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 저녁]
아무것도 하지 못할 정도로 기분이 좋지 않아 집에 돌아오는 동안 지하철 터널만 응시한 채 구석에 처박혀 있었다. 구로 역에서 내려 무언가 에 쫓기듯 서둘러 집으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에 편의점에서 저녁거리로 먹을 간단한 도시락 같은 것을 사와야 했지만 그것도 그만두었다.
아무리 기분이 안좋아도 집에 들어오자 마자 가방은 냉장고 옆에 옷걸이에 걸어 두고 난 후 침대위로 쓰러지듯 누웠다. 난 그다지 감성적인 성격도 아니고 철학적으로 심각한 자기분석도 하지 않는다. ‘나’란 존재에 대해 스스로 정의나 규격을 구분하지 않으니 특별히 자신에 대해 평가도 하지 않게 되고 자연히 내가 비뚤어진 만큼 세상사람들도 비뚤어져 있으니 내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하지만 간혹 나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정상적인 사람을 만나게 되면 너무나 슬프고 괴로워진다. 나라는 사람이 얼마나 잘못되었고 망가져 있는지를 불연 듯 깨닫기 때문이다. “젠장.”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힘겹게 중얼거렸다.
이런 생활을 접어두고 적당히 정상적이고 최소 나보다는 착한 남자를 만나 연애하고 결혼이라도 하면 평범해지려 나 하는 생각을 간혹 하는데, 지금과 같을 때는 생각만이 아니라 정말 그렇게 하고 싶어 진다. 하지만 요즘 같은 세상에서 제대로 된 남자를 만나는 일만큼 힘든 일이 없고 간신히 호감 있는 남자를 찾아도 말도 제대로 못 붙이는데 뭘 어찌해 볼 도리도 없다.
조금씩 더워지는 기분에 난 그대로 엎어진 채로 침대 옆 탁자를 더듬어 리모컨을 찾아 에어컨을 틀었다. ‘뽀롱’ 소리와 함께 에어컨이 시원한 바람을 내 머리 위로 뿜어내기 시작했다. 공기가 조금씩 시원해지자 기분도 조금씩 괜찮아졌다. 난 천천히 침대에서 일어나 옷을 훌훌 벗어 던지고는 땀에 절은 몸을 힘겹게 끌어 욕실로 들어가 찬물에 간단히 샤워를 했다. 젖은 머리를 그대로 풀어 헤친 채 수건으로 비비며 발가락으로 데스크탑 전원을 넣었다. 기분이 좋지 않아서인지 머리가 아프고 시야가 흐릿해 지는 기분에 안경을 찾아 썼다. 도수는 높지 않지만 가끔 스트레스로 시야가 좋지 않을 때 도움이 된다.
난 그녀의 핸드폰에 심어 놓은 해킹 바이러스의 코드를 찾아 통신망 서버에 접속했다. 이제 그녀가 핸드폰을 작동시켜 네트워크 망에 접속하기만 하면 된다. 이제부터는 그녀가 자신의 핸드폰으로 자신의 SNS 계정에 접속하는 것 만을 기다리면 된다. 필요하다면 그녀의 SNS의 계정만이 아닌 공인인증서 ID와 비밀번호 계좌정보와 심지어 핸드폰 디바이스 고유 코드까지 알아낼 수 있다. 핸드폰의 앱들이 실행될 때마다 통신망 서버를 타고 칠레에 구축해 놓은 내 사설 서버에 기록될 것이다. 그냥 난 앉아서 그녀가 내 일을 대신해 주기를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난 냉장고에서 주스를 한 잔 따른 뒤에 침대 위에 앉아 비디오 게임을 시작했다.
사람들은 게임에 대해 이것저것 장점과 단점을 두고 ‘좋다’ ‘나쁘다’를 두고 대립한다. 게임은 매우 비생산적이며 너무나 많은 시간을 소비하며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고 한다. 맞는 말이다. 게임을 통해서 사람이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마음이 맞는 사람들과 술을 마시고, 필요한 것도 없는데 굳이 물건을 사기 위해 쇼핑을 하고, 그저 웃거나 울기 위해 TV를 보고, 친한 친구들과 커피를 마시며 수다를 나누는 것과 다를 게 없다. 게임을 하는 것은 앞서 말한 다른 것들과 같이 현재의 고민을 잊기 위한 것이다. 두어 시간 동안 ‘치프’와 함께 우주의 평화를 시키기 위해 고대 유적들을 박살내는 사이 방금 전까지 날 우울하게 만들었던 문젯거리는 사라지고 조준과 발사가 내 인생의 모든 것이 되었다.
