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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여는 자 2 - 사슴처럼 빠르게 사자처럼 용맹하게
작가 : 강이안
작품등록일 : 2020.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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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여는 자 2 - 사슴처럼 빠르게 사자처럼 용맹하게 33
작성일 : 21-05-31     조회 : 316     추천 : 0     분량 : 102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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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3.

 

  어? 왜 구두를 신고 있지? 분명 운동화여야 하는데. 검은색, 어두운 갈색, 다시 검은색 구두가 보였다. 신발을 바꿔 신었나? 그 위로 보이는 옷도 운동복이 아니다. 고개를 들자 단정한 복장을 한 성인 남자들이 앞에 서 있었다. 그 중 두 명은 경비직원용 유니폼을 입었다.

  “혹시 방금 전에 고함소리 못 들었습니까?”

  “네?”

  “누군가 사람 이름을 외쳐댔던 것 같은데.”

  다행이다. 그 아이들이 아니었다. 소리를 듣고 달려온 병원직원이었다. 굳이 이 사람들에게 상황을 설명해줄 필요는 없겠지.

  “전 잘 모르겠는데요. 저 너머에서 무슨 소리를 들은 것 같긴 한데.”

  대답하는 민호를 보는 시선들이 탐탁지 않다.

  “지금 여기서 뭐하세요?”

  ‘바닥에 주저앉아 엉금엉금 기는 모습이라니 누가 봐도 이상할 거야.’

  “아, 저, 동전을 떨어뜨렸는데 찾지를 못하겠네요.”

  ‘큰 병원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하루에도 수많은 이상한 환자들을 다뤄야 할 테니 나 같은 사람은 그다지 대수롭지도 않겠지.’

  고개를 흔들어가며 그들이 민호를 지나친다. 그때, 민호의 귀가 멀리서 들리는 대화소리를 감지한다.

  “확실해? 정근이 목소리였어?”

  “우리 이름을 불렀다니까.”

  나직한 음성이 뒤따른다.

  “흩어지지 말았어야 했는데 괜히 둘만 보냈어.”

  민호는 그 나직한 목소리의 주인공이 궁금했다. 분명 나이가 꽤 있는 사람이다. 지난 번 마주쳤을 땐 전부 앳된 얼굴의 아이들뿐이었는데 누구랑 같이 있는 걸까? 민호는 궁금해져 확인하고 싶었지만 차마 얼굴을 마주할 용기를 내진 못한다. 빨리 자리를 피해야 한다는 생각이 앞설 뿐. 멀어져가는 병원직원 일행을 서둘러 따라잡았다. 일행 가장 뒤에 있던 직원이 민호를 의아한 눈으로 쳐다본다.

  ‘그렇게 보든지 말든지.’

  저 만치서 다가오던 두 명이 발걸음을 멈춘다. 그들이 나누던 대화가 끊긴다. 그들을 지나쳐가며 민호는 슬쩍, 뒤를 향해 힐끔거렸다. 눈에 익숙한 파란색 축구복이다. 그들 뒤에 누군가 있는데 가려져서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고개를 더 돌렸다간 눈이라도 마주칠 거 같아 그렇게 하진 못했다. 좌우로 복도가 나뉘는 곳에 도달하자 함께 이동하던 직원 전부 민호를 알아채고 의심스럽게 쳐다본다.

  ‘역시나, 그러든지 말든지.’

  아무렇지 않게 그 일행 사이를 빠져나와 성큼성큼 앞으로 나섰다. 뒤돌아볼 생각은 하지도 않았다. 민호는 은지랑 헤어졌던 곳에 도착하니 한시름 마음을 놓는다. 조심스레 주위를 살폈지만 뒤따라오는 사람은 없었다. 휴. 깊게 한숨이 흘러나온다.

  “이렇게 사람 많이 지나가는 곳에서 해코지 당하진 않겠지.”

