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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 류다
작품등록일 : 2016.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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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화: 지극히 '평범한', 어느 수험생의 이야기>
작성일 : 16-09-22     조회 : 728     추천 : 0     분량 : 89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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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야, 들어와"

 

 

 지금이 몇 시나 됐다고 벌써 저 타령이다. 에휴. 야자까지 끝내고 밤 11시가 되어서야 터덜터덜 정해진 목적지를 향해 걸어갈 수 있는 '자유'를 얻었는데, 이 터덜거림조차 일정한 템포에 맞춰서 제 시간에 귀가하기를 바란다. 11시 37분. 내 손목을 휘감고 있는 이 시커먼 전자시계가 멍한 송장같이 깜박거리고 있는 숫자다. 평소의 귀가시간은 11시 20분에서 25분 가량. 걸음이 비교적 빠른 편이라 사실은 버스에서 내린 지 5분 정도면 거뜬히 집에 갈 수 있을 거리다. 하지만, 채 30분 남짓의 이 귀갓길은, 바로 내가 하루에 반복하는 일과들 중 가장, 어쩌면 유일하게, 기대하는 시간이다.

 

 언제나 새벽 5시 반에 일어나서, 의무적으로 머리를 감고 간단히 샤워를 마치면,

 

 '오늘은 언니 자니까 드라이기 화장실에서 해라.',

 '아니, 언니는 왠일로 집에 왔대 오늘? 알았어요.'

 

 아침밥을 '들이켜 마시고', 허겁지겁 셔츠 블라우스 단추를 채우지도 못한 채로 셔틀버스를 부여잡는다. 아저씨의 눈초리. '오늘도 늦잠 잤냐?' '야 루인아, 너 좀 빨리 좀 와라!' '아, 그래도 탔잖아..' 휴, 오늘은 앉을 자리가 있다. 왠일인가, 내 자리도 맡아주고. 매점에서 빵이나 하나 사줄까. 30분의 자습시간 후 시작된 수학선생님의 텅 빈 눈빛은 우리를 어루만지지 못하고, 그저 기계처럼 반복되는 그의 손짓은 검초록빛 칠판과 하나가 된다. 그 전날 밤 TV에 나온 잘생긴 '오빠'들을 찬양하며 속삭거리는 입술들이 내 친구들이라니. 이번 수업시간에는 저 무리 속에서 도저히 버틸 수 없을 것 같다. 고개를 엎드려 눈을 감고, 광활한 어둠으로 잠시 빠져든다.

 

 공허한 눈빛으로 우리를 지나치던 수학 선생님의 시선이 교실 밖을 향하면서 수업의 끝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리고 나면, 은밀하게 속삭이던 우리들의 사지도 당당히 움직일 수 있는 허용권을 부여 받는다. 다만 딱, 그 틀 안에서일 뿐이다. 각자 전 수업이 선사해 준 '옥중생활'에 대한 피로함을 달래기 위해 매점으로, 운동장으로, 교실 뒤켠에 깔려져있는 담요와 목배게 위로, 10분 동안의 휴식을 청하러 간다. 어차피 수업을 열심히 듣는 것도 아니면서, '이번 시간도 수고해봅세, 아 겁나 졸리다.'는 화이팅 겸 엄살을 여러 마디로, 매일 다르고도 비슷하게 풀어내며 우리의 14시간은 채워진다.

 

