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요일]
어제 저녁에 기운 없이 지하철 바닥에 널 부러져 있던 김종말씨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고 평소와 같이 씩씩한 모습으로 횡단보도 앞에서 종말과 죄악 그리고 심판에 대한 내용으로 열변을 토하고 있었다. 나 역시 여느 때와 같이 주머니 속 동전들을 그의 종말박스에 집어 넣고는 횡단보도를 건너 병원건물로 들어섰다. 아직 하늘에는 구름이 잔뜩 끼어있지만 적어도 비는 그쳤다.
정문을 지나 계단을 타고 내려와 사무실로 들어서자 팀장이 어디선가 가져온 작은 화분 하나를 빈 책상 위에 내려놓고 있었다.
“어.. 왔어……”
“예. 왔어요”
난 가방을 벽에 걸면서 화분을 바라보았다. 작고 앙증맞은 고양이 모양의 화분에 이름 모를 꽃이 심어져 있었다.
“집에서 키우던 건데 사무실이 너무 삭막해서 가져와봤어” 내가 화분에 신경을 쓰는 것 같자 팀장은 어눌한 목소리로 말했다. “마음에 안 드는 건 아니지?”
“예. 괜찮아요. 화분 귀엽네요.”
“그렇지? 일본 가서 사온 거거든…..” 귀여운 것과 일본이 서로 무슨 상관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대꾸하지는 않았다. 난 자리에 앉아 컴퓨터를 켜고 어제 받은 그래픽 카드를 잘 가지고 갔다고 인사치레 정도의 이야기만 하고 평소와 같이 보안 로그를 뒤져보고 밤 사이 해킹한 내역을 확인하고 로그를 삭제한 뒤 종규씨가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를 확인했다. 그렇게 잠시 자리에 앉아 조용히 시간을 보내고 있는 사이 문이 벌컥 열리며 영미가 뛰어 들어왔다.
“야!!! 김소향!!!”
오랜 친구년이 출근하기 무섭게 다짜고짜 고함을 지르며 사무실로 뛰어 들어왔다.
“네 이년”
원래 시끄러운 성격이지만 소리를 지르며 날뛰는 편은 아닌데 오늘은 평소와는 좀 다르다.
“아직 9시전이거든. 기운 좀 아껴.”
“지금 기운 이야기를 할 때가 아니야! 너 어제 낮에 8층에서 그 훈남 마취의랑 히히덕 거렸다며!!”
아침부터 당황스럽게 시끄러운 이유가 이거였다.
“너 언제!! 우리병원 최고 훈남이랑 서슴없이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가 됐어?”
지금 시끄럽게 떠들어대는 이 미친년보다 이 이야기를 아무렇지 않게 듣고 있을 팀장이 더 신경 쓰였다. 난 자리에서 일어나 ‘뭐가 어찌 돌아가는 거냐’고 조잘대는 친구 년을 끌고 밖으로 나왔다. 사무실을 빠져 나오기 무섭게 계단을 오르며 토요일에 있었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물론 내가 미리 계획해서 그들을 찾아가서 그녀의 핸드폰에 해킹 작업을 했다는 이야기는 빼놓고 말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 난 그 남자에게 관심 없다’는 거짓말도 추가했다.
그제서야 영미는 대충 상황이 이해됐다는 듯 내 등을 두드렸다.
“정말 관심 없어?”
“마취의??”
“어.”
“내 인생에 남자가 있었냐?”
“여자도 없었지.”
난 대답 대신 어깨만 한번 으쓱해 보였다.
“가끔 드는 생각인데 내가 널 15년간 알아왔잖아. 여자의 황금기라 할 수 있는 20대를 포함해서 말이야. 그런데 네가 누군가를 만나거나 사귄 적이 없거든. 게다 누굴 마음에 두고 있다고 한 적도 없고” 그녀가 날 빤히 바라본다.
“근데?”
“남자를 안 만나니 이성애자는 아니고 그렇다고 동성을 만나는 것도 아니니 동성애자도 아니고 그렇다는 건 양성애자도 아니라는 이야기고….”
“그래서?”
“무성애자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단 말이지.”
대답할 대꾸도 필요 없는 그녀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그냥 씨익 웃어줬다.
