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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종종 그리곤 하던, 바다를 항해하는 큰 범선을 그리고 있었다. 그러나 내 머릿속엔 그림이나 다른 생각 따위는 들지 않았다. 그저 힐끔힐끔 그 아이를 보고 있을 뿐이었다. 내가 전에도 이런 적이 있었을까? 나름대로 한국에선 내가 학원을 가면 다른 여학교의 여학생들이나 선배들이 나를 보러 교실에 몰려올 정도의 인기를 구가하던 나였고 언제나 당당했던 나였는데. 그런 분야엔 이미 오만해졌던 나는 결코 누군가에게서 눈길을 받아주지도 않았고 물론 준적도 없었는데. 그런 내가 그 아이에게 눈길 그 이상을 주고 있었다. 그리고 그 때, 더욱이 나는 나 스스로 나를 심하게 비하하고 있었다. ‘나는 저들에겐 그저 지금 어디 붙어있는지도 모르는 동쪽 끝자락 가난한 제 3세계의 방랑하는 거지일 뿐이야. 저들이 그토록 노란 바나나라고 조롱하는 그런 구경거리일 뿐인거야.’라고 머릿속으로 말하고 있었다. 오만함과 자신감 따위는 이미 모르는 단어가 되어버린 것이었다. 나는 그저 대충 3일을 보내야겠다고 결심하고는 머릿속을 훌훌 털어버렸다.
그림을 다 그리고 서로의 그림에 대해 소개하기 시작했다. 선생님은 아이들에게 각자 그림을 소개하게 했다. 머리가 어지러운 상태의 나는 그들의 형편없는 그림과 설명을 잘 알아듣지 못했다. 비로소 내 차례가 되어서야 나는 정신이 조금 차려졌다. 처음에 막상 내 그림을 소개 하려고하자 조금 버벅거리게 되었다. 그런데 그 틈에 내 옆에 앉은 남자아이가 그 그림은 돼지냐고 조롱하듯 물어오는 것이었다. 귀여운 얼굴에 커피색 피부의 그 아이는 백인처럼 보이지는 않았고 남미 메스티소나 동양인의 혼혈 같아 보였다. 후에 미술을 전공할 뻔까지 했었던 내 완벽한 그림에 그런 말을 하다니 조롱이 틀림없었다. 나는 약간 꿈틀했고 정신이 바짝 돌아왔다. 나도 신기할 정도의 유창한 영어가 내 입에서 쏟아져 나왔다.
“이 그림은 범선이에요. 지구의 구석구석 바람을 타고 돌아다니는 모습이 저를 표현하기에는 더없이 좋은 그림이죠. 그렇지 않나요?”
그 소년을 빼고는 모두 내 그림에 감탄한 눈치었다. 그 아이의 차례가 왔고 나는 한쪽 입꼬리를 올리고 아이의 발표를 쳐다봤다. 그 아이는 축구공을 그려놓고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스포츠라고 소개했다. 그러다 문득 갈색 고수머리칼을 한 여자아이가 그 아이에게 자기소개를 부탁했다. 그 아이는 자신의 아버지는 미국인이고 어머니는 필리핀사람이라고 했다. 나이는 나보다 한 살이 많았고 지금 미국에서 아버지와 산다고 했다. 그 말을 듣고 나는 아까의 조롱을 이해하고 넘겨주었다. 나까지 이런 생각을 해서 미안하지만 미국에서 무력하다고 비하되는 ‘필리피노’의 혈통인 그가 백인이 절대 다수인 이 지역에서 그 어느 쪽도 아닌 정체성에대하여 마음속으로 자격지심을 갖다가 나 같은 흔치 않은 동양인을 보니 그 무언가를 표출하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지금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우스운 동정이었지만.
소개를 마치고 선생님은 우리에게 쉬는 시간을 줄 테니 서로 대화하며 알아보라고 하시곤 어디론가 나가셨다. 당연히 모든 질문은 나에게 쏟아졌다. 한국에서 미국에 가면 절대 나이나 종교를 묻지 말라고 들었었는데 역시 그 따위 말은 모두 거짓이었다. 아이들은 선생님이 나가기 무섭게 나에게 나이와 종교를 가장 먼저 물어봤다. 그것도 나에게만 물어본 것도 아니었고 서로 그것들을 묻기 시작했다. 나는 아직은 짧았던 영어로 악센트와 인터네션에 주의해가며 차근차근 대답했다. 다들 각자의 취미와 특기를 묻기 시작했는데, 대한민국 교육과정의 폐해었을까? 나는 그 쉬운 질문에 대답을 하기가 곤란했다. 완벽한 한국교육을 받은 나에겐 그저 학교 조사지에 쓰는 온 국민의 취미, ‘독서’라는 말 밖에는 떠오르지 않았던 것이다. 아이들은 운동, 악기연주, 노래 등을 말했다. 그러자 에바는 자신의 기타를 가져와 노래라고 대답했던 흑인소녀에게 반주를 해주기 시작했고, 그 흑인소녀는 환상적인 노래실력을 보여주었다. 물론 나에겐 반주를 해주는 그 아이 밖에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무언가 보여주고 싶어졌다. 그 때었다. 그 아이가 다짜고짜 내 무릎에 기타를 올려놓는 것이었다. 그때서야 어떤 생각이 내 머리를 강타했다.
