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원은 달리고 있었다.
순라꾼들의 순찰을 알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시간이 없었다.
순라꾼들에게 잡히기 전에 저 놈을 먼저 잡아야만 했다.
저 등짝. 그 놈이 틀림없다.
퍽!
줄곧 앞만 보며 뛰고 있는 희원이 옆 골목길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사내와 부딪혔다.
순간 가슴팍에 숨겨놓았던 춘화집이 떨어졌다.
“거기. 거기 섰거라.”
순라꾼들이 희원을 발견하고는 뛰어오기 시작했다.
희원은 쫓던 사내를 놓치는게 아깝지만 일단 순라꾼들을 피하는게 더 급해져버렸다.
책을 주워 다시 가슴팍에 찔러놓고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숨을만한 곳을 찾아보는데 이런.
어디로 가야 되는것이냐 대체.
그 순간 희원이 팔목이 낚아채졌다.
가슴과 가슴이 맞닿을 만큼 좁디좁은 골목길.
‘이건 뭐지? 순라꾼을 피하려다 더 봉변을 당하는것인가?’
일단 순라꾼을 피하기로 결심하였으나 만일을 대비하여 희원은 잡히지 않은 손을 움직여 제 가슴팍 쪽으로 끌어당겼다.
은장도가 이 쯤 있으리라.
쿵쾅 쿵쾅
‘뭐지? 이 느낌?’
우진은 한 손엔 호롱불을 들고, 한 손엔 책을 들고 걷고 있었다.
순라꾼들의 순찰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면 거리는 조용해지고 순라꾼들의 발소리만 들린다.
이 적막감이 좋아 일부러 이 늦은 시간에 집으로 돌아가곤 했다.
그런데 갑자기 들려오는 부산스런 소음에 우진은 뒤를 돌아봤다.
‘아니, 여인 혼자 왜 저기서...’
우진은 사내와 부딪혀 넘어진 여인을 도와줘야 되겠다는 생각을 먼저 했다.
여인의 몸으로 순라꾼들에게 잡히면 이유 없이 고초를 당한다는 소문을 들은 그였다.
일단 뒤돌아가 골목길 틈으로 여인의 손목을 잡아 숨었다.
쿵쾅 쿵쾅
‘팔자에 없는 일을 하려니 괜히 떨리는군.’
한 무리의 순라꾼들이 골목길 옆으로 지나가자 우진은 여인을 지그시 내려다 보았다.
그리곤 여인의 등 쪽으로 손을 뻗기 시작했다.
“털끝만이라도 건드리면 당신 손을 가만두지 않겠소!”
어느새 가슴팍에서 은빛 은장도를 꺼내들은 희원이 무서운 눈으로 우진을 노려보았다.
예상치 못한 희원의 반응에 깜짝 놀란 우진은 양손을 위로 들어 희원의 뒤쪽을 바라보았다.
“뭔가 오해가...”
“오해요? 무슨 오해? 도와주시려거든 깔끔하게 곤경만 피하게 해주시면 되지. 무슨 짓 입니까?”
“뒤에...”
“뒤에? 뒤에 뭐요?”
희원이 뒤를 돌아보았다.
우진은 희원이 뒤쪽으로 놔두었던 호롱불과 책을 챙겨 들었다.
“거, 참. 은장도를 들고 다니는것 보다 이 시간에 집에 있는 것이 더 안전하지 않겠소? 목숨 살려줬더니 보따리 내놓으라더니. 그 쪽이 딱 그렇습니다.”
“아... 그것이....”
“고맙다는 말 그런거는 애초에 기대도 하지 않았소.”
희원이 붉어진 얼굴을 숙이며 다시금 은장도를 가슴에 넣으려는데 순간 책이 우진 앞으로 떨어지며 활짝 펼쳐졌다.
“그냥 잡아가게 둘 걸 그랬나보오. 괜한 걱정으로 구해줄 사람은 아닌 것 같으오.”
