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정은 들어서는 안되는 비밀을 들은 것 같이 마음이 철렁 내려앉았다. 하지만 이런 하정의 마음과는 상관없이 윤소저는 자신의 말을 계속 이어갔다.
“압니다. 저는 제 마음과는 상관없이 가문이 정해준 혼례를 해야 한다는 것을요. 하지만 도련님께 작별 인사라도 남기고 싶습니다. 제가 다시 그 분 곁에 나타나지 않더라도 절 걱정하거나 찾지 않게 하고 싶어요.”
하정은 말리고 싶었다. 혼례를 앞두고 있다는 말은 이미 윤소저는 다른 남자의 여자라는 뜻이었다. 하고 싶어도 해서는 안되는 것이었다.
“하, 하지만 아가씨.. 깊은 정에 그 분께서 혹 잘못된...”
“그럴 일 없을 거에요.”
하정의 걱정은 윤소저에 인해 가로 막혔다. 담담히 내뱉는 윤소저의 기색이 슬퍼보였다.
“그 분은 저를 여인으로 보지 않으세요. 그리고 제가 윤대감의 여식인 것도 모르세요.”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슬픔이 묻어나던 윤소저의 얼굴빛에 살며시 홍조가 나타났다. 그녀의 홍조는 분명 연모하는 도령을 향한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산 너머 불어오는 봄바람이 여인의 볼에 살랑거리고, 고운 햇살이 치맛자락에 아름답게 퍼지던 일 년 전이었다.
윤소저는 큰 나무기둥에 숨어 한 곳을 몰래 엿보고 있었다. 그녀의 시선이 머무는 곳에 화사한 미소로 학당 동기와 이야기를 나누는 꽃도령이 있었다. 아버지와 가문의 체통을 위해 한 번도 나서서 꽃도령에게 다가서지 못한 채, 몸종까지 따돌린 후 은밀히 훔쳐보고 있었다.
“잘 생기긴 했지?”
굵직한 남성의 목소리가 그녀의 뒤통수에서 들려왔다. 화들짝 놀란 윤소저가 뒤를 돌아봤다. 자신보다 키가 크고 눈매가 시원하게 생긴 도령이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뉘, 뉘신데 반가의 여인에게 말을 거시는 겁니까?”
“반가의 여인이 도령을 몰래 훔쳐보는 것은 괜찮은 거요?”
아이..씨. 들켰나? 하지만 인정할 수도 없었고 인정해서도 안되었다. 해서 조신하게 시치미를 뚝 때었다.
“무슨 오해가 있으신 듯 합니다.”
“오해요?”
도령은 엉덩이를 슬쩍 빼고 허리를 굽힌 채 나무 옆으로 얼굴을 빼꼼히 내어보는 것이다. 조금 전 그녀가 취했던 자세와 눈길을 따라한 것이었다.
“이렇게 보면 저기 꽃도령 밖에 보이지가 않는데요.”
“정말 왜 이러십니까. 오해라는데..”
윤소저가 발끈했다.
“오해라니 할 수 없군. 하지만 그대가 내 여동생 같아 한 가지 조언은 남겨 드리리다. 꽃도령을 연모하는 여인이 그대 하나만이 아니오. 이런 방식으로는 꽃도령의 마음은커녕 눈길 한 번 받기 어려울 것이오.”
뒤돌아서 두 걸음쯤 갔을 때 도령의 팔이 그녀의 손에 의해 잡혔다.
“어떻게 하면 눈길도 받고 마음도 받을 수 있습니까?”
행복한 꿈을 꾸고 있는 듯 이야기를 하고 있던 윤소저의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그렇게 인연을 맺었지요. 조언을 받기 위해 만나다 보니 언젠가부터 제 마음에 도련님이 들어와 있었습니다.”
“그럼.. 말을 하시지 그러셨습니까?”
하정은 안타까워 저도 모르게 말을 내뱉었다.
“그럴 수 없어요.”
“왜요?”
