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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하의 한국인 레지스탕스
작가 : 아라누리
작품등록일 : 202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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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회 1차 시도와 불심검문
작성일 : 21-05-09     조회 : 344     추천 : 0     분량 : 58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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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힘차게 악수하는 그의 손은 따뜻하고 두툼했다. 강인한 마초일거란 내 생각과 달리, 그는 연신 사람 좋은 웃음을 내게 보였다.

 

 “만나서 영광입니다.”

 

 “이 쪽은 얀 쿠비쉬, 이나도 익히 들어서 알고 있겠지만.”

 

 “얀 쿠비쉬입니다.”

 

 사진 속의 얀은 선이 고운 사람이었다. 실제로 만나보니 그의 눈빛은 모든 것을 뚫어버릴 것만 같은 기운이 감돌았다. 전형적인 외유내강형의 인물.

 

 반갑다는 인사와 함께 그와 악수를 나누었다. 얀의 손은 요젭처럼 두툼했으나 약간 차가운 느낌이 들었다.

 

 얀이 물었다.

 

 “어떻게 우리들의 이름을 알았죠? 저희는 이나 양을 전혀 모르는데.”

 

 “클럽 로즈에서 일하다 보면, 이런 저런 듣는 정보들이 있어요.”

 

 “밀레나가 그 정도까지 알지는 못할 텐데...”

 

 “자세히 말씀드릴 순 없지만, 저도 영국군 안에 심어 놓은 인맥이 있답니다.”

 

 전생에서 40년 넘게 살았던 내공이 여지없이 발휘되는 순간이었다. 내게 그런 인맥이 있을 리 만무하다. 그런데도 내 입에선 능수능란한 거짓말이 술술 나왔다. 이런 자리에선 어느 정도의 허세도 중요하다.

 

 그들의 환한 미소에 나도 덩달아 마음을 놓았다.

 

 “스텐 기관 단총을 다룰 줄 알아요?”

 

 “동지들에게 배웠습니다만, 아직 많이 서툴러요.”

 

 한 번 해보라는 그들 앞에서 나는 총알을 장전하고, 다시 해체하는 과정을 보였다. 그들은 서로 눈빛을 교환하더니 내 앞에서 다시 시범을 보였다.

 

 기릭, 크륵, 탁.

 

 단 3번 만에 장전, 해체가 일사불란하게 끝났다. 소요된 시간을 대략 예상하자면 3초에서 5초 사이. 나는 빨라 봤자 15초였다.

 

 전문적으로 훈련받은 공수부대원과 민간인의 차이였다.

 

 “이나도 그만하면 잘 했지만, 실전에서 싸우기엔 다소 느려요.”

 

 “달리기는 100미터에 몇 초를 뛰죠?”

 

 갈수록 나는 작아졌다. 학창시절 100미터 달리기는 18초면 잘 나온 편이었고, 앉아서 공부만 하느라 살만 쪄서 19초, 20초를 찍은 적도 있었다.

 

 솔직하게 기록을 말하자 그들은 서로 얼굴만 바라보았다.

 

 “안나 말이 맞아요. 후방 업무에 신경써주세요.”

 

 얀이 위로하듯 내 어깨를 한 번 툭, 치고 지나갔다. 안나와 요젭, 얀은 다른 레지스탕스들과 기차역에서 거행할 암살 시도를 모의하느라 칠판에 지도를 그리고 논의 중이었다.

 

 7인 중 얀과 요젭의 이름만 알았던 나는 현지에서 아돌프 오팔카와 요젭 발치크 라는 두 명을 알게 되었고, 나머지 3명의 이름은 논의 막바지에 문을 열고 들어 온 사람들이었다.

 

 얀 흐루비,

 야로슬라브 스바르크,

 요젭 부블릭.

 .

 .

 .

 기나 긴 회의를 마치고 우리들은 해산했다. 한꺼번에 우르르 몰려 나가지 않고 2~3명씩 끊어서 일정한 시간마다 간격을 두고 나갔음은 물론이다.

 

 마리 부인 집에서 머무는 대학생 무리와 함께 나는 프라하 시내의 주요 거점을 확인했다. 어린 인드리슈카도 자전거를 끌고 우리와 같이 나섰다.