 난 외적으로는 그 동안, 꽤나 여러 친구들과 함께 지내왔다. 고 3, 학창시절의 끝물을 먹으며 지난 학창시절을 되돌아보자면, 한 번쯤 반장도 해보고, '뒷담화 무리'에도 잘못 엮여서 옆자리에서 같이 밥먹는 친구의 부모님 욕지거리를 퍼부으며 손을 씻는 아이의 '베프'행세를 해본 적도 있고, 사실은 서로 서로 다 뒤에서 수근 거리던 8명이 번갈아가며 왕따가 되자, 주도자로 오해받으며 그 해 '최후의 왕따'가 되본 적도 있다. 그 다음해에는 같이 다니던 - 다니려고 하던 - 무리에 치이고 질려서 잠깐의 '은따' 생활을 자발적으로 겪던 중 착한 친구들을 만나 나름대로 소소한 추억들을 남길 수 있었다. 같이 배드민턴도 치고, 빵 내기도 하고, 서로 생일 축하도 해주고. 뭐 그렇게 지내다가 또 대부분이 사람들이 그렇듯, 예전에 '친구'라고 서로 불렀던 얼굴들과 몇 개월, 혹은 길어봤자 1,2년의 시간만으로 옷깃만 스쳐가는 사이가 되기도 했다. 별로 이상할 건 없었다. 흘러가는 게 바로 관계라는 거니까. 정말 이상한 건 바로 '모르는' 사이가 되어버리지 않는, 매 해 한 두 명 가량의 친구들이었다. 신기하게도 그들과는 어찌저찌 죽이 맞아 몇 년 동안 반갑게 하이파이브를 주고받으며 어깨를 토닥인다. 딱히 할 말이 별로 없어도, 몇 번의 실없는 표정과 스텝을 나누다보면 익숙한 웃음이 터져나오곤 한다.

 

 학교를 다니고 있는 대부분의 학생들과 유지되는 적당한 거리, 그리고 매 해 한 둘의 신기하지만 과하지 않은, 그런 평균적인 생활을 하고 있는, 평범한 학생 13반 29번 이루인.

 

 이렇듯 난 여느 학생과 별 다를 바 없어 보이게 생활해왔다. 하지만 사실, 나는 다른 학생들과는 다르다. 난 연예인같은 것엔 관심이 없다. 아이돌 노래를 따라부르고 팬덤을 가르면서 끈끈한 소속감을 느끼지도 않는다. 제작년에 친구가 줬던 모 그룹의 리더 스티커를 잠시 공책에 붙여놨다가 뗀 게 다이다. 내 관심은, 같은 학교 남자애들에게 있지도 않다. 성적? 딱히 목 메이지는 않는다. 사실, 내 주의는 항상 하늘에 가있었다. 수업시간에도, 쉬는 시간에도, 친구들과 얘기를 나눌 때도. 파란 하늘 위에 피어오른 뭉게 구름. 어제는 시커먼 회색이었는데, 오늘은 보송한 흰색의 구름이다. 점심을 먹으러 급식실에 갈 무렵에는 쨍-한 햇빛이 구름선에 반사되어 그 테두리가 영롱하게 빛난다. 밤에 떠 있는 빛나는 초승달, 혹은 보름달만이 사람들에게 주로 익숙하지만 난 6교시가 끝나고 청소시간이 되면 보이는 오후의 달도 음미할 줄 안다. 복도를 쓸다가 보면 창문 밖을 비추는 어렴풋한 초저녁의 달. 당번이 되어서 분필가루가 묻어있는 지우개를 손에 쥐고 모퉁이에 있는 창문으로 걸어갈 때는 기분이 설레곤 한다.

 

 '아.. 진짜 오늘 쌤 필 꽂히셨네. 발표 시키실듯. 고3한테 뭔 발표냐.' 투덜거림을 가장하며 날 도우려는 친구가 내 옆의 지우개를 뺏어든다. 아니 괜찮아. 지우개를 털며 나오는 그 흰색 가루들이 하늘로 날려가는 모습은, 왠지 내가 구름을 퍽퍽 쳐서 눈을 쏟아내게, 뱉어내게, 하는 느낌을 선사해주거든. 발표 같은 거 매일 해도 되. 상관 없어. 이렇게 너가 '지긋이 하늘을 응시할 수 있는' 나의 자연스러운 시간을 뺏지만 않는다면. '휴-, 야 얼른 들어가봐. 다음 쉬는 시간에 매점이나 가자.' 내 지루한 학교생활에서 남몰래 꼽히는 개인적인 순간들 중 하나다. 방해받을 수 없지. 그냥 잠자코 밖을 고개를 치켜들 수 있는 시간만큼에는 '시험에도 나오지 않는 것들을 자꾸 질문해서 선생님을 놀리고, 수업을 지체시킨 죄', 체육복 바지를 입고 양반 다리를 한 채로 수업을 들은 '반항죄' 같은 우습지도 않았던 죄목으로 모욕당했던 수치심과, '야, 너도 좋아하는 애가 있을 거 아니야~? 내숭 떨기는'하고 쉼 없이 질문을 쏟아내는 피로한 일상에서 씻겨나온다. 손의 아림과, 약간 모멸감과 분노, 그리고 귀찮음이 창 밖으로 날려나가고 나면 이 곳은 잠시 동안 굉장히 자유롭고 아름답게 느껴진다.

