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연재 > 현대물
새벽을 쫓는 자들의 연회
작가 : 심해해삼
작품등록일 : 202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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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너의 비밀, 나의 거절 (1)
작성일 : 22-02-16     조회 : 194     추천 : 0     분량 : 48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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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 너의 비밀, 나의 거절 (1)

 

 

  앰뷸런스 여러 대가 클럽 앞을 바쁘게 오갔다.

  구조대원들은 쓰러진 클럽 손님들을 들것에 실어 날랐다. 나알들루시 상태에서 벗어난 손님들은 후유증 때문인지 좀처럼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아스트라와 케팔로스는 그대로 도주. 남은 것이라고는 방금 전 싸움의 잔해와 그 위를 찍찍거리며 오가는 쥐 몇 마리가 전부다.

  “일단 가스 누출로 인해 집단 실신을 했다고 말해뒀어. 나머지는 연합 측에서 알아서 할 거야.”

  규호는 짤막하게 상황을 정리했다. 외부로 유출 될 경우 혼란이 있을 수 있는 사건 사고는 연합이 알아서 언론을 통제한다. 이번 일도 그냥 가스 누출 사고로 유야무야 넘어갈 터였다. 애초에 단체로 괴물이 되어 날뛰었다는 이야기는 아무도 믿지 않겠지만.

  “고생했어요, 선배.”

  주아는 건물 구석에 앉아 한숨 쉬듯 말했다. 불편한 옷을 입고 싸운 데다, 앤드류에게 흡혈까지 당한 탓에 몸이 천근만근 무거웠다.

  “이 상처, 앤드류가 한 짓이야?”

  규호는 주아 목에 남은 상처를 곁눈질하며 물었다. 그녀의 목에는 날카로운 것에 잡아 뜯긴 것 같은 흔적이 남아 있었다. 주아는 왠지 겸연쩍어서 너스레를 떨었다.

  “별거 아니에요. 그 자식, 비실거려서 가끔 피를 줘야 하거든요. 이 정도는 익숙해요.”

  “뭐? 이전에도 물린 적 있어?”

  그 말에 규호는 깜짝 놀라 물었다 주아는 괜히 아차 싶어서 어색한 미소와 함께 변명했다.

  “별거 아니예요. 뱀파이어에게 물린다고 해서 뱀파이어가 된다는 건 옛날 미신이니까. 그냥 조금 뻐근한 정도예요.”

  뱀파이어에게 물리면 뱀파이어가 된다는 것은 그냥 공포소설 설정이 널리 퍼지며 생긴 오해일 뿐, 아무런 효과가 없다. 고작 상처 감염으로 인해 덧나는 게 고작이다. 그것도 그냥 소독약 몇 번이면 말끔히 낫는다.

  규호 역시 이 사실을 모를 리 없었다. 그래도 그는 주아가 걱정되었는지, 차분한 목소리로 일렀다.

  “주아야, 너는 너 자신을 조금 더 소중하게 하는 법을 배워야 해.”

  “칫. 그러면 연합에서 일 못하죠.”

  여기는 사람 머리는 가볍게 씹어 먹는 괴물들이 즐비한 곳이다. 여기에 몸을 담고 있는 이상 지금보다 더 한 것은 각오해야 하는 건 잘 알고 있다.

  주아는 입은 투덜거렸지만, 그래도 얼굴은 조심스럽게 붉혔다. 그래도 규호가 자신을 왠지 걱정해주는 것 같아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남은 일은 내가 정리할게. 너는 앤드류에게 가봐. 잘은 모르지만, 힘들어 보여.”

  규호는 주아에게 일렀다. 아까의 일 이후 앤드류는 말없이 저 멀리 앉아 묵묵히 자리만 지키고 있었다. 허리를 굽힌 채 상체를 푹 숙이고 있는 그의 뒷모습은 오늘따라 작아 보였다.

  “흠흠.”

  주아는 몇 번 헛기침을 한 뒤, 그의 옆에 앉았다. 앤드류는 그녀를 슬쩍 보고는 퉁명스럽게 물었다.

  “왜?”

  “그냥 몸은 괜찮은지 궁금해서.”

  엔드류는 무언가 말하려다 다시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고개를 푹 숙인 채 풀죽은 어조로 말했다.

  “미안.”

  “뭐가?”

  “놓쳤잖아. 그 자식들.”

  “네가 놓쳤나. 나도 놓쳤는데. 그래도 클럽 손님들은 구할 수 있었잖아.”