‘나도 클래식기타를 연주할 줄 알잖아!’
나는 기타를 치기에는 너무 긴 손톱을 바라보며 안절부절 했다. 그러자 갑자기 그 아이가 방으로 뛰어 들어가더니 분홍색의 소녀다운 손톱깎이세트를 나에게 내밀었다.
“필요해 보이는데? 맞지? 너 기타를 칠 줄 아나보구나?”
나는 얼떨떨하게 받아든 분홍 손톱깎이세트에서 손톱깎이를 꺼내 재빨리 손톱을 적절한 길이로 다듬었다. 그리곤 기타를 받아들고 내가 아는 가장 어려운 곡인 ‘알람브라궁전의 추억’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내 실력에 비해 좀 어려웠던 곡인데다가 나일론 줄의 클래식기타가 아닌 쇠줄의 기타여서 도저히 손에 익지를 않았다. 나는 재빨리 잘 칠 수 있는 앞부분만 치고 살짝 웃은 뒤에 클래식기타 곡 중에 아주 쉬운 편이지만 연주하면 꽤나 멋있어 보인다는 ‘로망스’를, 내가 아는 갖은 기교를 다 섞어서 연주했다. 예의상이었는지 아니면 다행히 그곳에 클래식기타를 배운 사람이 없었는지 그 쉬운 곡을 연주했는데도 정말 잘 친다며 찬사를 보내주었다.
“뭐야? 취미도 특기도 없다더니.”
그 아이가 웃으며 말했다. 나도 웃으며 그 아이를 살짝 바라보았다. 가슴과 머리가 어지러웠다.
웃고 떠들며 시간이 꽤나 흘렀다. 점심시간이 다 되어서야 선생님이 돌아왔다.
“얘들아, 이제 점심시간이구나. 각자 알아서 해결하자.”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말했다.
“가자 내가 스포츠유틸리티차를 갖고 왔으니 근처 마트에 가서 점심을 해결하자. 전부 타!”
혼혈 남자아이가 말했다. 나는 머뭇거리고 있었는데 고수머리 여자아이가 내 손을 잡아끌었다.
“진수, 너도 가자!”
나는 하릴없이 그들을 따라나섰다. 뒷좌석에 앉아 안전띠를 메지 않는 내게 아이들이 핀잔을 줬다.
이윽고 근처 상점에 도착 했다. 미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조그만 프랜차이즈 매장이었다. 우리나라와 다르게 각종 과자와 젤리를 그람단위로 팔고 있었다. 혼혈 남자아이가 ‘센 척’ 통을 열어 젤리를 그냥 집어먹으며 으스댔다. 우습지도 않았다. 우스운 건 그들이 점심이라고 그걸 사는 것이었다. 정말 내겐 같잖은 음식들이었다. 무슨 젤리나 과자가 점심인가. 그런데 정녕 그들은 그걸 점심이라고 먹었다. 뭐, 나도 적응해야하는 상황이니 선택이란 없었다. 그렇게 얼렁뚱땅 점심을 해결했고 오후엔 진짜 수업이 시작됐다. 정말 이제 내 귀의 영어의 수용능력은 한계에 닿아있었다. 귀에 바람이 불듯 들리기 시작했다. 대략 저축이나 주식에 대하여 말했는데 선생님은 자꾸 나에게만 질문을 하였다. 물론 나는 모르겠다는 몸짓을 보이거나 가능한 최대한의 능력으로 대답하려고 애를 썼다. 몇 시간 뒤 천사표 사콘이 나를 부르는 구원의 소리가 들렸다.
사콘과 함께 그가 일하는 그의 삼촌의 태국식당에 가서 그 친구의 인정만큼이나 진한 향료가 듬뿍 들어있는 볶음밥과 스프를 들었다. 항상 나에게 베풀어 주는 그에게 난 그저 매번 미안하고 고맙단 말밖엔 해 줄 수가 없었다. 식사 뒤에 역시 그날도 고맙다는 말만을 남기고 나는 곧장 집으로 들어갔다.
샤워기에서 나온 물이 머리부터 적셔왔다. 머리가 찌릿거리며 눈앞에 별이 보였다.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하다 문득 거울을 자세히 쳐다봤다. 잘 손보지 않은 콧수염이 거뭇했고 내 얼굴이 살면서 그토록 초라하게 보이기는 처음이었다. 다 씻어내고 면도까지 마친 뒤에 다시 거울을 보았지만 여전히 보잘것없고 초라했다. ‘쳇, 언감생심 나 까짓게 어딜. 정신 좀 차려라. 넌 지금 여기선 그냥 외국인 거지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