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체 어딜 다녀오신 겁니까?”
객사에 돌아온 희원을 향해 단이가 꾸짖듯 물었다.
“네가 내 어머니냐? 뭘 그리 야단을 치느냐?”
희원이 귀찮다는 듯이 되받아쳤다.
“걱정되니까 그렇지요. 분명 계신걸 보고 저도 깜빡 잠이 든것인데... 깨어나 보니 없어졌으니 제가 얼마나 놀랬겠습니까?”
희원은 단이의 말에 수긍하는 듯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시큰둥 하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걱정마라. 무사히 여기에 오지 않았냐.”
“성도련님 아니었으면 어쩔 뻔 하셨습니까?”
“도포남 만났다.”
희원이의 말에 단이가 놀라 동그란 두 눈을 크게 떴다.
“누구요?”
“그 송상의 도포남. 오만방자하고 싸가지 없는.”
“헉. 어떻게요?”
“참... 희한해. 그렇지? 우연히 봤어. 일 때문에 왔다던데...”
희원이 눈을 가느다랗게 뜨며 생각에 집중하듯이 말했다.
“또 한바탕 붙으신 건 아니시죠?”
“오늘은 좀 다른 것 같았어.”
의외의 대답에 단이는 의아해 하며 희원을 바라봤다.
“뭐가 다릅니까? 낯선 곳에서 일면식이 있는 사람을 보니 그나마 마음이 놓여서 그랬겠지요.”
단이가 별 일 아닌 듯 대답했다. 희원은 단이의 대답을 듣고서는 그럴 것이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한양은 너무나도 크다. 어렸을 때랑은 너무 달라.”
“한양에서 살았습니까?”
“살았었지. 아주 어렸을 때. 네가 우리 집 처음에 들어온 게 한양집이었잖아. 기억 안나?”
“네? 글쎄요. 너무 어렸어서.”
“그리고 너는 많이 아팠었잖아. 그 때 네가 엄청 아파서 피 쏟은 옷 입고 있었잖아. 그리곤 며칠을 앓아 눕고.”
“그게 다 기억나십니까?”
“그럼. 동생이 새로 생겨난 일인데 다 기억나지.”
희원은 사랑스런 눈빛으로 단이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러나 단이는 당황한 얼굴을 숨기듯 어색한 얼굴로 희원의 눈빛을 외면했다.
그 모습에 희원은 그저 단이가 부끄러워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제 제발 저 없이 밖으로 나가지 마세요.”
단이는 희원의 눈빛을 피하며 말했다.
그런 단이가 귀엽다는 듯이 희원은 단이를 향해 웃어 보이며 이부자리 위에 벌러덩 누웠다.
*
수탉의 울음소리가 서너 번 계속 되더니 이윽고 날이 밝아져 오기 시작했다.
방문 사이로 빼꼼이 들어오기 시작한 빛이 어느새 그 영역을 넓혀가고 있었다.
단이는 옆에 누운 희원을 힐끗 보고서는 이부자리에서 일어나 방문을 열고 나갔다.
그리고는 객사 밖으로 나가 길을 걷기 시작했다.
마치 몇 번이고 가본 길인 것처럼 거침없이 걸어갔다.
한참을 걷던 단이는 멀찌감치 보이는 큰 기와집 앞에 섰다.
사모하는 님이 계신 집을 보듯 그윽한 눈빛으로 집을 꼼꼼히 살펴보았다.
큰 기와집을 두른 긴 돌담에서부터 돌담 위로 보이는 기와집의 지붕까지 천천히 보고 있었다.
마치 지붕에 올려진 기왓장의 개수를 세는 듯이 자세하게 제 자리에서 미동도 없이 그렇게 집을 바라보았다.
“예서 뭘 보고 있는가? 칠칠이 낭자는 어디에 두고 혼자서 여기에 있어?”
우진이었다.
깜짝 놀란 단이가 우진을 보고 인사를 했다.
“이렇게 이른 시각에 홀로 어찌...”
“그냥 지나가다 본 것입니다.”
“그럼...”
우진은 희원을 뭐라고 불러야 될지 몰라 잠시 말을 멈추게 되었다.
아직까지 그녀의 이름을 알지 못한 탓이었다.
“객사에서 책 보고 계십니다.”
우진의 의중을 알아차렸는지 우진의 물음이 끝나지 않았는데도 단이가 말했다.
“이상한 그림책은 아니고?”
“아닙니다. 책을 많이 좋아하십니다. 언문책도 많이 읽고, 특히 그림을 좋아해서 모사도 하고 그러십니다.”
“어련하실까.”
“그림을 보면 그림체가 어느 나라의 것인지도 단번에 알 수도 있다 하셨습니다.”
