둥둥둥! 둥둥둥!
갑자기 들려오는 북소리에 소월과 우진은 영문을 몰라 서로를 바라봤다.
둥둥둥! 둥둥둥!
이번엔 아까 보다 더 세차게 들려온다.
“신문고 소리가 아니냐?”
“예. 그런 것 같아요.”
신문고 소리를 들은 사람들은 모두 관아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우진과 소월도 관아로 다가갔다.
“사또. 제 청을 들어주시옵소서.”
방금까지 신문고를 두드린 남자가 관아 마당에 엎드려 고개를 숙이며 사또에게 읊조렸다.
“어디 사는 누구인고?”
그러자 대청마루의 한 계단 아래에 선 이방이 남자를 보고 시큰둥하게 물었다.
“소인. 주산에 거주하는 사람이옵니다.”
“그래. 너의 청을 말해 보거라.”
대청마루 한 가운데에 놓인 의자에 앉은 현감이 진지하고 근엄한 표정으로 사내에게 말했다.
“사또. 본디 소인은 올해 정인(情人)과 혼인을 하려고 하였사온데 흉년이 들어 혼인비용이 부족하게 되었습니다. 올해 제 나이가 벌써 열아홉을 지나 스물이 되옵고 아픈 노모가 계십니다. 올해는 혼인을 꼭 치르고 싶습니다. 부디 저를 불쌍히 여겨주시고 어진 사또께서 제 간곡한 청을 들어주소서.”
“혼인비용을 대달라는 말인 것이냐?”
현감은 사내의 구구절절한 말을 한마디로 정리하며 되물었다.
“예. 사또.”
“어허. 무엄하다. 어디 나랏돈을 사사로운 곳에 쓰게 해달라고 청한단 말이냐.”
돈을 대달라는 말에 발끈한 이방이 사내에게 큰 소리로 쏘아댔다.
남자는 형벌을 받을까 두려움에 떨면서도 간절한 마음으로 현감에게 계속 청을 했다.
“사또. 부디 도와주시옵소서. 저는 언년이와 필히 혼인을 하고 싶습니다. 제 사랑을 지켜주시옵소서.”
“어허. 어허. 네 이놈이 말을 못 알아듣는 게냐? 어느 안전이라고 개인의 연정 따위를 나랏영감께 고하는 것이냐? 어서 끌어내거라.”
이방의 칼날 같은 말에 옆에서 대기하고 있던 포졸들이 남자를 끌고 나가려 했다.
“그만 두어라.”
현감이 멈추게 하자 포졸들이 빠르게 풀고 제 자리로 돌아갔다.
이방은 그 모습을 보며 쓸데없이 나랏돈을 낭비할까 조마조마하며 현감을 쳐다봤다.
“올해 흉년이 드는 것이 너에게만 닥친 일은 아닐 터, 너와 같은 사람이 이 고을에 얼마나 많이 있겠느냐. 허나, 사랑하는 정인(情人)과 함께 하고자 하는 깊은 너의 연심으로 이 곳 까지 와서 나에게 읍소를 하였으니. 너의 용기를 갸륵하게 여기노라. 하여 통상적으로 드는 혼인비용의 전부는 가당치 않으나 그 반값은 내어주도록 하겠다.”
“감사합니다. 나리. 감사합니다.”
사내는 간절한 마음에 현감을 찾아 신문고를 두드리긴 했지만 진짜로 자신의 청을 들어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자신의 마음을 헤아려 준 사또에게 연신 감사의 인사를 드렸다.
“향리. 저 자의 정인과 양가 부모님을 만나 확인하고 그에 합당한 돈을 내어주도록 하시오.”
“예. 사또.”
이방은 현감의 처리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일단 그 자리에서는 현감의 뜻대로 하겠노라고 대답했다.
*
“나리는 어찌 생각하세요?”
“무얼 말이냐?”
“방금 저 사내 말입니다. 사또는 청을 들어주었지만 이방은 탐탁지 않게 생각하는 듯 보여서요.”
“용기가 있는 사람이라 느꼈다. 다른 이유도 아니고 형편이 곤궁하여 혼인을 못하는 것이라 사내 마음에 꽤 힘이 들었을 텐데. 저리 많은 사람 앞에서 읍소를 하는 모습이 대단하다 생각했다.”
“... 진정 연모했나 봅니다. 놓치고 싶지 않을 정도로.”
