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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여는 자 2 - 사슴처럼 빠르게 사자처럼 용맹하게
작가 : 강이안
작품등록일 : 2020.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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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여는 자 2 - 사슴처럼 빠르게 사자처럼 용맹하게 32
작성일 : 21-05-24     조회 : 323     추천 : 0     분량 : 2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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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2.

 

  은지는 비명소리에 놀라 정신이 번쩍 든다. 승강기 문이 열리며 드러나는 모습이 무시무시했지만, 얼굴이 자세히 보일 만큼 가까이 다가올수록 한 번 봤던 인상이라 그런지 오히려 덜 무섭게 느껴졌다. 지금은 사나운 표정을 짓고 있지만, 신생아들을 내려다 볼 때 짓던 표정이 아직 기억에 남아있었다. 문 가까이에 있던 수지는 질겁하며 주저앉은 자세로 위협하듯 다리를 휘둘러댄다. 은지가 보기엔 전혀 닿을 것 같지 않다.

  바로 팥떡이 날아든다. 수지의 어깨를 지나 은지 바로 앞 바닥 위로 떨어진다. 그 떡을 보자 수지는 더욱 빠르게 다리를 저어댄다. 이번엔 가래떡을 휘두른다. ‘아, 저를 어째.’ 정통으로 수지의 이마에 맞았다. 보기엔 물렁물렁하지만 그 무게감이 상당했다. 휘두르는 힘이 더해지면서 충격이 강하게 전해진다. 휘청. 수지의 상체가 흔들거린다. 이미 정신은 반쯤 나가있다. 떡을 흘리며 안으로 들어서자 문이 닫히기 시작한다. 은지는 이 좁은 공간에 그녀와 함께 갇힌다는 생각을 하자 몸에 소름이 돋는다. 오른팔 아래로 매달린 가래떡이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바닥 위를 훑어댄다. 왼팔을 들어 거의 누운 자세로 있는 수지 위로 올리자 소매 안쪽에서부터 조랭이떡이 쏟아져 나온다. 작은 떡들이 삽시간에 몸 전체를 덮친다. 이제 수지는 완전히 바닥 위로 드러누웠다. 그대로 있다간 팥물이 들었던 그 의사처럼 떡에 파묻힐 것이다.

  “그만해!”

  이건 의도한 행동이 아니라 반사적인 동작이었다. 그대로 두고 볼 수 없었다. 팔을 휘둘러 쏟아지는 떡을 밀어냈다. 갑작스레 끼어든 은지 때문에 은숙이 놀란다. 조랭이떡들이 벽에 튀기면서 사방으로 흩어진다. 어떻게든 밖으로 나가야 한다고 생각한 은지는 있는 힘껏 은숙을 밀어붙이고 문으로 향했다. 열림 버튼이 보였다. 거의 손가락 끝까지 닿았다. 누르려고 하는데 뭔가 목 위로 떨어진다. 허연 가래떡 뭉치. 이제는 떡국도 못 먹을 것 같다. 이 가래떡 생각이 날 테니까.

  한 겹이 둘러졌을 땐 무게감만 빼곤 별다른 느낌이 없었다. 그 다음 두 겹, 그리고 세 겹, 이렇게 늘어나자 점점 목에 압박이 가해졌다. 숨이 턱, 턱, 막혔다. 가래떡이 겹겹이 쌓여 눌러왔다. 무릎이 휘청했다. 앞으로 고꾸라지면서 겨우 닫힌 문에 기댈 수 있었다. 목에 둘러진 가래떡을 뜯어내보았지만 겹겹이 둘러 쌓여 큰 차이를 만들지 못한다. 목 아래와 가슴을 누르는 무게 때문에 숨쉬기가 점점 더 힘들어진다. 은숙이 앞으로 다가온다. 표정을 읽기 힘들다. 계속 쌓여가는 가래떡 끝이 위로 꼿꼿이 솟아올라 흡사 살아있는 뱀처럼 보인다. 한 겹만 더 두르면 정말 숨을 못 쉴 지경에 이를 듯하다. 눈앞이 흐릿해진다. 목사님 얼굴이랑 민호, 민재가 얼핏 보인 것도 같다. 어릴 때 돌아가신 엄마, 아빠를 다시 보게 되면 정말 좋겠지만 그 얼굴까진 떠오르지 않았다. 너무 시간이 흘러 이제 기억이 가물가물해졌는지도.

