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진은 동진나루에 나와 있었다.
내일 있을 장시에 내놓을 물건이 오늘 도착한다는 전갈을 받았기 때문이다.
우진이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 보았다.
푸른 하늘에 하얀 목화솜이 설기설기 붙어 있는 모양으로 구름이 떠 있었다.
그 아래로 파아란 강물이 잔잔히 출렁이는데 마치 하늘과 강이 서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보였다.
보부상 시절 지게에 그릇들을 짊어지고 전국을 돌아다닐 때도 우진은 이렇게 하늘과 강을 오랫동안 쳐다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오늘은 자꾸만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형님”
얼마간 하늘과 강을 번갈아 보면서 작은 미소를 짓고 있던 우진이 동복의 부름에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무엇을 그리 열심히 찾아보십니까?”
“아니다. 아무것도.”
“아무것도가 아닌 것 같은데요?”
“신경 쓰지 마라.”
“에엥? 형님. 옷이 왜 이러십니까? 지난번에 행수 어르신께서 주신 도포는 어디에 두고 다시 이 낡은 것을 입으셨어요?”
우진은 제 도포를 민망한 듯 매만졌다.
양반이지만 벼슬길이 막힌 집안이라 직접 몸을 움직이지 않으면 입에 풀칠도 못 할 정도로 가세가 기운 집안에서 자랐다.
그래서 좋은 비단 옷은 거의 없고 죄다 무명천으로 만든 옷들뿐이다.
그러나 우진은 양반이라는 허울만 남은 이름 보다는 실제로 사람답게 살고 싶었다.
그래서 무작정 저잣거리에 물어물어 보부상을 찾았고 그렇게 장돌뱅이를 했다.
그러던 중 지금의 행수의 눈에 띄어 이 곳 송상에 서기로 들어오게 되었다.
그 때 행수 어르신이 이젠 매일 걸어 다니지 않고 한 곳에서 일하게 되었다고 좋은 비단 도포를 선물해 주셨다.
열심히 일을 하라고 격려차 주신 것이다.
우진은 감사함으로 그 옷을 행수님 마냥 조심히 다뤄가며 입었었다.
그런데 어제 그 칠칠치 못한 여인에게 덮어주고 집에 있던 낡은 도포를 입고 온 것이다.
“옷을... 잃어버렸다.”
우진은 어제 일이 생각난 듯 희미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예에? 어찌... 아니 왜요?”
“그리되었다.”
칠칠치 못한 여인이라 신경이 쓰인 것 뿐인데 자꾸만 우진은 웃음이 났다.
“그런데 왜 자꾸만 웃으십니까? 진짜 잃어버린 게 맞아요?”
“흠흠. 그렇대두. 물건은 잘 도착했느냐?”
더 이야기를 했다가는 집요한 동복에게 모든 것을 다 말할 처지에 놓일지도 몰라 우진은 헛기침을 하며 얼른 말을 돌렸다.
“예. 저쪽이 의주만상에서 가져온 물건들이고, 이 쪽이 동래내상에서 찾는다는 물건입니다.”
대답을 마친 동복이는 연신 기침을 해대었다.
“도자기가 없구나.”
물건들을 살피던 우진이 동복에게 물었다.
“예. 청나라 도자기 말씀하시죠? 그것이 이번엔 진품 찾는 것이 어려워...”
“그러게 모사품이 많으니 실력 있는 도자기공과 함께 가라고 하지 않았느냐?”
“요 근래 도자기공들이 조선 땅에 남아 있습니까? 웬만한 자들은 다들 왜로 넘어갔지요. 동네에 있는 도자기공들은 일손이 부족하다는데 어디 싼 값에 함께 장사 여정에 따라가려 하겠습니까?”
“아니, 그걸 왜 이제야 말을 하느냐? 이번에 꼭 수령님께 청나라 도자기를 올려야 된다고 몇 번이고 말해뒀지 않느냐?”
“아니 그것이... 청나라 그림이라도 잘 볼 줄 아는 사람이 있으면 도움이 될 거 같긴 한데...”
“그걸 알았으면 진즉에 데리고 가서 했어야 되지 않느냐?”
“죄송합니다. 제가 잘 다시 알아보겠습니다.”
며칠 전 장대비가 쏟아지던 그 날에 동복은 오랫동안 연모하던 연이에게 서찰을 받았었다.
그동안 줄곧 동복이만 서찰을 보내고 그에 대한 답신이 없어 마음앓이를 하고 있던터였다.
반가운 마음으로 서찰을 읽었는데 그만 동복은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그 서찰은 연이가 이제 곧 혼인을 하게 되니 더 이상 서찰을 보내지 말라는 연이 아버님이 보내신 것이었다.
혼자서만 연모하고, 연이와 함께 한 시간이 없다 하더라도 떠나버린 여인에 대한 슬픔과 공허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주막에서 홀로 술을 마시다 그만 길거리에 쓰러져 잠들고 만 것이다.
다행히 지나가던 순라꾼들에 의해 발견되어 큰 변고는 면했지만 고뿔은 피할 수 없었다.