우진은 대답 대신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요 근래 들어 우리 고을 뿐만 아니라 나라 전체에 독신 남녀가 많아졌다고 해요. 그 중에 많은 수가 형편이 어려워 혼인을 못하고 있는 것이라던데. 저러다 그 많은 사람들이 모두 몰려와 혼인 시켜 달라고 하면 어찌될까요?”
“저 사내처럼 용기 있는 사람들이 그리 많을까.”
우진은 혼인에 대해서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제 형편도 어렵거니와 지금 당장 그에게 혼인 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돈을 벌어 집안에 보탬이 되는 것.
그리고 적자인 형님이 과거공부에 정진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그에겐 더 급했다.
그러나 순간 어제 그 칠칠치 못한 여인이 문득 떠올랐다.
혼인 할 생각은 없지만 그런 여인과 혼인했다간 내조 받기는커녕 아내의 뒷수습만 하러 다니기도 바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갑자기 그 여인이 생각났는지 모를 일이다.
우진은 시덥지 않은 생각을 하는 자신이 낯설어 헛웃음을 지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갑자기 우진이 미소를 지었다.
그의 생각이 궁금하다.
그의 머릿속에 들어가 노를 저으면 그것을 찾아낼 수 있을까.
그렇게 우진을 몇 번이고 바라보며 조금 더 걸었을 뿐인데 벌써 월명관 앞에 다다랐다.
‘몇 마디 나누지도 못했는데...’
소월은 아쉬움에 바로 들어가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머뭇거렸다.
“어서 들어가 보거라.”
“...”
“...그리고... 앞으로 헛걸음은 하지 말거라.”
“...나리...”
소월의 눈빛이 우진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서운하고 간절했다.
하지만 여지를 두어서는 안 될 일이다.
소월의 마음을 뒤로 하고 우진은 매정하게 뒤돌아 갔다.
소월은 멀어지는 우진을 보았다.
마음을 다잡으려 했는데 어느새 뺨 위로 맑은 물방울이 또로록 흘러 내렸다.
*
“어머니. 어머니. 나와보셔요. 언년아. 언년아. 너도 어여 나와봐.”
사내는 자신의 집에 다다르자 어머니와 정인의 이름까지 부르며 호들갑을 떨었다.
“이미 살림을 차린것이냐?”
이방이 비꼬며 물었다.
“당치 않으십니다. 어미가 노쇠하여 언년이가 낮에 와서 돌봐주고 밥을 해주고 가느라 그렇습니다.”
억울한 누명이라도 쓴 듯 사내는 고개를 세차게 저으며 해명했다.
그러나 이방은 영 시원찮은지 그저 헛기침을 했다.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한 여인이 부엌에서 바가지를 들고 급하게 나왔다.
“이방님이여. 이방님. 우리 혼인비용을 대 주겠대”
“정말이야?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혼인비용이라는 소리에 여인이 반색하며 향리에게 연신 꾸벅 꾸벅 절을 해대었다.
거동이 어려운 그의 어미는 문만 열어젖히고 이 모든 말을 듣고 있었다.
“어머니. 이제 걱정하지 마셔요. 나랏님이 다 도와주신답니다.”
혼기 찬 아들을 보며 장가도 못 보내고 혹여 먼저 갈까 노심초사 했던 어미는 옷고름으로 눈물을 닦았다.
“여인의 부모는 어디에 사시는가?”
“아랫마을에 계십니다. 뫼셔 올까요?”
사내는 향리를 안방에 모셔 놓고 부리나케 달려갔다.
안방에 들어온 향리는 인상을 찌푸렸다.
좁은 방에 창호지는 다 헤져서 얼기설기 붙여진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 사이 언년이는 맹물이 담긴 대접을 낮은 소반에 얹어 향리에게 건넸다.
“대접할게 이 것 밖에 없네요. 죄송해요.”
“끄응.”
손님이라고 자신에게 대접이라도 하려고 노력하는 모습도 이방은 이유 없이 꼴보기 싫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이방은 사내를 기다리는 이 시간이 너무도 지루했다.
노모와 언년이는 죄 지은 것 마냥 무릎 꿇고 앉아 있었다.
이 서먹함과 불편함은 현감에 대한 분노로 모아졌다.
쓸데없는 짓을 벌이는 현감이 참으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현감은 말만 하면 그만이지만 실제로 이 고을을 다스리는 것은 향리의 몫이기 때문이다.
현감은 임기 몇 년 만 잠시 있다가 떠나면 그만이다.
