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는 느티나무 밑 평상에 앉아 냄비 안에 끓고 있는
닭도리탕을 뒤적이고 있었다.
“잔인한 질문 같지만, 기분 어떠세요?”
“기분? 글쎄. 배가고파. 2년 만에 느껴보는 시장기야.”
지혜는 미소를 지었다.
“이렇게 끝나는 거예요?”
“대책이 없잖아? 잠시 쉬면서 다른 일을 생각해 봐야겠지.”
의외로 편안한 인성의 표정을 보며, 지혜는 분노를 느꼈다.
“말도 안 돼요! 2차 간기때 단백질 문제만 풀리면, 3차, 4차······.
자동인데, 어떻게 여기서 끝내요? 이제 다 됐는데,
여기서 접으라고요? 전 그렇게 못해요!”
“네 기분 알아. 하지만 이게 현실이야.”
“제가 조교들하고 학장님을 만나서 얘기해 보겠어요.
얘기해서 안 되면 무릎 꿇고 사정이라도 해봐야지요. “
“카이스트 프로젝트는 일반 연구와 달라. 이건 사업이라고!
넌, 이제 박사 논문에 집중해. 그동안 고마웠어. “
인성의 말을 듣는 지혜의 눈에 눈물이 고인다.
서울로 올라와 일반인의 생활로 돌아온 인성은 오랜만에 시간의
무료함을 느낄 수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 커피를 끓이고,
조깅을 하고,
TV를 시청하기도 하고······.
무료함을 달래 보려고 수면시간을 늘여보기도 했으나,
그것도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눈만 감으면 떠오르는 건 ‘단백질’ 이었다.
인성은 검은 바다를 혼자 걷고 있었다.
바다는 파래야 하는데······.
저 앞에, 바다와 모래의 경계에, 한 여인이 달빛을 받으며 앉아 있었다.
작은 파도가,
여인의 하얀 발에 묻은 모래를 덮었다 씻어내기를 반복한다.
인성은 뒷모습이 아름다운 여인에게 다가가, 그 옆에 말없이 앉았다.
여인이 고개를 돌려 남자를 쳐다본다.
여인은 한없이 평화롭고 황홀한 미소를 짓는다.
“엄마!”
여인은 말없이 양손으로 인성의 머리를 잡아
그녀의 가슴으로 안았다.
샤프론 향기.
그건 엄마의 냄새였다.
“띠리리리 리······.”
인성은 잠에서 깨어나며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조인성 박사님?
나, 성광그룹, 차 회장입니다. “
“아! 예, 차 회장님. 어쩐 일로 전화를 다 주셨나요?”
“시간 내서 한번 만났으면 합니다. 오늘 바쁘신가요? “
“저야 뭐, 그냥 집에서 쉬고 있습니다.”
“그래요, 집이 서울이시지요?”
“예, 성수동입니다.”
“10시에 제 사무실로 와주시겠습니까?”
“예. 찾아뵙겠습니다.”
인성은 핸드폰을 내려놓으며 생각했다.
‘다 끝난 일인데, 이제 와서 왜, 나를 만나자고 할까?’
충정로 성광빌딩, 12층.
인성은 회장실로 들어서며 허리를 굽혀 차 회장에게 인사했다.
“아! 조 박사님. 어서 오세요. 이리 앉으시지요.”
인성은 맞은편 소파에 단정히 앉으며,
“지난번 프로젝트, 실망시켜드려서 죄송합니다.”
“과학자는 사업가가 아니에요.
과학의 결과는 실패를 통해 얻어집니다.
좌절감이 크지요? “
“잊으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차 회장은 말없이, 한동안 인성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말문을 열었다.
“조 박사님, 나하고 일해보지 않으시겠습니까?”
“제가 무슨 일을......”
“카이스트는 포기했지만, 난 아직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다시 시작해 보세요. “
“다시 시작하다니요? 회장님.
이런 연구는 저 혼자 책상에 앉아서 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
“하, 하······. 이 늙은이도 그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나하고 둘이서 해봅시다!
내가 기자재와 인력을 모두 지원하는겁니다.
제한기간 없이 될 때까지 하는 겁니다.
조 박사는 연구에만 몰두 하십시오.
뒤는 제가 알아서 합니다.
나하고 단둘이 계약을 하는 거지요. “
차 회장은 70을 바라보고 있었다.
재계 10위권의 성광 그룹을 자수성가로 일궈낸,
입지전적 인물이었다.
“계약이라니요? 전 아무런 확신도 회장님께 드릴 수 없습니다.
