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내가 한국을 떠난 지 무려 24시간이나 지난 뒤에야 나는 목적지에 이르렀다. 내리며 나는 사막의 건조한 바람을 폐 속에 가득 불어넣었다. 그리곤 곧장 수하물을 찾는 곳이 있는 아래층으로 유난히 긴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갔다. 미리 한국에서 구한 숙소(한국 유학생 부부의 학교 아파트로 그들이 잠시 한국에 머무는 방학 동안 나에게 내어주었다.)의 주소가 적힌 쪽지를 손에 꼭 쥐고 내려가던 내 눈에 내 이름이 적힌 종이를 들고 서있는 한 남자의 모습이 보였다. 나는 혹시나 하며 물었다.
“누구신지는 모르겠지만 혹시 저를 찾으시나요?”
“아, 네가 진수구나. 반갑다 주민상이라고 한다. 상수가 여기서 유학할 때 동고동락하던 사이란다. 일단 가자. 내가 네가 갈 곳 까지 데려다 주마. 사실 나도 거기 살거든. 하하하”
우리 어머니의 작품이었다. 작년에 귀국한 사촌형님의 인맥을 동원해 나의 여행에 간섭하시려는 모양이었다. 나는 단매에 거절하고 싶었지만 몸이 너무 피곤했고 더욱이 주민상씨의 너무나도 착하게 생긴 얼굴에다 대고 거절을 할 수가 없었다. 결국 주민상씨의 차에 실려 시내로 들어갔다.
처음 본 사막의 도시의 모습은 놀라웠다. 정말 넓은 도로와 무수히 꼬여있는 고가도로가 개선문처럼 나를 반겼고 한국에서 잘 보이지도 않는 유럽제 차나 난생처음 보는 일본의 차들이 도로에 널려있었다. 도시는, 그리 높지는 않지만 옆으로 거대한 건물들에서 나오는 빛으로 환히 밝혀져 있었다. 그리고 잠시 뒤 차는 뜻밖에도 시내에서 가장 전망이 좋은 강가로 들어섰다. 가는 내내 시내의 고급 빌라나 주택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런데 그 중에 옥의 티 같은 네모난 구조물들이 있는 곳이 눈에 걸렸다. 바로 그곳에 차가 멈추었다.
“여기가 네가 이번 방학동안 머물 곳 이란다. 나는 저기 C동에 살고 있고. 네 주소는 알지?”
주민상씨는 내 짐들을 자동차 트렁크에서 내려주고 내가 머물 A동까지 같이 옮겨주었다. 나는 주민상씨에게 감사인사를 하곤 한국에서 받은 열쇠로 문을 열고 들어갔다. 쌀쌀한 사막의 밤이었지만 낮의 온기를 머금은 집은 아직 따뜻했다. 그래도 나는 주섬주섬 난방 장치를 찾아 틀었고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하고는 알몸으로 소파에 쓰러져 잠들었다.
눈을 떴다. 날이 밝아 있었고 정면 텔레비전위에 있는 시계가 오전 7시 반을 띄우고 있었다. 평소보다는 조금 더 잤지만 완벽히 단번에 시차적응을 한 것이다. 소파에 일어나 앉아서 정신을 가다듬고 샤워를 했다. 그리곤 집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집은 붉은 벽돌로 지어져 있었다. 크게 한 발짝이면 끝날 거실과 사람 세 명이 일렬로 서면 가득 차는, 부엌이라고 하기도 민망한 조리시설이 있었다. 비좁은 방은 두 칸이었는데 집주인 부부와 쌍둥이 남매가 각각 썼던 흔적이 보였다. 나는 트렁크를 펼쳐서 책들의 상태를 점검하고 모두 꺼내 안방 바닥에 쌓아두었다. 내 몸보다도 큰 배낭도 열어 다 찬 휴지통처럼 꾹꾹 눌러담은 옷가지들을 안방 큰 침대에 쏟아냈다. 그러곤 그 옷들 중 무난한, 아니 가장 현지인 같은 스포츠져지와 반바지를 찾아 입었다. 흰 모자까지 눌러 쓰고 그 집에 있던 슬리퍼에 발을 걸치고는 아침밥을 구하러 나섰다. 겨울이라 뜬지 얼마 되지 않은 해가 낮게 걸려 있었다. 나는 집 앞 주차장으로 나와서 내가 몇 달 머물 집의 모습을 자세히 눈에 익히기 시작했다. 