 

 “이 골목 모퉁이를 돌면 빵집이 나오고... 저 쪽엔 교회당이 있어요. 이쪽으로 꺾어지면....”

 

 분수대가 있는 광장에서 마리 부인의 집까지 오는 코스를 최소 3개 이상 익혔다.

 총격전이 벌어질 때 몸을 은닉하기 좋은 장소까지 모조리 터득했다.

 하루 종일 돌아다니느라 발이 퉁퉁 붓는 것을 느꼈지만 내색하지 않기로 했다.

 .

 .

 .

 엄살이 아니라 정말 발바닥이 아팠다. 마리 부인 댁에 돌아가서 신발을 벗자 나는 온 집안이 떠나갈 정도로 비명을 질렀다.

 

 “아악!!!!”

 

 양말의 발가락 부분이 피투성이였다. 땀으로 젖어 피부가 짓물렀는데, 신고 있는 신발은 공기 하나 통하지 않는 가죽 구두였으니 당연했다.

 

 조심스럽게 양말을 벗겨내자, 껍질이 벗겨진 내 발이 벌건 속살을 드러냈다. 마리 부인은 구급상자를 가져와 내 발을 치료했는데, 정말 불에 데어도 이보다 아프진 않을 것만 같았다.

 

 “윽...아파요!!!”

 

 “이나, 내 불찰이야. 다음에는 편한 신발을 줄게.”

 

 1942년, 항일 독립군들도 이런 고초를 겪고 있을 것이다. 같은 하늘아래, 동시대를 살아가는 그들도 동상에 언 손과 발, 짓무르는 피부에 고생하며 싸우고 있겠지.

 

 목숨을 내놓고 싸우는 일은 결코 낭만적이지 않다.

 소독약을 바르고 나서 붕대를 감은 마리 부인도 블라우스의 가슴과 등이 땀으로 젖었다.

 

 “마리 부인, 죄송해요. 손이 많이 가는 저 때문에.”

 

 “그런 말 하지 말아요. 우린 가족이고 동지야.”

 

 가족이고 동지라는 그녀의 말에 나는 그 동안 프라하에서 알게 모르게 겪은 이방인으로서의 외로움과 마음고생을 한 번에 보상 받는 것 같았다.

 

 소리 없이 우는 나에게 마리 부인은 따뜻한 커피 한 잔과 빵을 내어 주었다.

 .

 .

 .

 

 지금 먹고 있는 커피와 빵은 전생과 지금 생을 합쳐서 가장 맛이 있었다.

 

 에티오피아, 케냐, 브라질, 과테말라, 온갖 종류의 원두커피를 먹어 보았지만 마리 부인이 타 준 이 커피를 능가하지 못했다.

 

 온갖 종류의 비싼 제과점 빵을 섭렵했어도, 지금 내가 뜯어 먹고 있는 이 빵 만도 못했다.

 

 겉돌기만 하는 이방인이 아닌, ‘동지’로 인정받은 기쁨 때문에.

 

 인드리슈카가 내 옆에 바짝 와서 날 껴안는다.

 나는 전생에서도 학생들이 유난히 나를 따랐었다. 내가 워낙 아기와 어린이를 좋아하다 보니, 그들에게도 그 마음이 닿았을 것이다.

 

 들고 있던 빵과 커피를 내려놓고 나도 그녀의 등을 힘주어 끌어안았다.

 

 “이나, 이나는 꼭 이모 같아요.”

 

 “그럼 이모라고 불러... 혹시 마리부인에게 여동생이나 언니가 있으셔?”

 

 “없어요. 그래서 이모가 있었으면 했어요.”

 

 “인드리슈카, 너는 내가 왜 좋아?”

 

 “그냥요. 이유는 모르겠어요. 굳이 생각하자면, 이나가 착하고 예뻐서?”

 

 인드리슈카가 고개를 들고 나를 보며 웃었다.

 이 얌전하고 속 깊은 아이가 나를 보며 천사같이 웃으면, 온 세상이 내 것만 같다.

 

 영화나 책에서 그녀는 어린 소녀답지 않게 늘 무표정하고 웃지 않았다.

 어둡고 우울한 시대를 감내하느라 그녀는 웃음을 잃었던 것이다.

 그런 그녀가...... 내 앞에서 웃었다.

 

 “나 그렇게 착하지 않아. 예쁘지도 않고.”