“아... 아니.... 이것은 사정이 좀 있어서...
“사정은 무슨... 치마까지 찢겨져 가면서 얻은 귀한 것이라 그 말이오?”
“무슨 말이십니까? 무슨 치마요?”
희원이 우진의 말에 울컥하여 제 치마를 만져 매무새를 살피는데, 아뿔싸.
***
“어이쿠. 이게 누구신가. 우리 그림낭자께서 너무 오랜만에 오질 않았소.”
“주인 어르신도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원본 가져간지 열흘이 넘었는데도 오지 않아서 아예 꿀꺽 잡숴버린 줄 알았수다.”
“에이. 섭섭하게 그런 말씀을... 제가 언제 날로 먹고 약속을 어긴 적이 있었습니까? 이번엔 제 사정이 좀 그리되었습니다. 그래도 물건은 확실하게 가져왔잖습니까.”
모사한 그림 꾸러미들을 책방 주인에게 넘겨주고 옆에 있는 책장에 켜켜이 꽂아있는 책들을 손가락으로 스윽 그어가며 구경하던 희원이 말했다.
점심에서야 겨우 집에서 겨우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것도 며칠째 바깥출입을 안하고 희원만 지켜보던 어머니가 드디어 오늘에서야 출타를 하신 것이다.
어머니가 대문을 나서자마자 비단옷 벗어던져 무명옷으로 갈아입고 부랴부랴 나온터였다.
오늘도 어머니가 출타를 하지 않으셨다면 모사해주기로 한 그림들을 제 때 책방에 넘기지 못할 뻔했다.
모사한 그림을 넘기지 못하는건 괜찮았다.
돈을 받지 못하면 그만이니까. 문제는 따로 있었다.
“암요. 내가 시일이 걸려도 이리 좋은 그림을 가져 올 줄 믿고 기다리고 있었지요.”
희원이 가져온 그림들을 정리하며 책방 주인이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 그런데 요즘은 좀 뜸... 한가봅니다. 어째 거 좋은 물건들이 나오지 않는 것 같습니다.”
희원이 조심스레 묻자, 허리를 굽혀 안쪽 서랍에 그림들을 넣던 책방 주인이 무슨 말인지 고개를 갸우뚱 거렸다.
그리곤 이내 뜻을 알아차리고는 혀를 한번 차더니 희원을 못 마땅하게 쳐다보았다.
“쯧, 여인의 몸으로 참...”
“아니 왜요? 여인은 안된답니까?”
“요즘은 구하기 힘드오.”
“에헤이. 다 아는 사이끼리 왜 이러십니까. 못 본 사이 주인어르신 많이 변했습니다”
“요근래 단속이 심해져서 책방에 아예 들여놓지도 못해요. 내 낭자가 싫어서가 아니라 사실이 그런걸 어찌하오. 오늘은 이만 돌아가서 지지난번에 부탁한 산수화. 그거 한번만 더 모사해 주시구려. 이 바닥에서 낭자 실력을 모르는 사람이 없질 않소. 내가 오늘 일도 있고 하니 값은 후하게 치러드리리다. 자아, 이건 오늘 모사 값이고. 수고했수다. 그럼 다음에도 잘 부탁합니다아.”
“흥. 그렇게나 내 실력을 잘 아는 분이 나를 이리 홀대하신답니까?”
자신의 다리 몽둥이가 분질러 질 것을 감안하면서까지 찾아왔는데 그림 모사값만 덜렁 주고 그녀를 내보내려는 주인이 희원은 야속했다.
그러자 희원은 서운하고 갑자기 일어나는 분한 마음으로 입을 삐죽거리며 책방 주인을 노려보며 쏘아댔다.
“어허. 이 낭자 보시게. 글쎄 안된다니까요.”
주인은 희원의 등을 떠밀며 문을 닫아 쫓아 내려했다.
희원은 쫓겨나지 않으려 발버둥을 치는데 어느새 문에 가까이 와 있었다.