어쨌거나 고뿔 때문에 며칠을 고생하고 있는 동복이지만 몸이 아파서 일처리를 제대로 못했다는 변명 하는 것이 싫었다.
더욱이 그 고뿔이 여자 때문에 걸린 것을 우진이 알게 되면 자신을 된통 혼낼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동복은 우진에게 연신 고개를 숙여 죄송하단 말을 할 뿐 더 이상의 변명은 하지 않았다.
우진은 이번에 관아 현감에게 도자기를 선물 하여 여각에서 손님을 받을 수 있는 권리인 주인권을 받아낼 참이었다.
이번에 송상도 동진나루 새로이 여각을 지었는데 아직 주인권이 없어 손님을 받아낼 수 없었다.
그리하여 청나라 도자기를 수집을 즐겨하는 현감에게 좋은 인상을 주고 주인권을 받아내려 했는데 일이 틀어지게 되었다.
소월의 도움이라도 받아서 이를 해결해야 되나 잠시 생각했지만 우진은 머리를 흔들며 그 생각을 지웠다.
‘그나저나 도포를 잃어버린걸 알면 행수어르신이 서운해 하실 텐데 어떡하지?’
*
그 시각 희원은 밥상을 앞에 앉혀 두고 멍하니 먼 산을 바라보고 있었다.
여느 때 같았으면 벌써 후루룩 먹어치우고 밖에 나갈 궁리를 하고 있었을 텐데 오늘은 아침부터 가만히 있는 희원을 보고 있자니 단이가 더 안달이 났다.
“아씨. 왜 그러세요. 아침도 드시질 않고 물리시더니. 어디가 아프신거에요?”
“...”
“아씨. 어제 늦게 돌아다니셔서 몸이 상했나봐요”
“그런걸까?”
계속 멍한 희원은 단이의 물음에 대답도, 되물음도 아닌 말을 했다.
“의원님을 불러올까요?”
“의원이 치료할 수 있을까?”
“어찌 그러시는데요.”
“여기.”
희원은 축 처진 얼굴로 제 왼쪽 가슴에 손을 얹었다.
“여기가 성이 많이 났나봐. 아무래도 내가 그동안 너무 뜀박질을 한 모양이야.”
단이는 처음 보는 희원의 축 처진 모습에 걱정이 되어 그의 손에 숟가락을 힘껏 쥐어줬다.
“조금이라도 드세요.”
“아니야. 누워야겠어.”
“아씨. 오늘 주인마님 출타하신대요. 꽤 오래 나갔다 오신다고 하던데요?”
“아니야. 됐어. 당분간 뜀박질은 안 될 것 같아.”
오랜만에 생긴 기회지만 희원은 밖에 나갈 기운이 없었다.
자꾸만 심장이 성을 내는 것 같아 몸을 움직이고 싶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성난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희원은 이부자리에 누워 한 켠에 개켜져 있는 도포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어제의 그 일이 다시 생생하게 떠올라 다시금 얼굴이 붉혀졌다.
‘저 옷을 어찌 돌려주려나.’
*
상단 한 켠에 자리 잡은 우진의 집무실.
행수는 우진에게 따로 방을 내주어 물건들을 기록하고 정리하게 했다.
그곳에서 우진이 장부를 쓰며 돈을 맞춰보고 있었다.
멀리 기침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동복이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오늘 들어온 물건들 모두 창고에 정리 했습니다. 이건 그 목록이요.”
“거기 놔둬라.”
“그럼 저는 이만 가볼게요.”
“탁자 위에 것 가져가거라.”
동복이 탁자에 다가가 무엇인지를 살폈다.
“이것은 약재가 아닙니까.
“팔복 더위에 사내자식이 고뿔은 무슨...”
우진은 여전히 동복의 눈은 보지도 않은 채 장부를 맞춰 보며 대꾸했다.
“형니임. 역시 우리 형님 밖에 없습니다.”
“사내자식이 징그럽게 무슨 짓이냐.”
우진의 호의에 감동한 동복이 여인처럼 우진에게 달라붙어 교태를 부렸다.
“난 이만 간다.”
놀란 우진은 동복을 떨어뜨리며 장부를 챙겨 들고는 밖으로 나갔다.
“예예. 먼저 들어가세요. 제가 오늘은 형님 방 깨끗하게 정리 해드리고 들어가겠습니다. 어서 가십시오.”
기분이 좋아 연신 입에 웃음을 달고 기뻐하며 한참을 정리하던 동복이 갑자기 허리를 일으켰다.
“아. 맞다. 형님!”
무언가 깜빡 한 듯 우진을 불러보았지만 이미 우진은 없었다.
“뭐. 마주쳐도 난 몰라. 둘이 알아서 하겠지.”
우진에게 귀띔을 해줘야 될 일이었지만 굳이 둘 사이에 끼고 싶지 않았기에 뒷일은 나몰라 하며 약재를 품에 껴안고 동복도 집을 나왔다.
***
소월은 우진이 일하는 상단의 대문 앞까지 와버렸다.
