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신대첩>
홀로 외로이 긴 밤을 지내는 님이여.
정인(情人)을 만나도록 도와드립니다.
참가자격 : 양인 중 독신남녀라면 누구나
참가일시 : 모월 모일
장 소 : 관아 마당
“단아. 우리가 그렇게 찾아 헤매던 무릉도원을 드디어 찾았다!”
희원이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두 눈을 반짝였다.
“설마 저 독신대첩에 간다는 건 아니시죠?”
단이가 걱정스런 눈빛으로 바라보며 물었다.
“당연히 가야지 나 같은 사람을 위해 관아에서 자리를 마련해 준다는데.”
“아씨!!”
단이는 희원을 나무라며 정신을 차리라고 했지만 희원의 귀에는 그 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았다.
그저 무릉도원에 갈 설레임만이 그의 온 몸을 감쌀 뿐이었다.
*
우진은 쓰개치마를 쥐며 걷고 있었다.
화가 난 듯 보이다가도 곧이어 헛웃음을 지어보였다.
우진의 그런 행동에 동복은 확신을 했다.
“그리 좋으십니까?”
동복이 히죽거리며 물었다.
“뭐가 말이냐?”
우진은 동복의 히죽거림이 마음에 들지 않은 듯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 여인 말입니다. 평소엔 남의 일에 관심도 없으신 분이 도포를 내어주질 않나, 별 일 아닌 것에도 일일이 대꾸해 주질 않나. 형님 같지 않으십니다.”
“그게 아니라 신기해서 그런다. 신기해서. 그러니 신경이 쓰이지 않겠느냐?
“아-. 신경이 쓰이세요?”
“그만 두어라. 그나저나 넌 왜 오늘따라 말이 많으냐?”
“전 신경은 안 쓰입니다. 웃으니까 다가간 것 뿐이지. 그리고 전 원래 말이 많습니다. 오늘따라 말이 많은 건 형님이십니다. 그러게 오늘따라 왜 이리 말이 많으십니까?”
“어허. 그만두래두.”
우진은 끊임없이 말을 하는 동복이 귀찮았다. 더 이상 쓸데없는 것을 묻지 않도록 짐짓 엄한 표정을 지으며 그만두게 했다.
“헌데요. 그 아씨가 진짜 도포를 돌려주려고 올까요? 양반댁 여인이면 이런 쓰개치마 한 벌 정도는 버리고도 남지 않겠습니까? 형님한테는 귀중한 옷인데...”
“...”
우진은 동복의 물음에 이젠 지치기라도 한 듯 대답은 하지 않고 쓰개치마만 더욱 꽉 쥐었다.
*
독신대첩이 열렸다.
당일 관아 앞에는 짝을 찾기 위해 모인 독신남녀들이 장사진을 이루었다.
둥둥둥!
북소리가 세차게 울리더니 관아의 문이 열렸다.
독신대첩이라고 방으로 사람들에게 알리긴 했지만 관아는 전혀 꾸미지 않았다.
그저 진짜 사람들 뿐 이었다. 그것도 사내들 천지였다.
둥둥둥!
또 한 번의 북소리가 나자 현감이 관아 앞쪽에서 사람들을 보며 말하기 시작했다.
“지난 몇 주 동안 신문고의 두드림이 끊이지 않았다. 대부분의 청원이 혼인에 관한 것이며, 특히 정인(情人)을 구해달라고 하였다. 하여 오늘 이 특별한 자리를 마련했으니 이 자리를 통하여 좋은 인연을 맺길 바란다.”
현감의 말이 끝나자 사람들은 서로를 둘러보며 탐색을 하기 시작했다.
여인들이 부족한 탓에 사내들은 자신이 먼저 여인에게 말이라도 걸어보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그러나 그 중 숫기 없는 몇몇 사내들은 그저 눈치만 볼 뿐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쩔쩔매고 있었다.
이방과 현감, 그리고 우진은 관아 건물 앞에서 마당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여인들에 비해 사내의 수가 너무 많아서 이거, 이거 성공이 되겠습니까?”
“...”
이방이 부정적으로 말했다. 현감도 이에 부정할 수 없어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러게 한낱 장사치의 말만 듣고 섣불리 일을 하시는 게 아니었는데...”
이방은 우진을 겨냥하며 못 마땅하다는 듯이 말했다.
“좀 지켜보지. 이제 시작인데 어찌 장담할 수 있겠는가.”
현감도 초조한 마음이 가득했지만 차분함을 유지하려 애쓰며 말했다.
이방은 그런 현감을 바라보다 한 사내에게 고갯짓을 했다.
그러자 사내는 마당의 군중 속으로 들어갔다.
단이의 옷을 입고 나온 희원은 한 쪽에서 사내들에게 둘러 싸여 있었다.
‘이게 무릉도원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런 행복이 내 생애 찾아오다니. 오길 잘했다. 단아. 좀만 더 집에서 버텨주라. 내가 오늘 정인(情人) 하나 물고 가겠다. 흐흐흐’
희원이 속으로 행복을 외치는 사이 사내들은 이것저것 희원에게 묻기 시작했다.