프로젝트는 될 수도 있고, 안될 수도 있습니다.
전 과학자로서 연구를 위해 불확실성에 도전할 수 있지만,
사업으로서의 성패는 장담할 수 없습니다.
성공 확률은 20프로도 되지 않습니다. “
차 회장은 단호하게 말했다.
“난, 그 20프로에 거는 겁니다. 아무 조건 없이 지원 합니다.
단, 한 가지만 약속해 주세요.
만일 프로젝트가 성공하면, 모든 특허권은 제게 구속되는 겁니다.
특허권을 제외한 모든 연구 성과는 조 박사님 것이고요.
어때요? 하시겠습니까? “
인성은 눈을 감은 채,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이 엉뚱한 제안에
만감이 교체했다.
“하지요, 회장님! 연구만 계속할 수 있다면 목숨이라도 걸겠습니다.”
차 회장은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용인에 그룹 연수원으로 쓰던 2층 건물이 하나 있습니다.
연수원이 평창으로 옮기면서 지금은 비어 있지요.
그곳에 연구소와 실험실을 만들어 보세요.
외부엔 알리지 않겠습니다.
오늘 중으로 현장을 둘러보시고, 필요 인력과 장비, 차량······.
모두 신속히 진행해 주세요.
난 자금 지원만 할뿐, 일에 관여하지 않습니다.
가끔, 나하고 저녁 식사라도 하면서 경과보고만 해주면 됩니다.
난 과학자와 얘기하는 게 즐겁거든요. “
조인성은 성광빌딩을 나서며 핸드폰을 열어 지혜에게 전화했다.
반가운 목소리로 지혜가 전화를 받았다.
“교수님? 어쩐 일이세요? 안녕하시지요?”
“그래, 논문은 어떻게 됐어?”
“통과 됐어요. 모두 교수님 덕분이지요.
학위 수여식만 기다리고 있어요.”
“그래. 잘됐군.
지금 시간 있나? 나하고 가볼 데가 있는데. “
“예, 교수님. 저도 교수님 보고 싶었어요.”
“그래. 용인 버스 터미널 앞에 던킨 도너츠가 있어.
거기서 1시에 만나지. “
조인성이 용인 버스터미널에 도착했을 땐 지혜는 벌써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지혜를 옆자리에 태우고 성광그룹 연수원으로 갔다.
연수원은 약 6천여 평의 대지위에 단아한 2층 흰색 건물로, 오봉산을 뒤로하고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미리 전화가 갔는지, 정문을 지키던 경비가 거수경례를 붙인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잔디밭을 가로질러 출입문 앞에 섰다.
문은 잠겨 있었고, 따라온 경비가 문을 열어주었다.
“조인성 박사님이시지요? 그룹 비서실에서 전화가 와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인성은 지혜와 로비로 들어섰다.
비어있는 건물이었지만 관리를 잘 해서인지 실내는 먼지하나 없이 깨끗했고, 정리가 잘되어 있었다.
그때까지 질문을 아끼고 있던 지혜가 로비로 들어서며 물었다.
“여기가 어디예요?”
인성은 로비에 있는 의자에 잠시 앉으며, 지혜에게 차회장과의 만남과, 이 건물에 오게 된 경위를 자세히 설명했다.
“와! 정말 꿈같은 일이군요!
저, 교수님 떠나시고 한 번도 프로젝트 잊은 적 없었어요.
박사논문 준비하면서도 틈나는 대로 자료들을 찾아보았지요.
이제 정말 다시 시작할 수 있게 된 거예요! “
“그래. 다시 시작하는 거야! 너, 날 도와줄 수 있겠니? “
“당연하지요, 교수님. 이건 제 일이기도 해요.”
그녀는 의욕에 넘쳐 있었고,
그녀의 눈은 조인성이란 남자를 존경을 넘어 경이의 대상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로비를 지나면 양쪽으로 복도가 이어지고 맞은편 중안으로 계단이 있다.
오른쪽 복도를 끼고 4개의 방과 식당이 있었고, 왼쪽 복도로는 세미나실로 썼던 두 개의 큰방이 마주보고 있었다.
그리고 2층에 발코니와 욕실이 딸린 12개의 숙소가 있었는데,
방마다 가구와 집기가 그대로 정리되어 있었다.
인성과 지혜는 2층을 둘러보고 계단을 내려와 복도 왼쪽의 세미나실로 들어섰다.
“이곳에 실험실을 만들어야겠어. 저쪽으로 무균실을 두고.
