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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과 나비와 계수나무
작가 : 재희
작품등록일 : 2017.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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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되돌아갈 수 없는 (3)
작성일 : 18-03-25     조회 : 445     추천 : 0     분량 : 53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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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답하며 하염이 수아와 눈을 마주쳤다.

 

 “어릴 때에만 쓸 이름이래도 그 이름을 타고난다지 않니. 이걸로도 괜찮을까?”

 

 부끄러운 듯 배시시 웃는다. 수아는 또 주책맞게 눈물이 나올 것 같아 급히 얼굴을 숙였다.

 ‘공주님…….’

 

 “수아야!”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인사하는 수아를 얼른 하염이 일으켰다.

 그러고도 한참을 수아는 감정을 추스르지 못했고 눈물로 얼룩진 뺨을 화장으로 감추고 나서야 돌아갈 수 있었다.

 

 

 

 3황자 첩의 잉태 소식은 금세 황궁을 휩쓸었다. 손이 귀한 자비국인지라 특히 내궁이 술렁거렸다.

 친모 경비는 기뻐하였으나 황후는 마냥 기뻐할 수는 없었다.

 ‘하필 외국에서 데려온 첩의 자식이라니. 그나마 태자의 자식이 아닌 것을 기뻐해야 하나.’

 생각하던 황후는 옆에서 경망을 떠는 경비를 노려보았다.

 

 “경비, 그 아이는 이리로 오라 했나요?”

 “예, 마마. 지위를 받은 후부터는 매일 문안 올리라 하였습니다.”

 “황손을 잉태한 여인으로서 알맞는 자태를 갖추도록 경비가 많이 가르쳐야 할 것입니다. 더 이상 외궁에 들락날락거리는 것도 삼가고.”

 “예, 마마.”

 

 경비를 물리고 나서는 내관 한 명을 은밀히 부른다.

 

 “태자는 뭐라 하던가?”

 “놀라시는 듯 하였으나 크게 신경 쓰지는 않는 눈치였습니다.”

 “말한 건 없고?”

 “‘아명이 뭐라고?’ 한 마디 여쭙고만 말았습니다.”

 “흥. 그놈도 황손인니, 천한 것이 감히 지은 이름에 놀랄 수밖에. 랑이 그 놈도 치마폭에 빠져서는 그리 무르단 말이야.”

 

 물론 황후의 혼잣말은 허공으로 흘러갈 뿐이다. 내관은 듣지 못한 듯 고개만 더욱 숙였다.

 

 “다른 황실혼에 대한 이야기는 없느냐?”

 “예, 아직은 없습니다만 라호국 왕실과의 혼담으로 의견이 분분한지라.”

 “먼저 할지 어쩔지 아직 모르는 거로군.”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손녀 성하다. 그런 아이를 3황자도 아니고 적인 태자에게 넘겨야 하는 황후는 생각만 하여도 속이 쓰렸다.

 본래대로면 황실혼은 모두 제 손에 있어야 하건마는. 꼬인 족보로 낙비 부인에 좌지우지되고 있었다.

 ‘그 노친네는 정정하기도 하지.’

 일단 불만은 접어두고 닥친 일부터 해야 했다.

 ‘라호국 여인을 태자에게 붙여버리면 어떨까.’

 누군가에게 대답을 바라는 질문이 아니다. 황후는 내관을 물리고 양가죽 의자에 몸을 뉘였다.

 ‘그것도 좋진 않은데. 일이 꼬이려면 이렇게도 꼬이는군.’

 그래도 아직은 기회가 있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보면 마지막엔 언제나 아쉬움으로 귀결된다.

 

 “내 아들만, 나의 아이만 살아있었더라면…….”

 

 그것만은 소용없는 일이다. 아무리 찾아보았자 이미 없는 사람이니.

 그리움보다는 짜증이 담긴 황후의 눈꺼풀이 닫혔다.

 

 

 

 다음 날, 3황자의 궁부는 아침부터 소란스러웠다. 물론 황자 랑도 마찬가지다.