어디 사는지부터 시작해서 미소가 왜 이리 아름답냐는 등 정말 가지각색의 질문이 쏟아졌다.
희원은 참한 미소를 날리면서 조급해하지도 않고 온전히 이 상황을 즐겼다.
그렇게 차분히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대답을 해주고 있었다.
“저기, 저 여인은 인기가 많은가 보오. 사내들이 온통 저기에만 몰려 있구려. 향리. 보시오. 이 많은 사람들 중에 한 쌍은 나오지 않겠소? 아니 그렇소, 김서기?”
희원을 둘러싼 무리를 보고 현감을 흡족한 목소리로 이방과 우진에게 말했다.
우진은 현감이 말하는 무리를 보고 갸우뚱 했다.
‘저 여인은?’
우진이 희원을 알아보는 순간 희원을 향한 한 사내의 낯선 움직임이 보였다.
우진은 그를 수상히 여겨 희원의 무리로 다가갔다.
“꺄아아아악”
희원이 낯선 느낌에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는 자신의 엉덩이를 매만진 자를 떨쳐 내기 위해 뒤를 돌아봤다.
“더 이상 손대면 당신도 큰 코 다칠거요.”
어느새 은장도를 꺼낸 희원이 뒤를 돌아봤다. 그런데 순간 희원은 낯익은 얼굴을 마주했다.
“헉. 당신은?”
우진은 억울했다. 희원에게 낯선 자가 이상한 짓을 하려 하길래 도와주러 온 것 뿐이었다.
그 사내가 이미 도망을 간 후라서 우진이 희원의 뒤에 서 있게 되었다. 영락없이 우진이 범인으로 몰리는 꼴이 되어 있었다.
“아니오. 난 아니오. 그저 당신을 도와주러 온 것 뿐이오.”
우진이 손사래를 치며 결백을 주장했지만 이미 희원 주위에 있던 사내들에게 포박당하고 있었다.
“뭐라고요? 이 사람이 지난번부터 칠칠, 정숙, 어쩌고, 저쩌고 하며 자신은 고귀한 척, 품위 있는 척 다 하더니 지금 이게 무슨 짓입니까?”
“나를 모르오? 난 진짜 아니오.”
“지금 현장에서 딱 걸렸는데도 발뺌 하시는 겁니까?”
“글쎄. 난 아니오. 내 말을 들어보시오. 그게 어떻게 된 것이냐면... 아아악.”
사내들은 자신들이 공을 들이고 있던 여인에게 수작을 부린 우진을 용서 할 수 없었다.
하여 포박하며 뒤로 돌린 우진의 팔을 더욱 꽉 조였다.
우진은 갑자기 조여드는 힘을 참아내지 못하고 소리를 질렀다.
“이게 무슨 짓이오?”
이방은 소란이 일어나자 단숨에 내려와 소리쳤다.
“김서기. 이 무슨 일이오?”
이방과 함께 내려온 현감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우진을 바라보며 물었다.
“사또. 그것이 아니오라 이 여인에게 낯선 자가 다가가는 것을 보고 그저 도와주려 한 것 뿐입니다.”
우진이 현감에게 억울함을 호소했다.
“어허. 어디서 변명 따위를 하는겐가? 장사치의 말을 듣고 이런 큰일을 벌인 게 아니었는데. 자네, 여인이나 탐하려고 이런 일을 계획한 것 인가?”
이방은 우진에게 쏘아 붓고는 희원을 바라보았다.
“괜찮느냐? 어디 다치신 곳은 없느냐?”
“...”
현감이 희원에게 물었다. 희원은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에 몹시도 당황하여 대답도 못하고 그 자리에 얼어버렸다.
뭔가 자신이 당한 것은 맞는데 희원도 우진이 그랬을 것이라고 생각지는 않았다.
순라꾼들을 피해 자신을 구해준 사람이 아니던가. 그런데 우진의 얼굴을 본 순간 왜 그랬는지 화가 나버려서 소리를 질러버린 것인데.
일이 커지고 있었다.
“여봐라. 당장 이 자를 끌고 가라.”
이방은 포졸들을 향해 명령했다.
“사또. 제가 그런 것이 아니옵고 저는 그저 도움을 주려고 했을 뿐입니다.”
“김서기. 일단 안으로 들어가서 자초지종을 들어보세. 지금 모든 정황이 자네를 지목하고 있네. 나도 어쩔 수 없네”
현감은 우진이 그럴 사람이 아니라고 믿었지만 정황은 그렇지 않았다.
한양을 가고자 실적을 내려고 기획했던 행사이다.
그러니 인연이 있다 하여 그냥 묻을 수만은 없었다.
더욱이 많은 사람들이 이 일을 보았으니 제대로 취조해야만 했다.
포졸들이 우진을 끌고 안으로 갔다.
“사또. 일단 오늘은 사람들을 돌려보내시지요.”
