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일 저녁]
오늘은 평소보다 몇 배는 힘들다. 오후일 이후 눈을 뜨고 있는 게 어려울 정도로 머리 속에서 뇌가 좌우로 흔들리는 기분에 퇴근 시간까지 책상 위에 엎어져 시간을 보냈다. 해가 넘어가자 거짓말처럼 구름이 하늘을 덮었고 퇴근시간에 맞추어 비가 추적추적 내리기 시작했다. 단순한 어지러움이 두통으로 변하기 시작했고, 평소라면 날 기분 좋게 해줄 비 냄새가 비릿하게 풍겨왔다. 오후에는 꽤 괜찮은 기분으로 하루를 보냈지만 저녁이 되자 왠지 모를 우울함이 강하게 밀려왔다. 가슴이 답답하고 두통과 비슷한 감각이 내 머리 속을 휘저어 생각도 제대로 할 수 없을 정도였다. 내가 보는 세상이 남들보다 아주 조금 어둡고 우울한 색감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었지만 오늘만큼은 회색 톤이 그 위에 짙게 드리워진 기분이다.
퇴근시간이 되기 무섭게 병원을 빠져 나와 영미와 함께 병원 근처 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팀장이 선물한 그래픽 카드를 들고 지하철역에 들어섰다. 비가 와서인지 김종말씨도 횡단보도가 아닌 개찰구 근처에서 비에 홀딱 젖은 채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뭐라 혼잣말로 중얼거리고 있었는데, 항상 도로 위에서 기운에 찬 목소리로 떠드는 평소의 모습과 다르게 젖은 박스바닥 위에서 웅크리고 있는 그의 모습이 굉장히 애처로웠다.
김종말씨를 지나쳐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지하철 플랫폼까지 내려온 뒤 이어폰을 귀에 꽂았다. 그리고 집에 가는 동안 ‘이소라’ 노래를 연달아 틀어댔다. 덕분에 우울한 기분이 바닥을 치고 몸서리를 치게 할 정도였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그래픽 카드와 가방을 벽의 고리에 정돈해 건 뒤에 화장실로 들어가 최대한 따뜻한 물로 샤워를 했다. 알몸으로 변기 위에 앉아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물줄기를 맞으며 생각을 하나 둘 정리하기 시작했다. 지금 내게 필요하지 않은 일이나 생각들을 최대한 객관적으로 나열한 뒤에 순위를 정해보았다. 그리고 그것들을 차례대로 포기할 수 있는 지 생각해 본다. 쉽지 않다는 걸 알지만 내가 살려는 인생은 최대한 간단하고 단순해야 한다. 그래야 나 스스로를 감당할 수 있고 바닥으로 떨어진 내 삶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최대한 감성적이지 않으려 의식적으로 행동하면 점차 이성적으로 변해간다. 그런 내 모습에 몇 안 되는 내 주변사람들은 내가 너무 차갑고 자기 멋대로이고 남들을 이해하지 않는 싸가지라고 말한다. 그럴 수 밖에 없다. 내가 날 그렇게 포장해 행동했으니까.
나이 31살이나 먹고 15살짜리 애들처럼 제멋대로 행동하고 말하지만 사실 내 근본은 그렇지 못하다.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며 나 역시 사회적인 행위에 위안을 느낀다. 자신의 사회적 행위의 일부분을 자기 스스로가 받아들이지 못하는 건 어디까지나 인간이 가진 자기보호본능에서 온다는 것을 어느 사회학자의 책에서 읽은 적이 있다. 어느 정도는 맞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사회적인 행위는 결국 자신이 아닌 다른 개체를 통해서만 이루어지는 행위이며, 자신 이외의 다른 개체는 언제라도 나 자신을 거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돌려 말했지만 결국 쉽게 말해 믿던 도끼에 발등 찍히고 싶지 않다는 거다.
“아직은 애야.”
그렇다. 난 아직 애다. 남들과 섞이기 무서워 징징거리는 꼴이 ‘유치원 가기 싫다’ 떼쓰는 다섯 살짜리와 다를 게 없다.
난 변기 위에서 내려와 샤워기를 잠그고 수건으로 물기를 닦은 후 컴퓨터 앞에 앉았다. 유일하게 세상에서 날 이해하고 받아주고 내 모든 걸 쏟아 부을 수 있는 것은 이 물건뿐이다. 내 해킹 라이브러리가 내가 자리를 비운 사이 확보한 데이터를 실시간으로 저장해 카테고리 별로 정리한 뒤 모니터 화면에 뿌려주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 우울했던 기분이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내 자리로 돌아왔다는 생각에 안도감이 빠르게 밀려왔다. 난 분명 이 일에 중독되어 있다.