그러는 사이 그녀의 첫 접속을 알리는 신호음에 난 잠시 게임을 멈추고 컴퓨터로 달려갔다.
신사역에서 지하철을 타기 위해 찍은 모바일 카드 기록으로 내 모니터에 그녀의 카드 번호와 인증 ID가 함께 찍혀 나왔다. 이제 난 그녀의 카드로 물건을 살 수 있게 되었다. 잠시 기다리자 그녀가 음악 앱을 실행시켜 ‘크랜베이스’의 앨범을 재생시켰다. 이제 그녀의 음악 사이트 계정으로 내가 좋아하는 노래들을 공짜로 들을 수 있게 되었다. 신난다….
그렇게 모니터 앞에서 5분여 정도 자리를 지키고 있었지만 더 이상의 추가정보가 없자 지루해 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지하철에서 그냥 음악만 듣는 타입인 모양이다.
지루해진 나는 다시 티테이블 위의 패드를 집어 들고 게임을 시작하려 했다. 그때 그녀가 앱 브라우저를 실행시키고 자신의 메일 계정에 접속했다. 그제서야 기다리던 그녀의 개인 정보들이 화면에 출력되기 시작했다. 현재 그녀의 메일계정에 저장된 모든 이 메일 기록과 내용들 그리고 첨부파일과 계정의 아이디와 비밀번호까지 전부 확보하는데 불과 1초도 걸리지 않았다.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비밀번호를 많이 만들지 않는다. 두 개에서 많아도 네 개 정보의 비밀번호를 돌려가며 쓰는 편이다. 때문에 난 당장 그녀의 SNS 계정에 이 메일 계정의 비밀번호를 입력했다. 잔뜩 기대했지만 틀렸다고 나온다. “쉽지 않네.”
컴퓨터 앞에 앉아 남은 주스를 입에 털어 넣고 그녀의 메일을 하나씩 뒤져 보기 시작했다. 거의 대부분이 광고 메일이고 그 중에 드문드문 업무관련 메일들이 눈에 들어왔다. 요즘은 메신저 기능을 이용해서 용건들을 주고받기 때문에 메일로는 파고들 만한 정보가 없다. 그 와중에 ‘케일론959’5라는 계정이 눈에 들어왔다. 업무용 메일계정은 분명 아니었고 그녀가 두 달 전 새벽 3시 48분에 발신한 메일이었다. 뭔가 좀 이상하다는 느낌에 메일을 클릭해 열어보자 안에는 아무런 내용이 없었다. 그냥 빈 백지였다.
“이건 애매하네.” 정말 애매한 메일이다. 서로 메일을 주고받은 적도 없는 계정으로 새벽에 아무런 내용이 없는 메일을 보낸다? 이런 짓을 할 이유도 없고 목적도 없다. 지금까지 500여명을 해킹해오면서 이런 행동을 보인 사람이 없었다. 술을 마시고 옛 애인에게 잘못했다 구구절절 애원하거나 욕으로 도배하는 사람은 종종 있어도 이런 패턴은 처음이다. 난 여느 때와 같이 거의 본능적으로 이 케일론 9595라는 계정을 추적하고 있었다. 일단 해당 메일 서비스의 링크 서버를 타고 유저DB에 접속했다. 해당 계정은 2012년 차재욱이라는 남자가 개설한 계정으로 남아있는 건 13년까지의 로그기록뿐이었다. 대부분이 입사지원을 위한 기록들로 추정되었고 약 3개월간 매일 평균 3통의 메일을 발신하고 2통의 메일이 수신되었다. 그리고 메일 사용량이 제로가 되고 6개월이 경과 되면서 이후 자연스레 시스템에서 휴먼계정으로 처리된 듯 보였다. 이후 계정이 다시 본격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건 15년 8월 6일부터이고 대부분이 수신 목적이었다. 평균적으로 1주일에 두 통 정도가 수신되었는데 모두 다른 계정에서 받은 메일이며 중복되는 계정은 하나도 없었다.
매우 이상했다.