원래 군인들의 막사로 이용했었다던 집주인의 집에 대한 설명처럼, 네모난 성냥곽같은 집은 한 동에 4가구 씩 규칙적으로 들어있었다. 동은 A부터 E까지 있었고 조금 넓은(나중에 느꼈지만 텍사스에서 그 정도는 일반 가정집 뒷마당 만큼도 못한 크기다.) 공터가 각 동 사이에 있었다. 중앙엔 지구 구석구석에서 온 다양한 피부색의 아이들이 엉켜 노는 놀이터도 있었고 집이 좁고 방음이 좋지 않으므로 집안에서 금지된 빨래를 위한 공공 빨래터가 위치했다. 커다란 나무 네 그루는 괜찮은 그늘을 만들어 주었고 그 아래에는 이곳이 텍사스라는 것을 일깨워 주듯 바비큐시설이 완벽하게 구비돼있었다. 다시 고개를 돌려서 주차장 앞 도로를 바라봤다. 바로 집 앞인데도 4차선 도로에서 살벌하게 큰 차들이 쌩쌩 달리고 있었다. 그 건너편엔 주유소와 함께 있는 편의점과 아침부터 문을 연 음식점이 있었다. 아직 식당에서 직접 음식을 주문하기 쑥스러웠던 나는 하릴없이 편의점으로 갔다. 아메리칸 스타일로 베이글 조금과 잉글리시 머핀 한 봉지, 딸기 스프레드와 베이컨을 사서 집으로 왔다. 난생처음 내가 직접 베이컨을 굽고, 베이글과 머핀에 스프레드를 발라서 먹었다. 이런 기름진 음식과 빵을 싫어하는 나인데 이렇게 먹고 나자 위장이 놀랐는지 속이 썩 좋지는 않았다.
아무생각 없이 베이글을 씹던 도중. 갑자기 전화벨이 울렸다. 조심스레 수화기를 들자 어머니의 음성이 들려왔다. 어머니는 잘 도착했냐는 질문 등 안부를 물으셨고 나는 대충 대답하며 최대한 빨리 전화를 끊었다. 그제서야 이 집에 전화기가 어디 있었는지 알게 되었다.
식사를 마치고 조용히 앉아 아침에 전해 받은 현지 신문과 한인신문을 살펴보았다. 한인신문에는 변호사 광고나 병원광고 등 나에겐 별로 영양가가 없는 요소들 뿐이었다. 하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한국 슈퍼마켓의 위치와 주소 전화번호는 따로 찢어서 챙겨두었다. 언제 매운 게 생각날지 모를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현지 신문을 살펴보니 깨알 같은 알파벳들이 널려있어서 제아무리 영어에 일가견이있던 나였지만 읽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래서 글이 적은 광고란을 살펴보게 되었는데 각종 현지 캠프프로그램이 소개되어 있었다. 이곳 청소년들의 겨울방학 캠프프로그램은 내가 생각했던 ‘캠프’라는 단어와 달리 마치 우리나라 학원처럼 아침에 갔다가 오후에 돌아오는 식으로, 약 이틀에서 삼일 길게는 일주일 정도 반복하는 그런 것이었다.(물론 이 곳의 겨울방학은 약 일이주 정도 밖에 되지 않아 겨울방학 캠프프로그램이 짧았을 수도 있었다. 짧으면 어떤가? 오히려 적은 돈으로 여러 가지 캠프를 체험하게 되었으니까.)신문에 나온 캠프프로그램 중에 아직 학생을 모집하는 곳은 대략 8곳이었다. 그중에 나는 가장 무난하고 유익한 것들을 골라서 날짜를 맞춰 보았다. 나는 크리스마스가 되기 전에 있는 3일간의 미술캠프, 크리스마스를 보내고 3일간의 비즈니스캠프를 신청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나 정작 문제는 그 다음부터였다. 신청은 전화로 해야 했는데, 외국인과 전화로 이야기 해본 사람은 알겠지만 수화기에서 넘어오는 영어란 아주 영어를 잘 하는 사람이라도 정말 알아듣기 힘들다. 가끔 한국에서 필에게 놀러오라는 연락을 하기위해 전화를 하곤 했던 나는 그 어려움을 알고 있었다. 잘 할 수 있을까라는 두려움이 밀려왔다. 하지만 ‘나는 남자가 아닌가?’라는 생각을 하자 갑자기 아드레날린이 혈관으로 번졌다. 나는 당당히 수화기를 들고 미술캠프프로그램에 전화를 걸었다.