  그녀는 앤드류에게 위로의 말을 건넸다. 앤드류는 입가에 들러붙은 검붉은 흔적을 쓱쓱 떼어내며 멋쩍은 어조로 답했다.

  “꼴사나운 모습을 보였네.”

  “그럴 수도 있지 뭐.”

  말은 그렇게 했지만, 사실 아까의 모습은 제법 충격이었다. 이성을 잃은 짐승처럼 열띤 숨을 몰아쉬면서 검붉은 액체를 핥아 먹던 모습은 그가 아는 앤드류와 달랐다. 흥분에 가득 찬 얼굴, 연신 움직이던 숨, 가쁘게 오가는 신음 소리까지.

  앤드류는 그녀의 마음을 짐작했는지, 가볍게 운을 뗐다.

  “피야.”

  그는 기운 없이 말을 이었다.

  “내가 아까 핥아 먹던 거. 정확히는 격이 높은 여성 귀족의 피.”

  “그러고 보니 오직 여자 뱀파이어만이 다른 뱀파이어를 만들 수 있지?”

  뱀파이어가 다른 뱀파이어를 만드는 것.

  세상에는 온갖 흉흉한 소문이 판을 치지만, 공식적으로 사람이 뱀파이어가 되는 방법은 단 한 가지뿐이다. 속칭 ‘세례’라고 불리는 의식을 통해 여성 뱀파이어의 피를 마시는 것.

  앤드류 역시 아마 어떤 여성 뱀파이어의 피를 받고 귀족으로 거듭났을 터였다.

  “맞아. 남자 귀족이 햇볕에 대한 내구력도 강하고, 신체적인 힘도 뛰어나지만……오직 ‘피’에서만큼은 여자 귀족을 거부할 수 없어. 이유는 몰라. 피에 명령을 내리며 하사하면 우리는 그냥 따라야 해. 그건 본능이야.”

  앤드류는 고개를 푹 숙였다. 그의 입술 아래에 있던 송곳니는 아까의 피를 기억하는지 급단현상이라도 온 것처럼 덜덜 떨렸다.

  “여자 귀족들은 자신 아래에 있는 남편들에게 보상 개념처럼 피를 내리곤 하는데, 그 자식들 궁지에 몰리니까 그걸 던지고 도망친 것 같아.”

  거기까지 말하고서 그는 어울리지 않게 쓴 웃음을 지었다.

  “한심하지?”

  많은 의미가 담긴 질문이었다. 주아는 고민하다가 가볍게 운을 뗐다.

  “네가 한심하면 내가 뭐가 돼. 나는 아스트라의 환각에 넘어갈 뻔 했잖아.”

  그녀로서는 나름 위로랍시고 한 말이었지만, 앤드류의 표정은 어둡기만 했다.

  “참, 귀족이라고 했는데 체면이 말이 아니네.”

  앤드류는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리고 투박한 말투 한 마디만 그녀에게 대던졌다.

  “조금만 걷다 올게.”

  이 말만 남기고서 그는 어두운 도시 저편으로 훌쩍 뛰어갔다. 그의 움직임에는 한 줌의 소리도 찾아 볼 수 없었다. 예전에 한 번인가 보여준 적 있는 고요한 움직임이었다. 마치 밤 그 자체에 녹아들 듯 앤드류의 뒷모습은 어두운 골목 사이로 금세 사라졌다.

  “하여간 자존심 하나는 더럽게 세다니까.”

  주아는 앤드류가 사라진 방향을 보며 중얼거렸다. 티는 내고 있지 않았지만, 특유의 능글맞으면서도 여유로운 모습은 찾아 볼 수 없다. 아마도 아까의 일 때문이겠지. 주아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앤드류는 조금 어때?”

  규호가 안부가 물어왔다. 주아는 어깨를 으쓱였다.

  “아무래도 아까 일 때문에 마음이 적잖이 상한 것 같아요.”

  “우리들은 뱀파이어의 생태를 잘 모르니까 어쩔 수 없겠지. 네가 위로 좀 해줘.”

  규호는 사람 좋아 보이는 웃음을 지으면서 다정하게 일렀다. 주아는 어이가 없어서 대꾸했다.

  “위로는 무슨. 저 자식은 그런 걸 받아도 기분 나빠할 걸요? 귀족인 자신에게 감히 위로를 하냐면서요.”

  “모르잖아. 가만 보면 오히려 저런 사람이 속이 더 여리더라고.”

  주아는 순간 귀를 의심했다.

  “속이 여리다고요? 저런 괴물이요?”