  한결 여유가 생기자 갑자기 피곤함이 몰려왔다. 앞가슴은 완전히 땀에 절어 눅눅했다. 목이 아파오고 어딘가 앉아서 쉬고 싶었다. 하지만 그런 사치를 부릴 여유가 없었다. 은지를 찾는 게 급선무였다. 무슨 일을 당하고 있을지 모르니까. 만약 은지에게 나쁜 일이 생긴다면 자신을 용서할 수 없을 터였다. 그걸 감당하느니 내가 당하는 게 낫지. 나랑 헤어져서 간 방향이 저쪽이었지. 어? 급하게 사람들이 달려가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무슨 일이 벌어진 건가? 혹시 은지가? 다시 마음이 급해진다. 다리가 무거웠지만 이를 악 물고 내달렸다. 엘리베이터가 어쩌고 하는 얘기가 들렸다. 엘리베이터가 왜? 아직 엘리베이터가 보이진 않는다. 은지가 그 안에 갇혔을까 걱정이다. 설마 아래로 추락한 건 아니겠지? 오만 가지 생각이 다 든다. 다음부터는 아무리 급한 일이 생겨도 함께 있는 게 낫겠어. 이렇게 걱정하며 스트레스를 받을 바에는.

  민호가 엘리베이터까지 갈 필요는 없었다. 달려오는 사람들을 피해 한쪽 벽에 붙어서 걸어오는 은지를 발견한다. 얼굴 위로 긁힌 자국이 보이고 목 주위에는 벌겋게 선이 그였다.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물어보기 겁이 난다. 얼마나 힘든 일은 당했을까. 그래도 은지는 민호를 보고 웃는다. 바보.

  “나, 하나 해냈다.”

  손을 들어 보여주는 검은 구슬. 걸린 고리가 웬만해선 풀리진 않을 정도로 단단히 잠겼다.

  “장하네.”

  민호는 뭐라 핀잔을 주려다 많이 지쳐 보이는 은지의 표정에 그 말을 안으로 밀어 넣는다. 대신 민호도 구슬을 꺼내 보여준다.

  “나는 두 개.”

  “우와. 힘들지 않았어?”

  ‘힘들어 죽는 줄 알았어.’

  “뭐, 그럭저럭.”

  “가자.”

  “어디?”

  “1층에 기도실이 있어. 여러 종교단체에서 돌아가며 쓰는 곳인데 거기라면 문을 열 수 있을 거야.”

  “엘리베이터 타고 안 갈래? 계단 내려갈 힘도 없다.”

  은지가 민호를 안쓰럽게 바라본다.

  ‘그런 측은한 시선을 받으려고 한 말은 아닌데.’

  은지가 사람들이 향하는 곳을 바라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저긴 말고. 다른 엘리베이터 타자. 저기 복도 중간쯤 어디에 있을 거야.”

  민호는 왜 그러냐고 물어보지 않는다. 말 걸기 미안할 정도로 지쳐 보여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오는 동안 둘 다 조용하다. 한껏 소진해버린 기운을 재충전하기 위해 숨만 연신 내쉬었다 들이쉰다. 1층에 있는 기도실은 생각보다 넓었다. 나름 방해받지 않을 위치로 선정한 의도였는지, 구석에 자리해서 처음 오는 사람은 찾기 쉽지 않을 터였다. 안을 들여다보니 다행히 마침 사용하는 사람이 없다. 누구에게나 열린 곳이라는 의미인지 문에는 잠금장치도 없었다. 은지가 익숙한 동작으로 스위치를 찾아 불을 켠다. 창에 둘러진 발을 모두 내려 밖에서 안을 볼 수 없게 한다. ‘방해금지’와 ‘의식집전 중’이라는 팻말까지 찾아내어 문 밖에다 건다.

  ‘참, 이럴 때 보면 은지는 전문적인 행사도우미 같다니까. 아주 능숙해.’

  그렇게 감탄하는 민호에게 은지가 묻는다.

  “뭐해?”

  “응?”

  “문 안 열고 뭐하냐고?”

  “아, 그래. 네가 너무 전문종사자 같아서 감탄했어. 너 아예 그런 쪽으로 창업하지 그러냐? 종교행사 전문도우미 같은 거 어때? 완전 대박 날 것 같은데.”

