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대 초반에만 해도 이력서에 본적지를 적는 란이 반드시 있었다. 나의 본적지가 강원도 영월군 중동면 직동리라는 것을 알게 된 건 20대 초반 이력서를 작성하면서부터였다. 하지만 이것도 세월과 함께 필요 없는 이력 중 하나가 되어 더이상 본적지는 삶에서 중요한 정보가 아닌 게 되었다.
내겐 이런 이력이 많다. 면접관들이 말하는 [쓸모없는 이력] 말이다.
이런 이력은 손목 수술을 하고 3년이 넘는 시간 동안 수술과 재활을 반복하며 더욱더 늘어나기 시작했다. 내 의사와는 상관없는 결정이었지만, 세상은 내게 받아들이라 했다.
“경력은 많은 데, 지원하신 일과 관련한 쓸모있는 이력 내용은 없네요.”
경력직을 지원한 것이 아니었다. 나이가 30대 중반이지만 나는 남들처럼 10년 20년 회사에서 근무한 근무자도 아니었고, 그나마 내놓을만한 사무직이나 현장경험은 청년인턴, 단기계약직, 연극 스텝으로 익힌 행정업무와 문화예술사업 기획업무가 다였다.
나에게 연극 말고는 거의 무(無)에 가까운 지식이나 경험치였기에 맡은 일을 잘하기 위해 고용노동부나, 문화재단과 같은 기관에서 진행하는 역량 강화 수업을 열심히 찾아 들으며 수료하기 위해 노력도 많이 했다.
이런 노력이 극단 내에서는 쓸모가 있었다. 유일하게 컴퓨터 활용능력이 있는 스텝이었고, 업무에 있어서 인정도 받으며 여러 일을 진행하는 나름 우수한 인재였다. 하지만 그 안에서의 우수함은 세상 밖까지 이어지지 않았다.
몰랐던 것은 아니었다. 알았기에 그래도 열심히 내 부족한 부분을 채워보려 애를 썼다. 하지만 나보다 더 열심히 자신의 능력을 채워 나간 이들이 수없이 많기에 난 세상에서 늘 빈 깡통 같은 사람이었다. 언젠가는 쓸모 있게 썼을지 모르지만, 지금은 쓸데가 없는 그런 빈 깡통 말이다.
이 사실을 나도 알고는 있었기에 늘 신입사원으로 지원을 했다. 30대 중반이 세상에선 신입이 아닌 나이일지 모르지만, 세상이 내 이력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신입이 맞을 테니 그렇게 지원했다. 하지만 10여년의 세월을 살아온 나의 이력을 버리고 싶지는 않았다. 지금은 텅텅 빈 깡통이라도 그래도 처음 용도가 무엇이었는지는 알리고 싶었다. 그리고 지금 그것을 담지 않아 비어 있으니 충분히 다양한 걸 채워 넣어도 된다고 말하고 싶었다. 빈 깡통이지만 예전처럼 다시 사용할 방법이 있다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몇 번 불리지 않는 면접자리에서 들려오는 말 한마디는 다시 내 이력서를 텅텅 비게 만들었다.
컴퓨터 앞에 앉아 텅 빈 이력서를 채울 경력을 찾지 못하고 멍하니 모니터만 바라보고 있는데, 퇴근하여 돌아오신 아버지가 나를 빤히 보며 물었다.
“뭐 재밌는 거 봐? 아빠가 왔는 데도 모르고?”
“이력서 쓰는 중이라 몰랐어요. 라면 괜찮지? 국 안 끓였어.”
“상관없어. 이력서를 쓰면 타자를 쳐야지 왜 모니터만 봐?”
“뭘 적어야 할지 몰라서”
“네 이력을 네가 모르면 누가 알아?”
“요즘 이력서 적는 게 쉽지 않아요.”
“그냥 본적지 적고, 아, 네가 본적지를 모르나 적어 강원도 영월군 직동리 화절치”
“본적이 거기인 건 알아. 근데 이젠 본적지 안 적어.”
“사람의 뿌리를 알아야지 왜 그걸 안 적어?”
아빠 말이 틀린 말은 아니지만 변해가는 세상 속에서 ‘굳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이제는 쓸데도 없는 주장을 펼칠 때가 많다.
“블라인드 채용이라고, 학연, 지연, 혈연, 요즘은 나이도 안 보고 오직 그 사람의 경력만 보고 뽑아.”