“예, 제인의 미술용품 가게입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어, 제가 이번 겨울방학 캠프에 등록을 하려고 합니다. 아직 빈자리가 남아있나요?”
“네, 아직 2명밖에 신청을 하지 않았답니다.……(그이후로 몇 마디는 알아듣지 못했다.)”
“신청자는 외국인이구요 한국인입니다. 나이는 (미국나이로)15살이고 결제는 당일에 직접 가서 현금으로 결제하겠습니다.”
이후로 전화를 받은 이는 몇 마디 주의사항을 말해주었지만 전혀 귀에 들어오지 않았고 대략의 일정만 간신히 알아듣고는 첫 통화를 무사히 마쳤다. 다시 나는 비즈니스캠프에 전화를 걸었다. 이번에는 간단하게 그냥 나이와 이름만 남기고 신청을 마칠 수 있었다. 전화기를 내려놓자 등에서 식은땀이 주르륵 흘렀다. 소파에 앉아서 밖을 한참 바라보던 나는 ‘이런 전화에도 쩔쩔매고 있는데, 원어민만 있을 캠프에 참여해서 그냥 바보가 되는 게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미술캠프까지 약 열흘정도 남은 시점에서 뭔가 대책이 필요했다. 나는 다시 한인신문을 샅샅이 읽었다. 마침 현지에서 변호사를 했었던 엘레나라는 백인할머니가 봉사활동으로 무료로 동양인에 한하여 일대일 영어 과외를 해준다는 기사를 보게 되었다. 그리고 집 앞 거리에서 구해온 주립대학의 학교신문으로는 외국인을 위한 영어 강습 프로그램이 개설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 두 가지 또한 최대한 빨리 신청해서 시작해야했다. 별로 주어진 시간이 없었으니까.
나는 다시 머리를 잘 손질하고 옷을 가다듬었다. 이번엔 운동화를 신고 길을 나섰다. 집 앞 버스정류장에 주립대학의 로고가 새겨진 버스가 멈추는 중이었다. 나는 냉큼 그 버스에 올라탔다. 버스기사가 나에게 무엇도 요구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도 그냥 돈이나 승차권을 내지 않았다. 버스가 몇 정거장을 돌더니 대학 앞까지 도착했다. 나는 내린 뒤에 가장먼저 관광안내소를 찾아 이 지역의 각종 지도란 지도는 다 쓸어 모았다. 사실 애초부터 지도를 구하러 일부러 외국인 학생들이 많음직한 장소로 나왔던 것이었다. 지도들을 모두 챙기고, 나는 대학로를 걸어 다니면서 각종 시설의 위치와 대학 주변의 분위기를 익혔다. 그리고는 다시 돈도 안 내고 조용히 버스에 올라서 집으로 돌아왔다.
마룻바닥에 지도를 펼쳐놓았다. 집은 바로 시내중심지 근처였기 때문에 집에서부터 주변 탐사를 시작했다. 걸어서 시내로 나가는 길엔 사람이 다니는 인도가 부족했고 고속도로에서 차와 함께 걷는 등 위험했다. 하지만 곧 시내로 들어서자 잘 정돈된 구획을 따라 대형 마트와 은행이 안전한 통행로위에 서있었다.
모은 지도와 지리정보를 활용해서 나는 무사히 청설모가 유난히 많은 ‘거북이등껍질거리’에 사는 엘레나 할머니에게 대화법과 고급어휘들을 전수받았고, 대학프로그램에서는 다양한 외국인 친구들을 만나게 되었다. 특히 대학의 프로그램에선 모두 외국인이라 공통 대화수단이 영어밖에 없었기 때문에, 속된말로 영어를 막 질러대면서 영어실력이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친구들의 차를 얻어 타기도 하고 영화에서나 보던 히치하이킹도 번번이 성공하며 교통문제 또한 해결해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