  어이없다는 미소. 민호는 자신의 차례가 되어 문을 열 준비를 한다. 한 번에 척, 문이 나타나길 바라지만 그게 아직까지도 생각만큼 용의하지 않다. 그럴 리가 없지. 열쇠를 끄집어내는 데 한참 애를 먹는다. 항상 시작이 어렵다. 열쇠만 손에 쥐면 문은 저절로 앞에 나타나는데 어찌나 반응을 안 하는지. 팔목에 그어진 검은 문신이 가증스럽게 느껴질 정도로.

  은지가 별 기대 안 했다는 동작으로 딴청을 피운다.

  ‘그렇다고 대놓고 그럴 건 없잖아.’

  주위 여기저기 널려있는 다양한 종류의 종교서적을 뒤적거린다. 슬슬, 그 행동이 거슬리는데 다행히 손에 감촉이 전달됐다. 피부를 타고 서늘한 냉기가 전해지고 이어서 번쩍, 거리는 황금빛이 눈을 아리게 한다. 지금 보니 이 정도면 상당히 큰 열쇠다. 커다란 집의 육중한 대문을 잠글 수 있을 만큼 크다.

  터어어엉. 잠금장치가 돌아간 후 문이 열린다. 항상 그렇듯이 저 너머엔 보이는 것이 없다. 아무것도 없는 것인지 아님 인간의 눈으론 볼 수 없는 것인지 그게 궁금하다. 그걸 묻는다고 친절히 가르쳐줄 만한 천사도 없고. 민호는 미갈이 꼭 저런 자세로 서 있어야 하는 건지 볼 때마다 의문이 든다. 등과 허리에다 이것저것 매달아놓고 경직된 팔과 다리에서 전혀 힘을 빼지 않는다. 본인은 아무렇지 않다고 해도 보는 사람 생각도 하면 좋으련만. 그 모습을 보고 있으면 민호 자신이 불편해진다. 조금만 시간이 흐르면 근육통이 생길 만하다. 힘 좀 빼라고.

  나팔이 은지에게 안부를 묻는다.

  ‘묻지 않아도 뻔하지. 얼굴 위 긁힌 상처가 보이지 않냐고.’

  목과 얼굴 위에 손을 얹었다 떼니까 금세 정상적인 피부로 되돌아온다.

  ‘어, 나도 멍든 데 있는데.’

  “한꺼번에 다섯인가? 나쁘지 않네.”

  나팔에게 치료를 부탁하려던 민호를 막아서며 가복이 다가온다.

  ‘참, 타이밍 절묘하군.’

  다짜고짜 손을 내민다.

  ‘천사는 사랑과 온정을 베푸는 행복의 전도사라는 이미지를 가져야 하는 거 아냐? 진짜 이 자식은 그 이미지를 사정없이 깨버린다니까. 예의라는 게 아예 없나? 아님 저 건너편에선 천사를 전부 군대식으로 교육시켜? 나팔을 보면 다 그런 건 아닌 것 같은데?’

  “여, 여기.”

  민호는 영이 빨려 들어간 구슬 네 개를 건넨다. 은지도 곁으로 와서 하나를 건넨다. 가복은 직접 손으로 받지 않고 손바닥을 펼쳐 들어 올리는 시늉을 한다. 구슬에 적용되던 중력이 사라져 버린 것처럼 다섯 개의 구슬이 위로 둥실 떠오른다. 민호와 은지는 이제 이런 정도엔 놀라지도 않는다. 고리가 풀리고 구슬이 주변으로 흩어진다. 빨려 들어갈 때 보이던 작은 알갱이 같은 입자가 솟아나더니 다섯 명의 형체를 만들어낸다. 골프채를 휘두르던 상철, 축구부원 정근과 재유, 떡을 뽑아내던 은숙, 그리고 여전히 바닥에 붙어 기는 환자복을 입은 남자. 다들 어리둥절한 모습. 자신들이 어디에 있는지조차 모른다.

  나팔이 상철 앞으로 나아간다. 그의 눈 위로 빛이 서렸다 사라진다.

