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테마파크] 지방 과거 시험의 풍경 - 비오는 시험장에 나타나지 않는 응시생들
글쓴이 :
스토리야 16-10-04 15:42
조회 : 3,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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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4년 5월 9일, 안동부사가 안동의 선비들을 모아 시험을 보기로 하였다. 30명을 선발할 예정이어서, 예안현의 수령이 시관(試官)으로 갔다. 김령의 아들도 5월 10일 안동으로 제술(製述 : 시나 글을 지음) 시험을 보러 갔다.
그로부터 약 한 달이 지난 6월 15일, 경상도 감사가 지난 5월에 선발한 30명을 다시 시취(試取)해서 2명을 선발하라는 분부를 내렸다. 당장 30명의 선비를 다시 모아 제술로 선발하기로 결정이 되었다. 감사의 관문은 9일에 나온 것인데, 거의 일주일이 지난 15일에서야 비로소 전해지니, 김령은 안동사람의 태만함이 거슬렸다. 30명 중에서 2명에 다시 뽑히기는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김령은 아들 김요형이 2명에 뽑히기 어렵다는 걸 알았지만, 헛걸음인줄 알면서도 한 번 시험 삼아 참가시켜보기로 했다.
시험에 임박한 6월의 어느 날, 장맛비가 부슬부슬 내리며 온종일 그치지 않았다. 시험을 보기 위해 향교에 모인 사람은 겨우 몇 명뿐이었다. 수령은 독촉하는 명을 내렸다. 김령의 아들 요형도 마침내 향교로 들어갔다.
배경이야기
◆ 조선시대 지방의 시취
○소과 초시
소과에는 생원시와 진사시가 있었는데, 다 같이 초시·복시 두 단계의 시험에 의하여 각기 100인을 뽑아 생원·진사의 칭호를 주고 성균관에 입학할 수 있는 자격을 주었다. 이와 같은 소과를 감시·사마시라고도 하였고, 또 생진과라고도 하였다.
소과 초시에는 한성시(漢城試)와 향시가 있었다. 한성시는 서울 및 경기도의 수험생 (경기도 수험생은 선조 38년 경기도의 향시가 폐지된 이후부터 응시하게 됨)들을 대상으로 하였으며, 시험장소는 대체로 1소를 예조, 2소를 성균관 비천당(丕闡堂)으로 하는 것이 상례였다.
각 시험장마다 한성부낭관과 4관(四館)의 7품 이하관 3인이 녹명(錄名)을 담당하고, 정3품 이하 1인이 상시관, 2인이 참시관, 감찰 1인이 감시관이 되어 처음에는 진사 초시·생원 초시 각각 100인을 뽑았으나, 경기도 향시를 없애고 경기도 수험생을 함께 고시하게 된 뒤에는 각각 130인을 뽑았다.
향시는 8도에서 도 단위로 실시하였다. 그 중 경기도 향시는 1603년(선조 36)에 폐지되었다. 향시도 시험장을 두 곳으로 나누는 것을 원칙으로 하여, 경기·충청·전라·경상도는 좌·우도, 평안·함길도는 남·북도로 나누어 고시하였다. 다만, 인구가 적은 강원·황해도만은 나누지 않고 한 곳에서 고시하였다. 시험 장소는 일정한 곳에 고정시키지 않고 소속 읍 중에서 윤번으로 정하였다.
향시시관은 감사가 문과 출신의 수령이나 교수 중에서 골라 상시관 1인과 참시관 2인을 임명하였다. 그러나 이들의 협잡이 많아서 1553년(명종 8)부터는 경관(京官:조선시대 서울에 있던 각 관아의 관원 및 개성·강화·수원·광주 등의 유수)과 도사(都事)를 상시관으로 보내기로 하였다.
하삼도(下三道)의 좌도와 평안남도에는 경시관(京試官), 하삼도의 우도와 강원·황해도 및 평안북도와 함경북도에는 도사, 함경남도에는 평사(評事)를 상시관으로 보내는 것이 관례가 되었다. 향시의 시취액수(試取額數)는 지역별로 각기 차등이 있었다.
○외방별시
1456년(세조 2) 왕이 평양에서 별시를 열어 문과 22인, 무과 1,800인을 뽑은 것이 그 시초이다. 이것이 전례가 되어 국왕이 몽진(蒙塵:임금이 난리를 피하여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김)하거나 능침(陵寢:임금이나 왕후의 무덤) 또는 온천에 갈 때 행재소(行在所:국왕이 머무르는 곳)에서 특별 과거시험을 실시하여 합격자에게 급제를 주거나 문과전시에 직부(直赴)할 수 있는 특권을 주었다.
이 밖에 국방상의 요지인 평안도·함경도에서 실시하는 서도과(西道科)·북도과(北道科)를 비롯하여 강화도·제주도·수원에서 실시하는 시재(試才)가 있었다.
이 외방별시는 문과와 무과만 열었으며, 단 한 번의 시험으로 급락이 결정되었다. 서도과는 임진왜란 이후 평안도에 어사를 보내어 시·부로 고시하여 1등에게 전시에 직부토록 하는 시재를 행하던 것이 1643년(인조 21)에 승격된 것이며, 북도과 역시 1664년(현종 5)에 승격된 것이다. 이것은 10년에 한 번 열렸으며, 시관은 중신을 보내어 상시관으로 하고, 참시관은 감사가 문신 수령 중에서 임명하였다.
고시 과목은 주로 부·표·책 중의 1편으로서 고시가 끝난 뒤 중신이 과차(科次:과거에 급제한 사람의 성적의 차례)하여 시권을 봉한 채 서울로 보내면, 서울에서 그것을 뜯어 등급을 매긴 다음 홍패(紅牌)를 써서 보내어 시험장에서 발표하게 하였다. 선발 인원은 관례상 3인이었으나, 뒤에는 서도과를 청남(淸南)·청북(淸北), 북도과를 관북(關北)·관남(關南)으로 나누어 각각 2인 내지 3인을 뽑았다.
다음으로 제주도 시재는 1623년(인조 1), 강화도 시재는 1626년, 수원 시재는 1692년(숙종 18) 각각 창설되었다. 이 지역에는 각각 어사 또는 승지를 보내어 시·부·표·책 중의 1편을 고시하여 그 시권을 봉한 채 서울로 가져오면, 대제학에게 과차하게 하여 성적우수자 2, 3인에게 전시에 직부할 수 있는 특전을 주고, 차등자(次等者)에게는 분수, 즉 점수를 주었다.
출전 : 계암일록(溪巖日錄)
저자 : 김령(金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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