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다시!”
도대체 몇 번이나 멈춤을 반복한 건가. 분해서 입을 앙다무는 한 여배우. 제이는 도통 오케이 싸인을 주지 않았다. 분위기가 싸-해지고... 다시 처음부터 연기를 시작한다. 매끄러운 힐레나의 연기가 펼쳐진다. 심술궂은 마녀의 노랫소리가 이어진다.
“그만. 그따위로 무대에 설거야? 흉내만 내면 뭐해. 아무것도 안 담겨있는데!”
“제이님! 뭐가 문제죠? 저는 할 수 있을 만큼 했어요!”
“그게 할 수 있는 만큼이라고? 그게 최선이라고?”
“그렇게 못마땅하시면 저를 빼고 다른 사람한테 배역을 주세요! 괜한 꼬투리잡지 마시고!”
제이에 대한 믿음이 분해되었다. 여배우는 뛰쳐 나가버렸다. 모두 차갑고 냉랭한 제이의 눈치만을 살핀다. 그때 작게 흥얼거리는 스칼렛. 신경이 곤두서서 날카로운 눈으로 바라보는데... 왠지 나쁘지가 않다.
“스칼렛?”
“네, 제이님.”
“그래, 맞아. 네가 있었지.”
“저 주시게요?”
“갖고 싶니?”
“네.”
모두가 말린다. 아니 이제 시작한 초짜에게 중요한 큰 배역을 맡기다니... 확실하게 검증된 것도 아니고 말이다. 힐레나는 왠지 기쁘게 보였지만, 알렉산더가 고개 저으며 손을 잡았다. 울쌍을 짓는 그녀.
“네 소프라노가 독특했지. 해보렴.”
“감사해요.”
다시 사람을 바꿔 연기를 펼친다. 곧 그녀의 차례. 넓게 펴지는 곱고 독특한 울림. 들어본 적 없는 신비롭게 느껴지는 노래. 짓궂고 잔인한 마녀를 완벽히 소화해내는 연기력까지. 정말 얼마 전까지 문외한이 맞나 싶을 정도였다.
마지막 소름끼치는 웃음소리까지. 모두가 이어서 하지 못하고, 정적이 흘렀다. 제이가 정신 차리라는 듯이 박수를 치자, 그제야 정신이 드는 배우들.
“제법이구나.”
“그런가요?”
“이례적이긴 한데... 네가 하렴.”
“알겠습니다.”
실전처럼 연습을 끝내고, 한 쪽에서 쉬고 있는 스칼렛. 모두의 관심사가 그녀를 향했다. 힐레나와 팔짱을 끼고 샤를레라가 다가갔다. 웃고는 있는데 영 어색해 보이는 샤를이었다. 동생은 눈물까지 글썽이며 스칼렛을 껴안았다.
“언니! 너무 멋졌어요!”
“그래.”
“잘하더라? 축하해.”
“진심이니?”
“그, 그럼. 당연하지.”
전혀 그래 보이지 않는데 말이다. 뭔가 따갑게 느껴지는 시선에 눈길을 보내자, 알렉산더가 사나운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그녀가 동생을 해치기라도 할 것 같아 경고를 보내는 걸까? 아니면 그녀가 신경 쓰여 죽겠던가.
그 날 이후 스칼렛은 제이의 속성특급교육을 배웠다. 천부적인 재능이 있던 걸까, 쉽게 받아드리는 그녀를 뿌듯하게 생각했다. 스칼렛에게는 묘하고 위험한 매력이 있었다. 빠져든다면 쉬이 빠져나올 수 없을 것이다. 무대에서 마음껏 표현한다면 그토록 무서울 것도 없을 거다.
“조금 느리게-”
“아아아아---”
“사납게- 거칠게-!”
“아아아아! 흐아아아!”
넘버12. 격정적이게, 사나운 바람소리. 끔찍한 비명소리.
스칼렛은 마치 진짜 마녀가 된 듯, 완벽하게 소화하고 있었다.
공연 당일이 되었다. 미친 듯이 뛰는 심장, 뜨겁게 들끓는 피가 온몸을 퍼져나가며 흐르고. 흥분과 떨림이 진정되지 않았다. 1막 넘버12가 시작되면 그녀는 ‘마녀 퓨츠’가 되어 생생하게 살아난다.
무대에 오르기 전, 마지막 대사.
“안돼!”
“히아아아- 흐아아아-”
시작된 것이다, 스칼렛의 뮤지컬이.
극이 진행될 때마다 몰입하는 관객들. 그녀 또한 커져가는 흥분과 열망, 그리고... 짜릿한 쾌감. 흥분에 몸을 몸서리쳤다. 더 깊이! 더 높이! 더 크게! 열정은 극에 달하고...
