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 한 장이나 겨우 들어갈 거리로 좁혀진 두 사람의 입술 위로 조심스러운 긴장감만이 감돌았다.
“이럴 때 춘화집에서는 보통 어떻게 합니까?”
팽팽하게 조여오던 긴장감을 먼저 완화 시킨 것은 우진이었다.
자신의 사내로서의 욕구를 잠재우기 위해 고육지책으로 내민 말이었다. 그러나 희원은 우진 보다 한 수 위였다.
“그걸 지금 저더러 말하라는 건가요? 아님 행동으로 보여 달라는 건가요?”
수줍어하고 부끄러워할 줄 알았던 희원에게서 나온 의외의 대답에 오히려 우진이가 놀랐다.
“알려주면 그대로 해 보시려구요?”
희원은 숨이 멎을 듯한 긴장을 감추고 분위기를 완화해 보려고 한 말이었지만 우진은 그 말에 더욱 자극을 받았다.
“한다면요?”
우진은 길고 가느다란 검지손가락으로 희원의 턱을 부드럽게 들게 하고는 엉큼하게 웃으며 말했다.
자신이 무슨 짓을 한 것인지 이제야 깨달은 희원이 뒤로 한 발짝 물러 나려했다.
그러나 그것은 우진의 팔에 더욱 힘을 주게 되는 꼴을 만들어 버렸다.
다시 옴싹달싹 못하게 되어버린 희원은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한 두려움으로 두 눈만 끔뻑끔뻑 할 수밖에 없었다.
다시 그의 숨소리가 코로 아스라이 느껴졌다.
이번엔 희원의 입술로 간헐적으로 불어왔다.
질끈 눈을 감아버린 희원의 입술 위로 우진의 붉은 입술이 포개졌다.
희원은 생경한 느낌에 도자기를 안은 손에 더욱 힘을 줄 뿐 굳어진 제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입술로 전해지는 그의 감촉이 따뜻했다.
그의 손이 어루만지고 지나간 뺨도 열기가 올라왔다.
희원은 점점 따뜻한 목욕물에 목욕을 하듯이 나른해 지는 느끼고 있었다.
도자기를 안은 두 팔과 땅위에 디디고 서 있는 두 발에 점점 힘이 빠지는 듯 했다.
우진이가 희원의 허리를 꽉 잡아주지 않았다면 희원은 그 자리에서 고꾸라졌을 것만 같았다.
우진의 손이 도자기를 든 희원의 손에 와 닿았다. 우진이 도자기를 끌어당겼다. 도자기를 바닥에 조심스럽게 내려놓은 우진이 도자기를 뺏겨 갈 곳 없은 손을 자신의 허리를 감싸게 인도 했다.
희원은 우진이 하는 대로 제 손을 맡기고 더 뜨거워진 그의 포근한 입술에 포옥 잠겼다.
*
나루터에서 희원보다 먼저 포졸들을 맞닥뜨린 단이는 동복이 이끄는 대로 함께 뛰었으나 여인의 몸으로 사내의 속도를 따라가는 것은 쉽지 않았다.
단이는 순식간에 빠른 속도에 발목을 접질러 넘어져 버렸다.
영문도 모른 채 뒤에서 몰아치는 포졸들을 피해야만 했다.
더딘 속도로 절뚝이며 뛰는 단이가 순간 한 사내에 의해 낚아채졌다.
사내는 풀숲이 우거져 포졸들의 눈에 띄지 않는 곳으로 숨어들어갔다.
포졸들을 피하려다 큰일을 당하나 싶어 단이는 옆의 사내를 찬찬히 훑어보았다.
헤진 갓을 쓰고, 무명옷에 낡은 도포를 둘렀으나 어딘지 낯이 익은 사내였다. 풀숲에 숨느라 옆모습만 보던 단이가 갸우뚱거렸다.
“발목을 접질린 것이냐?”
사내는 단이를 힐끔 보며 묻고는 이내 다시 포졸들의 경계를 살폈다.
