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테마파크] 20년만에 만난 관기 몽접, 그녀의 노래실력은 여전하다
글쓴이 :
스토리야 17-05-31 12:01
조회 : 5,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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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8 년 5월 5일, 남도일대를 유람중이던 양경우가 수령에게 접대를 받았다. 관기인 몽접(夢蝶)이란 이가 들어와 인사를 드리는데, 이 기생은 젊었을 때 노래를 잘 불렀다. 난리를 만나 떠돌아다니다가 용성에 이르러 내가 거처하는 촌사(村舍)에 3년 동안 붙어살았는데, 그 이후로 20년간을 어디에서 사는지 알 수가 없었다. 지금 문득 만나니 또한 세상사는 사람의 우연한 일이다. 서로 옛날이야기를 하였고 그녀로 하여금 노래를 부르게 하였다. 아직도 옛날과 마찬가지로 한들한들 멋들어지게 노래를 부른다. 태수가 나를 위하여 술자리를 마련하니 밤늦도록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다가 파하였다.
배경이야기
◆ 관기
삼국시대에 이미 매춘풍속이 있었다고 한다. 사학자 이능화의 주장에 따르면 김유신이 어느 날 술에 취한 자신을
천관녀의 집으로 안내한 말의 목을 베었다는 설화를 전하면서 ‘천관녀가 바로 창녀였으며 오릉(五陵)동쪽에 있는
천관사(天官寺)는 바로 윤락업소’라고 설명한다. 즉, 삼국시대에 이미 음방(淫放, 음란한 동네)과 매춘풍속이 있었다는 설명이다.
고구려에도 유녀(遊女)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 발생은 3-4세기경 고대 부족국가의 정벌과정에서 포로 중 일부를
유녀로 삼았다는 설과 무녀(巫女)가 제정 분리되면서 남자 무당은 추장을 겸하고 여자 무당은 신전 유녀로 전락했다는 설
등 2가지가 있다.
노래와 춤, 색(色)을 통해 남성들에게 즐거움을 주는 기생이 나타난 것은 고려 이후의 일이다.
고려 태조 왕건이 전쟁 중 사로잡힌 여성들에게 춤과 노래를 연습시켰다는 기록이 있는데, 그것이 우리나라 기생의 시초라 할 수 있다.
고려시대에는 기생을 길러내는 일종의 기생학교인 교방(敎坊)이 설치됐으며, 행사가 있을 때에는 교방의 기생들과
광대인 창우(倡優) 등을 징발했다. 충렬왕 때에는 각 고을의 창기 중에 아름답고 재주 있는 자를 뽑아 교방에 보충했다는 기록도 있다. 김부식을 비롯한 고려의 문인들은 기생들과의 인연과 연애의 정을 담은 글을 남겨, 이미 기생제도가 폭넓게 퍼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조선 세종 때에는 기생제도를 폐지하자는 주장이 나오기도 했다. 이때 정승이었던 허조(許稠)는 ‘주, 읍의 창기는 모두 공가(公家)의
물건이니 취해도 무방한데 만약 이것을 엄하게 금비하면 젊은 봉사조사(奉使祖士)들 모두가 옳지 못하게 사가(私家)의 여인을
탈취하여 영웅준걸이 죄에 빠지는 일이 많을 것’이라며 창기제도 개혁을 반대하기도 했다.
방탕한 생활을 즐긴 연산군 때에는 대궐 안을 드나드는 기녀인 ‘흥청(興淸)’의 수만 해도 천명에 달했다고 한다.
연산군은 당시 서울시내에서 가장 규모가 큰 원각사를 헐고 그곳에 흥청의 숙소를 만들기도 했다.
하지만 이들 기생들을 모두 성매매 여성으로 보기는 힘들다.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의 기생들 중에는 극히 일부만이 경제적인 대가를 받고 성을 제공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기생에는 3가지 계층이 있었다. 이중 일부만이 성매매를 했다. 기생 중 가장 위에는 노래와 춤은 물론 서화에도 능숙한
일패(一牌)기생들이 있었다. 조선 중종 때 황진이나 이매창, 부용 등이 바로 일패기생이다.
일패 아래에는 이패(二牌)인 은근자(殷勤者)로 불리는 여성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기생출신으로 첩이 되거나 밀매음을 했다.
