그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어디 가서 내가 말했다고 하지 말고.”

 

 고마운 마음에 나는 그에게 고개를 숙였다. 문고리를 열고, 호텔 방을 빠져 나왔다. 그가 굳이 배웅하겠다며 따라 나섰다.

 

 

 *********************

 

 

 프라하 중심가에서 나는 그에게 돌아가라고 손짓했다. 그에게 내가 가는 행선지를 들키고 싶지 않아서였다. 그는 돌아서서 자신의 호텔로 향했다. 그가 작은 점으로 보일 때까지 기다렸다가 나는 마리 부인의 집으로 향했다.

 

 “마리 부인...”

 

 엄마 품에 안긴 딸처럼 나는 참았던 울음을 터뜨리고 감정을 쏟아 내었다. 그녀는 이미 밀레나에게 모든 얘기를 들었는지, 나를 꼭 안아 주었다.

 

 “저, 오늘부터 클럽 안 나가요. 부족하지만 저도 동참하게 해주세요.”

 

 “알았으니까 그만 울어요. 이나... 괜찮아... 잘했어...잘했어...”

 

 나는 본격적으로 레지스탕스 인물들과 만남을 가졌다. 마리 부인과 나는 체코 정보군 아웃디스턴스팀 중위 아돌프 오팔카와 요제프 발치크 소위를 먼발치에서 바라보았다.

 

 이들은 유인원 작전을 수행하는 그 7인에 속하는 인물들로, 얀 쿠비쉬와 요젭 가브칙보다 먼저 프라하에 잠입해서 현지의 레지스탕스 운동을 이끈 주역들이었다.

 

 우리나라에도 이름 없이 싸우다 장렬히 전사하는 의병들이 있듯이, 내가 만난 사람들 모두 이름 없이 스러져갈 체코의 의병들이었다.

 

 학교 선생님, 노동자, 경찰, 신문팔이 소년, 대학생....

 그리고 내 눈을 잡아끄는 아름다운 여성, 안나 마리노바.

 

 안나는 얀 쿠비쉬의 연인이자, 프라하의 레지스탕스였다.

 

 나의 시선을 느낀 그녀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웃어 보였다. 안나는 무표정하게 나를 보다가, 별 반응이 없이 정면으로 고개를 돌렸다.

 

 무안했지만, 이해 못할 것도 아니었다. 동양 여자라는 것도 미심쩍고, 은밀한 정보를 교류하는 곳에 있으니 그녀 입장에선 경계하는 것이 당연했다.

 

 그녀에게 신임을 받으려면 꽤나 오래 걸릴 거란 생각이 든다.

 

 

 *********************

 

 

 총알과 권총, 기관 단총, 수류탄을 실은 무기 상자를 밤새 운반하고 수량을 체크했다. 나치군이 수시로 동선을 바꾸고 일정을 바꾸는 통에 프라하 내의 레지스탕스들은 현장에서 수시로 정보를 접하는 데 총력을 기울였다.

 

 나의 외모가 너무 눈에 띄어서 레지스탕스 활동이 어려울 거란 판단에, 나는 마리 부인과 인드리슈카의 도움으로 염색을 했다. 목표는 금발이었지만 타고난 머리 색깔 때문에 밝은 갈색이 되었는데 그것만으로도 소기의 목적은 달성한 셈이었다.

 

 최대한 이목구비가 진하게 드러나도록 화장했고, 분가루를 많이 두들겨서 피부 톤을 백인처럼 보이도록 노력했다. 동양인 티가 나는 외모를 완벽히 숨길 수는 없었지만, 하지 않는 것 보다 나았다.

 

 알 없는 안경도 쓰고, 베레모를 상시 착용하여 최대한 동양 여자의 흔적을 지웠다.

 .

 .

 .

 4월 경, 기차역에서 하이드리히를 암살한다는 작전이 나왔다.

 

 첫 번째 암살 시도로 볼 수 있는 이 작전은 실패한다. 나는 결과를 알고 있었지만 입도 벙긋 할 수 없었다.

 

 미래에서 시간 여행을 온 사람이 해서는 안 될 일이 있다. 함부로 과거의 역사를 바꾸려 들지 말아야 하며, 앞으로 일어날 일을 말해서도 안 된다.

 

 이 거대한 인과의 섭리를 역행해보려고, 카렐 츄르더를 조심하라는 얘기를 레지스탕스들에게 했다가 급작스러운 복통으로 바닥을 구른 적이 있었다.

 

 말하지 말라는 신의 뜻이었다.

 현대였다면 앰뷸런스를 불러 달라고 요청할 만큼 그 고통은 심각했다.

 

 프라하 내의 레지스탕스들의 두 번 째 모임에 참석한 그 어느 날, 한쪽 구석에서 나를 조용히 지켜보던 안나가 내 옆으로 다가왔다. 나는 스텐 기관 단총에 총을 장전했다가 해체하는 연습에 몰입하느라 그녀가 옆에 온 지도 몰랐다.

 

 “이나, 사람 죽여 본 적 없죠?”

 

 갑작스러운 물음에 나는 잠시 멍한 상태에 있다가 정신을 가다듬었다.

 

 “네, 아직은. 앞으론 많이 죽이겠지만요.”