순간 단이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항상 고운 비단 도포를 두르고, 화려한 장식의 갓끈을 매고 있던 도영이 제 눈앞에 허름한 몰골로 있었기 때문이다.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단이는 제 발목이 아픈 것보다 더 놀란 마음으로 작은 목소리로 도영에게 물었다.
그러나 도영은 한손으로는 단이의 입을 막고 다른 한 손의 검지는 제 입술에 대며 아무 말을 하지 못하게 했다.
단이는 놀라움으로 숨을 죽이며 사내 옆에서 바짝 몸을 웅크렸다.
그 옆으로 풀숲을 다 헤치지 못한 포졸들이 단이와 사내를 스쳐 지나갔다.
계속 포졸들의 동태를 살피던 도영이 풀썩 주저앉아 단이를 바라보며 웃었다.
“여긴 또 무슨 일이냐?”
도영은 대수롭지 않은 일을 겪은 사람 마냥 능청스럽게 단이에게 물었다.
“도련님!”
단이는 어째서 여기서 도영이를 만나게 됐는지 의아하면서도 희원이를 걱정하는 마음에 괜히 도영이가 야속해서 버럭 소리를 질렀다.
단이의 말에 순간 포졸들이 다시 두 사람이 있는 쪽을 둘러보았다.
도영은 재빨리 단이의 입을 다시 막으며 풀숲에 납작 엎드렸다.
포졸들이 멀어진 것을 확인한 도영은 그제야 단이의 입을 자유롭게 해주었다.
“네 아씨는 대체 또 무슨 일을 벌이기에 네가 여기까지 온 것이냐?”
도영은 호기심 많은 희원의 성격을 알기에 여기에 왜 왔냐고 묻지 않고 무슨 일 때문에 나루터에 왔는지를 물었다.
“그것이...”
단이는 도영에게 우진의 일을 도우러 왔다는 말을 곧이곧대로 해야 되는지 아니면 둘러대야 되는지 고민하느라 제대로 답변을 못 하고 있었다.
“됐다. 뭐 일이 있어서 왔겠지. 나 같은 정혼자가 또 어디 있겠느냐?”
그런 단이의 속마음을 알아차린 것인지 도영은 단이의 대답을 더 이상 듣지 않았다. 그리고는 아량 넓은 남편감이라고 자랑을 하듯이 우쭐댔다.
“가자. 여기 더 있다가는 모기 밥이 되거나 포졸들에 잡혀가거나 어쨌거나 죽을 거 같다.”
도영은 풀숲에서 먼저 일어나며 단이를 재촉했다.
큰 보폭으로 성큼성큼 걷는 도영의 뒤를 단이가 절뚝거리며 뒤따랐다.
“헌데 도련님은 여기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행색은 또 왜 그러시구요?”
단이는 열심히 도영의 뒤를 쫓으면서 재잘재잘 이것저것을 물어보기 시작했다.
“일이 있으셔서 며칠 객사에 못 오신다더니 이런 몰골로 여기서 뵙다니요. 아씨께서 아시면 얼마나 슬퍼하시겠어요.”
“그 여인이 나 걱정할 시간이 어디 있겠냐? 당자(當者)의 일로도 바쁠 텐데.”
단이는 도영의 말에 반박할 것이 없었다. 워낙에 호기심이 많고 하고자 하는 일은 반드시 해보고 마는 성미를 지닌 희원이가 아닌가.
그 성미를 아는지라 무언가 좋은 대답을 머리로 강구하고 있지만 번뜩 떠오르지 않았다.
강변 위로 난 길을 따라 도영이가 앞서고, 두 세 보(步) 떨어진 간격으로 단이가 절뚝걸음으로 뒤따르며 걷고 있었다.
도영은 뒤떨어져 걷는 단이의 걸음새를 보고는 단이를 부축하려 했다.
“괜찮습니다. 혼자 걸을 수 있습니다.”
단이는 도영의 호의에 부담감을 표하며 거절했다.
아무리 발이 다쳤어도 윗분에게 폐를 끼칠 수는 없었다. 더군다나 도영은 희원의 정혼자가 아닌가.
그러나 도영은 뿌리치는 단이의 팔을 제압하고 단이에게 어깨동무하며 기대어 걷게 했다.