“처음엔 신분노출을 막기 위해 제 이름과 신분을 속였습니다. 이 후에 밝히려고 했을 땐 대윤으로 인해 그 도련님 아버님이 귀양을 가셨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
이런 몹쓸 인연이 어디 있단 말인가. 하정은 애처로워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도련님이 저 같은 여인을 스쳐가는 인연으로 생각할 수 있게 진도원님 도와주세요. 그렇게 할 수 없다면 저는 차라리 오늘 계곡물에 빠져 죽는 게 나았을 거에요.”
죽음이라는 말에 하정은 다시 한 번 마음이 철렁 내려앉았다.
“아가씨 어찌 그런 말씀을... 제가 뭘 해야 하는데요?”
윤소저는 그녀 앞으로 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그 안에 편지가 들어 있습니다.”
서신이 담긴 봉투를 보는 하정의 눈빛에 두려움이 비쳤다.
“또다시 거짓말을 적었습니다. 아버님이 낙향하기를 원해 모든 가족이 한양을 떠난다는 내용입니다. 부탁합니다.”
애처로운 빛을 발하는 윤소저의 눈길과 마주치자 하정은 봉투를 거머쥘 수 밖에 없었다.
***
탕! 탕!
금명이 집무실 자신의 책상을 내리친 후 어이없는 표정으로 하정을 보고 있었다.
“제 정신이야?”
하정으로부터 윤소저의 서신에 관해 대충 얘기를 듣자마자 보인 반응이었다. 하정은 움찔했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준다고 그것을 달랑 가지고 오면 어떡해? 지금 이게 얼마나 심각한 일인지 몰라?”
“저도..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그게 지금 할 소리야? 이 일이 윤대감 귀에 들어가기라도 하면 거래만 끊어지는 게 문제가 아냐. 이 면주전도 위험해진다구.”
“아, 아가씨의 사연을 듣고는 차마 거절할 수가 없었습니다. 행수님께서 들으셨어도..”
“어떻게라도 둘러댔어야지.”
“그래서 이번 한 번 만이라는 약조를 받았어요.”
“한 번?”
금명은 코웃음을 쳤다.
“이 서신을 읽고 도령이 윤소저를 데리고 야반도주라도 하겠다고 결심하면 어쩔 거야?”
“그럴 염려는 없어요.”
“니가 어떻게 알아?”
“짝사랑이에요. 아가씨께서 혼자.. 내용도 한양을 떠난다는 작별인사에요. 혼사를 앞두고 아가씨가 집 밖 출입이 어려워 부탁하신 거에요.”
“그래서 결국 전달하겠다는 거야?”
“5방 사람인지 모르게 전달할게요. 그냥 서신만 주고 오면 돼요.”
“그거 지금 나더러 안심하라고 하는 말이야?”
“제 앞에서 천장을 보시는데 목이라도 맬 것 같은 표정이었어요. 혼례도 하기 전에 죽으면 안되잖아요. 그건 행수님도 원하는 게 아니죠?”
이 계집애가 정말.. 부글부글 끓는데 금명은 어쩌지 못했다. 그녀는 순진했다. 순진해서 속고, 순진해서 일을 벌이고, 그런데 어느 순간 진실을 부여잡고 한방에 훅 하고 들어온다. 지금과 같이.
얼마나 어렵게 기회를 잡았단 말인가. 하정의 말처럼 윤소저는 지금 죽어서도 안되고 죽게 해서도 안된다.
***
달이 산마루에서 떨어져 나와 온 들과 초가지붕에 포근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림자를 앞세워 사립문을 열고 들어온 하정은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천당과 지옥을 여러 차례 오고 간 피곤한 하루였다.
“어, 다녀왔어?”
마루턱에 걸터앉아 있던 서가락이 자리에서 엉거주춤 일어나며 물었다. 그는 하정이 마루로 와서 앉자 다가와 앉으며 그녀의 기색을 살폈다.
“근데.. 5방 행수가 무슨 일로 보자는 거야? 저.. 혹시, 오늘 낮에 있었던 일 때문에...”
“아저씨랑 상관없어요.”
서가락의 얼굴에 안심의 빛이 돌았다.
“그래? 난 또 하루 종일 걱정했네. 그럼 왜 부른 거야?”
“전방에서 며칠간 일해 달래요.”
하정은 거래를 누설하지 않겠다는 약조를 금명과 했기에 자세한 얘기를 해줄 수 없었다.