“아니 그러면 경력 없는 사람은 기회도 안 주나? 옛날에 그랬으면 아빠는 지금껏 일자리도 못 구했어. 아주 사람들이 말이야 자기들이 구원받은 거 생각도 안 하고, 젊은 애들 기회를 뺏고 있어.”
“구원? 적당한 단어가...”
“옛날에 말이야”
아빠는 더이상 나의 말은 듣지도 않고 자신의 옛날 옛적 이야기를 시작했다.
“왜 아빠 때는 본적을 봤냐? 바로 그 사람의 뿌리를 알아야 그 사람의 근본을 알 수 있기 때문이야. 아빠가 지게 지고 나무하러 다니면서 어떻게 공부를 할 수 있었겠어, 그 산골에서. 그러니 아빠 같은 사람에게도 기회를 주기 위해 본적을 적고 그 뿌리를 보고 사람의 근본을 파악하는 거지.”
“내가 화절치에서 산 것도 아니고 일 년에 한두 번 가던 거 이제는 아예 가지도 않는 데 내 본적지가 화절치인 걸 봐서 뭐해. 예전에는 본적지에서 살았다지만 지금은 아니잖아.”
“넌 내가 키웠잖아. 나는 내 아버지가 키웠고. 그러니까 그 뿌리가 중요한 거지.”
틀린 말도 아니었다. 하지만 내게 본적 따위보다 남들이 인정하는 이력서 한 칸을 채울 경력이 내게 더 필요했다. 없는 란을 일부러 만들어 밀어 넣는다고 뽑아 줄 곳도 없으니 말이다.
내 반응이 시큰둥하자 아빠는 말을 돌렸다.
“할아버지 이발하러 가자.”
“벌초 추석에 하지 않았어?”
“너 머리 깎았다고 머리 또 안 잘라? 가자, 내일.”
“싫어. 이력서 써야 해. 지금 한 창 모집 기간이라 바빠.”
“가락국수 사줄게. 이번에 작은 아빠가 바빠서 아빠 혼자라도 가서 해야 한단 말이야.”
어린시절 아빠를 따라 영월에 내려가면 항상 휴게소에 들려 가락국수를 사 먹었다. 내가 아빠를 따라 영월로 향하는 건 오직 휴게소 가락국수가 먹고 싶어서였다. 하지만 길이 좋아져서인지 화절치까지 가는 시간이 줄어들었고, 굳이 휴게소에서 밥을 먹고 가지 않아도 도착해서 산 초입에 있는 큰할머니네 집에서 받을 얻어먹고 가는 일이 많아져 가락국수는 내게 그냥 옛 추억의 음식에 불과했다.
라면을 끓이고 있어서 그런지 그 맛이 그립게 느껴졌다.
“가락국수 때문에 가는 거 아니야. 아빠 혼자 벌초한다니까 가는 거지.”
말은 그렇게 했지만, 솔직히 몇 시간째 정지된 화면처럼 한 화면만 보여주는 모니터 앞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이력서에 적지도 못할 머릿속에 가득한 여러 가지 생각과 감정을 그곳에 버리고 오고 싶었다.
“아니 왜 휴게소를 안 들리고 바로 와! 가락국수 먹고 싶었는데~”
“안 먹는다며~ 아빠 도와주러 온 거 아니야?”
괜히 자존심 때문에 뱉은 말이라는 걸 아빠도 잘 알면서 모르는 척 어벌쩡 넘어갔다.
“큰할머니가 맛난 거 해주실 거야.”
아빠는 나보다 더 신이나 목적지인 큰할머니댁으로 들어갔다. 좁은 앞마당에 여전히 자갈이 깔려있었지만, 그 위로 코코넛 매트가 깔려 사람이 오고 가는 길을 안내했다.
우리 차가 좁은 마당에 들어서 주차를 하자 문을 열고 등이 굽은 큰할머니가 나왔다. 할머니는 문 앞에 서서 아빠의 차가 주차가 될 때까지 기다리고 계셨다.
“왔나?”
우리가 차에서 내리자 할머니는 무뚝뚝한 말투로 인사를 건넸다.
어릴 적 만나고 처음 뵙는 데도 할머니의 목소리부터 말투, 작은 행동까지 모든 게 어제 본 것처럼 익숙했다.