“그렇게 혼자 걷다간 오늘 중으로 집에 들어가지 못한다.”
도영의 말에 단이는 못 이기는 척 도영에게 몸을 기대어 걸었다.
단이는 희원이가 말하는 자유연애라는 것을 자신이 하게 되면 도영과 같은 사내 같이 배려심 넓은 사람과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이 미치자 단이는 제가 모시는 윗분의 정혼자에 대해서 불순한 생각을 한 것 같아 고개를 저으며 그 생각을 떨쳐내려 했다.
그렇게 한참을 걷고, 또 걸어 다리가 욱신거리고 체력의 한계가 와 잠시 쉬고 싶을 즈음 도영의 걸음이 멈추었다.
드디어 멈춘 도영의 걸음에 반색하며 도영을 바라보는데 도영이 돌이 되어 길 아래의 강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도영의 시선을 따라간 단이의 눈에 싱그러운 연정을 나누는 두 남녀의 모습이 담겼다.
그리고 이내 두 남녀가 희원과 우진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단이는 망측하고 민망한 장면에 도영의 눈치를 살폈다.
도영이는 그저 아무 말 없이 바라보기만 할 뿐 표정의 변화가 전혀 없었다.
“오늘 나를 본 것도, 이것을 본 것도 모두 네 아씨에겐 말하지 말거라.”
단이에게 당부하는 도영의 말투에서는 어떤 감정도 느낄 수 없을 정도로 무미건조 했다.
*
밤이 되어서야 단이는 객사에 도착했다.
단이는 도영과 함께 한참을 강가를 바라보다 희원과 우진이 함께 말을 타고 떠나는 것 까지 본 후에 강변에서 출발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방에는 이미 희원이 들어와 환하게 불을 밝히고 있었다.
조심스럽게 방문을 열고 들어가니 희원은 멍하니 벽을 쳐다보고 있었다.
단이의 인기척도 느끼지 못한 듯 희원은 무엇인가에 집중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단이는 아까 강가에서 희원의 모습이 생각이 나 화가 나기 시작했다.
좋은 정혼자가 있으면서도 다른 사내와 입맞춤을 하고 있는 제 아씨가 영 못 마땅했기 때문이다.
단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가만히 희원의 앞에 앉았다. 여전히 알은체도 없는 희원이다.
아무리 제가 모시는 아씨지만 강가에서의 일을 본 이상 그냥 두고 볼 수만은 없을 것 같았다.
희원에게 어떻게 말을 꺼낼지 고민하고 있는데 희원이 정적을 깨고 먼저 운을 떼었다.
“단아. 나 연애할래.”
여전히 시선은 벽을 바라보고 있는 희원이 담담한 말투로 단이에게 물었다.
“지금 하고 계시잖아요. 성도련님이랑요.”
단이가 희원의 말에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아니, 성선비님과는 연애가 아니야.”
“예?”
“내 심장 말이야. 그 사람만 보고 나면 심장이 성을 냈던 이유를 오늘에서야 알게 된 것 같아.”
“무슨 말씀이세요?”
“그건 성낸 것이 아니었어. 은애하는 마음의 두근거림이었어.”
“아씨-.”
“그 사람. 도파남과 연애하고 싶어.”
단이는 희원의 간절한 진심을 보았다. 자신이 해줄 수 있는 말도, 희원 대신 해줄 수 있는 일도 없었다.
또한 내심 희원이 도영이 아닌 다른 사람을 택하기를 바라기도 했다.
신분의 차이로 자신은 절대 도영의 사람이 되지 못할 것을 알지만 아주 잠시만이라도 혼자만의 정인(情人)으로 마음속에 품는 것은 괜찮을 것 같았다.
호롱불을 가운데 둔 두 여인의 그림자가 문 밖에 비쳐져 있었다.
두 여인의 조근거리는 작은 목소리가 불빛을 타고 문 밖으로 흘러 나왔다.
‘도포남과 연애라...’
달빛도 비추지 않은 칠흑같이 어두운 그 밤, 도영은 복잡한 얼굴로 두 사람의 그림자를 응시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