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는 당신은 뭔데?”
도영의 비꼬는 듯한 물음에 우진과 준성이 열을 내며 동시에 말했다.
“나 참. 말 안하려 했는데... 큰소리로 떠벌릴 수도 없고...”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능글맞은 표정을 지은 도영이 난처한 듯 말을 흐렸다.
그러자 희원이 절대 말하지 말라는 표정을 지으며 도영에게 눈빛으로 애원했다.
그러나 도영은 또 싱긋 웃어 보이며 양 옆으로 퍼진 우진과 준성의 어깨를 둘러 모으며 말했
다.
“나? 최희원 정혼자.”
단 세 명만 들을 수 있도록 작은 목소리였지만 준성과 우진에게는 귀가 울릴 정도의 큰 소리로 들렸다.
도영이 그들을 두르던 팔을 풀자 모두가 도영의 팔에 엮여 맞닿아져 있던 고개를 하나씩 들었다.
도영은 마치 전쟁의 승자가 패자들의 가소로웠던 모습을 보듯 웃음을 지어 보였고, 희원은 모든 것을 들킨 것만 같은 생각에 얼굴이 붉어졌다.
도영은 천천히 희원의 양팔을 잡고 있는 우진과 준성의 손을 하나씩 풀어내더니 그 바람에 휘청거리는 희원의 손목을 제가 잡아 앞에 있는 의자에 앉혔다.
“자자. 소란은 이미 끝났으니 다들 다시 독신대첩을 시작하지요.”
희원의 맞은편 의자에 앉은 도영은 팔을 훠이훠이 저으며 뭉쳐있던 사람들을 몰아냈다.
우진과 준성은 도영의 말을 믿지 못하겠다는 듯 희원과 서로의 얼굴을 번갈아 보기만 할 뿐이었다.
“뭐 불만 있나?”
아직도 벙쩌 있는 우진과 준성을 향해 도영이 앉은 채로 고개와 상체만 뒤로 돌리며 말했다.
“내가 이 여인과 한식경 동안 대화를 해야겠으니 그대들은 자리 좀 비켜주시오.”
도영은 여전히 이 상황이 흥미로운지 우진과 준성에게 웃어 보이며 말했다.
현감은 관아 마루에서 조마조마 하며 소란을 지켜보고 있었다.
지난번처럼 불미스러운 일이라도 일어날까 걱정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번에도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어떻게 이 일을 수습해야 될지 머리를 안 굴릴 수가 없었다.
우진이 소란이 잦아들자 다시 현감의 곁으로 다가왔다.
“김서기. 대체 어쩐 일이오?”
“별일 아닙니다. 지난번에 오해가 있었던 여인이 다시 왔기에 도움이 될까 싶어 갔던 것입니다.”
우진이 현감의 물음에 별일 아니라는 듯 대답했다.
“매번 관아 행사에 기름을 부으려 하십니다 그려.”
이방은 우진을 감싸 도는 현감에게 들으라는 듯이 부러 우진을 탓하며 말했다.
“됐네. 일이 이만하길 다행이네.”
“송구합니다. 차후엔 조심하겠습니다.”
일이 커지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여긴 현감의 말에 우진이 대답했다.
*
“대체 왜 이러십니까?”
희원이 여전히 도영을 노려보며 말했다.
“장차 서방 될 몸으로서 내 부인이 될 사람을 위해 그 불구덩이와도 같은 위험 속에서 구해주었거늘, 왜라니요?”
“지금 그게 말이라고 하십니까?”
“아니 나는 전-혀 이해가 되지 않소. 대체 내게 왜 화를 내시는 거요? 나는 진짜 도와준 건데...”
“저 혼자서도 할 수 있습니다.”
“에이- 무슨. 아까 그 키 크고 짙은 곤색의 도포를 입은 사내. 그 사내가 지난번 독신대첩에서 그대의 몸에 무례한 짓을 하지 않았소. 참고로 그건 나도 안하는 짓이오. 그리고 저기. 대청마루에 앉아 있는 비취색 도포를 입은 사내. 저 사람이 그 이후에 다가가서 당신과 오해가 어쩌고 저쩌고 하면서 싸우지 않았소.”
“뭐라구요?”
“아이참-. 그대는 왜 이리 나만 보면 화를 내시오?”
“그게 아니라 그렇지 않습니까? 뭘 알고나 그러시는 겁니까?”
희원의 물음에 도영은 왜 그러냐는 듯이 익살맞은 표정을 지어보였다.