하지만 고을을 다스린다고 현감이 몇 마디라도 질러 놓으면 그 일을 수습하는 건 항상 이방 그의 몫이기 때문이다.
지금의 현감은 아직까지 이렇다 할 일들을 내놓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던 차였는데.
갑자기 이 무슨 일이란 말인가.
혹시 자신 몰래 꾸미고 있는 일이 따로 있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되었다.
“나리. 언년이 부모님 뫼시고 왔습니다.”
“뫼시고 들어오거라.”
향리의 말에 사내와 장차 장인, 장모가 될 부부가 함께 방안으로 들어왔다.
“이야기는 들으셨을테고. 정녕 이 둘의 혼인을 허락 하시는 겁니까?”
향리는 사내와 여인의 부모를 보며 물었다.
“예에. 여부가 있습니까. 이리 도와주셔서 참으로 감사합니다.”
여인의 아비가 감읍한 표정으로 향리에게 대답했다.
그러자 두 안주인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현감께서 말씀 하신대로. 여기 혼인비용이요. 그리고 여기 지장을 찍으시게나.”
향리는 엽전 뭉치와 수령증을 내밀며 인주와 함께 건넸다.
황급히 엽전을 세던 사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향리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나리. 사또께서 분명 통상의 반값에 해당하는 혼인 값을 주신다고 하였는데요. 이것은 그 반값에서도 반의 반입니다.”
“사또께서 여기 부임하신지 얼마 되지 않아 관아 형편에 많이 어둡네. 따라서 관아의 형편에 따라 자네에게 내 줄 수 있는 최대 값을 내어준 것이네.”
“어찌 이러실 수 있단 말입니까? 분명 사또님의 이야기와는 다르지 않습니까?”
“자네 이러면 안 될세. 자네와 자네 부친, 그리고 여기 여인의 오라비와 그 동생. 그리고 그 할아버지의 군포가 아직 해결이 되지 않았네. 그리고 이웃집 삼돌이네의 군포도 아직 치르지 않은 것을 모르진 않겠지?
“어찌 이러십니까. 저의 아비는 돌아가신지 이미 몇 해 되었고, 언년이 할아버지도 돌아가셨습니다. 그리고 삼돌이네는 이사 간지 여러 해 되었고 저희와 친척도 아닌데 어찌 군포를 내라 하십니까?”
“나라법이 그러한 것을 내가 어찌 알겠는가.”
“나리!”
“어허! 자네의 군포가 아직 해결되지 않았음에도 사또의 명으로 이리 큰돈을 내어주거늘!
어찌 은혜도 모르고 성을 내는 것인가.”
“무슨 수로 이 값을 가지고 혼인을 치른답니까?”
“그럼 이 돈은 필요 없다? 정 그렇다면 내 그만 일어나겠네.”
“아... 아닙니다.”
이방이 엽전 뭉치를 움켜쥐며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자 사내가 가로막으며 이방을 앉혔다.
“검소하게 치르게. 검소하게. 남들 다 하는 그런 거 전부 하려고 하지 말고. 적당히. 검소하게.”
사내가 자신의 손과 어미의 손에 인주를 묻혀 수령증에 찍는데 향리가 옆에서 훈계를 두었다.
“아, 이것은 단지 혼인비용만 말하는 것이네. 아까 말한 군포는 해결된 것이 아니니 시일에 맞춰 꼭 납부 하시게.”
사내와 언년이 가족은 이방의 뻔뻔함에도 뭐라 말도 못했다.
그저 가만히 앉아 속으로만 화를 삭히고 있었다.
“자, 그럼 혼인 축하하오.”
반면, 제 일이 다 끝난 이방은 힘껏 자애로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비열한 사람.’
사내는 혼인의 기쁨 보다 이방을 향한 쓰디쓴 감정이 더 크게 일었다.
*
“희원아. 희원아.”
며칠 잠잠하다 했다.
그러게 이상하다 했다.
단이는 다시 시작된 예전과 똑같은 생활에 고개를 내두르며 빗질을 했다.
며칠 동안 희원은 왼쪽 가슴이 계속 뛰어 아프다면서 일어나지를 못했다.
그렇게 끼니도 잘 챙겨 먹지도 못하고 누워 있기만 했다.
누워 있는 희원이 걱정된 정부인이 약방에 약을 구하러 나갔다.
갑자기 일어난 희원이 그 틈을 타서 책방을 다녀온 것이다.