“안녕하세요.”
“큰 안(딸인 나를 말한다) 가?”
“많이 컸죠, 큰엄마? 아빠가 혼자 벌초한다니까 따라왔어요. 기특하죠?”
집에서보다 더 강한 강원도 억양으로 인사도 없이 거짓말 섞인 딸 칭찬을 늘어놓았다. 정확히는 아빠가 아닌 내가 한 거짓말이지만 말이다.
“기특하네. 딸아가 아들 노릇하느라.”
“나한테는 아들보다 귀한 딸이지. 하하. 이거 매트 잘 깔았네. 큰엄마 다니기 편하겠어.”
“아들 새끼 필요 없어. 이것도 다 셋째가 해준 거야. 지금도 셋째가 와서 네들 밥하고 있어.”
“에이~ 그런 소리하지 말라니까. 오빠네가 돈 준 거로 내가 그냥 주문만 한 거야.”
밀가루가 묻은 앞치마를 두른 고모가 문을 열고 나와 할머니를 말렸다. 그 모습을 보고 아빠는 너털웃음을 내며 할머니를 부축해 집 안으로 들어갔다. 고모는 주방으로 들어서면서도 자기는 연차를 자유롭게 쓸 수 있는 일이니까 온 거라며, 오빠들은 멀리 살고 연차도 자주 못 쓰니 내가 움직이고 오빠들이 돈으로 내는 거라며 할머니에게 잔소리를 했다. 마치 집에서의 나와 엄마의 모습 같았다. 이런 경우 보통 엄마는,
“시끄럽다. 큰 아(아빠를 말한다) 배고프니 언능 밥 차려 온나.”
“알았어요. 오빠, 창고 방에 상 좀 꺼내줘요.”
고모의 말에 아빠가 익숙하게 창고 방이란 곳을 찾아 들어가 상을 가지고 나왔다. 그 모습이 어제도 이곳에서 머물던 사람 같이 편안하고 익숙해 보였다.
“행주가 어디 있죠?”
밥을 뜨기 위해 밥솥 앞에 서 있는 고모에게 물었다. 고모는 빙그레 웃으며 식탁 닦는 행주를 빨아 내게 주었다.
“어릴 적이랑 똑같네. 몇 살까지 보고 못 봤지?”
“할아버지 장례 치르러 장지에 여기 왔으니까 그때가 마지막 일 거예요. 20대 초반?”
“그때 왔었어? 난 어떻게 어릴 적 모습만 기억이 나냐. 이래서 나 늙는 건 알아도 애 크는 건 모른다는 소리를 하나 봐. 언니랑 많이 닮았네.”
“엄마랑요? 엄마보다는 아빠일 걸요? 동생이 엄마를 많이 닮았어요. 뒷모습은 완전 아빠지만.”
“뒷모습이 왜?”
“둘이 걸어가는 걸 뒤에서 보면 아주... 아빠 미니미에요. 키도 작아서 더 그래요.”
“둘째는 몇 살이지?”
“걔도 서른 초반이죠.”
“동생도 결혼할 때가 됐네.”
“상 닦고 올게요.”
결혼 이야기만 나오면 할 말이 없어서 난 어색하게 미소만 지으며 자리를 피했다.
아빠는 큰할머니 곁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이제 농사 그만 져요.”
“땅 굴려서 뭐해. 몸둥이 하나 놀고 있는 거 재미 삼아 일하는 거지.”
“점점 허리가 더 굽으시는 데.”
“그래서 씨만 뿌리고, 농약 하나 안 쳐서 옥수수가 멋대로 생겼잖아.”
“아니 수확은 사람이 하잖아요.”
“셋째가 와서 도와.”
“셋째는 일 안 하나? 일 다니는 녀석이 매번 와서 도우려면 힘들지.”
“그러고 싶어도 못해요 오빠. 농지 놀리면 세금이 폭탄이야.”
쟁반에 반찬을 챙겨 온 고모가 상에 올려놓으며 아빠와 할머니 대화에 끼어들었다.
“용도 변경도 쉽지 않고, 이 집이랑 땅을 팔지 않는 이상은 뭐든 지어야 해요.”
“그런 법이 다 있어.”
“쓸모없는 건 없다. 쓰면 된다. 쉽게 포기하고 변경하지 마라. 그런 거 아니겠어?”