 '야, 당번! 들어와, 선생님 오신다.' '아직까지 뭐하니, 들어가자.' 한 마디에 십분도 채 안 되어 끊기고 마는 일탈이지만.

 

 

 비어있는 1학년과 2학년생들의 복도를 차례차례 거슬러 내려온다. 교무실은 불이 꺼진 채로 비어있고, 경비 아저씨는 우리의 '퇴근'을 반긴다. 이제서야 비로소 나의 하루가 시작된다.

 

 

 내가 올해 반에서 친하게 지내는 - 급식실에서 같은 식탁에 앉아 밥을 먹고, 같이 식판을 비우고 운동장을 걷는, 가끔씩 배드민턴도 치고 매점도 가는 - 친구들은 총 6명이다. 다들 가끔 괴팍하긴 하지만 착하고, 잘 웃는다. 그 중 이따금 소미라는 아이는 어딘가를 멍-하게 보는 것이 느껴져서 학기 초에 내 호기심을 종종 자극 했다.'혹시 창 밖의 모래바람에 몸을 맡기고, 구름 위를 떠다니고 있는 게 아닐까?' 드디어 일상적으로 주고 받던, 일상적인 잡담을 넘어 나의 진심이 담긴 말들을 입 밖으로 꺼내볼 수 있을까? 그게 대화로 이어질까? 4월에 나는 용기를 내보았다. 청소시간에 소미와 같이 매점에 갔다. 오랜만에 소보루빵을 나눠먹으며, 흘러가는 소리로 나는 '오후에 뜬 달 본 적 있냐?'라는 말을 내뱉었을 때, 나는 조금은 다른 대답을 기대했었다. '이응. 다음 문과충.' '취했냐? 뭐여 고 3이라고 시도때도 없이 감성이 터지는 거여 아니면 낮술을 한거여.' '너 대학가서 말술 돋을듯.'

 ....

 

 그래, 사실 많이 기대한 건 아니었다. 조금은 다른 주제로 대화를 (나의 입장에서는 '비로소' 대화다운 대화를) 나눠 볼 수 있으리란 희망을 품었다가 깨져본 적도 이미 많았다. 다만, 나도 고3은 고3인만큼, 더 예민해져 있었나보다. 예상했던 것 보다 김이 많이 빠졌다. '아, 씨 소보루빵 엿같네. 겁나 퍽퍽해. 니가 다 먹어.' '야 뭐하냐 루인아.' 내가 바라는 건 거창한 게 아니었다. 처음부터 어떤 한 아이가 내 상상과 들어맞을 거라고 생각하고 덤빈 건 실제와 맞을 확률이 퍽 적을 거란걸 예상해야했다. 멍하니 어딘가를 보고 있는 건 누구나 많이 하는 일이다. 다만 소미의 응시점이 주로 하늘을 향해 있다고, 나와 비슷한 '취미'를 갖고 있을 거라고, 그의 행위에 혼자 이름을 붙여놓고 그러길 바랬을 뿐이다. 소미는 키가 작은 편이다. 책걸상에 앉으면 고개를 치켜든 채로 있는 게 더 자연스러운 각도였다. 남들과 대화할 때나, 수업을 들을 때나, 턱을 괴고 졸 때나. 착각했다.