“내 추리가 맞냐?”
“일이나 하러 갈란다.”
난 대답 대신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병원으로 향했다. 그때 뒤에서 영미가 소리쳤다.
“내가 부탁한 일 좀 빨리 해줘!!” 양심도 없는 년….
사무실로 다시 돌아왔을 때 또 다른 손님이 날 기다리고 있었다.
“아 소향씨”
방금 전 소란의 주인공인 종규씨가 팀장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며 날 기다리고 있었다. 칙칙한 회색 빛의 벽과 어두운 형광등 불빛 아래에서도 그가 서 있는 공간만이 분리된 듯 빛나고 있었다.
“좋은 아침 입니다.”
아침 인사와 함께 그의 미소가 날 바라본다. 순간 얼굴이 확 하고 달아올랐다. 난 내가 어떻게 된 것이 아닌지 잠시 당황했고 곧 종규씨 때문이라는 것을 인지했다.
“안녕하세요.”
최대한 태연하게 대답하려 노력했지만 목소리가 가볍게 떨리는 기분이다. 내 인사에 그가 쑥스럽게 웃으며 내 쪽으로 두어 걸음 다가왔다. 난 본능적으로 뒤로 한 걸음 물러섰는데 그도 그런 내 행동을 눈치 챘는지 더 이상 다가오지 않았다. 종규씨는 한 세 걸음 떨어져 날 똑바로 바라보며 기분 좋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 저기 여기 이렇게 찾아온 이유가요.”
“알고 있어요. 어제 8층에서 대화 나눈 거 소문이 났던데요.” 고개를 끄떡이며 다 안다는 듯이 그의 얼굴을 바라봤지만 눈을 똑바로 볼 수는 없었다.
“예. 알고 계셨네요. 아침부터 간호사들 사이에서 소문이 나버려서 그것 때문에 폐를 끼칠까 봐. 그래서 뭐랄까.. 사죄도 드리고…... 그러려고 왔어요.”
“신경 안 쓰셔도 되는데, 뭐 그런 소문은 원래 신경 쓰지 않으면 그냥 사라지잖아요.”
“뭐 그렇기는 하죠.”
그가 잠시 머뭇거리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아무튼 이 일 때문에 곤란한 건 아니시죠?”
“예. 곤란하거나 그런 건 없어요.”
다시 그가 뜸을 들인다. 뭐라 이야기해야 할 지 고민하는 눈치다. 그를 곤란하게 만들고 싶지도 않고 나 역시 어색해지는 건 싫어서 내가 먼저 말했다.
“정말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되요. 저희가 무슨 10대 애들도 아니고요. 그냥 몇 마디 나눈 것뿐인데 그걸로 소문이 돌았다고 신경 쓰는 게 더 이상한 것 같아요.”
“그거야 그렇죠.”
그가 기분 좋게 웃었다. 그때서야 내가 그를 정말 좋아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냥 좋아하는 정도가 아니라 사랑하고 있었다. 이유는 알 수 없고 언제 그렇게 되었는지도 모르겠지만 순간 그의 웃음 자체에 내가 만족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했다. 그래서 그가 소개팅을 한다고 했을 때 그 상대에게 관심을 가졌던 것이고 그 상대가 나와 비교조차 되지 않는 아름다운 여성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자격지심에 질투했던 거다. 그걸 인정하지 못해 고민하고 우울해 했던 것이다. 난 잠시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며 그의 얼굴을 빤히 바라봤다. 그제서야 그의 눈동자가 눈에 들어왔다. 약간은 갈색 빛을 띈 검은 홍채가 동그랗게 말려 그의 눈꺼풀 아래에서 부드럽게 움직이는 것이 너무 아름답다 생각하고 있었다.
“저 그럼 이만 올라가 볼게요.”
종규씨가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하는 것을 받아주자 그가 사무실 문을 열고 나갔다. 그가 나간 뒤 난 잠시 자리에 서서 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 잠시 자리 비워도 되죠?”