또 가무는 하지 못하고 잡가만을 하면서 매음하는 기녀를 탑앙모리(塔仰謀利) 또는 창녀로 불렀다.
이패나 삼패기생들은 종종 매음을 했지만 오늘날 전업 성매매 여성과는 확연한 차이가 있다.
불특정 다수를 상대하기보다는 관청 등에 속해 있으면서 일정기간 한 남자를 섬기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이는 화폐제도가 발달하지 않은 상황에서 불특정 다수에게 성을 제공하고 금품을 받기가 힘들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대신 성의 대가로 일정기간 숙식을 보장받았다.
이러한 성거래는 성매매라고 하기보다는 오히려 축첩제 연장선에서 이해하는 것이 옳은 듯하다.
조선 초기에는 모든 기생이 관청에 속한 관기였다. 하지만 후기에 접어들면서 일반 고객들을 상대하는 기생들도 나타났다.
여기에는 매파(媒婆)가 기생과 고객 사이를 주선했으며, 기생의 뒷바라지를 해주는 사내를 기생서방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오늘날 기둥서방의 원조 격인 셈이다. 창기들이 많이 모여 사는 곳을 청루(靑樓) 또는 음방, 기방이라 불렀다.
그리고 창기 여러 명을 거느리고 있는 사람은 ‘아무개’를 뜻하는 ‘某甲’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이들의 본래 목적은 잠자리 시중이 아니라 노래와 춤을 제공하는 것이었던 것 같다.
또 화랑유녀, 사당패, 색주가, 들병이들도 금품을 받고 손님과 성관계를 맺었으나, 이 역시 본업이 아니라 부업이었다.
‘화랑유녀’는 절 등에 머물면서 속인이나 승려를 가리지 않고 성매매 행위로 이익을 얻는 무리를 말하고, ‘여사당’은 춤과 가곡,
곡예를 하는 사당패를 따라 전국을 돌아다니며 은밀하게 몸을 파는 여성들을 일컫는다.
조선 말기에 불린 〈여사당 자탄가(自歎歌)〉는 여사당의 은밀한 성매매를 해학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사람의 왕래가 잦았던 지방 길목이나 장터, 항구, 광산들의 주막에서는 색주가(色酒家)라고 불리는 여인들이 있었다.
이들은 술과 함께 몸을 제공했는데. 오늘날 술집 여성을 작부(酌婦)라고 부르는 것도 바로 이들 색주가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 색주가가 많았던 곳은 서울 홍제원(현 홍제동)과 남대문 밖 잰배(현 순화동), 탑골 공원 뒤 탑골(塔洞)과 수운동 등이 유명했다. 나그네들이 하룻밤 잠을 청하거나 술이나 음식을 사먹는 주막이 일반화 된 것을 화폐 통용이 활발해진 뒤로 본다면, 색주가가 본격 등장한 것도 조선 효종이후로 여겨진다.
‘들병이’는 주막에서 동이 술을 떼어나 길손들이 많은 길목에서 잔술을 팔면서 추파를 던지다가 몸을 파는 여성들을 일컬었다.
주막에는 ‘막창(幕娼)’이나 ‘통지기’가 있어서 성을 제공하고 해의채(解衣債, 화대)를 챙기기도 했다.
오늘날과 같은 ‘전업성’ 성매매와는 확연히 구분되는 조선시대의 이러한 성매매는 포주 등 알선인이 존재했다기보다는
개인이 성을 파는 프리랜서에 가까웠다. 특히, 현재의 집장촌처럼 특정 공간을 점유해서 이뤄진 것이 아니라 은밀하게 이뤄졌기 때문에 집창이라 부르기도 매우 힘들다. 이능화는 ‘원래 도성에는 갈보가 없었다.
고종 갑오년(1894)이후에 비로소 번성하게 되면서 사람들이 나라가 쇠망할 징조라고 했는데, 허언이 아니었다 ’고 밝혀
구한말에 이르러서 성매매가 본격적으로 시작됐음을 시사하고 있다
출전 : 역진연해군현잉입두류상쌍계신흥기행록(歷盡沿海郡縣仍入頭流賞雙溪新興紀行錄)
저자 : 양경우(梁慶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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