“아랫사람도 이리 정숙한데... 그 칠칠이 낭자가 오히려 자네에게 배울게 많은 것 같소.”
“어찌 아씨를 그리 말씀하십니까?”
단이가 화를 내며 말했다. 단이의 희원에 대한 조근조근한 설명이 그저 자신이 모시는 분을 애써 좋게 포장하며 이야기 하는 것 같아 우진은 그 심성에 감탄하며 말한 것이었지만 단이는 우진이가 희원을 부르는 말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름을 모르지 않소. 그래서 그 날 우리 상단 앞에서 일이 벌어진 거 아니오.”
변명하듯 살짝 뾰로통해 하며 우진이 말했다.
그랬다. 그제서야 단이는 이름을 알지 못해서 아씨가 도포를 돌려주러 상단에 갔을 때 대문 앞에서 설명하느라 고생했던 것이 생각났다.
“어찌 서로 말씀들을 안 하시고...”
한껏 화난 목소리로 말한 것이 살짝 송구한 마음이 들어 단이가 작은 목소리로 기어들어가듯이 말했다.
“그러는 자네는 이름이 무엇이오?”
“예?”
“이참에 자네의 이름이라도 알아두려 하네.”
“단이옵니다.”
“아- 단이.”
“어찌 그러시옵니까?”
“비슷한 이름을 가진 여인이 생각나서 그러오. 아니지, 여인은 아니고 꼬맹이지.”
“예?”
“그런 것이 있소.”
우진이 한참을 바라봤던 그 집은 과거 우진이 살던 집이었다.
우진은 한양에서 내로라하는 양반가의 자식이었다.
어느 날, 소작농들이 들이닥치더니 가족들을 한 명 한 명 죽여 갔다.
자신을 보호하던 하인이 제 앞에서 죽으며 우진 위로 떨어져 우진도 한동안 의식을 잃었다.
그 때 놈은 우진이 아예 죽었다고 생각했는지 우진의 숨을 끊지 못했다.
그렇게 살아난 우진은 평소 아버지의 절친 이었던 지금의 부안에 있는 아버지에게 입양되어 길러진 것이다.
열다섯이 되던 해에 보부상 일을 하면서 우진은 한양에 올라올 때마다 이 집을 보고, 그 때의 놈들을 수소문 하게 되었다.
무엇보다 소동을 일으켜 아버지를 죽이고 집안의 재산을 훔쳐간 그 놈을 찾아야만 했다.
그러나 이미 한양 바닥을 떠났다는 말만 들었을 뿐 별다른 소득은 없었다.
그래도 계속 사람들에게 그 놈에 대해서 묻고 다니고, 한양에 올 때마다 그 소식을 전해 들었다.
오늘도 큰 소득은 없다. 다만, 더 이상 농민 중에서 찾지 말라는 조언을 들었다.
어지러운 세상이었다. 이미 공명첩을 사서 신분을 바꾸었는지도 모른다는 것.
일리있는 조언에 우진은 수긍할 수 밖에 없었다.
우진은 그 말을 듣자 마음이 착잡했다.
말세인 근래에는 너도나도 살 수 있는 것이 공명첩이었고, 이미 양반 행세를 하고 다니는 사람들일텐데 일일이 양반집을 돌아다니며 신분이 언제부터 양반이었냐고 물어볼 수도 없는 일이었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다시 시작해야 될지 막막했다.
*
“아침부터 어딜 다녀온 거야?”
이른 아침부터 보이지 않던 단이가 다시 객사로 들어오자 방에서 책을 읽고 있던 희원이 말했다.
“일찍 일어나셨네요. 죄송해요. 잠이 안와서 잠시 다녀오려고 한 것인데... 아침 갖다 드릴까요?”
“괜찮아, 천천히 해.”
희원은 자신처럼 단이가 길을 잃었을까 걱정되어 물어본 것인데 단이에겐 꾸지람으로 들렸나 싶어 마음이 무거웠다.
희원에게 단이는 단지 아랫사람뿐만이 아니었다.
어렸을 때부터 함께 자라왔기에 자매 같기도 했고, 친구 같기도 했다.
그래서 희원은 항상 단이에게 스스름없이 대했다.
그러나 단이는 꼬박 꼬박 저에게 예를 갖추려고 노력했다.
물론 어머니인 정부인 때문에 더욱 그랬을 수도 있지만 비단 그 뿐 아니라 단이의 천성이 워낙 곱기 때문이라고 희원은 생각했다.
“밖에 나가시려거든 오늘은 저랑 함께 나가셔야 해요. 어제처럼 혼자 그러시면 안돼요.”
단이는 희원의 이부자리를 정리하면서 언니처럼 말했다.
“알았어. 저잣거리에 제대로 나가보자.”