  눈썹이 떨리고 초점이 완전히 흐려져 앞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머릿속 안이 온통 소용돌이쳤다. 그 속에서 선명하게 떠오르는 건 ‘두 번째 멜로디.’ 정말 그건 은지가 일부러 내는 소리가 아니었다. 뒷머리 어딘가 아주 조그마한 난쟁이가 웅크리고 있다 자기 차례가 오자 튀어나와서 불러주는 허밍 같았다. 자신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데도 은지는 스스로 듣는 관객이 되는 아이러니. 가래떡이 쌓여 올라 입과 코 주위를 두르기 시작한다. 목과 가슴에 와 닿는 무게가 문제가 아니라 이제 숨이 들어오고 나갈 구멍이 막힐 거였다. 그렇지만 귀에 들려오는 소리에 마음이 쏠려 질식할 거라는 두려움은 멀리 흘러가 버린다. 몸과 마음이 온통 그 소리를 느끼는데 몰입했다. 이건 은지 자신이 하나의 악기가 되는 그런 상태였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몰랐다. 흡사 다른 세상에 넘어갔다 다시 돌아온 기분. 소리가 멈추고 정신을 차려보니 가래떡이 더 이상 쌓이지 않았다. 무릎을 꿇고 앉아 울고 있는 은숙이 보인다. 눈과 코에서 체액이 마구 흘러내린다. 양손을 모아 얼추 아기 같은 모양을 한 백설기를 안고 있다. 크게 뭉쳐져 실제 아기와 비슷한 크기였다.

  “우리 아기. 이제 겨우 네 달 됐는데.”

  두 번째 멜로디가 뭐였지? 그래, 자신 안에서 잊고 있던 기억과 감정을 되살려주는 것. 아기가 있었다는 걸 다시 기억하셨나 보다. 그 그리움에 신생아실 앞에서 뚫어져라 애기들을 쳐다봤던 걸까? 상체를 앞뒤로 흔들어가며 아기를 달래듯이 팔을 모은다. 은지는 그제야 급작스레 호흡곤란이 느껴졌다. 물에 빠졌을 때처럼 급하게 팔을 휘저어 목과 가슴 언저리 쌓인 떡뭉치를 뜯어낸다. 한데 뭉쳐진 떡들이 찐득하게 달라붙어 잘 떨어지지 않았다. 마지막 가락을 집어던지고 모자랐던 산소를 힘껏 들이쉬었다. 사람은 박탈을 당해봐야 평소 당연히 여겼던 것이 얼마나 소중한지 안다고, 아무 생각 없이 들이키던 공기가 너무나 달콤했다. 숨이 편해질 때까지 그렇게 있었다. 울고 있는 은숙을 앞에 두고.

  구슬을 집어 든다. 고리를 풀고 손바닥 안에 단단히 감아쥔다. 은숙 옆으로 조심스레 다가갔다. 혹시 덤비면 어쩌나, 라는 걱정이 들었지만 이제 도망갈 힘도 없었다. 될 대로 되라는 심정이었다. 눈물, 콧물이 범벅된 은숙이 몸을 흔들어대면서 은지를 향해 고개를 든다. 적의는 보이지 않은 채 백설기 뭉치를 소중히 안고 있다.

  “이제 네 달째인데 엄마 젖도 못 먹고.”

  처량한 울음소리가 목 안에서 흘러나왔다. 아무런 염려 없이 가벼운 수술을 받으러 갔다 어린 아기와 생이별을 하셨으니 가슴이 많이 아프셨겠지. 그 설움이 맺히고 맺혀서 우리한테 무섭게 화풀이를 하셨던 걸까? 민호가 했던 때와 똑같았다. 그걸 보니 신기했다. 몸 전체가 작게 입자 하나하나로 나눠지더니 금방 구슬 안으로 쑤욱, 빨려 들어간다. 한순간이었다. 수지는 누운 자세로 신음을 토해낸다.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다. 상태는 나쁘지 않아 보인다. 출혈도 없고 숨도 잘 쉰다. 깨고 난 뒤에는 차라리 아무것도 기억 못하는 게 나을 텐데. 민호 생각이 난다. 빨리 찾아야 하는데. 어디서 무슨 일을 당하고 있을지 염려가 된다. 아직 같은 층에 있을까?

작가의 말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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