“내가 그 때 거기 있었다 하지 않았소. 높은 곳에서 지켜봤기에 다 보았지요. 제가 그런 사람입니다.”
도영은 뭔가 큰일이라도 치른 사람처럼 생색을 내며 말했다.
“진정 저 키 크고 짙은 곤색의 도포의 사내가 저를 그리 했단 말입니까?”
도영은 왜 그리 자신을 못 믿냐고 눈빛으로 쏘아대고 있었다.
“아니, 그것이 아니라 그럴 분이 아니시니까요.”
도영의 눈빛을 보고 주눅이 든 희원이 말을 흐리며 말했다.
“그럴 분이 아니라... 근데 저 비취색 도포랑은 왜 그리 으르렁거리오?”
도영의 물음에 희원은 바로 안색이 바뀌면서 순식간에 굳어졌다.
“오만방자 해서 그럽니다.”
참 이상했다. 도영도 무례하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희원에게 대하는데.
왜 그리 우진에게만 그런 마음이 드는 것인지.
“둘이 뭔 일이라도 있었소?”
“알 것 없습니다. 이야기 할 가치도 없습니다.”
“아-. 그대의 과거인 것이요?”
“예에?”
희원은 도영의 말에 너무 놀라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과거라니.
남자의 ‘ㄴ’도 모르는 나에게 과거라니.
희원은 어처구니가 없어 무슨 말을 해야 될지 당황스러웠다.
“괜찮소. 서로 그런 점은 묻어두기로 합시다. 말 그대로 과거잖소. 나, 그렇게 여인의 과거에 목매는 그런 사람 아니오.”
도영은 본인이야말로 성인군자라는 것처럼 희원을 다독이며 말했다.
둥-.
한식경이 지났음을 알리는 북소리가 들려왔다.
희원은 자신의 결백함을 주장하며 사실을 이야기 하려고 했지만 북소리를 들은 도영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서로 마음이 맞으면 사또께 보고하라던데...”
희원이 당황한 눈으로 자리에서 일어나는 도영을 급히 훑으며 따라가는데 도영이 희원을 놀리듯이 말했다.
“혼인을 시켜준다 하지 않소? 공짜로.”
“미쳤습니까? 무얼 보고를 한단 말입니까? 그러다 어른들께 걸리면 어쩌시려고요?”
“쩝. 그대의 말이 일리가 있소.”
도영이 입맛을 다시며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양가 어르신들의 정혼만 아니었다면 선비님과 같은 사내하고는 절대 정혼하지 않았을 겁니다.”
“가시지요. 청유가 끝났으니 댁에 데려다 드리리다.”
희원의 말에도 아무렇지 않은 듯 도영은 그저 이해한다는 듯이 희원에게 말했다.
“됐습니다. 혼자 갈 것입니다! 따라오지 마십시오!”
희원이 도영을 내치고 빠른 걸음으로 관아에서 나왔다.
‘뭔 저런 인간이 다 있어?! 내가 너랑 무슨 일이 있어도 파혼을 하겠어!’
희원은 도저히 저런 사람과 평생을 함께 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우진에게 드는 마음과 달리 또 다른 종류의 것이 마음속에 차올랐다.
도영은 따라가려다 말고 일부러 그녀에게 시간을 주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제 길을 갔다.
‘참으로 흥미로운 여인일세.’
도영은 희원과의 일을 떠올리며 속으로 말했다.
*
준성은 책방으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지난번 책방에서 있었던 일도 있고, 혹시나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싶어 오늘 독신대첩에 참여한 것이다.
만나서 무얼, 어떻게 해야 될지도 몰랐지만 일단 먼저 만나야 되겠다고 생각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 하나로 이방의 지시가 없었는데도 불구하고 그 곳에 간 것이었다.
‘그 여인이라면 필히 오늘 올 것이라 믿었다.’
그렇게 만난 여인인데. 또 우진이라는 놈이 방해가 되었다.
제 집에 양자로 들어온 첫 날부터 자신의 형처럼 구는 것도 모자라 매사에 사사건건 방해만 되는 우진이가 준성은 너무도 싫었다.
책방에 가서 마음을 다스릴 좋은 책이나 읽어야겠다고 생각했다.
*
희원은 도영을 내치고서는 바로 집에 가지 않고 책방에 들렀다.
희원은 책방에 도착하자 자신만의 고유 의식을 치르기 위해 눈을 감았다.
눈을 감고 숨을 들이 마신다.