“오! 루빈...”
공연이 끝나고, 고요한 관객석. 얼마의 여운이 흘렀을까 정적을 깨고 박수갈채가 이어졌다. 기립해서 보답하는 관객들. 최고의 파급력이었다. 브라보!를 외치는 사람들. 앙코르를 선창한다.
커튼콜이 이어졌다. 스칼렛이 등장하자, 환호했다. 웃으며 인사하는 아름다운 여인. 강렬히 남은 마녀의 모습이었다. 벌써부터 팬층을 형성한 게 아닐까? 제이도 만족스러운 얼굴로 박수를 쳤다.
스칼렛 뮤지컬 인생에서 대부분이 기억하는 데뷔였다. 물론 극단 ‘알타샤(달)’의 공연이 있었지만 기억하는 이들은 극소수였다. 화려하게 시작되었던 것이다.
“힐레나와 쌍둥이지?”
“언니라며? 늦게 시작했는데도 잘하는데?”
“역시 쌍둥이라 좋아하는 것도 비슷한 모양이네.”
“진짜 똑같은데, 연기하는 모습이 다르더라.”
#
“수고들 많았어.”
“호오!!!”
“마음껏 마시자구?”
“잘했어, 스칼렛.”
“감사합니다.”
뒷풀이가 시작되었다. 여전히 홀로 마시는 스칼렛에게 다가가려는 힐레나를 막는 알렉산더. 하지만 남자배우 몇이 그녀에게 다가갔다. 차갑게 응답하는 그녀였지만 동료로서 축하를 보낸다. 날카롭게 쳐내도 고맙다고 응대하는 스칼렛.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지금 보니 달라져 보이는 그녀에게 호기심을 느낀 이들이 있었던 모양이다. 조심조심 스칼렛에게 다가가는 여배우들도 있었다. 스칼렛은 이해가 안가는 게 배역을 빼앗고 주목받은 그녀에게 질투나 시기를 느끼지도 않는지, 친밀감 있게 다가오고 순수하게 축하해준다.
그것이 자신에게는 유리했지만, 이상한 사람들이었다.
잠시 사람들이 흩어지자, 샤를레라가 스칼렛에게 웃으며 다가왔다. 그녀의 팔짱을 끼고, 소곤소곤 말을 꺼냈다.
“넌 이 정도에서 머물러 있을 거야. 힐레나의 자리를 넘볼 생각 마.”
“큭. 넌 그 정도가 되고?”
“네가 얼마나 악랄한지 난 알아. 너에게 밝은 날이란 없을 거야.”
“푸핫. 귀여운 샤를, 그런다고 힐레나가 알아주리라 생각하니? 그 아인 좋은 아이가 아냐. 단지 착한 제 자신이 마음에 들뿐이지. 그것이 없다면 사랑받지 못 할 거란 걸, 알고 있지.”
“너와 같은 줄 알아? 매도하지 마!”
“곧 네 어리석은 생각이 틀리단 걸 알거야. 그 아인, 내 분신이거든.”
손을 들어 뺨을 내리치려는 시늉을 하는 샤를을, 사람들이 다가와 막았다. 갑자기 무슨 짓이냐고 묻는 이들에게 ‘아무것도 아니야’라며 자리를 빠져나갔다. 괜찮냐고 묻는 사람들에게 스칼렛은 고개를 끄덕였다.
새벽까지 이어지는 뒤풀이. 잠시 밖을 나온 스칼렛이 화원으로 향했다. 다른 곳에 비해 푸른 밤을 보여주는 그 곳에. 타이를 풀면서 알렉산더가 나타났다. 그녀를 보며 경계한다. 그런 그를 비웃었다.
“겁이 많구나?”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나를 의식하고 있잖아.”
“아니, 그럴 리가 없잖아.”
“그러니?”
“……”
그러나 자리를 떠나지 않는 알렉산더였다. 달빛이 은은했다. 힐끗 스칼렛에게 시선을 주었다. 달빛에 반짝이는 머리칼, 하얗지만 붉은 빛이 도는 피부. 높은 콧대의 콧망울. 도톰한... 아랫입술. 그녀도 그를 바라보았다.
황급히 떠나려는 알렉산더의 팔을 잡았다. 얼굴을 잡고 짧게 입을 맞췄다. 모든 것이 멈춘 듯 했다. 아쉽게 떨어지는 입술... 이번엔 그가 그녀의 허리를 잡고 깊게 파고들었다. 그의 목을 감싸 안는 그녀. 스칼렛의 눈이 호선을 그렸다.
“하아...”
힐레나. 짐작할 수 있겠니? 그가 누구를 선택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