자신의 마음을 내비친 이후에 우진은 더이상 그녀를 찾지 않았다.
그에게 자신은 그저 벗이라고 했으나 그녀에게 그는 벗이라고만 할 수 없었다.
그를 향한 마음은 날로 커지고 깊어져만 갔기에 그녀는 우진의 말대로 따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오늘은 우진을 보고 싶은 마음에 기어이 이 곳 까지 온 것이다.
“소월 아씨.”
동복이가 물건을 나르다 소월을 발견하고는 아는 체를 했다.
“형님을 찾아오신 겝니까?”
소월은 대답도 하지 않고 그저 고개를 숙였다.
“어찌 이리 찾아오십니까. 이제는 아무리 말해도 아씨를 보러 가지 않을 것입니다.”
“알아요.”
동복은 안타까운 눈으로 소월을 바라봤다.
소월은 매창 이후로 부안에서 유명한 일패기생이다.
일패기생이라 잠자리는 하지 않는데도 부안현 내의 모든 양반들은 소월이와 술 한 잔 하기를 고대하며 그녀의 시와 노래를 듣기를 원했다.
그런 소월이가 매달리는 사람이 우진이라니.
형님은 참으로 복을 누릴 줄 모른다.
잠자리를 안하는 기생이라 조금만 시각이 늦어도 술자리를 뜨는 소월이었지만 우진과 함께 있는 날이면 늦은 시각까지 그의 곁에서 술시중을 들어주었다.
우진이는 다른 사내처럼 시 한 자락을 읊지도 못하는데도 소월은 그런 그의 곁에 묵묵히 앉아 있었다.
“여기서 잠시만 계셔 보세요. 내가 말씀 드려 볼 테니.”
소월은 여전히 말없이 동복에게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그리곤 겉싸개로 다시 얼굴을 감싸고 그렇게 대문 한 켠에 서서 우진을 기다리고 있었다.
“네가 여긴 어인 일로.”
동복이의 징그러운 교태를 받아내기가 무서워 얼른 장부를 들고 나온 우진이었다.
그런데 대문 앞에 생각지도 못한 사람이 서 있어 깜짝 놀랐다.
“지나가는 길에 잠시 인사나 드릴까 하여 기다렸습니다.”
소월이는 아무일도 아닌 것처럼 덤덤하게 대답했다.
우진이 소월을 알게 된건 송상에 들어가 행수를 따라 몇 차례 기방에 들르게 되면서였다.
그 곳에서 매창 만큼이나 시와 노래에 능하다는 소월이를 알게 되었다.
몰락한 양반 집안에서 자란 우진은 살기 위해 글공부 보다 돈 벌기를 택했다.
그리하여 장돌뱅이를 하게 된 뒤로는 글을 제대로 배우지 않아 시나 책을 잘 알지 못했다.
그런 그에게 소월은 책과 글을 알려주고 시와 책을 들려주고 권해줬다.
자신은 전국을 돌며 상민과 농민들과 어울리는 통에 잘 알지 못했던 양반들과 정치에 관한 이야기도 소소히 알려주곤 했다.
소월이가 유명한 기생이란는 것도 우진은 처음엔 잘 알지 못했다.
그저 행수 어르신 따라 몇 번 갔는데 이 후부터 소월이는 줄곧 어르신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제 옆에 앉기를 반복했다.
어르신이 다른 아이와 다른 방에서 정을 나눌 때도 소월이는 늦은 시각까지 제 옆에 앉아 글과 시를 알려주곤 했다.
그러다 전라감영이 소월이를 찾는다는 말을 우연히 듣게 되었는데 그제야 그가 얼마나 유명한 기생이며 자신처럼 늦게까지 시간을 그와 같이 한 사내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뒤로 우진은 소월에게 거리를 두었고, 소월은 그런 그에게 서운함을 갖고 있었다.
그러다 몇 달 전 결국 소월이 그에게 자신의 마음을 드러내 보인 것이다.
“소월아.”
“예. 압니다. 그러니 더는 말씀 마셔요.”
총명한 여인이다.
항상 많은 말을 하지 않아도 의중을 알아채고 먼저 행동에 옮겨주었다.
그래서 그녀랑 있을 때는 편안했고, 둘이 있는데도 홀로 있는 듯 생각에 집중할 수 있어서 좋았다.
그러니 많은 사람들이 그녀를 찾는 것이리라.
“가자. 월명관까지 함께 가주마.”
“예에.”
소월은 짧은 거리지만 우진이와 함께 걷게 되는 것이 기뻤다.
몇 달 만에 보는 그란 말인가.
하고 싶은 말은 마음속에 가득한데 그 모든 말을 꺼내었다간 우연히 마주쳐도 모른 척 지나갈까 두려워 마음속에 고이고이 접어 두고 그를 뒤따랐다. 그렇게 아무 말 없이 한참을 걸었다.
둥둥둥! 둥둥둥!
갑자기 들려오는 북소리에 소월과 우진은 영문을 몰라 서로를 바라봤다.
둥둥둥! 둥둥둥!
이번엔 아까 보다 더 세차게 들려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