마치 여기가 숲 속인 듯 갈색의 나무기둥에서 풍기는 냄새가 코 끝에 머문다.
그리고 숨을 내쉰다. 잠시 코 끝에 머물러 있던 나무냄새는 어느새 쉬이 달아난다.
한 번 더 숨을 깊게 들이 마신다.
이번엔 나무냄새와 함께 묵직한 검은색 묵향이 깊숙이까지 들어온다.
그렇게 아주 잠시 동안 그 내음들을 가슴에게도 맡아보라고 내어주면 어느 순간 참기 어려워진 숨이 머리 꼭대기까지 가서 성을 낸다.
그 때 생색이라도 내듯 숨을 내쉬어 준다. 여름이 되면 습한 냄새까지 더해져 더욱 고유한 내음이 난다.
오늘처럼 힘든 날을 겪으면 희원은 자신만의 이 고유 의식을 치름으로써 치유를 받곤 했다.
실제 숲을 거닐며 고유의식을 치른다면 좋겠지만, 여인 홀로 숲을 간다는 것은 너무 어려운 일이었다.
그리하여 희원은 책방의 책꽂이 사이에서 책을 하나 꺼내어 자신만의 고유의식을 치르고 있었다.
희원이 눈을 뜨자 엷은 미소를 띤 준성이 눈앞에 서 있었다.
‘이것이 꿈인가’
희원이 동그란 눈을 크게 뜨고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눈동자를 굴렸다.
그 때 준성이 작게 웃으며 말했다.
“그 책, 읽으실건가요?”
희원은 갑작스런 준성의 등장에 놀라 허둥지둥 책을 덮어 책꽂이에 넣었다.
“책을 들고 눈만 감고 계시길래. 낭자는 눈을 감고서도 책이 읽히는 겁니까?”
“잠시 숨고르기를 하느라...”
“책방을 좋아하나 봅니다.”
준성은 희원이 꽂아 넣은 책을 다시 꺼내보며 물었다.
“예. 저잣거리에 나오면 항상 들르는 곳이긴 합니다.”
“이 책, 제가 사드리이까?”
“예? 아니 왜...”
“실은 제가 낭자께 본의 아니게 무례를 저지른 일이 있어 용서를 구해야 됩니다.”
준성의 말에 희원은 낮에 도영이 제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혹, 지난번에...”
“용서해주십시오. 일부러 낭자의 몸을 범하려 했던 것이 아니라 그게... 무리 틈에 끼어 있다보니...”
준성은 솔직히 말하기가 애매하여 말끝을 흐리며 말했다.
희원은 준성의 고백에 당황스러웠지만 도영에게 들었을 때와 다르게 오히려 준성이 직접 용서를 구하며 말을 해주니 고마운 마음마저 들었다.
그렇지 않은가. 자신의 과오에 대해서 솔직하게 말을 하는 게 웬만한 용기로 가능한 일은 아니니 말이다.
“괜찮습니다.”
희원은 민망해 하며 제 앞에서 쭈뼛거리는, 애꿎은 책 모서리만 만지작거리는 준성에게 웃어 보이며 말했다.
그 말에 준성은 반색하며 희원을 바라보았다.
“정말입니까? 정말 용서해 주시는 겁니까?”
준성은 여전히 믿지 못하겠다는 듯이 되물으면서도 눈은 희원의 눈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방황하고 있었다.
그의 손은 어느새 책을 반으로 휘어 접어 책장으로 부채질을 하듯 바람을 일으키고 있었다.
“어찌 그리 책을 혹사 시키십니까?”
그제서야 제가 책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달은 준성은 멋쩍은 듯 웃으며 황급히 책을 펴서 표지를 쓰다듬기 시작했다.
“책을 그리 함부로 다루실거면 제게 선물으로라도 주십시오. 선비님 손에 계속 있다간 책이 제 명에 못 살 것 같습니다.”
희원은 웃으며 부러 짓궂게 농을 던졌다.
준성은 맑은 눈으로 희원을 보며 활짝 웃었다.
그 웃음이 너무나도 아이와도 같이 맑게 보여 희원은 순간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희원의 재밌지도 않은 작은 농담에도 웃음을 보이는 그가 왠지 측은해 보였기 때문이다.
속내를 들킬까 희원은 곧바로 그가 지은 웃음보다 더 활짝 하얀 이를 드러내 보이며 웃어보였다.
“나무... 좋아하십니까?”
갑작스런 희원의 질문에 준성은 영문을 몰라 눈만 꿈뻑꿈뻑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