 

 “누가 왔다고?”

 “태자 전하께서…….”

 “왜 여길?”

 

 의뭉스러운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내관이 외쳤다.

 

 “태자 전하 드십니다.”

 

 멀끔한 차림으로 들어서는 계. 랑이 일어나자 자연스레 상석으로 가 앉는다.

 

 “어쩐 일이십니까.”

 

 랑의 물음에 계는 잠시 뜸을 들였다.

 

 “축하를 하러.”

 “네?”

 “아이를 가졌다지.”

 “아……, 네…….”

 

 여전히 납득보다는 의문이다. 계가 언제부터 황손에 신경 쓰는 인사였나.

 

 “폐하께서 깨어나셨다면 크게 축하를 하였겠으나 아직 누워 계시니, 나라도 대신 축하해야 하지 않겠나.”

 “아, 네.”

 “경비께서도 기뻐하시던가.”

 “그렇지요. 한동안 황손이 조용했으니까요.”

 “첩지를 내릴 테지?”

 “그래야지요.”

 “궁도 따로 쓰겠군.”

 “네, 뭐…….”

 “아이 이름을 ‘정이’라고 하였다고.”

 “아명입니다.”

 “그렇겠지.”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다.

 

 랑은 이 분위기 자체가 낯설었다.

 그와 독대한 적도 거의 없을 뿐더러 사적인 이야기는 더더욱 한 적이 없었다. 헌데 태자와 제 자식에 대해 시시콜콜 다정하게 이야기를 하고 있다니.

 ‘무슨 꿍꿍이가 있겠지.’

 이유를 생각해보아도 제 후사를 노리는 것 외에는 떠오르는 것이 없다.

 

 랑이 차를 건네었으나 계는 손도 대지 않았다.

 뭔가 할 말이 있는 것 같은데도 도통 입을 열지 않는다. 랑만 괜히 차를 들이켰다.

 

 “그 아이를 부를까요? 축하라도 하시겠습니까?”

 

 마지못해 꺼낸 말이었다.

 

 “되었네. 다만…….”

 “네.”

 “나중에 아이가 태어나면 보러 오겠네.”

 “네. 네?”

 

 계가 일어났다.

 

 “가보지.”

 “네?”

 

 그러나 여전히 랑은 그가 했던 말을 되새기고 있다.

 ‘또 오겠다고? 아이를 보러?’

 다시 묻기엔 이미 계가 나간 뒤였다. 랑 혼자서 꿍꿍이를 풀어내려 머리를 쥐어뜯었다.

 

 

 

 ***

 

 ‘저를 구해주셔서.’

 입을 맞춘 하염은 그렇게 말했었다.

 

 생각에 잠긴 계의 걸음이 3황자궁을 나와 자연스레 행화궁 앞에 멈추었다.

 ‘빚이라 생각하나…….’

 하염은 빚을 지고는 살지 못하는 사람이다. 언제나 보답하려 했다. 고의든 아니든. 수아의 일로 제가 빚을 졌는데도 사정 모르고 선물을 내밀었던 때처럼.

 

 전의 생과 달라진 것. 하염의 목숨을 구한 것이 이렇게 돌아오고 있었다.

 ‘내가 구해주었기 때문에.’

 행화궁의 단출한 입구를 올려다본다.

 

 한때 향비는 이곳을 싫어했었다. 황자의 궁과 가까워, 임신이 알려진 뒤로는 유폐되다시피 했던 곳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한때는 그도 쳐다보지도 않았던 곳이었는데.

 

 내관이 태자 전하께서 오셨다고 급히 행화궁 안으로 들어갔다. 계는 그곳으로 선뜻 들어섰다.

 때마침 난로를 쬐고 있던 하염이 일어선다. 놀란 눈을 휘둥그레 뜬다.

 난로 위에 차가 끓고 있었고, 그 옆에는 필사하던 흔적이 고스란히 놓여 있다.

 

 “어쩐 일이세요?”