바로 그때 그녀의 SNS계정 로그인 정보가 위쪽 모니터에 출력되었다. 드디어 그녀의 패스워드를 확보한 것이다. 난 순간 그녀의 모든 것을 들 여다 볼 수 있다는 기쁨에 환호성을 지르며 즉시 그녀 계정으로 로그인 했다.
비밀번호는 ‘PTS7785GH’ 였다. 어렵다. 어떤 뜻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과 연관 있는 것을 비밀번호로 만들어 기억하는데 이 비밀번호는 그런 느낌이 들지 않는다. 그냥 아무렇 게나 되는대로 만들어 사용하는 그런 것 같았다. 아무튼 곧 눈 앞에 펼쳐진 그녀의 비밀스러운 개인정보들을 바라보며 평소보다 몇 배는 즐거워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신난다." 하지만 난 곧 실망감에 빠져들고 말았다. 별 내용이 없다. 계정 안에는 친구들과 나눈 비밀대화도 없고 비밀 포스팅 정보도 없고 개인적인 사진도 없었다.
게다가 다른 SNS 계정도 없었다. 오로지 ‘좋아요’를 받기 위해 올린 공개적인 게시물들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하루에 평균 8개 이상의 게시물을 작성하는 사람이 아무런 비밀스러운 이야기도 하지 않는다.
이런 경우는 사실 별로 없다, 아니 없었다.
실망한 난 잠시 의자를 빙글빙글 돌리며 이 패배를 극복하려 했다. 그때 그녀가 창규씨와 같이 카페에서 찍은 사진을 올리고 오늘 즐거운 날이었다는 내용을 올렸다. 사진 속의 그는 약간 수줍고 사랑스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는데 그 모습에 나도 모르게 그와 비슷한 미소를 지었다. 곧 그녀의 게시물에 ‘좋아요’가 눌리고 ‘저도 즐거웠어요’라는 창규씨의 답변이 달리는 것을 보았다.
잘 어울리는 귀여운 커플이다.
[월요일]
출근 후 서류작업을 몇 개 처리한 후 영미와 함께 분식집에서 간단히 점심을 해결하고는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손에 쥐고 병원 뒤쪽 공원의 그늘에 앉아 있었다. 아이들이 그네 타는 것을 바라보며 거의 한 시간 째 우울해 하는 영미의 기분을 맞춰주고 있는 중이었다. 내용인 즉 프러포즈한 남자친구가 아무래도 다른 여자를 몰래 만나고 있는 듯 하다는 것이었다. 불과 이주일 전까지 만 해도 바람 피던 상대에게 차인 상태였는데 정말 빨리도 다른 여자를 만나다니 감탄이 절로 나왔다.
하지만 문제는 나에게 어찌해야 하느냐고 찡얼거리는 영미의 스트레스에 그대로 노출된 내 상황이었다. 그녀 옆에 앉아 최대한 공감한다는 표정을 지으며 머리 속으로 새로운 보안코드 해제 라이브러리를 구축했다. 가만히 앉아 아무것도 안하고 시간을 보내는 방법을 몇 가지 시도를 해봤지만 그 중에서도 이 방법이 최고였다. 게이트 서버에 접근한 뒤 서버의 암호화 패킷의 규격을 어떤 형태로 최적화할 지 고민하는 그때 영미가 날카롭게 물었다.
"너 듣고 있는 거야?"
"듣고 있어."
난 본능적으로 대답하고는 내가 딴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걸 그녀가 눈치 채었는지 슬쩍 그녀를 바라보며 자세를 고쳐 잡아 앉았다.
“전에 내가 메일 비밀번호 잃어버렸을 때 네가 찾아줬던 거 기억나?”
물론 기억하고 있다. 작년 12월 연말정산서류를 메일로 첨부해 보내 놓고는 비밀번호를 찾지 못해 패닉 상태에 빠져 있었을 때, 영미의 기존 로그 기록을 뒤져서 비밀번호를 찾아 준 일이 있었다.
"그때처럼 해킹 같은 그런 일 또 해줄 수 있어?”
‘해킹 같은 일을 해 줄 수 있냐’ 라고 한다. 나는 다시금 내 가장 친한 친구가 ‘나에 대해 전혀 모른다’ 라는 걸 새삼 확인한다. 하지만 난 고개를 흔들며 여전히 그녀가 나에 대해 잘 모르기를 바라며 대답했다.