“집이고 땅이고 사람이고 써야 쓸모가 있는 거지, 저절로 쓸모가 생기는 거 아니여.”
할머니의 말에 갑자기 눈물이 왈칵 올라왔다. 요새 쓸모없다는 말을 자주 되뇌어서 그런지 쓸모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 뭔가 왈칵 눈물이 올라왔다. 아니 정확히는 용도 변경이라는 말에서부터 내 마음이 이상해졌다.
땅 하나도 “이제 농사를 지을 수 없다”며 용도를 변경하려 하면 정말 그 방법이 최후의 최선의 최고의 선택인지 스스로 묻고 또 묻게 만드는 절차를 만들었을 텐데, 사람인 내가 기존에 사용하던 방식이 아닌 다른 용도로 사용해 보라고 가리지 않고 여기저기 두드리니 그들 딴에는 내게 물었던 것은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정말 최후의 최선의 최고의 선택입니까?”
나는 애써 눈물을 삼키며 주방에 행주를 가져다 놓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 뒤를 고모가 따르며 국 옮기는 걸 도와달라고 했다.
“꿩고기 좋아하니?”
고모가 6인용처럼 보이면 냄비의 뚜껌을 열자 아까부터 방안을 가득 채운 맛있는 냄새가 더 깊게 찐하게 내 코와 배를 자극했다.
“꿩만두국이에요?”
“어릴 적에 여기 와서 내가 해줬던 거 같은 데 기억 나니?”
“꿩만두를 먹은 건 기억 나요. 그래서 가끔 꿩만두 파는 데 있으면 시켜 먹어요. 비싸지만.”
“예전에는 강원도에나 와야 꿩고기를 먹을 수 있었는데 지금은 인천에도 많지?”
“근데 어릴 적 먹었던 게 너무 맛있어서 그만큼 맛있는 거 못 먹어 봤어요.”
고모는 깔깔 웃으며 오늘도 맛있게 먹으라며 쟁반에 4개의 국을 떠 주었다.
손목을 수술한 후로 쟁반에 여러 음식을 담아 옮긴 적이 없어 오랜만에 4인 국을 옮기려니 손목에 통증이 살짝 느껴졌다. 최대한 잰걸음으로 상 앞에 가져가자 아빠가 자리에서 일어나 쟁반을 받아들었다.
“이 녀석이 손목을 다쳐서 무거운 걸 못 들어요.”
“아니, 아직 젊은 처자가 뭐 땜에?”
“나 닮아서 일 시키면 몸을 안 사리고 해. 그래서 그렇지 뭐. 그러니까 아픈데도 아빠 돕겠다고 여기까지 온 거지. 딸 잘 키웠죠?”
아빠의 말에 할머니가 내게 칭찬을 하는 동안, 고모가 밥을 가지고 나오며 괜히 시켰다며 미안하다고 내게 사과했다. 내가 괜찮다 말하는 데도 고모는 반찬을 내 앞에 밀어주며 많이 먹으라고 계속 권했다.
“벌초는 내일 하러 가는 거지?”
“네. 오랜만에 작은아버지랑 고모님도 뵈려고요. 밥 먹고 바로 올라가야죠.”
“여기서 자고 가면 좋은데~”
“이 녀석 오랜만에 내려왔으니 인사시켜야죠. 어지간히 안 따라 다녀요, 이제는.”
“다 컸는데 따라다니는 애가 어디 있어. 내 새끼들도 안 따라오는 데. 끼고 다니는 건 중학교 졸업하면 끝이야.”
아빠와 고모의 대화를 들으며, 생각해보니 정말 중학교 졸업과 함께 아빠를 따라다니지 않았던 기억이 떠올랐다. 정확히 중학교 졸업과 동시에 벌어진 일은 아니었으나, 고등학교를 올라가고 야자-우리 학교는 정규수업 끝남과 동시에 야간 자율학습이 매일 9시까지 진행됐다-에 학원 수업에 집에 돌아와서는 다음날 0교시에 진행되는 매일 아침 쪽지 시험에 치여 어디를 여행 간다는 건 사치에 불과했다. 그런 삶을 남들도 같이 보내왔는데 나는 그들과 다른 선택 영역 안에 들어 있다는 게 힘들었다. 내가 결정한 선택이지만 이런 결과가 초래할지 그땐 알지 못했다.