 

 

 자영이라는 아이는 학기 초 서로를 파악해갈 무렵 자기를 소개하면서 책 읽는 걸 굉장히 좋아한다고 했다. 마음에 들었다. 무슨 책일까? 종이와 글자 속으로, 자신이 속해있지 않은 세상에 여행을 떠나는 건 참 재밌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걔는 주로 어떤 세상을 탐험하는 걸 좋아할까? '요즘은 무슨 책 읽어, 자영아?' '요즘은 대학 논술 수시 샘플 모음집 읽느라 바쁘다. 책 읽을 여유가 없어. 아니, 이게 지금은 책이지 뭐.' 그래. 지금은 고등학교 3학년. 수험생이니까. 뭐 그래도 대화를 나누다가 자영이에게 쏠쏠하게 도움을 얻을 기회도 생겼다. 자영이는 고 1때부터 출판사 별 문제집을 비교하며 다양하게 풀어왔는데 고3이 된 지금은 개인의 유형별로 문제집을 추천해줄 수 있는 경지에 이르렀단다. '고 3때 푸는 문제집이야 EBS 말고는 그냥 문제 많은 거면 되지 뭐가 중요하게 다를게 있겠냐', 라고 생각했던 나조차도 생각이 바뀌었다. 자영이는 '자질구레한 해설보다는 깔끔하고 밀도 있는' 심화 문제집을 선호하는 내 성향을 정확하게 집어내 주었고, 과목별로 그에 맞는 문제집들을 추천해주었다. 솔직히, 한 과목, 언어는 내가 많이 부족한 과목이라서 자영이의 추천을 따랐다가 결국, 국어까지도 예습하고 있는 동아리 후배에게 이름만 쓰여진 빳빳한 새 책으로 주어야 했다. 문학을 어떤 틀에 가두어 해석해야 하는 언어 과목의 특성 자체가 나와 상충됬다. 같은 시일지라도, 오늘 읽는 이 한 줄의 느낌과, 다음 달에 읽는 이 한 줄의 느낌은, 다를 수 밖에 없다. 어쨌든 그래서나는 떡꼬치 다섯 개를 그 후배에게 얻어먹었다. 그리고 훨씬 더 두껍고 조잘거리는 문제집을 한 권 새로 구매했다.뭐, 그 외에는 자영이의 추천이 잘 먹혀 들었다. 그 문제집들을 추천 받아서 쓰기 시작한 4월 말 이후, 6월 모의고사에서 수학과 탐구가 10점 이상씩 오르는 쾌거를 맛보기도 했다. 그 날의 모의고사가 유난히 난이도가 높았던 걸 고려해봤을 때 등급은 더 많이 올라갔 던 것 같다. 난생 처음 담임선생님과 서울에 있는 대학교에 수시를 지원하는 문제로 개인상담을 하러 불려가기도 했으니까. 반에서 3등이라고 했다.

 

 

 담임선생님께서는 방과 후 교외 수업과, 자녀 문제로 동시에 몹시 바쁘신 분이었기에 - 그런 분이 어떻게 고3 담임을 맡으셨나 싶기는 하다 - 상담을 긴히 요청해오는 학생들과만 길지 않은 진로 상담 시간을 가졌다. 난 그 동안 대입을 몇 달 남기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굉장히 여유로운 편이었다. 바빠보이는 담임 선생님께 딱히 먼저 상담을 청해 올 필요성은 느끼지 못했고, 항상 가득 차있는 듯한 선생님의 일정에 대해서도 별 다른 불만을 느끼지 못했다. 인터넷도 있고 언니도 있고 오빠도 있으니 뭐.

 '우리 고3반 맞냐?'