  “평생을 골프와 함께 했군. 한때 선수였고, 그 후엔 코치로. 그러다 한동안 병원에서 지내다시피 했고. 흠, 병원에서 돌아다니다 아내를 발견했나?”

  “맞, 맞습니다. 병실에 있는 집사람을 봤어요. 그 사람이 왜 여기 있는 거죠? 엊그제도 날 면회 왔었는데.”

  “엊그제가 아니야. 한참이 지난 일이지.”

  “한참이 지났다구요?”

  나팔이 손을 올려 머리 옆으로 가져간다. 찰나가 지났을까. 상철이 울상을 짓는다. 입술이 심하게 흔들린다.

  “그랬나요? 사십구재까지 치렀군요. 묘 자리까지 마련했네요.”

  말을 끝맺지 못한다. 손으로 입술을 비틀어가며 억지로 터져 나오려는 울음을 막는다.

  “그런데 왜 집사람이, 집사람이 여기 있지요?”

  “굳이 알고 싶나?”

  대답이 없다.

  “환자복을 입고 병원에 있는 이유가 뭐겠나?”

  “많이, 아픈가요?”

  나팔이 슬쩍, 미갈을 넘겨보자 미갈이 눈살을 찌푸린다. 나팔이 살짝, 고개를 흔든다.

  “지금은 자신의 운명에만 집중하기도 벅찰 거야. 당신 아내의 운명은 하늘에 맡기도록 하지. 떠나왔던 곳으로 되돌아갈 시간이야.”

  나팔이 열린 문을 가리킨다. 상철이 아저씨가 문 너머를 멍한 눈으로 바라본다.

  “저, 저기는…….”

  선뜻, 내키지 않는 모습이다. 앞으로 나서지도 뒤로 물러나지도 못하고 머뭇거린다. 뒤를 돌아보는 상철과 은숙이 서로 눈을 마주한다.

  “은숙 씨.”

  은숙의 얼굴 위로 눈물자국이 선명하다.

  “선생님. 제 아이를 잊고 있었어요. 아직 돌도 지나지 않은 아기. 그 불쌍한 어린 것.”

  은숙의 눈이 젖어가고 그 등 위로 빛뭉치가 올라왔다 어딘가를 향해 사라진다. 나팔이 그녀 뒤로 돌아가더니 엄지와 검지를 들어 등 뒤로 튀어나온 투명한 선을 잡고 힘을 준다. 꼭 인두로 지지듯이 마찰이 일더니 끊어진다. 끊어진 부분들이 서서히 흐릿해지더니 눈에 보이지 않게 사라진다. 은숙이 깊은 숨을 들이쉬었다 내쉰다. 상철이 곁으로 온다.

  “은숙 씨, 같이 갑시다. 여기는 우리가 있을 곳이 아니라네요.”

  “하지만 우리 아기 어쩌죠? 엄마 젖도 제대로 못 먹였는데.”

  상철이 잠시 말을 고른다. 자신도 확신이 서지 않는데 타인을 설득하려니 마뜩찮다. 그러는 사이 가복이 무릎을 꿇고 앉아 기어 다니는 환자복의 남자와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눈다. 그 남자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든다.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아요. 어떻게 서야 할지 모르겠어요.”

  “내가 조금 도와줄까?”

  가복의 양손 아래에서 투명한 실들이 튀어나온다. 빛이 나는 것처럼 번쩍인다. 실이라기보다 전선이라고 하면 더 어울릴 듯하다.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실이 다리를 휘감더니 순식간에 양다리 전체를 꼭 의족이라도 한 것처럼 뒤덮는다. 가복이 위로 손짓을 하자 훅, 두 다리가 들리더니 발로 바닥을 밟으며 일어난다. 상체는 하체가 받은 기운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해 휘청대다 억지로 균형을 잡는다. 갑작스레 일어서게 되자 그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팔을 휘젓는다.

  ‘하여튼, 저 자식, 거칠기는.‘

  민호는 가복과 대뜸 눈이 마주친다.

  ‘뭐야, 내 생각을 읽은 건가? 생각을 읽는 건 나팔이 하는 일이잖아?’