“그거 그렇게 쉬운 일도 아니고 그냥 취미수준으로 하는 거라 될지 안될지도 몰라.”
하지만 영미는 여전히 내 말 따위 신경 쓰지 않고 자기 말만 다시 늘어놓는다.
"그래서 말인데, 남친한테 꼬리친 그 년 SNS 계정 좀 해킹해줘.”
난 정색하고는 대답했다.
"안돼"
"야! 말도 안 끝났는데 거절하는 거야? 그리고 왜? 왜 안 되는데?"
억울한 표정을 지으며 작은 목소리로 악을 쓰는 그녀를 다독이며 난 이유를 설명했다.
"해킹이라는 게 뭐 쉬운 줄 알아?"
생각보다 쉽다. 최소한 우리나라 한정의 쇼핑몰 사이트나 메일계정 또는 게임접속정보 같은 허술한 보안체계를 뚫는 건 초딩도 일주일 공부하면 간단히 따라 할 정도로 난이도가 낮다. 하지만 난 여전히 정색하며 그녀에게 어렵다고 거짓말을 시작했다.
"요즘은 다들 예전과 다르게 패킷 정보만을 기준으로 한 보안망을 쓰지 않는다고, 일단 트래픽 서버를 통과하는 것부터 문제고 설사 들어간다고 하더라도 보안로그에 기록이 남을 텐데 흔적이라도 남는다면 그냥 쇠고랑 찬다.”
난 두 손으로 ‘철컹철컹’ 흉내를 내보이고는 시선을 다시 그네 쪽으로 돌렸다.
"그래도 할 수는 있잖아."
대화가 되지 않으니 설득이 불가능하다. 이기적인 년.
"해줘. 해킹! 그년이 뭐 하는 년인지 알아야 겠어. 나이가 몇 인지, 어디 사는지, 무슨 일해서 먹고 사는지, 그년도 다른 남자랑 바람 피는지!"
난 한숨을 쉬며 여전히 시선을 그네 쪽을 고정한 채 물었다.
"뭐 어디 사는지 알면 찾아가 머리끄덩이라도 잡게?"
"머리만 잡겠냐?”
내 친구지만 생각 수준은 그냥 아침 드라마 레벨이다. 그래도 머릿속으로 그 상황을 그려보니 재미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미가 남친의 바람난 ‘그년’ 찾으러 갈 때 따라가 볼 생각에 그녀의 부탁을 승낙해 버렸다.
"시간 좀 걸릴 거야."
"얼마나?"
대충 5분에서 10분쯤 걸리지만 일단 귀찮으니 일정을 좀 더 길게 잡아 이야기해준다.
"글쎄 짧으면 일주일, 길면 한달..."
"그 정도면 괜찮아, 최대한 빨리 해줘."
난 잠시 영미를 바라봤고 당황한 그녀가 멀뚱거리며 묻는다.
"왜 그렇게 봐?"
"너도 어지간하다."
"뭐가?"
"들어 주기 유치할 정도의 수준인데, 지나치게 진지하다 싶어서."
"그럼 그냥 당하고 있어? 결혼하려는 남자가 바람 피우고 있는데 나쁜 자식 그 자식이 문제야. 바람 피우고 있었으면서 나한 테 청혼해? 뭐 그딴 자식이......"
영미가 다시 점심 먹기 전부터 조잘거리던 패턴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다. 난 한숨을 가볍게 내쉬고 다시 시선을 그네 쪽으로 돌려 머릿속으로 다른 루트의 해킹 알고리즘을 생각해 보기 시작했다.
사무실로 돌아오자 내 책상 위에 예쁘게 포장된 상자 하나가 놓여있었다. 난 잠시 팀장을 바라본다. 그는 모른 척 자기 모니터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굉장히 당황하고 있다는 게 한 눈에 들어왔다. 이 상자는 의심할 것도 없이 팀장이 내 책상 위에 올려 둔 것이다.
나도 모른 척 다시 상자를 바라봤다. 대충 80cm 정도되는 박스로 두께는 얇은 편이었다. 두손로 들어보자 꽤 묵직하다. 가볍게 흔들어 보다가 좀 강하게 흔들자 팀장이 기겁한다.
"안돼, 안돼! 그러면."
“이게 뭐예요?”
