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프후작은 자신의 누이를 사랑했다. 가문의 어른들이 극구 반대를 했지만, 결국은 누이와 혼인까지 치렀다. 애지중지하며 옆에 끼고 다녔지만, 누이는 점차 지쳐만 갔다. 자유 따위는 사치였다. 그녀가 하고 싶은 성악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아이들에게 자장가 한 소절을 부르는 것이 다였다.
그런 어미의 영향으로 스칼렛은 성악을, 힐레나는 뮤지컬의 길을 정했다. 쌍둥이가 10살 무렵에 견디지 못한 그녀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후작은 누이가 아니라면 모든 것이 무의미했다. 핏줄도 마찬가지였다. 방치된 아이들을 돌본 것이 바로 쥬피터였다.
의지하고 기댈 곳이 없었던 쌍둥이는 오라버니가 큰 의미의 존재였다. 아비를 비꼬며 스칼렛을 혐오했다. 그 피가 짙어 끔찍한 결과물이 태어난 것이라고 상처를 주었다. 그가 오직 지켜줄 아이는 힐레나뿐이었다. 당연하다는 듯이 받아드리는 동생에게 질투와 증오의 감정이 들끓었다. 그러면서 그녀가 자신이 미워하는 게 원망스럽고 슬프다고 말한다. 마치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이, 순진함을 가장한 위선을 떨며.
“언니, 이엘이랑 공연 보러오세요. 언니가 좋아하는 휘르시안의 ‘악몽’이란 작품이니까, 재미있게 감상하실 수 있을 거예요.”
“그러니? 그다지 보고 싶진 않구나.”
“그러면 나와 같이 가자구나.”
“...오라버니도 함께요...?”
“싫은 거냐?”
“아뇨. 괜찮으시겠어요? 이엘을 데려갈까 하는데.”
“괜찮다. 시간을 비워두거라.”
결코 이런 적이 없었다. 그러나 오라버니가 내민 손을 놓칠 수는 없었다. 약간의 설렘과 기대감을 느꼈다. 이엘에게 찾아가 한결 부드럽게 이야기를 꺼냈다. 그는 내키지 않은 눈치였지만. 당일이 되고, 마차에 오르려는 그녀를 바라보기만 하는 쥬피터. 결국 이엘이 에스코트 했다.
“왜 같이 가자고 하셨나요?”
“힐렌의 주연으로서 데뷔작이니까. 그 아이가 실망하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았다.”
“저를 위한 마음이 조금이라도 없으셨나요?”
“설마. 있을 리가 없지 않느냐.”
“형님!”
“어디서 함부로 짓 꺼리는 게야!”
그럼 그렇지. 어릴 적부터 부르던 애칭을 아직 부르는 오라버니. 그 자상한 음성으로 ‘스캇-’이라 불러주던 게 아주 먼 일이었다. 어쩜 저렇게도 잔인할 수가 있을까. 그래도 제 동생인데, 같은 피를 이어받은 가족인데. 이엘이 일어나 화를 내는 모습을 보였지만, 말릴 수가 없었다. 심장이 떨어져 나갈 것만 같아서.
“꽃을 준비해야하지 않을까요?”
“그렇구나. 내가 하지.”
“아뇨. 제 분신이니까 좋아하는 걸, 제가 더 잘 알아요.”
“허튼 수작 부릴 생각 마라.”
“네, 오라버니.”
거리에 멈춰서, 꽃가게에 들렀다. 가장 크고 화려한 주홍색 꽃을 골랐다. 그리고 주위에 하얗고, 노랗고, 붉은 꽃을 선택했다. 가게 주인이 말을 흐리는 모습이었다.
‘카이란스’ 증오와 죽음의 꽃말을 뜻하는 아름다운 주홍색 꽃이었다. 사람들은 의미를 잘 모르는 꽃이기도 했다. 그러나 정확하게 먼저 집은 걸 보아하니 알고 있는 눈치였다. 포장을 예쁘게 하고 다시 마차에 올랐다.
“아름답구나. 축하의 꽃이냐?”
“네. 제 마음이에요.”
“조금 나아진 모습이구나. 기특하다.”
“아니에요, 오라버니.”
뮤지컬 홀에 도착했다. 이번에는 제대로 쥬피터가 에스코트를 했다. 이엘이 뒤를 따랐다. 예술을 사랑하는 제국답게 크고 웅장했다. 그러나 누구나가 이런 곳에서 공연을 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힐레나가 속한 제국예술재단이 후원하는 ‘트란카누스(맹독)’팀이기에 가능했다.
그 명성 높은 뮤지컬극단에서 힐레나가 프리마돈나로서 데뷔하는 것이었다. 조금 이른 게 아닌가 싶었지만 그만큼의 재능을 인정받았기에 가능한 것이 아닐까, 사람들은 짐작할 뿐이었다.
“관람을 위해 오신 분들께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새로운 여주인공을 만나보실 차례입니다. 많은 기대와 관심을 부탁드리며 막을 올리겠습니다.”
고급VIP객석에 초대된 트라프들. 뮤지컬이 시작되고, 등장하는 힐레나. 헝클어진 머리로 무대를 달려간다. 음악이 압박하는 듯, 긴장되는 효과음이 들린다. 나타난 어두운 그림자. 경악하는 힐레나의 모습이 보이고 암전이 되었다.
그리고 다시 불이 켜지고, 소란스러운 가운데 인물들이 등장한다.
몰입되어 가는 관객. 스칼렛 역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결코 밝은 작품은 아니었는데도 피가 끓고 심장이 뜨거워지는 감각을 느꼈다. 웃었다가, 절망하고... 슬퍼하고, 노래하는 그 모습이 너무 크게 다가왔다. 단 한 번도 느낄 수 없었던 열망마저 샘솟았다. 힐레나의 아리아에 벅차올라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렸다.
이엘이 따라오는 걸 알았지만, 멈출 수가 없었다. 몹시 거친 숨을 내쉬었다. 이게... 뭐지? 그저 힐레나가 미워 빼앗는 것과는 달랐다. 저 무대에 자신이 서있다면... 내가 노래하고 있었다면...! 몹시도 흥분되었다. 자신이 기다려온 충족함이 바로 저것이다! 여태껏 바라던 것이 바로 뮤지컬이란 말이다!
“큭... 큭...”
“누님! 왜 그러십니까?”
“이엘. 푸하하... 갖고 싶구나.”
“무엇을요?”
“바로 저 무대를 말이다.”
스칼렛에게 열망의 꽃이 싹텄다.
잘 키우고 싶구나. 크큭... 크하하! 뜨거운 눈물이 날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