“뭐한다고?”
아버지와 이야기를 나누던 큰할머니가 내 안부를 물었다. 뭐하냐는 질문에 난 늘 무슨 말로 답해야 할지 몰랐다. 이럴 때 답은 직장의 이름이나, 업무일 텐데 나는 시간제 아르바이트 조차 하고 있지 않으니 문제에 대한 정답은 내게 있지 않았다.
“엄마, 요즘은 그런 거 물어보면 실례예요.”
내가 아까 결혼 얘기 때 자리를 피한 것 때문인지 고모가 오히려 내 눈치를 보며 할머니를 만류했다. 할머니는 이에 그러냐며 말을 집어넣었다. 아빠는 그런 할머니에게 미안한지 말도 안 되는 말로 나를 추켜세웠다.
“작가에요, 작가.”
“어머! 책 낸 거야?”
매년 고모가 옥수수를 보내줘 고모는 매년 아빠나 엄마랑 통화를 하며 안부를 주고 받았다. 그때마다 아빠든 엄마든 나에 대해 [글 쓴다]는 말로 내 소식을 전했다. 문제는 내가 연극하며 돌아다닐 때도 전공이 문창과라고 [글 쓴다]고 표현했다. 난 졸업과제로 전공 수업에 제출한 중편소설 말고는 제대로 된 글을 쓴 적이 없다. 공모전에 여러 번 도전은 했지만 공개된 선정 작들을 읽으며 내가 선정되지 않은 이유를 쉽게 납득하는 글 쓰는 사람 정도였다. 글쓰기는 내가 연극을 사랑하는 것과 같이 나의 빈 곳을 메워 위로하는 그런 일이었다. 그래서 손목 수술 후 일을 할 수 없을 때에 한 손으로 타자를 톡톡 두드리며 여러 공모전을 다시 두드린 것도 어떠한 목표가 있어서라기보다 그 자체가 나의 즐거움이 돼서였다. 그러니 내 직군을 작가로 표현할 거는 더욱 아니었다.
오해가 더 커지기 전에 바로 잡을 필요가 있었다.
“아빠가 그냥 하는 소리예요. 아직 취준생이에요.”
“책을 내야 작가인가? 집에서 글 쓰면 다 작가지.”
“자소서 쓰는 거야.”
“요즘 자소서 쓰는 게 어렵다더라. 우리는 그런 게 없었잖아요. 근데 요즘은 자소서에 업무계획서에, 경력기술서까지 엄청 적더라고요.”
내가 툴툴거리며 아빠 말에 대꾸하자 고모가 나를 도닥이며 할머니께 요즘 취업이 왜 힘든지, 그래서 결혼이 줄고, 출산이 준다며 우리 애들이 대학 졸업하고 취업전선에 오를 때는 더 심각해질 거라며 위로 섞인 걱정을 늘어놓았다.
하지만 나를 심란하게 하는 것은 취업이 어려운 것만 있는 건 아니었다.
취업을 하기 위해 이력서를 적고 자소서를 적는 과정에서 회사마다 수십번 썼다 지웠다 하는 이력과 자기소개서 내용이 조금씩 변해야 할 때마다 과연 이렇게 매번 쓸 때마다 변하는 나의 소개가 [내가 맞는지] 의문이 들었다. 이런 의문이 들 때면, 그렇게 긴 시간 작성한 자소서를 단 몇 초만에 삭제해버렸다. 채우는 것은 힘들지만 비우는 건 하나의 의문이면 그만이었다.
“다 먹었으니 올라가자.”
“바로 먹고 가면 멀미 나~”
“아직도 돌길이에요?”
“잘 닦였어. 그리고 돌길이면 어때. 아빠랑 맨발로 오르면 되지. 아빠 어릴 적엔 맨발로 이 산을 넘어 정선까지 날아갔어.”
아빠의 어린 시절을 그대로 글로 적으면 마블 영화에 나올 법한 영웅담이었다.
반나절이면 영월에서 정선을 오고 갔다느니, 화절치 전역을 아빠가 지배해 나무를 따왔다느니 하는 이야기들은 매번 들어도 믿어지지 않았다. 반복적인 진술은 사실이라는 데도 아빠의 허풍이 가미된 이야기는 늘 믿어지지 않았다. 화절치가 영월과 정선을 잇는 산길이고, 그 지역 청년들이 꽃을 꺾어 나무 뺏기 내기를 했다는 걸 알게 된 건, [화절치]가 진짜 지역명이 맞는지 검색창에 검색하고 나서다.