 

 “그렇다면, 총을 들지 마세요. 당신이 머뭇거리다가 우리 편이 죽을 수 있으니까.”

 

 안나의 목소리는 낮고 묵직했지만 서늘했다.

 

 그녀의 연인, 얀 쿠비쉬를 존경에 가까운 마음으로 흠모했던 나였다. 아울러 체코를 위해 나의 젊음과 인생을 바치기로 결심한 내게, 그녀의 말은 모질게만 들렸다.

 그녀와 친해지고 싶었던 만큼,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그러는 안나는, 사람 죽여 본 적 있어요?”

 

 “그래서 저는 후방 업무에만 치중하죠. 총은 들지 않아요. 그러니까 이나도 나와 같이 후방 업무에만 집중해요. 실전 경험도 없는 사람이 총을 든다는 것은...”

 

 “안나, 내가 알기론 당신도 총을 쏠 줄 아는데...”

 

 “당신이 나에 대해 뭘 안다고 그렇게 말하죠?”

 

 그 때 내 옆에 생쥐 한 마리가 지나가다 멈춰 섰다. 기회다 싶어 나는 손에 들고 있던 기관 단총으로 생쥐를 쏴 버렸다.

 

 탕 !!!!

 

 요란한 소리와 함께 레지스탕스 전원이 놀라서 내게 몰려 왔다. 생쥐는 처참한 몰골로 바닥에 쓰러졌다. 엄한 생쥐에겐 미안했으나, 어쩔 도리가 없었다.

 

 “이나, 미쳤어!! 총소리를 내면 어쩌자는 거야?”

 

 “안나가 저에게 사람 죽여 본 적이 없으니 총을 들지 말라네요. 이렇게라도 증명해야 했어요.”

 

 “이나, 동물을 죽이는 건 쉬워요. 사람을 죽이는 건 차원이 달라요.”

 

 나는 안나의 가슴을 향해 스텐 기관단총을 치켜들었다.

 죽이려는 마음은 아니었다. 그저 나를 만만히 보지 말라는 일종의 시위였다.

 

 “여기서 한 마디만 더 하면, 안나가 그 첫 번째로 죽는 사람이 될 거 같네요.”

 

 유인원 작전을 수행하는 핵심 인물 얀 쿠비쉬의 여인답게, 안나는 눈썹 하나 깜박이지 않았으며 그녀의 아름다운 갈색 동공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그녀가 내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총구를 자신의 가슴에 겨눴다.

 

 “이나, 어디 한 번 쏴 봐요.”

 

 “당신을 죽일 순 없죠. 나의 동지니까. 아무리 미워도.”

 

 나는 총을 내리고 장전을 해제했다.

 마리 부인이 내 어깨를 흔들며 거칠게 벽으로 밀쳤다.

 

 “이나, 아무리 화가 나도 동료에게 총을 겨누는 것은 안 될 일이야!!”

 

 “정말 죽일 마음은 없었어요. 안나가 자꾸 도발하는 거 같아서...”

 

 “그녀는 당신보다 훨씬 오래 활동했어. 사람들은 당연히 안나를 믿지, 당신을 쉽게 믿지는 못해.”

 

 “마리 부인도 절 못 믿나요?”

 

 그 때 얀 쿠비쉬, 요젭 가브칙, 카렐 츄르더가 뒷문을 열고 등장했다. 사람들은 모두 그들에게 달려들어 껴안고 악수를 나누느라 분주했다.

 

 내게 집중되었던 관심은 곧 그들에게 집중되었다.

 

 안나가 얀 쿠비쉬에게 달려가 그의 목에 팔을 두르고 키스를 했다.

 전쟁 속에서 피어나는 남녀의 사랑은 애잔하고 아름답다.

 그들을 바라보는 나의 눈빛은 질투도 미움도 아닌, 동경이었다.

 

 청춘을 청춘답게, 젊음을 젊음답게, 열심히 살고 사랑하며 불타는 그들이 부럽다.

 

 수면제를 입 안에 털어 넣을 때, 일제강점기로 태어나게 해달라고 기도할 걸 하는 약간의 후회도 들었다. 내 나라에서 목숨 걸고 싸운다면, 그나마 덜 외로웠을 것 같다.

 

 낯 선 체코에서, 인류애와 정의감 하나로 레지스탕스를 하겠다고 뛰어 들었지만, 왠지 나 혼자만의 짝사랑으로 끝날 것 같다.

 

 알아주길 바란 것은 아니지만, 나의 진심까지 인정받지 못하는 것은 속이 상했다.

 그저 나의 진심을 알아 줄 때까지, 묵묵히 임하는 수밖에.

 정공법만큼 확실한 것은 없다. 시간이 걸릴 뿐.

 

 그들은 뜨르들로(체코의 전통 빵)를 가져와서 사람들에게 나눠 주었다. 뜨르들로는 가운데 구멍이 뻥 뚫린 원통형의 빵인데 겉에 달콤한 설탕과 버터가 녹아 있어서 먹을수록 기분이 좋아졌다.

 

 요젭 가브칙이 나를 발견하고, 악수를 청했다. 흑백 사진 속에서 보던 대로, 부리부리한 큰 눈에 높고 우뚝한 콧대를 지녔다. 강인한 이미지였다.

 

 “밀레나 이모에게 들었어요. 이나 양, 만나서 반가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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