  “생각보다 나쁘지 않지?”

  “어, 어, 어.”

  가복이 손가락을 구부려 걸어가는 동작을 취하자 그에 맞춰 다리가 걷는다. 천천히 열린 문을 향해 다가간다. 그 남자는 문에 가까워지는 건 전혀 개의치 않고 자신이 걷고 있다는 사실만이 무척 신기한지 다리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움직이는 하체에 맞춰서 열심히 앞뒤로 상체를 흔들어가며 균형을 잡으려 노력한다. 그대로 문 너머로 넘어가 버린다. 민호는 다시 궁금해졌다. 저 너머엔 어떤 세상이 펼쳐져 있을까?

  “은숙 씨, 아기는 남은 가족들이 잘 돌봐줄 겁니다. 은숙 씨는 다른 걱정 말고 나랑 가야할 곳으로 갑시다.”

  상철이 다가가서 손을 잡아준다. 불안한 눈으로 은숙이 주위를 둘러본다. 민호는 은지의 눈빛이 젖는 걸 발견한다.

  ‘항상 누군가를 저 너머로 보내야 할 때면 저런 표정을 짓던데.’

  나팔이 은숙의 눈 가까이 손을 가져간다. 그러자 은숙의 초점이 한가운데로 모아진다.

  “우리 아가, 많이 사랑받고 있구나. 아이구, 이뻐라. 웃는 것도 너무 이쁘네.”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린다. 은지가 보기엔 그 눈물엔 슬픔보다 그립고 애틋한 감정이 담겼다. 나팔이 손을 내리자 상철이 조심스레 그녀의 손을 잡는다. 은숙이 별 다른 저항 없이 그를 따른다. 행복한 미소까지 머금었다. 상철이 민호를 본다. 표정의 변화는 없다. 살짝 목례를 전하더니 고개를 돌려 문을 넘는다.

  ‘그 인사는 뭐지? 미안하다는 건가? 모르겠어.’

  가복이 남은 정근과 재유를 향해 다가서자 둘은 경계하듯 뒤로 물러난다.

  “너희들도 가야지?”

  “어, 어디를요?”

  “저기, 너희가 있어야 할 곳.”

  “우, 우리는 집에 가야 해요. 엄마, 아빠가 기다려요.”

  “엄마, 아빠는 더 이상 너희랑 같이 있을 수가 없어.”

  뒤에 있던 정근이 팔을 잡아끌자 둘은 뒤로 돌아 기도실 출입문을 향해 뛰어간다. 문 앞에 다다라 손잡이를 잡으려는데 그 순간 손이 더 이상 나아가지 않는다. 민호는 뭔가에 막힌 것도 아닌데 왜 그러지라는 의구심이 든다. 그 다음에야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이 눈에 들어온다. 겹겹이 쳐진 은빛실의 장막이, 탱크 같이 커다란 거미가 줄을 치면 저렇겠다 싶을 정도로 문만 아니라 벽 전체를 막아설 정도로 넓게 쳐져 있었다. 가복이 이미 주위에 준비를 해놓고 있었다. 손이 막힌 정근은 놀라서 금세 뒤로 팔을 뺀다.

  “재유야. 앞에 뭔가 있어!”

  둘은 양쪽으로 갈라져 달린다. 그래봤자 좁은 기도실이라 몸을 숨길만한 공간이 달리 없다. 정근을 가복이 막아선다. 달려오는 힘에 밀려 거의 부딪힐 뻔했지만 충돌은 일어나지 않았다. 위로 떠오른 가복이 아래를 향해 실을 뿜어내 정근의 몸 전체를 덮는다. 가복이 날아오르며 날개를 펼쳤는데, 민호와 은지가 그렇게 제대로 펼친 모습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새하얀 깃털이 공중을 뒤덮는 모습은 말 그대로 장관이었다. 하얗다는 말로는 부족했다.

  ‘저런 순백색이 존재하는 줄 몰랐어. 너무 하얘서 창백하다고 할까?’