 선생님이 우리의 입시에 제대로 신경써주지 않는 것 같다며 종례시간마다 선생님의 말에 토를 다는 아이도 있었다. 사실 걔는 평균 7등급이 나오는 애다. 수학시간에는 아예 교실 뒷자리에 나가서 담요를 깐 채로 누워있던 적도 있다.담임선생님께서는 바쁜 일정을 쪼개가며 학업부진문제로 그 아이와는 개인 상담 시간을 3번이나 가졌다. 미술을 좋아하지도, 재능이 있지도 않아보였지만 성적이 낮게 나와도 대학을 갈 수 있다는 소리에 예체능을 택했던 그는 막상 대학에 별 관심이 없어보였다. 심지어 마지막 상담시간에는 보충시간이 끝난 후, 배가 너무 아프다며 빨리 병원을 갔다 오겠다고 했지만, 그 아이는 친구들과 떡볶이를 사먹으러 갔었다. 그리고 그냥 집으로 가버렸다. 선생님께서는 한 시간 동안 저녁도 드시지 않은 채로 혼자 교무실에서 기다리셨었다. 내가 그걸 어떻게 아냐고? 사실 보려고 했던 건 아니지만, 그 모습을 직접 봤다. 급식실에서 저녁식사를 마치고 친구들과 함께 운동장을 걸어오고 있었는데, 도무지 친구들의 말소리에 귀기울일 수 없던 찰나의 순간 동안, 하늘을 수놓고 있던 노을빛을 들여다보고 있었는데, 마침 그 빛의 꼬리가 창문에 가서 앉았을 때가 교무실에서 거세게 문을 닫고 나온 담임선생님의 분주하고 지친 표정이 창 밖으로 비춰졌을 때였다. 운동장에서 바라보는 3층 창문 안의 담임선생님은 상당히 먼 거리였지만, 그 때 선생님의 표정은 결코 잊혀지지 않는다. 선생님은 핸드폰을 부셔질 정도로 집어들어서 성난 표정으로 무언가를 중얼거리고 계셨고, 불안한 모습으로 허둥지둥 나의 시야범위를 벗어나셨다. 분명 선생님께서는 항상 바쁘셨음에도 불구하고 침착함을 잃지 않는 분이었기 때문에 그 날의 우연한 '관측'은 쉽사리 잊혀지지 않았다.

 

 

 "야, 아니, 이루인, 너 뭐하고 있는거야!!!"

 

 

 소위 '블럭폰', '무전기'라고 불리는 투박한 나의 2G 핸드폰 너머로 엄마의 분개한 목소리가 고스란히 전해진다. 원래 고3이 되면서 핸드폰을 아예 없애버릴까도 생각했지만 부모님은, '여자애가 밤에 위험하다'며 핸드폰 하나는 꼭 챙기고 다니라고 당부하셨다. 나는 그 중에 고르고 골라 인터넷도, SNS도 안 되는, 딱 전화와 문자만 되는 구식의 2G폰을 선택했지만, 귀가길 때만 되면 내 핸드폰은 친구들의 휘황찬란한 최신 스마트폰보다도 훨씬 더 바쁘게 제 기능을 하는 것 같다. 내 손목시계는 12시 19분을 끔뻑인다. '아, 알겠어요. 네, 바로 앞이에요. 들어가요, 아. 좀.'

 성의 없이 말을 쏟아내고 핸드폰 화면을 보니 부재중 전화만 14통.

 

 '들어와'

 

 

 오늘 밤의 별은 너무나도 아름다워서 마치 밤하늘이 나에게 말을 거는 것만 같다. '들어가지마.' 분명 아침에 셔틀버스 안에서 봤던 하늘은 약간의 회색을 머금고 있었던 것 같은데, 지금은 맑다 못해 약간의 청량감 마저 느껴진다. 음, 분명 칠흙같은 검정색의 밤하늘인데, 그 안에 무슨 기포방울이라도 있는 것 같다. 비슷하게 생겼지만 분명 다른 수많은 별자리들이 하늘을 빽빽이 수놓아서 오늘 밤은 가로등이 필요 없을 지경으로 환-하다.

 

 약간 '섬'같이 동떨어진 작은 동네이긴 하지만, 나름 아파트 단지 네 개에, 대형마트, 학교 5개가 들어차있는 '오염지역'에서 이렇게 선명한 별들을 본 적은 처음이었다. 별들의 미세한 색 차이도 느껴졌다. 새하얀 게 있는가 하면 조금 누르스름한 것도, 푸르스름한 것도, 보면 볼 수록 신기해서 눈을 비벼야 했다. 아, 그래도 그렇지. 12시가 지났다니. 수능이 채 100일도 남지 않았단 걸 감안할 때, 얼른 들어가서 자야되는 게 맞긴 하다.

 

 

 바로 집 근처 천변에서 있었기 때문에, 딱히 뛸 필요는 없었지만, 그래도 조금이나마 덜 혼날까 싶어 숨의 박자를 불안정하게 증폭시킨다. 현관문의 비밀번호를 눌렀다. 긴장했나, 번호를 잘못 눌려서 첫 번째에 바로 열지 못하고, 두 번째에 문을 딴다. 불이 켜져있다. 역시나, 오빠는 집에 들어오지 않았고, 언니는 자고 있었으며, 엄마와 아빠는 마루에서 불을 킨 채 노한 눈썹을 씰룩이며 날 바라보고 계셨다.