팀장을 바라보지도 않고 말하고는 팀장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난 계단을 타고 중앙 홀로 나갔다. 생각을 좀 정리할 필요가 있다. 난 병원을 빠르게 빠져나가 김종말씨를 지나쳐 한 블록 거리의 자동차 전용도로 쪽으로 향했다. 자동차 전용도로를 따라 이어진 커다란 가로수들이 나열된 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생각을 정리하기에는 이 3블럭 정도의 길이의 거리가 정말 좋았다.
우선 가장 먼저 든 생각은 ‘더 이상 이렇게 살지 말자’였다. 나도 연애하고 결혼하고 아이를 가지고 싶다. 개처럼 두들겨 맞고 강간당하듯 자신을 성적으로 학대한 남편의 그늘아래 매일 아침 저녁으로 공장에 들락거리며 살아온 엄마와는 다르게 정말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 행복한 가정을 가지고 싶다는 생각이 가슴속 깊이 치솟아 올라왔다. 그리고 그 남자가 종규씨였으면 좋겠다는 간절함이 뒤를 따라왔다. 사회부적응자 같은 생활을 청산하고 남들과 비슷한 삶을 살아봐야겠다는 생각과 그러려면 당장 해커 질 따위 정리해야 한다는 것, 머뭇거리지 말고 당장에 실행에 옮겨야만 한다는 순으로 생각이 정리됐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용기를 내야 한다. 그 용기로 종규씨에게 다가가야만 한다.’고 되 내었다.
돈이라면 충분할 정도로 있다. 그 동안 해커들의 작업코드를 만들어 주며 벌어놓은 돈이 2억가량 있으니 이것으로 결혼자금을 대신한다는 생각까지 이어지며 머릿속으로 그 뒤의 일까지 멋대로 그려보았다.
대충 생각과 감정이 정리되자 이번에는 이성적으로 좀 더 생각의 폭을 좁혀봤다. 어떤 방식으로 종규씨에게 다가가야 할지를 심각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때 ‘영미’ 얼굴이 머리 속을 스쳐 지나갔다. 쪽 팔리기는 하지만 지금은 그런 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런 고민이라면 그녀만큼 해박한 사람이 없었다.
난 다시 발걸음을 병원 쪽으로 돌렸다.
김종말씨를 다시 지나쳐 정문을 지나 주차장을 끼고 건물을 돌았다. 병원으로 오는 도중에 영미에게 당장 카페에서 보자는 문자를 보내고 경쾌한 걸음으로 휠체어를 탄 노인을 지나쳐 환자들이 삼삼오오 모여 담배를 피우고 있는 커다란 나무를 통과해 병원 뒷문으로 빠져 나와 카페로 향했다.
하늘은 아직 구름이 잔뜩 끼어 우그러져 보였지만 내 기분만큼은 어제 저녁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가벼웠다. 그 동안의 자잘한 고민들과 항상 불안감에 차 있던 마음이 언제 그랬다는 듯 깔끔히 사라져 있었다. 카페 입구를 열고 들어서자 병원 직원들이 군데군데 자리를 잡고 있었다.
난 카운터의 알바에게 다가가서 ‘라떼’를 한잔 주문했고 잠시 기다리려 안쪽으로 들어서는 순간 동료들과 구석자리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종규씨를 다시 보게 되었다. 헤어진 지 불과 30분 만에 다시 만나게 되자 굉장히 반가운 마음에 한층 업된 기분이 더욱 공중으로 떠오르는 듯 했다. 우리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눈이 마주쳤고 난 그만 볼 수 있도록 가볍게 손을 흔들며 웃었다.
그때 그가 무표정하게 날 바라봤다. 마치 처음 본 사람인 양 잠시 날 바라보다 고개를 돌려 날 모른 척 했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그가 날 바라보는 눈빛은 굉장히 곤란하면서도 이제는 더 이상 아는 체 하지 말자고 말하고 있었다. 난 그에게 흔들던 손을 내리고 조용히 구석에 가 섰다. 순식간에 참담한 패배감이 날 휘감았다. 최대한 의연히 서서 주문한 라떼가 나오기 무섭게 그것을 손에 쥐고 카페를 빠져 나와 다시 병원으로 향했다.
희한하게도 바닥으로 내리친 기분은 불과 1분도 되지 않아 회복되었고 평소의 우울한 나로 돌아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