난 종규씨의 소개팅녀 최유람의 데이터 기록을 본능적으로 뒤지기 시작했다. 그녀가 오늘 아침 몇 시에 어디로 출근했고 점심으로 뭘 먹었고 몇 시에 커피를 마셨으며 9시간 동안 직장 사무실에서 얼마나 많은 시간을 낭비하였는지, 하루에 받은 보이스피싱 전화와 몇 번이나 화장실에 다녀왔는지도 알 수 있었다. 오늘 그녀가 오전 10시쯤에 자신의 SNS 계정에 올린 유투브 고양이 동영상 링크와 2시쯤에 가장 핫 했던 ‘검사장 뇌물수수사건’ 뉴스속보 링크를 확인하고, 오후 5시 퇴근 전 올린 짧은 하루의 보람과 같은 가식적인 내용의 수기 같은 것을 읽었다.
그 후 그녀의 회사 보안 네트워크에 접속해 8배 빠른 속도로 그녀의 감시카메라 영상을 찾아 눈을 때지 않고 바라보았다. 순간 내가 얼마나 질투 어린 감정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는지를 깨달았다. 이런 감정은 처음이다. 지금까지 여섯 명을 스토킹 해왔고 그 중 유부남도 한 명 있었지만 이런 감정으로 대상을 바라보고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그녀가 밉고, 나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그녀의 아름다운 외모에 자격지심까지 느끼고 있었다.
그렇게 그녀의 기록을 뒤지던 중 그녀의 GPS 좌표가 성북역 쪽으로 향하는 것을 보았다. 처음에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지만 그녀의 집은 양재 쪽이라는 것이 기억나는 순간 그녀가 완전히 집에서 반대방향으로 향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곧 그녀는 신이문역에 도착했고 역에서 내린 듯 잠시 위치가 흔들리더니 곧 3번 출구를 지나 중랑천쪽으로 향하는 것을 보았다.
“외근인가?” 컴퓨터 시계가 10시를 조금 넘은 시각을 가리키고 있다. 이 시간에 여직원에게 외근을 시키는 회사도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외근인데 왜 중랑천으로 가지?’
창 밖으로 장대비 정도가 아닌 폭우가 쏟아지고 있었고 간간히 번개도 내려쳤다.
‘이런 날씨라도 일이라고 한다면 외근을 할 수 있나?’
‘한국철도공사차량기지가 근처에 있는데 여기에 볼일이 있는 건 아니겠지?’
‘그녀 회사는 광고대행사인데 한국철도공사차량기지쪽으로 갈 일이 있을 리가 없지.’
‘애초에 그녀의 위치가 철도공사차량기지가 아닌 중랑천쪽인데 그럴 리가 없잖아’
잠시 그녀의 위치를 바라보는 사이 여러 가지 생각들이 머리 속을 스쳐 지나갔다. 곧 그녀의 GPS 신호가 이화교 근처에 멈추었다. GPS 신호가 조금씩 약해지더니 곧 사라졌다. 직감적으로 분명 무언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난 이상한 느낌에 그녀의 신호가 다시 모니터에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그렇게 새벽 2시가 돼서야 그녀의 GPS 신호가 사라졌던 중랑천 이화교 근처에서 다시 잡혔다. 곧 도로변으로 나온 그녀의 신호는 잠시 멈추어 있었고 택시라도 잡았는지 아주 빠른 속도로 양재천을 벗어나 동대문구를 지나 강남 쪽으로 향했다.
뭔지 알 수는 없지만 그녀는 뭔가 자신만의 비밀을 가지고 있는 것이 확실하다. 지금 짐작으로는 일종의 불륜이나 다른 남자가 있다는 것 정도다. 내가 이해되지 않는 것은 SNS에 열중하고 있는 20대 중반의 미모의 여성이 이런 비밀스러운 개인적인 이야기를 자신의 SNS비밀 라이브러리나 핸드폰 또는 메일 같은 곳에 그 흔적을 남기지 않았다는 것이다. 난 키보드를 의미없이 두드리며 어떤식으로 이 여자의 치부를 파해쳐야 할지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