 '야, 이러면 내일 하루 종일 피곤하잖아. 그리고 너 전화도 계속 안 받고, 수능이 얼마나 남았다고! 컨디션 관리도 실력이다 너.'

 

 ...오늘 밤하늘이 너무 예뻐서 별들을 좀 보다가 시간 가는 줄 몰랐어요. 죄송해요....

 

 '수능 망해버리면, 다 부질없는 거야. 얼른 잠이나 자! 에휴...'

 

 "오늘 밤하늘이 너무 예뻤어요. 별들이 완전 환하더라니까요. 시간 가는 줄 몰랐어요. 오랜만에, 정말 행복했어요. 사실 죄송하진 않아요. 매일 밤마다 삼십분 정도씩은 별 좀 보고 들어오고 싶어요. 대신 내일부턴 잘 일어나서 버스 시간에 늦지 않게 학교 잘 갈게요. 성적도 꽤 올랐어요. 네?"

 

 휴. 무슨 말을 한 거지. 별을 보느라 늦었다니. 그걸 왜 말했을까. '문제가 안 풀려서 운동장에서 친구에게 질문하느라 늦었다던가, 잘 암기가 되지 않는 탐구과목을 소리내어 암기해보기 위해 좀 걸어다니다가 늦었다'고 하던 그 익숙한 핑계들은 도대체 어디로 간거냔 말이다. 그랬으면 별 탈없이 '그래. 그럴 수 있지. 가서 쉬어.' 와 함께 혹시나 침대 이불을 덮어주러 들어온 엄마의 토닥임을 기대해볼 수도 있었을 텐데. 조용히 창 밖을 올려다보며 오늘의 밤 하늘을 다시 볼 수 있는 틈을 얻었을 수도 있을 텐데.

 

 

 별 말이 없으셨다. 불편하리만큼 침묵이 지속됬다. 부모님 두분은 방에 들어가서 서랍을 뒤적거리시는 것 같았다. 바스락 거리는 소리와 함께 엄마의 '아, 찾았다.' 소리가 들렸다. 나는 조용히 방에 들어왔고, 오늘은 세수도 안하고 잠에 들어버리고 싶은 피곤함에 쓰러지다시피 침대에 누워버렸다. 교복도 갈아입지 않은 채로. 아니, 이건 좀 불편하다. 잠옷으로 재빨리 옷만 갈아입고, 질끈 위로 올려 묶었던 머리를 푼 채 이불을 덮는다.

 말을 했다. '대화'를 했다....

 

 

 끼이익-- 잠든 루인이 위에 엄마가 손수 이불을 올려다준다. 손에는 무언가 들려있다. 어릴 적 그녀의 사진이다. 삐뚤 빼뚤 '외계인'이라고 그린 초록 괴물을 손에 든 채, 할아버지의 망원경을 같이 올려다보던 그녀의 입가에는 함박웃음이 지어져있다. 엄마는 머리를 쓰다듬어주시며 '너가 잘됬으면 좋겠어. 알지? 그래서 이러는거야. 근데 가끔은 그런 생각도 들어. 잘 되는게 뭘까? 수능 잘 봐서 좋은 대학 가는거? 그래서 돈 많이 주는 회사에 취직하고, 부자랑 결혼하는 거?.... 너가 많이 배우면 좋지, 돈 많이 벌어서 편하게 살면 좋지. 진짜 이번 모의고사 성적 보니까 너 말대로 성적도 많이 올랐더라.' '너와 눈을 맞추면서 대화하는 게 정말 오랜만이었어. 눈이 참 맑더라.' '잘 자라 루인아.'

 라는 말을 루인의 귀 안에 살포시 눌러담는다.

 

 

 루인은 잠에 든걸까. 엄마의 얘기를 들었을까. 엄마는 루인이가 잠든 줄 아는 것 같다. 그렇게 오랫동안 루인이의 머리칼을 하염없이 쓰다듬고 있는 걸 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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