  재유는 미갈이 맡는다. 어깨에 매달려 있던 방패를 잡아 던지니 빙글빙글 돌며 공중을 가른다. 재유는 날아오는 방패를 보고 기겁을 하며 그 자리에 주저앉는다. 내려다보는 미갈의 눈이 사나워 눈을 감아버린다. 방패는 재유를 지나쳐 주인을 향해 되돌아간다. 민호는 자신이 저 아이의 입장에 처하지 않은 게 감사했다. 나팔이 나선다. 아무래도 미갈에게 맡겨두면 좋게 끝나지 않을 듯하다. 미갈도 겁만 주려는 심산인지 나팔이 하는 대로 두고 본다. 나팔이 재유를 향해 미소 지으며 눈인사를 건넨다.

  “많이 무서웠죠?”

  나팔이 말을 건네는 사이 미갈이 살짝 방패를 들어 올렸다 내리며 재유 등 뒤로 연결된 선을 끊어버린다. 재유는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하고 나팔을 뚫어지게 바라본다. 나팔의 손이 눈앞에 펼쳐진다. 민호에겐 그런 나팔의 동작이 이제 익숙하다.

  ‘참, 좋아. 저러면 머릿속을 들어갔다 나갔다 마음대로 하니까. 저 너머에선 정신과 의사가 필요 없겠네.’

  “엄마, 아빠.”

  재유의 입술이 떨리고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린다. 코를 훌쩍이며 문 너머를 본다. 민호는 그 방향으로 시선을 주지만 역시 보이는 건 없다.

  ‘나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데 쟤는 무언가 보이는 걸까?’

  나팔이 천천히 재유 어깨 위로 손을 얹고 가볍게 두드린다. 재유는 주저하는 눈빛으로 그런 나팔을 보다 앞을 향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한다. 조심스레 문을 넘는 그 뒷모습을 나팔이 가만히 보고 있다. 미갈은 표정 없는 얼굴로 언제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가만히 서 있다. 제대로 보지 않으면 이건 흡사 조각품이다. 미동이 전혀 없다.

  가복은 공중에서 곡예를 한다. 날개를 반쯤 접어 낮게 활강을 하더니 그대로 문을 지나쳐 넘어간다. 길게 연결된 실이 팽팽히 당겨지더니 끝에 있는 물체를 끌어당긴다.

  ‘맙소사.’

  ‘어머.’

  민호와 은지가 속으로 거의 동시에 감탄사를 뱉는다. 정근이 누에고치처럼 실에 돌돌 말려 얼굴만 내보이고 있다 그대로 문 너머로 빨려간다. 어미 거미가 포획물을 획득해서 저장고에 집어넣듯이 그렇게 안으로 사라진다.

  “힘들지 않았어요?”

  나팔이 민호와 은지를 향해 말을 건넨다. 어느새 미갈도 사라지고 없다.

  ‘인사는 항상 나팔만 하는군.’

  “은지 씨 얼굴과 목에 난 상처를 보니 쉽지 않았겠어요.”

  은지가 말없이 미소를 건넨다. 민호가 대신 응답을 한다.

  “저도 멍든 곳이 쓰라린데 어떻게…….”

  “물론이죠.”

  정말 신기했다. 몸에 닿은 것도 아니고 거리를 둔 채 손을 다친 자리 위에 올려놓고 있을 뿐인데 욱신거리는 통증이 사라진다. 파랗던 부분도 원래 살색을 되찾는다.

  ‘평소 데리고 다니면 참 좋을 거야. 넘어지면 바로 와서 치료해주고. 어, 웃네. 내 생각을 또 읽었나?’

  “저기, 병원에 아이들이 아직 더 있어요.”

  은지가 입을 뗀다. 민호가 옆에서 거든다.

  “게다가 아이들만 있는 게 아닌 것 같아요. 우리가 모르는 누군가랑 같이 다녀요.”

  나팔이 살짝 얼굴을 찌푸린다.

  “영들이 함께 모일 거라는 예상은 했습니다. 그들이 힘을 합치게 되면 상황이 더욱 어려워질 겁니다. 은지와 민호가 더욱 조심해야 합니다.”