약방에서 돌아온 정부인은 별채로 이어진 중문에 들어서자마자 뛰었다.
그리곤 있는 힘껏 희원의 방문을 열어젖혔다.
“설마 또 나갔다 왔느냐?”
방안을 살피며 두리번거리던 정부인이 의심의 눈길로 희원에게 물었다.
“아닙니다. 어머니.”
아직까지 누워 있다 이제야 일어난 듯 희원이 천천히 이부자리에서 일어나며 정부인에게 대답했다.
“저잣거리에서 너랑 비슷한 여인을 내가 본 것 같은데...”
“그러셨어요? 소녀는 아직 몸이 좋지 않아 누워 있었어요”
“정녕 나가지 않은 것이냐?”
“예에.”
희원은 가슴을 천천히 쓸어내리며 정부인에게 결백을 주장했다.
의심스럽지만 확실한 물증이 없으니 이쯤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는 정부인이었다.
정부인이 중문을 빠져나가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희원은 잽싸게 이불 밑에 숨겨두었던 언문책을 꺼내 읽기 시작했다.
“아픈지 얼마나 됐다고 또 뜀박질을 하신겝니까아?”
희원은 답을 하지 않고 책에만 집중했다.
“이젠 다시 뜀박질을 해도 괜찮으신 겁니까?”
“응. 괜찮더라고. 이게 잠시 나한테 화를 낸 것이 맞다니까!”
희원은 천진난만한 표정을 지으며 걱정 말라는 듯 제 가슴을 토닥이며 말했다.
“이 책은 또 무엇이에요?”
“자유연애 지침서.”
“그게 뭔데요?”
“단아. 내가 말하지 않았느냐. 하늘과 땅이 있듯이 음양이 있다고. 사내와 여인이 정을 나누는 것을 도와주는 일종의 길잡이 책이라는 거지.”
“그게 왜 필요한데요?”
“정인(情人)을 만나기 위함이지.”
“그래서요?”
“우리 단이는 설명을 해도 해도 다시 본래로 돌아오게 만드는 재주가 있구나.”
“그런걸 뭐하러 읽으십니까?”
희원은 단이의 물음이 귀찮다는 듯이 그에게 관심을 주지 않고 책만 들여다봤다.
“아씨. 그러지 마시고 그냥 혼인을 하십시오. 혼인을 하면 낭군님과 알콩달콩 재밌을 테니 그런 책은 필요 없지 않겠습니까.”
“떽! 나는 혼인을 하고 싶은 게 아니다.”
“... 그러면요?”
“연애를 하고 싶은 것이다. 흐흐흐.”
“연애요? 어차피 그건 혼인 하려고 남녀가 만나는 거 아닙니까?”
“쯧쯧. 단순히 혼인을 하려고 연애를 하려는 게 아니란 말이다.”
“서로 알아가고, 정을 나누고. 또 ...”
“그러니까요. 혼인하면 다 할 수 있는 일을 왜 이런 책까지 보시면서 그러시냐고요?”
“에이. 됐다. 아까도 말했지만 넌 설명을 해도 해도 다시 본래로 돌아오게 만드는 재주가 있구나.”
“혼인을 안 하면 어디 가서 사내를 만나신단 말입니까? 마님께서 저리 딱 지키고 계시고, 아씨는 필히 마님께서 정해주신 혼처로 가야 된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러니 내가 이 책을 읽는 것이 아니냐.”
“제가 볼 땐 아씨야말로 이야기를 해도 해도 본래로 돌아오는 것 같습니다. 책만 읽으면 뭐합니까? 만나셔야죠.”
“그러니까 그게 문제야. 근데 딱 정해진 혼처 말고, 여러 사내들만 모아 놓는 자리가 있다면...”
희원은 단이에게 가까이 다가가며 말했다.
“거기서 뭐하시게요?”
단이도 희원에게 얼굴을 들이밀며 물었다.
“가서 골라야지. 내 낭군님을.”
눈을 반짝이며 희원이 대답했다.
“에이~ 남녀칠세부동석인데 누가 그런 일을 벌인단 말입니까?”
“흐음...”
그렇다.
여기는 성리학의 나라.
조선이다.
그런 일이 실제로 일어나겠는가.
희원과 단이는 머리를 맞대고 서로 다른 방향의 천장을 바라보았다.
*
“예에?”
이방은 우진의 제안에 깜짝 놀라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말이 됩니까? 남녀칠세부동석이라 했습니다. 어찌 그런 불경스런 말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