생각해보면 아빠는 생긴 외모나 풍기는 분위기에서 꽃이나 나무를 전혀 좋아할 것 같지 않은 데 젊은 시절부터 아빠는 꽃과 나무를 참 좋아했고, 지금도 핸드폰 가득 꽃 사진으로 넘친다. 아빠의 꽃에 대한 사랑은 화절치에서부터 시작된 거였다.
그런 화절치로 차는 다시 달렸다. 예전엔 산이 시작됨을 알리는 것처럼 차 아래 수 많은 돌들이 차를 좌우로 흔들어 꼬리뼈의 충격과 멀미를 함께 안고 산 위로 올랐다. 하지만 정비된 도로는 산에 들어선 것조차 알 수 없을 정도로 편안하게 길을 안내했다.
갑자기 아빠가 차를 한 건물 앞에 세웠다. 힐링센터라고 적힌 공간이었지만, 그곳이 어디인지 알 수 있었다.
“아빠 학교지?”
“오~ 기억력 좋은데?”
아빠는 잠시 둘러보고 가자며, 차에서 내렸다.
어린 시절 아빠가 폐교가 된 학교에 데려온 적이 있었는데, 사람의 발길이 끊겨 으스스했던 풍경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주변의 산과 계곡을 품은 편한 안식처로 변해있었다.
“공공기관인가?”
“몰라.”
“이렇게 막 들어와도 돼?”
“안 되면 막지 않았을까?”
“그런가?”
“나가라면 미안하다 하고 나가면 되지 뭐. 하하하”
아빠는 다시 너털웃음을 내며 예전에는 운동장이었던 공간을 돌아보았다. 아빠의 뒤를 따르며 내 기억 속에 아직 남아 있는 폐교를 떠올리며 주변 경관을 살폈다. 쓸모를 잃어 버려진 텅 빈 학교가 이젠 마을 주민을, 안식이 필요한 사람을 품는 공간으로 변모해 차가웠던 주변 공기를 따뜻함으로 채우고 있었다.
다시 차에 올라 할머니 집으로 향하는 길은 계속 평탄했다. 내가 산을 오르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 건 다 뽑은 배추밭 위로 다시 솟아오르는 봄동 배추들 때문이었다.
“배추가 새로 나는 건가?”
“김장배추 수확하고 퍼져서 자라는 애들은 남겨 놓았다 봄동으로 수확하는 거지. 사람이든 채소든 남들과 다르다고 버릴 게 있는 게 아니야. 다 쓸 곳은 있어.”
아빠가 날 왜 이곳에 데려왔는지 알 것 같아 왈칵 눈물이 다시 올라와 눈물을 삼키려 창문을 내렸다. 그러자 아빠가 춥다며 창문을 다시 올렸다. 나는 괜히 멀미 난다며 점점 서늘해지는 찬 바람을 맞으며 산 위로 향했다. 그렇게 한참을 배추밭, 무밭을 구경하며 달리던 차는 배추 밭 앞 공터 앞에 차를 세웠다. 작은 할머니네 집으로 올라가기 전 늘 차를 정차했던 곳이었다.
차에서 내리자 배추밭 끝에 서서 손을 흔들어 보이는 사람이 보였다. 작은 할머니였다. 난 허리 숙여 인사하고는 아빠가 인도하는 배추밭 옆에 난 길을 따라 할머니 댁으로 올라갔다.
“어서 와. 먼 길 오느라 고생 많았지?”
“작은어머니 오랜만입니다. 아버지 벌초 오면서도 인사 한 번 못 드렸네.”
“힘든 데 뭘 여기까지 올라와. 그냥 볼일 보고 가면 되지.”
“마음이 그게 아니죠. 작은아버지는요?”
“위에 고모님 댁에 올라가셨어. 고모가 오랜만에 조카 온다고 고기 굽고 있어.”
“아이고, 귀찮게. 큰어머니 집에서도 꿩고기 배 터지게 먹고 왔어요.”
“돼지랑 꿩이랑 같나. 얼른 올라가.”
“할머니는요?”