  “영들이, ……, 특별히 목적을 갖고 움직이나요? 따로 원하는 게 있을까요?”

  은지가 묻고 민호가 덧붙인다.

  “다들 죽기 전 기억에 매달려있는 것 같던데요.”

  “그들을 이곳으로 데려온 자가, 영들에겐 남겨진 기억을 이용해서 선동할 겁니다. 그저 가만히 보고 있지만 않을 테니까.”

  “그럼 그 자가 무엇을 하려는 걸까요?”

  “그건 차차 드러날 겁니다. 아무래도 상당한 혼란이 야기될 거라 예상합니다. 세상이 그대로 돌아가도록 놔두진 않을 테지요.”

  ‘천사라고 모든 걸 다 아는 건 아닌가? 억?!’

  문 너머에서 가복이 날아온다. 문을 넘자 날개를 쫙, 펼치고 공중에 머무른다. 나팔이 거슬린다는 말투로 건넨다.

  “작작해. 굳이 이 좁은 공간에서 그래야겠어?”

  “퀵 서비스. 빨리 주고 가려고.”

  툭. 바닥 위로 꽤 커다란 주머니가 떨어진다.

  ‘어째 이 주머니 요상하게 생겼네. 고등학교 세계사 시간에 본 듯한 옛날에 사용되던 가죽주머니 같지 않나?’

  “넉넉하게 준비했어. 넘어온 영들을 다 집어넣고도 남을 만큼. 요긴하게 쓰라고.”

  ‘아, 구슬들이구나.’

  “저, 근데, 구슬 몇 개는 제대로 쓰지도 못하고 잃어버렸어요. 찾지 않아도 괜찮나요?”

  “어차피 영들에게만 작용하는 거야. 이 세상에서는 흔한 돌덩어리에 불과하다고. 기념으로 가지려면 찾아보던가.”

  ‘역시나, 자기 할 말만 하고 넘어가버리는군. 활공이 상당히 빠른데. 저런 날개를 가지면 어떤 기분이 들까?’

  “더 이상 질문이 없다면 나도 가봐야겠군요. 몸조심하세요.”

  은지가 목례를 한다. 민호는 가복이 날아가는 모습을 보고 있느라 인사를 건넬 기회를 놓친다. 나팔이 안을 향해 넘어가고 문이 닫히자 언제 거기에 있기라도 했었냐는 듯 사라진다. 비좁게 보이던 기도실이 휑, 하게 넓어졌다. 민호는 은지의 옆모습이 더욱 피곤해 보인다.

  “이제 어쩐다? 남은 애들을 찾으러 가봐야겠지?”

  파리한 얼굴이 민호를 본다.

  ‘저러다 쓰러지겠다.’

  “아님 집에 가서 잠깐만 쉬었다가 다시 올까?”

  은지는 민호의 제안에 반문한다.

  “그 사이 모두 어딘가로 가버리면?”

  민호는 가복에게서 건네받은 불룩한 주머니를 들어 보인다.

  “그렇긴 한데 이걸 들고 다니진 못하겠어.”

  그 주머니가 아주 묵직하다.

  “이거 백 개는 족히 넘게 들었겠네. 받는 사람 입장은 고려하지도 않고 그냥 던져놓고 가버렸어.”

  그 말을 꺼내면서도 민호는 혹시 가복이 듣고 있지 않나 주위를 살핀다. 주머니를 보며 은지도 난감해 한다.

  “함부로 둘 물건도 아니니까.”

  “그래. 급하게 서두르지 말자. 민재도 혼자 두기 신경 쓰여. 집에 들렀다 다시 오자.”

  네 얼굴이 너무 피곤해 보여. 민호는 그 말을 입 밖으로 내진 않았다. 은지가 더 힘들어 할까 봐. 주머니 무게를 가늠해 보는데 너무 무겁게 느껴져 집에까지 들고 가야 하는 자체가 암담하다. 무겁다고 은지에게 함께 들어달라고 하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다.

  ‘이래저래 오늘 하루는 무거운 날인가 보네. 내 어깨 위로 두 배의 중력이 쏟아지는 그런 날.’

작가의 말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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