“오늘은 예기치 못한 상황이 벌어지게 되어 행사를 이만 끝내야겠다. 허니 일단 오늘은 집으로 돌아가라. 조만간 다시 방을 붙여 공고를 하겠다.”
여인들과 사내들이 이야기를 꽃 피우던 무리는 야유의 소리를 냈고, 말 한마디 못 붙여 보고 저들끼리 모여 있던 사내들은 한숨을 푹 쉬며 터벅터벅 관아를 나갔다.
웅성웅성 거리며 자리를 못 떠나고 있는 사람들을 이방의 지시에 따라 포졸들이 내쫓았다.
“자네는 피해자이니 이리 오시게.”
또 다른 포졸은 돌아가려는 희원을 불러 세웠다.
“왜요?”
놀란 희원이 물었다.
“가서 어찌 된 것인지 차근차근 이야기를 해줘야 될 것 아닌가.”
“아까 다 보셨지 않습니까? 저는 이만 집에 돌아가야 될 시각인데요.”
“원래도 한 식경만 있다가 갈 참이었나?”
“아... 그게... 저... 저는 꼭 지금 가봐야 되는데...”
희원은 발만 동동 굴렀다. 이러려고 여기에 온 것이 아니다.
물론 독신대첩 행사 내내 머무를 생각이었다.
연애 지침서 대로 한번 쫘악 해보고 맘에 드는 사내와 오랜 시간 이야기도 해보고 싶었다.
그러나 이건 말이 다르다.
이런 일을 당했다는 걸 부모님이 알게 되면 이제 두 번 다시는 외출은 금물이며, 이것저것 따지지도 묻지도 않으시고 얼굴도 모르고, 말도 한마디 안 나눠본 사내와 혼인을 하게 될 것이다.
더군다나 이 일이 소문에 퍼지기라도 하면 자신은 나이 먹은 늙은 홀아비 영감에게 후처로 팔려갈지도 모를 일이다.
“어서. 어서 가시게.”
희원이 생각에 잠겨 우물쭈물 하고 있는데 포졸이 재촉했다. 희원은 울며 겨자먹기로 포졸을 따라 나섰다.
한편, 도영은 관아 뒤쪽 일각에서 이 모든 일을 지켜보고 있었다.
“흥미로운데.”
도영은 이 일이 마냥 재밌었다.
전국을 그렇게 돌아다녀도 이만큼 재미난 일은 보지 못했다.
오랜만에 돌아온 고향이었다. 집으로 가던 길에 관아가 유독 시끄러워 한번 들러본 것이었다.
독신대첩이라고 양인 남녀를 한자리에 몰아넣더니 결국 이런 일이 벌어지기까지 한 것이다.
‘한양 같은 큰 고을에서도 하지 않는 일을 이런 촌구석에서 하고 있다니.’
그렇게 도영은 자신이 없는 사이 변해버린 고향에 흥미를 느끼고 있었다.
*
사람들이 사라진 관아 마당에 우진은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앞쪽 마루 정중앙에는 현감이 자리에 앉아 있었고, 그의 왼쪽 계단 아래엔 이방이 우진을 보며 비웃고 있었다.
현감의 오른쪽 계단 아래엔 희원이 포졸들의 호위를 받으며 서 있었다.
“어찌 된 것인지 천천히 말해보시오.”
현감이 차분한 목소리로 우진에게 물었다.
“그것이... 한 사내가 이 여인에게 다가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자의 움직임이 수상하기에 따라가 보았습니다. 허나 사내는 이미 도망을 가버렸고, 제가 그 뒤에 서 있게 된 것입니다. 이를 본 여인이 저를 오해한 것입니다. 소인은 결백하옵니다.”
“그대는 어찌 생각하는가?”
현감이 희원을 보며 물었다.
“저... 그러니까...”
“사또. 변고를 당한 여인이 당사자인 사내를 앞에 두고 사실대로 고할 수 있겠습니까?”
희원이 상황을 설명하기도 전에 이방이 먼저 현감에게 아뢰었다.
“저도 사실은 이 분이 그런 일을...”
“사또. 여인이 갑작스런 일에 많이 놀라고, 또한 사내가 바로 앞에 있으니 많이 두려워 하는 듯 보입니다. 일단 오늘은 날이 저물어 가니 여인을 집에 돌려 보내고 다시 저자를 취조 하시는게 어떠실런지요?”
이방은 이번에도 희원을 말을 가로막으며 제 말을 했다.
“그러시오.”
현감도 우진이 안타깝고 자초지종을 제대로 듣고 싶었지만 현재 상황으로서는 이방의 말을 들을 수 밖에 없었다.
“여봐라. 죄인 김우진을 당장 하옥하라.”
현감은 포졸들에게 하명하였다. 우진과 희원은 놀란 눈으로 현감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현감은 이미 자리를 뜨고 뒤돌아 간 후였다.
“하옥하랍신다.”
이방은 입꼬리를 올리며 현감의 말을 포졸들에게 다시 한 번 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