 

 “그런 말 하지 말아요. 우리 모두, 이나에게 고마워하고 있어요.”

 

 “......................”

 

 “이나 앞에서 말을 안 해서 그렇지, 우리와 같이 싸워줘서 미안하고 고맙다고 했어요.”

 

 내 눈에서 또 다시 눈물방울이 흘러내렸다. 수도꼭지라도 틀어놨는지, 시도 때도 없이 눈물이다. 27살의 몸이지만 그 안에 깃든 나는 갱년기라서 그런지도.

 

 “누가?”

 

 “모두가요. 우리 엄마도, 우리 오빠도, 이 집에서 머무는 사람들, 그리고 작전 중인 얀, 요젭도...”

 

 나는 주머니에 있는 손수건을 꺼내 코를 풀고 눈가를 정리했다. 한번 시작된 눈물은 폭풍처럼 몰아친다. 두 개로 땋아 내린 인드리슈카의 금발머리가 창문 너머로 지는 햇빛을 받아 붉은 톤의 금빛으로 빛났다. 그녀는 말없이 내 머리카락과 어깨를 매만졌다.

 

 꼭 끌어안고서 그녀의 정수리에 쪽, 뽀뽀를 해주었다.

 

 

 *************

 

 

 기차 역 거사 일이 다가왔다. 나는 현장에 나갈 수 없었지만 어떤 일이 벌어질지 이미 알고 있는 터라, 입을 무겁게 닫았다.

 

 마리 부인 댁에서 결과를 기다리던 우리는, 지금은 폐쇄된 *카를 대학교 학생 테오가 문을 열고 들어서자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카를로바 대학교였으나 1882년 체코대학과 독일대학으로 분리되고 1920년에 체코대학이 카를대학으로 명칭이 바뀌었으며, 나치스 지배 때 폐쇄되었다. 2차 대전 종전 후 부활하면서 독일대학은 폐지되었다.)

 

 “실패했어요. 반대편에서 오는 기차에 가렸답니다.”

 

 마리 부인과 다른 사람들은 실망감에 털썩 주저앉았다. 결과를 이미 알고 있는 나로선 크게 놀랍지 않았다.

 

 건물 안에 숨어든 얀과 요젭은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가 타고 있는 기차가 역에 정차하자, 그의 머리를 조준하고 사격을 하려 했으나 반대 방향에서 오는 기차가 막아 버린 것이다.

 

 내가 영화에서 본 장면과 정확히 일치하는 테오의 묘사에 온 몸에 전율이 일어났다.

 

 뺨을 때리고 꼬집어보아도, 이것은 꿈이 아니었다.

 나는 2차 대전의 중심축에 서서, 이 모든 현장에서 먹고 마시고 배설하며, 싸우고 있다.

 

 “우리도 다음 일을 기약해야죠. 한 번에 되는 거사란 없어요. 이럴수록 그의 동선을 파악하는 일이 중요해요. 오늘은 일단 해산해요.”

 

 “마리 부인, 발바닥이 다 나아가니까, 저도 같이 합류할게요.”

 

 마리 부인은 내 얼굴을 빤히 보더니 테오와 2인 1조로 다니라고 지시했다.

 

 

 ***********

 

 

 테오와 나는 권총과 총알, 단검까지 갖추고서 프라하 성 주변을 탐문했다.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의 동선을 파악하기 위해 프라하 내의 레지스탕스들이 곳곳 마다 2인 1조로 배치되었고, 우리는 프라하 성 주변을 맡았다.

 

 나치들이 사방에 깔렸고, 보무도 당당하게 열을 맞추며 행군했다.

 간혹 지나가는 프라하 시민들을 세우고 심문하는 양상도 보였다.

 

 “우리가 수집한 정보에 의하면 매일 아침 11시 경, 프라하 성에서 나오게 되어 있어요.”

 

 “테오, 그렇다면.....”

 

 “프라하 성에 하이드리히의 집무실이 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죠.”

 

 시간은 이미 정오를 달리고 있다. 하지만 프라하 성에서는 개미새끼 한 마리도 나오지 않았다.

 

 “테오, 시간을 잘못 안 거 아닐까요?”

 

 “11시가 아니라 그 이전인 것 같네요.”

 

 “그럼 돌아가서 마리 부인께 알려요.”