당황해 어쩔 줄 모르던 그가 갑자기 부끄럽고 쑥스러워 하며 어물쩍거리기 시작하는데 그 모습이 대단히 짜증스러웠다.
“저…… 친구가 용산 에이스 총판에서 일하는데 이번 프로모션으로 그래픽 카드 신형이 무료로 50개 풀렸다고 하나 주더라고. 그런데 난 얼마전에 같은 모델을 하나 샀거든…… 너도 필요할 것 같아서 주려고……”
“그런데 포장까지 해서 줘요?
“아니...... 뭐...... 이왕 선물로 주는 건데 포장해서 주면 너도 좋고 나도 좋잖아.”
뭐 틀린 말은 아니다. 난 대답 대신 포장지에 붙어 있는 테이프를 조심스럽게 뜯어 내용물을 천천히 꺼냈다. ‘엔당’의 하이스펙 신형 그래픽카드가 예쁘게 내 눈앞에 펼쳐졌다. 현재 인터넷 최저가로 97만원짜리 8기가 모델이다.
“선물로 주기에는 너무 비싼 거 아니 예요?”
그가 고개를 젓고 두 손을 흔들며 대답한다. “아냐, 아냐. 난 같은 모델을 듀얼로 쓰고 있어. 내가 가지고 있어봤 자 뭘 하겠어. 뭐 친한 것도 아니고 서로 교류도 없었지만 그래도 같이 일하는 사이니까 어…… 그러니까……” 뭐 라 말을 마무리해야 할지 몰라 버벅이자 답답한 마음에 내가 대신 말을 이었다.
“일단 내가 신경 쓰고 있다는 건 알아주길 바란다?”
“어.. 응…… 그래. 어쨌든 같은 팀이고 같은 사무실에서 일하고 있으니까.”
나도 어색했지만 그는 어색함을 넘어 굉장히 창피해 하면서 당장에 라도 쓰러질 듯 땀을 뻘뻘 흘리며 당황해 하고 있었다. 혹시나 내가 ‘싫다’고 거절할까 봐 잔뜩 겁먹은 표정으로 시선을 한 곳에 고정하지 못했다. 그가 쓰러져 내가 누군가를 불으러 가기 전에 서둘러 대화를 끝내야 할 것 같았다.
“아무튼 고마워요. 그렇지 않아도 하나 구하려고 가격을 알아보고 있었거든 요.”
내 대답에 그가 활짝 웃었다. 그의 불안감이 그나마 조금 사라진 것이 한눈에 보였다.
무엇보다 이걸 정말 친구가 프로모션으로 공짜로 주었다는 것도 믿기 어려웠다. 하지만 뭐 나쁠 건 없다는 생각이다. 2년간 같이 일하는 동안 서로 인사만 하는 사이였다는 것에는 나도 신경을 쓰고 있었으니 말이다. 약간의 관계 진전이 있어도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색하게 하지만 정말 기분 좋게 웃는 그가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나도 그가 준 그래픽 카드를 얌전히 책상 한쪽 구석에 밀어 놓고 컴퓨터 앞에 앉았다. 잠시 그렇게 어색한 침묵이 흐르자 팀장이 다시 나에게 말을 걸었다.
“이번 GNG 세일 때 새로 나온 게임을 세트로 구매했는데 코드가 두어 개 남거든, 그 신형 그래픽 카드에서 돌아가는 고 사양 게임인데 코드 줄까?”
“스팀 코드에요?”
“어 스팀 코드야.”
난 다시 한번 기분 좋게 웃으며 대답했다. “저야 거절할 이유가 없죠.”
일단 서로 화기애애하게 웃기 시작했지만 슬슬 부담스러워 지기 시작했다. 그때 책상 위의 내선전화가 울리기 시작했다. 어디선가 문제가 생겨 우리를 찾는 것이다. 팀장이 곧 전화를 받았고 간단한 대답 후에 움직이려는 순간, 내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제가 갈게요.”
“응? 어.. 어……” 그가 당황해 나를 바라봤다.
난 작업용 가방을 꺼내 책상위에 올리며 물었다. “어디 에요?”
“아니, 내가 갈게. 오전에도 소향씨가 원무과 PC 설치작업 다녀왔잖아.”
“괜찮아요. 선물도 좋은 거 받았는데 이정도는 제가 해야 죠.” 난 이미 가방을 어깨에 메고 그를 돌아봤다.