“겨우 며칠간만? 일을 주려면 좀 오랫동안 할 수 있게...”
하다가 하정이 자신을 흘기고 있음을 알아채고 말꼬리를 흐렸다.
“오해는 마! 어차피 당장 고향으로 갈 수 없으니 넉넉한 일거리라도 있으면 좋겠다는 거지.”
“가긴 어딜 가요? 넉 달 뒤에 가족들이 한양으로 올거에요. 정말 어쩌시려고 그랬어요?”
“정말 미안해. 그때는 정말 나중에 돌에 맞아 죽더라도 아픈 아이를 살려야겠다는 생각밖에 할 수 없었어. 아이만 괜찮아지면... 이 집이라도 팔아서 갚아야지. 암, 꼭 갚아야지.”
그의 집은 한양에서도 변두리에 자리한 낡은 초가였다. 한양의 북촌이나 번화가에 번듯하게 자리한 기와집들과 비교하면 초라한 모습이었다. 도성 안에서는 농사를 지을 수 없다. 해서 하정의 시골집에도 있는 외양간도 없었기에 전체적인 집의 크기는 그녀의 시골집보다 작았다.
하정은 다시 한 번 더 금명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도대체 시전을 겨우 100냥에 살 수 있다고 생각했다니..
겨우 100냥. 몇 칸 공간을 얻는 대가로 시골에서는 100냥씩이나 였는데, 이곳에서는 겨우 100냥이 되고 말았다. 이것은 현실이지만 그의 무시하는 듯한 목소리는 그녀의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아저씨, 5방 행수는 어떤 사람이에요?”
“어?”
“아니.. 그냥 좀 냉정한 거 같아서요.”
“그런 면이 있기는 하지. 근데 그게 사별한 아내 때문에 더 심해졌다고 하더라구.”
“사별한 아내요?”
하정은 흠칫 놀랐다. 부인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사별을 했다고는 생각지 못했다.
“죽고 못 사는 여자가 있었는데 그 여자가 병약했었데. 그런데 그 사랑이 뭔지 서행수는 부모의 반대를 끝내 설득해 혼례를 치렀지.”
“.....”
“부부간 금실이 좋으면 하늘이 질투한다고, 부부 연을 맺은지 일 년 만에 아내가 병으로 그만 세상을 뜨고 말았지.”
“어머나..”
하정은 금명의 야멸차고 냉정한 모습 속에 이런 아픔이 숨어 있었다고 생각하니 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 이후로 서행수 집 안에서는 재혼을 시키려고 하는데 서행수가 눈도 깜빡하지 않는 거야. 아내를 잊지 못해서. 근데, 인물이 워낙 잘 났잖아. 그래, 여기저기서 여인네들이 접근을 하는데.. 사내가 그걸 물리치려니 냉정해질 수 밖에 없지.”
순정을 지키려 냉정해졌다니.. 낭만적이면서 슬픈 이야기였다. 역시 겉모습만 보아서는 알 수 없는 게 사람이었다.
“아내는 어떤 분이셨어요?”
“나야 모르지. 아내가 한양 사람이 아니었거든. 혼례 후에도 아내 병 치료 때문에 처가살이를 했다고 하더라구.”
하정은 금명의 순애보를 듣다보니 윤소저의 순정이 떠올라 중얼거렸다.
“그렇게 연정을 아는 사람이 왜 그런 식으로 말할까요?”
“뭐?”
“아, 아니에요. 제가 잠깐 딴 생각을 했어요.”
“건넌방 치워놨어. 이불도 가져다 놓았으니까 오늘부터 그 방에서 지내.”
“예. 고맙습니다.”
***
눈만 빼꼼히 드러난 쓰개치마를 뒤집어 쓴 하정이 종종걸음으로 한 민가를 향해 가고 있었다. 저만치서 보이는 집의 지붕은 기와로 덮여 있었지만 살짝 기울어진 담장이며 부서진 용마루 등 한 눈에 보기에도 오래되고 낡아보였다.
지난 밤 하정은 윤소저가 가르쳐 준 강도령의 집 앞에서 금명을 만나기로 했었다. 한양지리에 어두운 하정이기는 했지만, 아침 댓바람부터 남자와 함께 하면 사람들의 이목을 받을 게 뻔했다. 더구나 금명은 어딜 가도 눈에 뛸 만큼 잘난 남자였다.