 

 “이왕 나온 거, 좀 더 돌아 봐요. 이나, 발은 괜찮죠?”

 

 내 발은 다행히 빠른 속도로 회복되었고, 편안한 신발을 신고 있어서 걷는 데에 지장이 없었다. 엄지손가락을 들어 보이자 테오도 흡족한 듯 미소를 짓는다.

 

 프라하 성에서 잠시 벗어나 얕은 잔디가 깔린 언덕에 우리 둘은 잠시 숨을 돌리고 다음 접선 장소로 이동할 준비를 했다.

 

 “이나도 27살이라면서? 나도 27살이야.”

 

 “그렇구나. 우리 친구처럼 편하게 말하면 되겠다.”

 

 테오가 잠시 머뭇거리다가 다시 묻는다.

 

 “이나, 이 질문은 지금까지 지겹게 들었겠지만, 다시 한 번 묻고 싶어. 왜 굳이 이 먼 나라에서 우리를 위해 싸우겠다는 거지?”

 

 “당신들도 우리를 도왔으니까, 나도 돕고 싶었어.”

 

 “후회하지 않겠어?”

 

 대답 대신 나는 총알을 장전하며 웃어 보였다.

 

 장전한 무기를 품속에 넣은 뒤, 테오와 나는 엉덩이를 툭툭 털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언덕을 내려와서 시가지에 접어들 즈음, 뒤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이나?”

 

 뒤를 돌아보니, 나치 장교 하나가 서 있다.

 장교의 손엔 이미 권총이 들려 있었다.

 내 이름을 아는 독일 장교는 1명이다.

 루드비히 폰 뮐러.

 

 모자를 쓰고 있었지만 그가 맞았다.

 갈색과 금발이 오묘하게 섞인 머리에 푸른 눈동자.

 

 “맞군, 클럽 로즈의 이나. 그 날 이후 종적도 없이 사라지더니.”

 

 “루디.....”

 

 “프라하 성 주변에 무슨 일이지? 다른 데보다 불심검문이 심한 곳인데.”

 

 “산책 중이었습니다.”

 

 테오의 대답에 루디는 싸늘히 위 아래로 훑어보다가 시선을 내게로 돌렸다.

 

 “이나가 말한 사랑하는 남자가, 바로 이 남자인가?”

 

 “........................”

 

 “대답해.”

 

 “맞아, 이 남자야. 테오라고, 카를대학교 학생인데, 너희가 학교를 폐쇄하는 바람에 다니지 못하고 있어. 심심해서 같이 산책 나온 거야.”

 

 나는 테오의 팔짱을 끼며 그의 어깨에 살포시 머리까지 기댔다.

 

 “증명해 봐.”

 

 “뭘?”

 

 “사랑하는 사이인지, 지금 내 앞에서.”

 

 “..................”

 

 나는 테오의 얼굴을 붙잡고 입맞춤을 시도했다. 뒤통수를 루디에게 보이며, 눈으로 찡긋 테오에게 신호를 주었다. 눈치를 챈 그도 내 뒤통수와 어깨를 단단히 짓누르며 입술을 포갰다.

 

 툭!

 

 그의 품에서 권총이 허무하게 바닥에 떨어졌다. 망연자실한 그의 눈빛과 책망하는 나의 눈빛이 뒤엉켰다.

 

 루디는 피식 웃으며 바닥에서 권총을 집어 들었다.

 

 “언제부터 대학생이 책과 연필 대신 권총을 들고 다녔지?”

 

 

 내가 알던 양심적이고 따뜻한 루디는 사라지고, 냉기가 흐르는 차가운 독일 장교가 내 눈 앞에 서 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루디가 테오의 얼굴을 주먹으로 가격했다. 입가에 피를 흘리며 바닥에 쓰러진 테오에게 다시 달겨드는 루디.

 

 겁도 없이 나는 루디의 등 뒤로 돌아가 그의 목을 두 팔로 감싸는 척 한 뒤, 단검을 그의 턱 밑에 가져갔다.

 

 “루디, 움직이면 바로 그어 버릴 거야.”

 

 루디는 항복한다는 제스처로 두 손을 들어 보였다. 테오는 루디의 손에 들린 자신의 권총을 거칠게 뺏은 뒤 총알을 장전하고 이마를 겨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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