“어.. 그럼 어디냐면…… 8층 간호사 로비인데 약재등록 단말기 정보가 갱신되지 않는다는데 아마도 네트워크 IP가 또 꼬인 것 같아.”
“알았어요. 가서 확인해 볼게요.”
“어.. 응. 수고해.”
난 사무실을 나서며 그때서야 숨을 골랐다. 지난 2년동안 나눈 대화보다 지금 5분간 나눈 대화의 양이 더 많았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으며 외부계단을 찾아 8층까지 오르기 시작했다. 계약직 직원은 병원 내의 일반 엘리베이터를 이용할 수 없는데다, 직원용 엘리베이터를 사용하려고 해도 일반 직원들이 은근히 눈치를 주는 편이라 그냥 계단으로 오르내리는게 속 편하다.
총총걸음으로 느긋하게 빌딩 숲 사이를 넘어가는 저녁햇살을 기분 좋게 받으며 계단을 올라 8층 간호사 로비에 도착했다. 간호사들은 내 모습을 보자 마자 고장 난 단말기를 가리키며 ‘이게 고장 났어요. 좀 빨리 고쳐주세요”라는 주문을 외기 시작했고, 얼굴을 아는 간호사들은 가볍게 인사를 건넸다.
난 일단 자리를 잡고 앉아 단말기의 네트워크 IP를 확인하고 주소를 다시 세팅했다. 이대로 설정이 되면 1분 안에 끝날 작업이지만 그렇게 쉽게 마무리 되지는 않는다. 일단 임시로 할당 받은 IP 주소를 몇 개 넣어보고 작동되지 않는 걸 확인한 뒤 담당 간호사에게 시간이 좀 걸리겠다는 이야기를 한 뒤 본격적으로 작업을 시작했다. 단말기의 네트워크 통신망을 완전히 초기화하고 가져온 USB 드라이브에 들어있는 미리 설정된 네트워크 드라이버를 설치했다. 8층에는 소아병동이 같이 붙어 있어서 20분 남짓한 작업시간 동안 몇몇 아이들이 내 쪽으로 다가와 내가 뭘 하는지 지켜본다. 난 애써 무시해보려 하지만 애들은 서슴없이 내게 말을 건다.
“이걸로 게임할 수 있어요?” 라던가, “나도 컴퓨터하고 싶다.”나 “아침만화 틀어주세요.” 같은 황당한 요구사항을 말하는데 들어주고 싶어도 들어줄 수가 없으니 그저 최대한 부드럽게 웃어 보일 뿐이다.
단말기 네트워크가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걸 확인하고 도구들을 챙기고 있는 도중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 안녕하세요.” 종규씨였다.
난 애써 모른 척 안 들린 척 가방을 어깨에 들쳐 메고 서둘러 계단 쪽으로 걸어갔지만 그가 뒤에서 쫓아와 내 어깨를 건드렸다. “안녕하세요.” 내가 돌아보자 그가 다시 내게 인사를 건네며 귀엽게 손을 흔들었다.
“어!!” 난 자연스럽게 놀란 듯 연기하며 그를 바라보았다. “안녕하세요.”
“역시 같은 건물에 있으니 이렇게 보게 되네요.” 그가 수줍게 웃는다.
“그러게요.”
잠시 공백이 생겼다. 어색한 기분이 들 찰나 그가 먼저 입을 연다.
“여기 뭐 고장 났었나 봐요?”
“예. 내원용 약을 발주하는 단말기가 고장 났다고 해서요. 지금 막 고치고 내려가려는 참이었어요.”
“아. 뭐 부품도 갈고 그런 건가요?”
“아뇨. 네트워크 IP 혼선이 있어서 그냥 초기화 작업하고 다시 주소를 할당하는 작업을 했어요.”
“아.. 네……”
내가 하는 말을 전혀 못 알아들은 눈치다. 하긴 컴퓨터로 할 줄 아는 거라고는 쇼핑하고 야동 받아보는 게 전부인 사람이니 알 턱이 없었다. 난 최대한 간단히 설명해 주려 했다.
“핸드폰 사면 처음에 아무것도 안 깔려 있고 백지상태잖아요.”
그는 잠시 자신의 핸드폰을 처음 샀을 때 모습을 생각하려는 듯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 렇죠.”