“난 고기는 소화 못 시켜. 너희들 먹고 내려와. 잠은 여기서 자고, 고모네는 방이 없어.”
작은할머니네랑 고모할머니네는 작은 텃밭을 사이에 두고 위아래 위치하고 있다. 텃밭 끝으로 좁은 샛길이 나 있는 데 고모할머니네랑 작은할머니 집을 오가는 가장 빠른 지름길이었다. 할아버지들이 다니기 편하게 밭의 흙으로 다진 길이다 보니 비가 오거나 밭으로 물을 주고 난 후에는 길이 꽤 질퍽거렸다.
차로 달린 길은 많은 변화를 겪었지만 이 길만큼은 예전과 다르지 않았다.
날이 조금 더 어두워지자 샛길을 비추는 조명이 켜졌다. 예전에는 불이 없어서 밤이 되면 도저히 오르내릴 수 없는 쓸모없는 길이 되어 버렸다. 이런 작은 길 위로 한 줄기 빛이 비출 뿐인데 그 쓸모가 다시 살아나 생명을 얻은 것 같았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아멘”
“성경 구절이야?”
“그것도 모르냐~ 샘장이라면서~ 목사님한테 일러야겠네~”
아빠는 화절치만 오면 신이 나는 지 장난꾸러기 어린이로 변했다. 평소에도 장난꾸러기 모습이 조금씩 보이긴 했지만 인천에서는 절대 그런 모습을 거의 꺼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이곳에 오면 아빠는 마치 무거운 짐을 다 내려놓은 것처럼 자신의 본 모습으로 돌아갔다. 아빠에게 화절치는 그런 공간이었다. 내가 진짜 나를 마주할 수 있는 공간.
이력서를 쓰며 내가 나를 잃어가는 모습을 보고 아빠는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내가 나를 이곳에서 마주하길 바랐던 것 같다. 아빠에게 본적지는 본래의 내가 있는 곳이었다.
“신발 저기 수돗가에서 닦으면 된다.”
샛길 끝에 있는 외양간 앞으로 들어서는 우리에게 소여물을 가지고 나오시던 고모할머니가 흙이 묻은 신발을 보고 집 앞 작은 수돗가를 가리켰다. 아빠는 이 정도는 괜찮다며 발을 땅에 퉁퉁 구르며 고기를 굽고 있는 고모할아버지와 인사를 먼저 나누었다.
나는 소여물을 주는 할머니 곁에 서 그 모습을 지켜 봤다. 여전히 김이 모락모락 나는 여물을 구유에 부어주자 냄새를 맡는 것처럼 구유 가까이 코를 데었다.
“아직 뜨거운데 먹어요?”
“똑똑해서 지가 알아서 식으면 먹어”
할머니는 다시 부엌으로 들어가 옥수수대와 마른 옥수수가 담긴 파란 바가지를 들고나와 아직 뜨거운 여물 안으로 집어넣었다.
“인천에서는 이런 거 다 버리지?”
“일반 쓰레기죠.”
“이 강냉이대가 잇몸에 좋아. 어미보고 이거 끓인 물로 가글하라 해. 고모부도 이거로 가글해서 잇몸 아픈 거 싹 나았다.”
“그래도 치아나 잇몸은 병원 꼭 가셔야 해요.”
“이런 시골에서 가기 쉽지 않아. 옥수수가 버릴 게 없어.”
“감자랑은 다르네요. 감자는 싹만 나도 버리잖아요.”
“싹 난 감자도 이제 사료로 나온다던데? 소들이 먹으면 튼튼해진다더만.”
“싹 난 거 그냥 주면 되는 거예요?”
“생 거는 배탈 나~ 사료로 나온다는 거 보면 뭔 처리를 했겠지~ 사람도 일터 가면 가르치고 다듬어서 쓰는 거랑 똑같어. 밭도 그대로 못 써. 양분 주고 갈아엎고 해서 다듬어 줘야 다음 해 농사에 풍년이 드는 거야. 버려진 빈 땅도, 한 해 열심히 일한 땅도 여러 사람의 손길과 발길이 쌓여야지만 양분이 가득 찬 좋은 토양으로 성장하는 거야. 땅이 그런데 흙으로 돌아가는 사람도 마찬가지겠지. 땅을 쓸모 있게 만드는 건 함께 하는 사람들이야.”