“도련님께 허락 맡고 올게요.”
*
우진은 동복이와 함께 운종가로 나왔다.
동복은 어두운 표정으로 우진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아침까지 오기로 한 화가라고 자신을 소개한 자가 당도하지 않아 한 참을 기다리다 포기하고 둘이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계약금을 주며 한양까지 데려오고, 어젠 잠시 구경을 하겠다고 하기에 허락해주었던 것인데 그 사람이 나타나지 않은 것이다.
어떻게 된 영문인지 알지도 못한 채 변명도 하지도 못하고 안절부절 우진의 뒤를 따를 뿐이었다.
오늘은 기필코 도자기를 찾아야 되는데 자신 때문에 일이 그르칠까 걱정이 되었다.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 이곳에서 지금 당장 사람을 구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송상 일을 한지 여러 해 되었지만 자신은 도자기를 볼 능력이 되지 않았다.
미적 감각이라고는 손톱만큼도 없었다.
그냥 묵묵히 그릇들을 나르고 작은 생필품을 나를 뿐이었다.
귀한 것들은 구경들을 해보지 못해서 우진에게는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서 이것을 잘 알고 조언해 주는 사람이 필요했다.
문득 새벽에 만났던 단이의 말이 생각났다.
그 칠칠이 낭자에게 도움을 구해볼까.
하지만 그녀가 어디에 머무는 지 알 수 없었다.
더욱이 자신은 그녀의 이름도 알지 못하니 도움을 구할 수가 더더욱 없었다.
한숨을 쉬며 일단 운종가에 나왔지만 사실 뾰족한 대책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이러다가 모조품을 사게 될까 걱정만 될 뿐이었다
*
희원은 어제보다 한결 더 편한 마음으로 저잣거리에 나왔다.
사람들은 이곳을 운종가라고 했다. 사람이 구름떼처럼 많아서 그런다더니 딱 알맞은 이름이라고 희원은 생각했다.
단이는 주위를 살피지도 않고 희원의 뒤만 따라다녔다.
그리곤 왔던 길을 곱씹으면서 길을 잃지 않도록 모든 감각을 곤두세웠다.
잠시 뒤를 돌아보며 걸어온 길을 기억해 내고 앞을 보았는데 이런! 희원이 사라졌다.
정말 평생을 희원의 뒤치다꺼리를 하고 살아야 하는 제 자신이 한탄스럽기 까지 했다. 어디서 찾으란 말인가.
희원은 어제 봐 두었던 책방으로 향했다.
그리 큰 책방에서 춘화집 하나가 없을 리 없었다. 물론 책장엔 나열해 두진 않았겠지. 당.연.히!
그렇다면 주인에게 은밀히 접촉해야 하는 것이다.
책방을 한 바퀴 스윽 둘러보던 희원이 책방 주인으로 보이는 중년의 사내에게 다가갔다.
중년의 사내는 책을 정리하다 말고 인기척을 느껴 뒤를 돌아보았다.
“뭐 필요한 거라도 있으십니까?”
“좋은거 하나만 추천해 주시오.”
곱게 잘 차려입은 희원의 모습을 본 주인은 의미심장한 표정을 짓더니 책방 구석으로 시선을 돌렸다.
희원도 주인의 시선을 따라갔다.
“따라오시오.”
주인이 희원에게 말했다.
주인을 뒤따르는 희원이 도착 한 곳은 책들이 들어선 책방의 가장 끝.
책장들이 들어선 그 사이 속에서 가장 뒤쪽에 위치한 곳에 책장이 한 더 있었다.
“조심히 다루시오. 안 그러면 발각되니.”
책 무덤 속에서 책을 한참 들어내고 나서야 빨간책들이 여러 권이 보였다.
하나를 꺼내 보며 짜릿한 웃음으로 성취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한양이라서 그런지 들어오는 춘화집의 품질 자체가 부안과는 다른 것처럼 느껴졌다.
종류도 많아 보이고 그 양도 비교 할 수 없을 만큼 많았다. 이 사실이 희원을 흥분시켰다.
“이걸로 주시오.”
책을 이것저것 훑어보던 희원이 활짝 웃으며 주인에게 책 한 권을 들어보였다.
주인에게 알맞은 값을 치르고 가슴에 만족스럽게 책을 꽂아 넣고서는 책방에 나왔다.
단이는 아직도 희원을 찾으러 그 주위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단아.”
희원이 정신없어 보이는 단이를 불렀다.
희원을 보고 큰 숨을 내쉬며 안도하는 단이가 희원을 다시 닦달하기 시작했다. 희
원은 연신 미안하다며 단이를 달래야만 했다.
*
“또 사고를 쳤습니까?”
익숙한 목소리가 희원의 귀에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