인큐베이터 4대를 그 안에 설치하는 거야.
그리고 중앙에 시뮬레이터, 이쪽으로 원심분리기, 썩션기······.
저쪽에 전자 현미경......“
지혜는 신나게 인성의 말을 메모지에 받아 적었다.
다음 날부터 인성은 주문해야 할 장비 리스트와 인력계획을 수립했다.
신속한 차 회장의 지원으로 한 달 만에 인테리어가 끝났고,
속속 들어오는 실험장비들이 제자리를 잡아 나갔다.
그 사이 조인성과 최지혜는 숙소를 건물 이층으로 옮겼고,
6명의 석사출신 보조 인원과 4명의 행정직, 4명의 건물 관리인원과 2명의 경비를 보강했다.
두 달 후.
‘용인 분자 생식학 연구소’는 그렇게 모습을 드러냈다.
연구소가 정상 업무를 시작하는 첫날,
조인성 박사는 15명의 전 직원들과 첫 번째 제네럴 미팅을 가졌다.
“자, 이제 이곳에 모인 여러분들과 함께, 오늘부터 업무를 시작합니다.
이곳의 모든 업무는 특허와 연관되어 있기에, 철저한 보안을 원칙으로 진행 됩니다. 분야별로 각자 맡은바 임무에만 집중해 주십시오.
연구와 실험에 관련된 어떤 자료도 외부로 노출되어서는 안 됩니다. 각자의 임무 외의 영역엔 관심을 가질 필요도 없습니다. 자료실과 메인 서버는 저와, 수석 연구자인 최지혜 박사 외엔 어느 누구도 접근을 불허합니다.
각자 근무시간에 근무 위치에서 맡은바 임무만 수행해 주십시오.
또 한 가지,
연구소 로비에 들어서는 순간 핸드폰 사용은 불허합니다.
긴급한 연락은 보안 행정실의 구내전화만을 통해서 가능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실내에서의 사진촬영 금지입니다.
······. “
‘대리모 없는 공여 체세포 증식 인큐베이터’
이 프로젝트는 이렇게 해서 다시 진행될 수 있었다.
조인성 박사는 이곳 용인에서 연구와 실험에 집중했다.
최지혜만이 연구의 내용을 알고 있었고,
그녀는 혼신의 노력으로 조인성의 연구를 도왔다.
연구와 실험이 거듭됐고, 그해 겨울이 지나면서 체세포 2차분열의 방사체 문제는 가닥을 잡아가고 있었다.
그 추웠던 겨울이 지나고, 연구소 뒤의 오봉산에는 연두색의 푸르름이 채색을 시작하고 있었다.
지난 4개월 동안 ‘용인 분자 생식학 연구소’의 건물엔 밤에도 불이 꺼지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조인성은 체세포 배양액의 PH농도를 달리한 14개의 시험체 중,
한 개에서 이상한 징후를 발견하게 되었다.
염색체의 유전자가 분화하는 것이다.
그리고 분화된 유전자는 각기 독립된 염색체로 분리 되었다.
‘이게 무슨 일이지? 어떻게 한 개의 체세포 안에 각기 다른 염색체가 만들어질 수 있는 것인가? “
“내가 뭘 잘못 본건 아닌가?”
그는 모든 관측기기들을 점검했다.
어떤 이상도 찾을 수 없었다.
‘이런 경우는 없었는데.’
그는 모니터를 주시했다.
감수분열을 마친 두 개의 서로 다른 염색체가 일차분열을 시작했고,
몇 분 후, 세포질은 각기 다른 염색체를 갖는 서로 다른 두개의
딸세포로 분리 되었다.
인성은 서둘러 배양액의 PH농도 변화를 관측하고 기록했다.
인성은 모니터에 눈을 고정 시킨 채 지혜를 불렀다.
“뭐, 문제가 있나요?”
“이걸 봐. 이상하지 않아?
일차 분열의 끝낸 두 개의 딸세포 염색체가 달라.
분명히 하나의 모세포에서 나온 딸세포인데......”
“말도 안 돼요! 이런 경우는 처음이에요.”
“속단하기는 일러.
일단, 이 두 개의 딸세포의 염색체를 비교해보자.
유전자를 확인하는 거야.
정말 다른 건지. 그리고 어떻게 다른 건지를.”
인성과 지혜는 서둘러 분리된 딸세포에서 핵을 채취하고.
곧바로 DNA 순차배열분석에 들어갔다.
곧 결과가 나왔다.
달랐다.
유전자가 다른 것이다.
하나는 남성이고 하나는 여성이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