내게 한 말은 아니었지만, 마치 내게 “너의 쓸모없음이 왜 너의 탓이겠니? 그걸 사용하려 하지 않는 사람이 문제지.”라고 얘기해 주는 거 같아 눈물이 났다. 이전처럼 눈물을 애써 참으려 했지만 잘 참아지지 않았다.
마당에서 고모할아버지가 밥 먹자는 부름에 할머니가 주방으로 다시 들어가고 나는 아까보다 어둑해진 어둠 속에서 눈물을 닦아내고 꾸역꾸역 눈물을 삼키며 고기가 구워지는 연기 속으로 향했다.
화로라고 하지만 과거 기름통으로 쓰였을 거 같은 이미 낡고 녹슨 깡통 위에 뒤집힌 가마솥뚜껑이 돼지고기와 묵은지를 지글지글 굽고 있었다. 보기만 해도 꼬르륵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자, 따뜻할 때 먹어.”
할아버지가 주신 나무젓가락은 내가 알던 나무젓가락이 아니었다.
“좀 그러나?”
“에이~ 깨끗이 닦았어. 봐봐 아빠도 먹잖아.”
아빠는 나무껍질이 반만 벗겨진 진짜 나뭇가지로 만든 나무젓가락이었다. 그러고 보니 할아버지 손에 있는 젓가락은 나무껍질도 벗기지 않은 나뭇가지였다.
“우리야 늘 먹었으니 괜찮지.”
“추억이야 추억”
“막내야 아가 젓가락 챙겨와라.”
툇마루에 앉아서 우리 모습을 지켜보던 작은할아버지가 주방에 있는 할머니에게 젓가락을 가져오라 소리치고는 툇마루에서 내려와 마당 위 평상으로 자리를 옮기셨다. 할머니가 은쟁반에 다리가 달린 밥상을 들고 마당으로 내려왔다.
아빠는 기다렸다는 듯이 할머니에게 달려가 밥상을 받아 평상 위에 올려놓았다. 쟁반 위에는 온 가족 밥숟가락과 젓가락이 나온 것처럼 대중없이 놓여 있었고, 밥은 모두 고봉밥이었다.
“밥 먹고 와서 이 정도는 못 먹을 거 같아요.”
“빈 속을 채우나? 사랑을 채우지.”
아빠가 한 숟가락 크게 밥을 떠서 고기와 함께 입안을 채웠다. 아빠의 입이 밥으로 가득 찬 건지 행복이 가득 찬 건지 알 수 없었지만, 아빠의 몸을 채우는 건 쌀이 아닌 사랑인 건 분명해 보였다.
나도 아빠처럼 밥 한 숟가락 크게 떠서 입안 가득 채워 넣었다. 작은할아버지는 아빠와 나의 모습을 보며 부녀가 똑 닮았다고 껄껄 웃으며 우리와 같이 큰 밥 한술을 뜨셨다.
내게 필요했던 건 어쩌면 텅텅 빈 이력서 한 칸을 채워 줄 이력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에서 털려 텅 빈 내 속을 함께 바라보고 함께 채워 줄 누군가의 위로와 사랑이 내게 필요했을지 모른다.
아빠가 그 텅 빈 속을 함께 보고 함께 채워주려 이곳 본래의 땅으로 나를 이끌어 온 것이다.
화절치까지 오르는 모든 길이 내게 위로였다.
이 꽃이 이뻐 이 꽃 한 단, 저 꽃도 이뻐 저 꽃 한 단
한 단 두 단 모으니 오합지졸의 예쁘지도 않은 한 아름의 꽃다발이 됐다.
그것이 내 손 가득 채운다.
예쁘지도 않고 땔감에 쓸모도 없다며 손가락질하는 사람들
내가 힘들게 모은 여러 단의 꽃들을 그들의 말 한 마디에 한 단, 두 마디에 두 단 버리면
내 손은 다시 텅 빈 상태가 된다.
무서워 손 안 가득 찬 오합지졸 꽃들을 있는 힘껏 부여잡는다.
하지만 화절치는
여러 종류의 꽃을 먼저 꺾은 사람이 우승한다.
오합지졸의 꽃은 선물처럼
여러 단의 땔감을 내 지게 가득 채운다.
내 삶도 화절치의 오합지졸 꽃과 같다.
아빠 살던 고향은
꽃 피는 내 고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