“그걸 제품 초기화 상태라고 하는데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사용자 계정 정보 등록하고 자기 집 와이파이 등록하잖아요. 저 단말기를 그 제품 초기화 상태로 만든 뒤에 와이파이를 등록한 것과 비슷한 네트워크 설정 작업을 한 거죠.”
그제서야 그가 이해한 듯 고개를 끄떡인다.
“아, 대충 알 것 같네요. 지금 엄청 단순히 설명했지만 그래도 생각보다는 쉽지 않은 작업이겠죠?”
“아무래도 그렇죠.”
그가 그 예쁜 큰 입을 옆으로 벌리며 순진한 표정으로 웃는다.
“컴퓨터 엄청 잘 하겠어요?”
‘컴퓨터’란다. 뭘 잘하냐고 묻는 게 아니라 통칭해서 묻는다. 이런 대책 없는 무지함이 또 귀엽다.
“그렇죠. 아무래도 그걸로 먹고 사니까 남들보다는 잘 알죠.”
“전 그런 쪽으로는 아무것도 몰라서 기계나 컴퓨터 잘 다루는 사람을 보면 부럽더라고요.”
“대게 그런 대사는 여자가 남자에게 하지 않나요?”
“아, 뭐, 대게는 그렇죠.”
그가 가볍게 웃자 나도 가볍게 미소 짓는다.
“그나저나 그날 소개팅은 잘 하셨나요?”
내가 토요일의 일을 묻자 그가 즐겁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아, 소개팅이요. 예. 잘 됐죠. 그때 우연히 만나서 민망하면서도 상황이 좀 재미있었잖아요.”
그가 잠시 뜸을 들이며 작지만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뭔가 가슴에서 울컥했다.
“급한 일 있다고 가시고 난 뒤에 그 소개팅 여성분이랑 한동안 재미있다고 웃었거든요. 덕분에 분위기도 좋아지고 어색하지 않게 식사도 마치고 영화도 보고 했죠.”
그가 이야기 하는 동안 그 소개팅 녀의 예쁜 얼굴이 머리 속에서 아른거리기 시작했다. 속에서 스멀스멀 불쾌한 감정이 치솟아 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평생 살면서 누군가를 감정적으로 미워하거나 부러워해 본 적이 없었지만 이 극렬한 감정이 질투라는 것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지금 내 앞에서 수줍게 웃고 있는 남자를 좋아하고 ‘조금’은 사랑하는 감정이 있을 것이라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그를 내 삶의 일부로 원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지금 이 기분은 내 본심이 그렇지 않다라는 것을 여실히 내게 알려주며 빨간 경고등이 시끄럽게 울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 남자를 빼앗기면 안돼’ 라고 내 마음이 외치고 있다.
“잘 됐네요. 상대 분이 굉장히 미인 분이라 저도 순간 엄청 긴장했었는데….”
감정적으로 대응하면서 내 마음을 터 놓을 수는 없다. 일단 이 상황에서 해야 할 말만 해야 한다.
“예? 긴장이요?”
“저 때문에 소개팅 망치실까 봐요.”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한다.
“아. 아니죠. 그렇지 않아요. 소개팅을 망쳤다면 제 잘못이죠.”
그가 쑥스러운 듯 팔짱을 끼고 웃었다. 이곳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기분이 들기 무섭게 난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들여다 보는 척을 했다.
“이제 가봐야겠네요. 아직 일이 끝나지 않아서요.”
그도 고개를 끄떡이며 약간은 미안한 표정으로 웃었다.
“아, 죄송합니다. 바쁘실 텐데 제가 눈치가 없었네요.”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난 고개를 숙여 간단히 인사하며 일단 자리를 벗어나려 발걸음을 옮겼다. 그때 그가 뒤에서 눈치 없이 말을 이었다.
“자주 얼굴 볼 것 같은데 인사하면서 지내요.”
순진하고 좋은 남자다. 그의 얼굴을 돌아보자 새삼 내가 그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다시 깨닫는다. 이렇게까지 감정이 흔들리지는 않았는데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르겠다. 하지만 난 일단 본능적으로 그의 말에 대답했다.
“네. 다음에 또 뵈요.”
내 미소에 그가 가슴 언저리에서 오른손을 작은 동작으로 흔들었다. 그 행동이 귀여워 죽어버릴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