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나는 혼자 조용히 크리스마스를 보냈다. 혼자 집 근처에 있는 큰 공원인 ‘질커 파크’에 나갔었는데 많은 사람들이 그 도시에서 가장 큰 트리를 보기위해 장사진을 이루고 있었다. 트리 쪽에 다가갈수록 나를 덮치는 무시무시한 인파에 나는 그냥 트리 앞에서 눈도장만 찍고 돌아 올 수밖에 없었다. 돌아온 나는 그저 조용히 혼자서 집 옆 강가에 앉아 밤하늘을 바라봤다. 사막 한가운데의 하늘은 맑았다. 그 와중에도 나는 방향감각을 잃지 않으려고 별자리를 자세히 보며 동서남북을 확인 했다.
크리스마스가 끝나고 드디어 비즈니스캠프에 가게 되었다. 9시까지 도착해야했다. 약속시간에 반드시 먼저 나가는 썩 괜찮은 버릇이 있는 나는, 집에서 차로 30분 거리에 있는 그곳에 가기위해 대학 프로그램(ESL : English as a Second Language)에서 만난 천사표 태국인 친구인 사쿤에게 8시까지 나를 데리러 와달라고 부탁했다. 많은 여유를 두고 출발한 탓에 결국 나는 8시 30분도 되기 전에 그 곳에 도착하였다.
비즈니스캠프의 장소는 생각 밖에 그냥 평범한 미국식 가정집이었다. 나는 조심스레 초인종을 눌렀다. 이윽고 정장차림에 나보다도 키가 조금 더 크고 덩치도 조금 있지만 외모는 이지적으로 생긴 50대(처음엔 40대인 줄 알았다. 50대 중후반이었단 사실은 후에 알았다.)여자가 나오며 나를 반겨주었다. 그녀의 풍채 때문인지 첫눈에 난 그녀가 선생님일거라고 직감했다.
“어서 들어오려무나. 기다리고 있었단다. 15살에, 한국에서 왔다지? 지금 내가 하는 말 알아들을 수 있니?”
“네, 알아듣고 있어요.”
“그래, 다행이구나. 나도 외국인은 처음이야. 정말 흥미롭구나. 그럼…, 이버(‘Eva, 에바’의 현지 발음을 묘사한 것.) 이버!”
그때 옆방에서 한 여자아이가 튀어 나왔다. 얼굴을 보자마자 나는 그녀가 그 선생님의 딸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어머니와 닮긴 했지만 이지적인 모습은 별로 없었고 어린 소녀의 표정과 오히려 약간의 백치미가 흘렀다. 눈은 담갈색이었고 머리색도 부분적으로 금발염색을 했지만 눈동자의 색을 닮은 담갈색이었다. 구름 같은 솜털이 돋은 얼굴과 피부는 내가 실제로 본 어떤 사람보다도 티 없이 깨끗했다.
“안녕, 내 이름은 에바야. 에바N 로즈. 친구들이 에바N 아니면 그냥 에반이라고도 불러. 만나서 정말 반가워.”
나는 그 아이의 활기찬 음성을 듣는 순간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심장의 팽창을 느꼈다. 동시에 그 기세에 눌려 한국에서처럼 허리를 굽히며 인사를 했다. 그 모습을 보고 그 아이는 신기했던지 내게 물었다.
“한국에선 그렇게 인사를 하니? 무슨 옛날 영화에서 본거 같아.”
발랄하게 웃으며 마치 서양무도회에서 왕자와 공주가 인사하듯 나에게 허리를 굽히는 서양식 절을 해보였다. 나는 귀엽다는 표정으로 웃어보였다.
“여기 명찰이 있어. 여기 네 이름을 쓰면 되는거야. 그럼 나도 써볼까? 참 이름이 뭐지? 한번 써봐.”
나는 정신을 가다듬었지만 무심코 내 이름을 한글로 썼다. 그리곤 퍼뜩 다시 영어로 썼다.
“우와! 그거 너네나라 글이니? 신기하다. 알파벳보다 네 이름 쓰는 데에 더 빠르네!”
나는 거기에 신이 나서 이번엔 내 이름을 한문으로 최대한 멋있게 써보였다. 미국에서 한자를 쓰는 것은 관심을 끄는데에 퍽 효과가 큰 수단이었기때문이다.
“그거 중국 문자지? 정말 멋지다. 내 이름도 한번 써줄래?”
어떤 한자를 쓸지 떠올리기도 전에 비즈니스캠프에 참여하는 학생들이 때마침 한꺼번에 몰려오는 바람에 대화는 중단되고 말았다.
나와 그 아이를 빼고 4명의 아이들이 이 캠프에 참여했다. 모두들 오래전부터 방학마다 이 캠프에 참여했었던 모양이었다. 만나자마자 서로 모두 안부를 물었고, 나를 보고 무척이나 신기해하는 눈치였다.
“얘들아! 모두 거실로 모이거라. 서로에 대해 알아볼 필요가 있겠지? 저기 파일과 종이가 있다. 저기에 너희를 나타낼만한 그림을 각자 그려보도록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