  “표현이 그래서 그렇지 본성은 좋아 보이던데.”

  규호는 특유의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를 지어보이며 속 편한 소리를 했다. 하지만 듣고 있는 주아는 기가 찼다. 툭 하면 사람을 귀한 먹거리 취급을 하면서 깔보길 좋아하는 놈의 본성을 좋다고 말하다니.

  “선배! 저 자식은 귀족이니 뭐니 하면서 거들먹거리기 좋아하는 쓰레기예요. 평소에 얼마나 능글맞고 짜증나게 구는 줄 아세요? 그런 주제에 툭 하면 저를 특식 취급하면서 그냥 편하게 꺼내 먹을 수 있는 간식취급이나 한다고요.”

  평소에 쌓인 게 많아서 그런지 주아는 속에 있던 말을 자신도 모르게 우다다 뱉어냈다. 규호는 열을 내는 주아를 보며 키득거렸다.

  “하하, 평소에 자주 싸우나보네.”

  “싸우기 보다는 그 자식이 절 일방적으로 놀려 먹는 거죠. 선배는 저 자식 어디가 좋아서 그렇게 편을 드세요?”

  규호는 그 말을 듣고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가벼운 어투로 답했다.

  “흠,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나는 저렇게 꾸밈없는 사람이 좋거든.”

  “네에? 선배, 제정신으로 하는 말이세요?”

  실로 오랜만에 들어보는 황당한 소리였다. 규호는 그런 주아의 마음은 까맣게 모르는지 앤드류가 사라진 방향을 보며 알 듯 모를 듯한 표정만 지어 보일 뿐이었다.

 

 

  * * * * *

 

 

  “후우.”

  규호는 짧게 숨을 들이마셨다.

  밤이 깊었다. 모두가 잠들었다. 풀과 나무 역시 어둠 속에 몸을 뉘였다. 가만히 들려오는 풀벌레 울음소리가 이곳에 머물러 고여 있던 침묵을 부순다. 바람은 차갑고, 그 위로 달빛만 잔잔히 내려앉는다.

  그리고 그 한 가운데에서 규호는 의식을 집중했다.

  곧 온 몸의 감각이 자연의 흐름을 감지한다. 공기가 윙윙 거리는 소리, 작은 미물들이 꿈틀거리며 내는 진동, 초목이 뿜어내는 옅은 숨이 자신에게 몰려들어온다. 이제 자신을 잊고, 모든 것을 잊고, 자연 그 자체를 가만히 받아들인다.

  도시에 돌아온 이후 마땅한 곳이 없었던 지라 제법 외곽에 있는 공터까지 나와야 했다. 그래도 하루 종일 매연과 소음에 지쳐 있던 의식이 순식간에 또렷해진 걸 보니, 여기까지 온 보람은 있었다.

  “집중하는데 방해해서 미안.”

  어둠 저편에서 누군가 말 한마디가 들려왔다. 그를 흔들었다. 낮게 깔린 굵직하면서도 어딘가 짐승의 울부짖음을 연성시키는 그르렁거리는 목소리. 규호는 뒤쪽을 향해 곁눈질 하며 슬쩍 물었다.

  “어디 가셨습니까? 주아가 걱정하던데.”

  “거짓말이 서투네. 그 마녀는 내가 어딜 가든 걱정 안 해.”

  곧 저벅거리는 발소리와 함께 앤드류가 걸어왔다. 어두운 밤에 마주한 그의 표정은 푸르스름하다 못해 차갑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늘에 반쯤 묻힌 앤드류의 눈은 안광을 흩어내며 규호에게 단단히 고정되어 있었다.

  “뒤를 밟으신 겁니까? 귀족답지 않으시군요.”

  “날 도발할 생각이면 시도는 좋았어.”

  앤드류는 빈정거리는 투로 답했다. 그러자 규호의 입가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주아와 함께 있을 때는 항상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가 걸여 있었다. 어찌 보면 가식적이고, 어찌 보면 작위적인 것 같은 표정.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지금 규호는 감정이라고는 하나 찾아 볼 수 없는 메마른 모습이었다. 그는 지극히 사무적인 어투로 앤드류에게 물었다.

  “그래서 용건은?:

  “여기에 보는 눈이 없잖아. 너와 나랑 단 둘 뿐이고. 사실 너에 대해 예전부터 궁금한 게 많았거든.”

  앤드류는 규호에게 천천히 걸어왔다. 그리고 허리를 낮추고 규호와 시선을 마주한 채 명령조로 일렀다.

  “일단 그 옷부터 벗어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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