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테마파크] [전쟁과 혼란의 기록 3]-아들에게 권한을 위임하고 홀로 망명하려던 임금, 갈 곳이 없게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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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야 16-04-14 23:31
조회 : 1,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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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년 6월 13일, 선조의 대가(大駕)는 비를 맞으며 영변으로 들어와 행궁을 차렸다.
저녁 시간 행궁에서는 선조가 호종한 신하들을 인견(引見)을 하며 이후 옮겨갈 곳을 논의하였다. 선조는 의주로 가고 싶어 했다. 만약의 사태를 대비하여 중국으로 건너갈 셈이었다.
여러 신하들은 평양의 상황을 보고 받은 후 움직이자고 하였지만, 선조는 이미 의주로 가는 길목에 있는 정주와 태천으로 행차가 갈 준비를 하라고 명령한 상태였다. 물론 이 명령 안에는 세자는 이곳 영변에 머물도록 하라는 임금의 의지가 들어 있었다.
이를 이미 알고 있는 정철(鄭澈)은 선조에게 “세자께서 지금은 여기에 머무시다가 끝내는 정주는 가는 것입니까?”라고 묻자, 선조는 “귀성(龜城)이나 강변(江邊) 등의 곳으로 가야 할 것이오”라고 대답하였다. 선조는 이미 세자를 남겨두고 갈 생각이었다.
그럼에도 선조는 여러 신하들에게 어느 곳으로 가야하느냐며 물었다. 신하들의 의견은 분분했으나 강계나 함흥 쪽으로 가야 한다는 의견이 나왔다.
선조는 오히려 화를 내며 자신을 강계로 인도하겠느냐고 신하들에게 반문한다. 그러면서 처음부터 중국 요동으로 갔었다면 좋았을 것이라고 짜증 섞인 말을 하였다. 그러고는 세자인 광해군에게 양위를 하겠다는 교지를 내린다.
“세자 이혼(李琿)은 뛰어난 자질로 숙성(夙成)한데다가 평소 인효(仁孝)로 알려졌다. 군하(群下)가 사랑하며 떠받드니 중흥하는 공을 돕기에 충분하고, 사방에서 은덕을 노래하며 모두들 우리 임금의 아들이라고 말을 한다. 왕위를 물려줄 계획이 오래 전에 결정되었으니 이제 군사를 총괄하는 명을 상고할 때이다. 이에 혼으로 하여금 임시로 국사(國事)를 섭리(攝理)하게 하여 모든 관작(官爵)의 임명과 상벌(賞罰) 등의 일은 편의에 따라 스스로 결단하도록 하노라. 영무(靈武)에서의 의기(義旗)를 드니 건곤(乾坤)이 다시 열리는 것을 보겠고, 미앙궁(未央宮)에서 헌수(獻壽)하는 술을 마련하여 부자(父子)가 다시 즐길 때를 기대하노라. 각자 추대하는 마음을 가져 함께 태평의 업적을 이루도록 하라. 정부에서는 중외(中外)에 유시하여 모두 듣고서 알도록 하라. 이에 교시(敎示)한다.”
다음날(6월 14일) 아침, 영의정 최흥원(崔興源)은 선조를 알현하고서는 세상의 형편이나 일의 상황으로 보아 양위하겠다는 선조의 말이 옳지만 조정의 높은 신료로서 감히 임금의 뜻을 따를 수 없다고 주청하였다. 아울러 언관(言官)들이 세자에게 권한을 넘기라고 주장하지 않는 대신(大臣)에게도 잘못이 있다고 고하였다. 이는 양위는 아니더라도 실질적인 국정의 권한을 세자가 가져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였다.
이를 들은 선조는 어제 내린 교지를 즉시 시행하라고 하였다. 그런데 중국 요동에서 온 외교문서에 조선을 구원하겠다는 뜻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자, 선조는 최흥원(崔興源)에게 다시 어디로 가야 하는가를 물었다.
최흥원(崔興源)의 대답은 ‘강계’였다. 하지만 선조는 강계로 갈 수 없다는 뜻을 어제 이미 신하들 앞에서 밝혔고 다시 신하들에게 중국 요동에 들어가기 위한 외교문서[咨文]를 작성하라고 명하였다. 대신 선조는 강계로 세자를 보내겠다고 결정하였다. 그리고 영의정 최흥원(崔興源), 형조판서 이헌국(李憲國), 부제학 심충겸(沈忠謙), 형조참판 윤자신(尹自新), 동지 유자신(柳自新), 병조참의 정사위(鄭士偉), 승지 유희림(柳希霖), 제조(提調)정탁(鄭琢)에게 명하여 종묘사직의 신주(神主)를 받들고 세자를 따르도록 하였다.
왕인 선조와 아들인 세자는 1592년 6월 14일 아침 부자간에 눈물로 이별함과 동시에 조선에는 임시적이지만 두 개의 조정이 있게 되었다.
배경이야기
◆ 분조 결성의 배경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왜적들이 파죽지세로 북상을 하자, 선조는 1592년 4월 30일 서울을 떠난다. 그리고 이틀뒤 서울이 함락되었고, 이때 선조는 개성에 있었다. 그리고 5월 7일 선조는 평양에 도착하였다. 그런데 21일 임진강 방어에 실패하고 6월 8일에는 대동강까지 왜적들이 진출하였다. 선조는 다시금 몽진을 하였는데, 6월 13일 영변까지 왔다. 여기에서부터 좀더 가면 중국 접경에 다다를 수 있는데, 문제는 왕이 거기까지 간다면 전쟁과 내정을 수행하기가 어려워진다. 이에 선조는 세자 광해에게 남아 국정을 수습하라는 명을 내린다. 이 명령은 6월 13일에 내려졌고, 선조와 세자 광해는 6월 14일 아침에 서로 헤어지게 된다. 세자 광해는 조선에 남아 임시정부의 역할을 해야 했다.
출전 : 피난행록(避難行錄)
저자 : 정탁(鄭琢)
출처: 한국국학진흥원 스토리테마파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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