그렇게 밀고 버티기가 계속 되더니 어느 순간 문이 닫혔다.
그런데 희원이 앞으로 얼마 튕겨져 나가지 못했는데도 그녀는 다시 뒤로 당겨졌다.
쿵.
급하게 문을 닫으면서 희원의 뒷치마가 문에 걸린 것이다.
놀란 주인이 문을 다시 열자 희원이 양팔을 좌우로 뻗어 문을 잡고는 닫히지 않게 버티며 애원했다.
“에이, 그래도 다른 방도로 구할수도 있지 않습니까. 어찌 이리 잘나가던 책을 무자르듯 자를 수 있단말입니까. 이것도 하나의 사업 아닙니까. 사업. 아시면서...”
“때끼! 어찌 그런말을 한단말이오. 걸리기라도 하는 날엔 이 책방 뿐만 아니라 내 목숨도 위험하오. 그러니 어서. 이만 나가보시오.”
주인은 더욱 힘을 주어 희원을 밀어냈다.
“아니, 내가 오늘 정말 어렵게 나왔는데... 이대로 집에 가기엔 너무 한데....”
계속 주인에게 애원하며 버텼지만 이내 주인의 힘에 못 이겨 쫓겨났다.
닫힌 문을 두드리며 한번만 더 말해볼까 손과 입을 달싹거렸지만 이내 포기했다.
그렇게 실망스럽게 돈만 챙겨들고 터벅터벅 걸음을 떼었다.
끼익.
“낭자”
순간 빼꼼이 문을 연 주인이 희원을 불러 세웠다.
‘그럼 그렇지. 나를 이리 보낼 리가 없지.’
만족스런 마음에 입꼬리가 실룩실룩 움직였지만 이내 감추고는 주인을 향해 뒤돌아 봤다.
“참, 별꼴이오. 여인이 밝히기는...”
아까 화내던 표정과는 다르게 못난 딸내미에게 약과 하나 더 주는 듯한 한결 누그러진 표정으로 주인이 희원을 내려보았다.
다시 책방에 들어온 희원에게 가까이 오라고 손짓하고는 책상 아래에서 빨간부채를 하나 꺼내더니 이내 귓속말로 은밀하게 귀중한 정보를 흘렸다.
“내가 특별히 낭자한테만 좋은거 하나 드리는거외다. 마침 오늘 물건 하나가 올게 있소. 이따 미시(未時)에 저잣거리로 나가 보시오. 이 빨간 부채를 들고 있으면 낭자를 알아보고 한 사내가 책을 전해 줄거요. 돈은 선불”
은밀한 거래를 약속한 두사람은 서로 눈웃음을 치는 것으로 도장을 찍었다.
터억.
마지막으로 주인은 책상 위로 손바닥을 내어 보였다.
챙그랑.
희원이 그의 손에 만족스런 무게를 얹어 주었다.
***
아뿔싸. 책방.
아까 책방에서 문에 걸렸을 때 찢겨진 모양이다.
망할 늙은이.
“이 시각에 돌아다니는 그 쪽에게 정숙한 여인의 옷가짐은 무리일 듯 보이오.”
뒷치마가 어떻게 이 모양이 됐는지 한참을 기억을 더듬는 중이었는데 희원의 뒤통수 위로 굵은 남자의 싸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진은 한심한 듯 그렇게 그녀에게 한마디 하고는 골목길을 빠져 나와 제 길을 걸어갔다.
속곳을 보인 민망하고 창피한 마음에 희원은 울그락 불그락 얼굴이 더욱 붉어졌다.
그리고는 무거워진 발을 떼지도 못하고 찢어진 치마를 움켜잡고 이리 돌리고 저리 돌리며 뒷매무새를 잡았다.
집까지 한 식경은 더 가야 될 거리다.
대충이라도 매무새를 잡고 길을 걸어가야 될 것이 아닌가.
순간, 희원의 머리 위로 천이 수루룩 덮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