 

 하염이 고개를 찻잔 쪽으로 돌렸다. 계는 잠시 대답 없이 그 옆모습을 쳐다보았다.

 

 “…….”

 “전하?”

 

 그래도 대답이 없자 고개를 든다. 계가 마침 차를 따르고 있었다.

 

 “그 시녀가 아이를 뱄다던데.”

 “네? 네! 수아 말이지요.”

 

 금세 하염이 밝아졌다.

 

 “잘 되었어요. 아이라니! 좋아하는 분께로 가서 아이까지 낳고…….”

 

 주절주절 얘기하려던 말이 멈춘다. 제 앞에 입을 맞췄던 이가 있다는 게 떠올라서다. 술 취한 입술에 몰래 한 것까지 하면 두 번이나 되었다.

 낯이 다시 민망해지려는 찰나였다.

 

 “아이 이름은 그대가 지었나?”

 “네?”

 “정이라고 들어서.”

 “아, 네……. 아명이니 용서하세요.”

 “용서하고 말 것도 없지.”

 “감사해요.”

 “…….”

 “그런데 어찌 아셨어요?”

 

 계가 잔을 한 잔 들이켜고 곧바로 다음 잔을 따른다. 붉은 수면이 찻잔 안에서 흔들렸다.

 

 “무엇을?”

 “제가 이름 지었다는 걸요.”

 “……어림짐작이지.”

 “그렇군요. 그래도 자비국식으로 지으려고 했는걸요.”

 “황궁에는 이름에 ‘밝음’ 같은 의미는 담지 않네. 사소하고 작은 것을 담지.”

 “어째서죠?”

 “그런 것에도 다 황명이 들어가 있음을 알리기 위해서.”

 “슬프네요.”

 “왜?”

 “그저 아이 이름이잖아요.”

 “그저 아이가 아니라 황손인걸.”

 

 감정이 풍부한 여인이다. 작은 일에도 기쁘고 슬퍼하는.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더 빨리 이곳에서 망가졌던 건지도 모른다. 제 어미처럼 다른 누군가를 연모하는 대신에.

 그리고 이번 생에서는 마음을 내주려 한다. 제게로. 아무것도 없는 내게로. 그저 목숨을 구해주었다는 이유만으로.

 

 “그렇군요. 그렇다면 더더욱 이름을 허락해주셔서 감사해요.”

 “감사는 3황자에게 해야지.”

 “그것도 그렇네요.”

 

 하고 하염은 희미하게 웃었다.

 어색함을 가시려는 듯, 말거리를 끊임없이 찾는 듯. 시선을 비스듬히 아래로 떨구고 또 하염이 입을 열었다.

 

 “헌데 어쩐 일이세요, 이리 갑자기.”

 “일전의 대답을 들으러 왔네만…….”

 

 제 편이 되어줄 수 있느냐는 말.

 계는 충분히 기다렸다. 이제는 그도 답을 들을 때였다. 허나 눈을 내려 깐 그녀를 보는 순간, 아니 문 앞을 서성이던 순간부터 그 답은 전혀 중요하게 생각되지 않았다.

 그것은 그저 찾아오기 위한 변명일 뿐.

 

 계는 손을 뻗었다. 하염의 손목을 붙잡았다. 허리가 굽혀지며 자연스레 두 얼굴이 가까워졌다.

 영문을 모르는 선한 뺨이 붉어졌다. 여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어쩌지 못하는 충동이 밀려든다. 다양 언덕에서 하염이 입을 맞춘 뒤로 끊임없이 치솟는 마음. 도망간 사람을 다시 붙잡고 어쩌지 못하여, 그저 선물에 해소할 수밖에 없었던 마음이었다.

 제 신분만 아니었다면. 제 과거만 아니었다면. 머리를 복잡하게 만들고 있던 그런 고민은 충동 앞에서는 무효했다. 아마 그녀 또한 그러했을 테지.

 

 “그댄 내게 고마워할 필요도, 미안해할 이유도 없어.”

 “네?”

 “과거에도, 지금도, 앞으로도 줄곧.”