급한 걸음으로 약속장소인 민가의 모퉁이를 막 돌아서던 때였다.
“앗!”
하얀 벽과 부딪쳤다고 생각했는데 그리 아프지는 않았다. 시선을 위로 올려다보자 자신을 한심하다는 듯 내려다보는 금명의 눈길과 마주쳤다.
“니가 말한 5방 사람인지 모르게 하겠다는 게 고작 이걸 뒤집어쓰는 거였어?”
“행수님이 사내라서 모르시겠지만 이렇게 뒤집어쓰면 내가 누구인지 들킬 수가 없어요.”
“정말?”
“그럼요.”
금명의 손길이 그녀의 어깨로 가더니 휘리릭~, 하정의 쓰개치마가 벗겨졌다.
“이래도?”
“잡, 잡아당기면 어떡해요?”
하정은 어물어물 그의 눈길을 피하며 얼른 쓰개치마를 다시 뒤집어썼다.
“걱정하지마세요. 글 읽는 선비는 행수님처럼 쓰개치마를 잡아당기지 않아요. 강도령은 보셨어요?”
“아직.”
금명은 못마땅한 투로 짧게 대답했다.
“곧 오실거에요. 달포에 두 번씩 절에 다녀오신다고 하더라구요.”
“다시 얘기하는데 서신만 전해 주는 거야. 다른 부탁 같은 거 들을 생각은 아예 하지마. 알았어?”
“알겠어요. 어? 어 저기, 읍!”
하정의 시야에 유려하게 생긴 선비의 모습이 보이자 손가락으로 가리킬 때였다. 금명이 하정의 어깨를 휙 돌려세워 손으로 그녀의 입을 가린 채 담장 벽으로 밀어붙였다.
“조용히 해.”
금명이 낮고 조용히 속삭이자 하정은 고개를 끄덕이며 알겠다는 신호를 보냈다. 그러자 금명은 그녀의 입에서 손을 떼었다. 하지만 들키지 않기 위해 벽에 붙은 두 사람의 간격이 너무 가까웠다.
“내가 지시할 때까지 기다려.”
콩닥콩닥 빠르게 뛰는 가슴 때문에 하정은 대답을 할 수도 고개를 끄덕일 수도 없었다. 강도령이 오는 것을 가늠하고자 고개를 돌리고 있는 금명은 쓰개치마 속 하정의 얼굴이 붉어진 것을 볼 수가 없었다.
“내가 셋 세면 나가. 하나, 둘, 셋.”
잠시 멍했던 하정은 ‘셋’ 소리와 함께 모퉁이에서 튕겨져 나왔다. 집 대문으로 들어서려던 강도령은 갑자기 나타난 쓰개치마 여인을 보자 발걸음을 멈췄다.
강도령을 보자 정신을 차린 하정은 쓰개치마를 더욱 눌러쓰며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저.. 강수찬 도련님 되십니까?”
“그렀습니다. 뉘십니까?”
하정이 쓰개치마 속에서 봉투를 내밀며 모기소리 만한 소리로 속삭였다.
“이것을 받으시지요.”
“이게 뭐요?”
강도령은 의아한 눈길로 쓰개치마 여인을 볼 뿐 봉투는 받지 않았다.
“이소영 아가씨께서 보내셨습니다.”
그래도 강도령은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다.
어? 왜 가만있지?
하정이 빼꼼히 고개를 들어보면 강도령이 굳은 얼굴로 봉투를 보고 있었다.
“이소영 아가씨께서...”
“난, 받을 수 없소.”
뭐? 하정의 눈이 놀라 동그래졌다.
“난 받을 수 없으니 도로 가져가시오.”
“예? 아, 저..”
뭐라 말도 해보기 전에 강도령은 대문을 열고 들어가더니 쿵! 굳게 닫아버렸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하정은 어리둥절했다.
“어떻게 된거야?”
금명이 어느새 하정 곁으로 다가와 있었다.
“모, 모르겠어요. 아가씨가 보낸 서신을 안 받겠다고.”
“뭐?”
금명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서신만 전해주면 된다더니.. 또다시 꼬여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