 

 그러나 숨기고 있는 것들을 다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전하? 무슨 말씀이신지.”

 

 대신 붉은 입술이 부드럽게 짓이겼다. 꽃잎처럼 문드러지는 살결. 혀가 움직였고 부드럽게 어루만진다.

 

 한순간의 현혹에 하염의 정신도 아찔해졌다. 힘이 빠져 밀쳐낼 수도 없이 그의 품에 그대로 안겼다. 계는 가슴팍에 들어온 어깨를 감싸 쥐었다.

 ‘이토록 자그만데.’

 아마 그의 어미 또한 이토록 작은 여인일 테고. 그 옛날의 선제 또한 그러했을 것이다.

 

 아주 짧은 순간 떠오른 선제의 얼굴에 불쾌감이 솟구쳤다. 그는 생각을 버리려는 듯 하염을 세게 붙잡았다.

 

 더운 열기에 기억은 녹아간다.

 하염은 새처럼 바르르 떨었다. 숨 가쁘게 입술이 열고 닫혔다.

 

 그러다 입술이 잠시 떨어졌을 때 하염이 물었다.

 

 “왜…….”

 

 목소리의 끝이 사그라졌다.

 

 “나는 곧 3황자를 무너뜨리고 라호국마저 잡을 텐데. 그들과 엮이는 이, 모두 내 적이 돼. 그대가 내게 말했던 것처럼.”

 “태, 태자 전하…….”

 “그때처럼 이름을 불러도 된다.”

 “계……?”

 

 그때처럼 또 다시.

 망설이며 부르는 하염의 목소리에 계가 답했다.

 

 “허나 약속하지. 내가 황제가 되면, 그대가 내 편에 서지 않더라도 단 두 명, 그대와 정이만은 건드리지 않겠다고.”

 

 하염의 눈꺼풀이 닫혔다.

 이것만은 어쩔 수 없었다. 만약에 그가 등극한다면 3황자와 그의 편에 섰던 이들을 놔둘 리가 없는 것이다. 왜 자신뿐 아니라 수아의 아이까지 약속한 건지는 몰라도.

 

 하염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뜨거웠던 입김이 다시 식어가고 있었다. 이제는 정말로 선택해야 하는 때가 온 것이다.

 

 “……말씀 감사합니다.”

 “말했지. 고마워 할 필요 없다고.”

 

 구명을 약속한 것으로 빚을 갚았다고, 계는 생각했다.

 ‘이걸로…….’

 과거의 그늘은 끝을 맺은 거라고. 제가 구해줌으로써 시작되었던 이 여인의 마음 또한 끝이 날 거라고.

 

 “그러니 그대는 마음만 정하면 돼.”

 “마음…….”

 “알고 있나?”

 

 올려다보는 여인의 속눈썹이 뺨에 그늘을 만든다. 사랑스러운 산새는 제 발로 걸어 들어와 노랗고 작은 부리를 내민다. 어찌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수 있을까.

 저 입술을 또 다시 삼키고픈 마음을 씹어 넘기며, 또박또박 할 말을 읊는다.

 

 “이곳은 여전히 전쟁터고.”

 “…….”

 “그대가 내 편에 서면 많은 게 달라질 거야.”

 

 그 말의 속뜻을 물을 필요는 없었다.

 

 “내 편이 될 텐가.”

 “…….”

 “무슨 일이 있어도.”

 “…….”

 “혹은 내게 무슨 일이 있다 하여도?”

 “……무슨 일이 생기나요?”

 “아마도.”

 “무슨 일인지 말해주실 수 있나요?”

 “…….”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당신 때문에 그 자신이 위험해질 거라고. 자신을 얽맨 증거를 조달했던 당신에게 어떻게.

 ‘얘기를 하면, 지금의 그대는 어떨까. 나를 도울까?’

 그것이 설사 자신의 아버지를 위험에 몰아넣는 일이 될지라도?

 

 “……내가 알고 싶은 건 다만 그 마음뿐.”

 

 가까워진 입술이 하염의 귓가에 속삭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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