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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6시에 알람이 울렸다. 샤워를 하고 내가 가진 가장 멋지지만 너무 튀지도 않는 옷을 입었다. 그리고 내가 스프레이와 왁스로 만들 수 있는 가장 세련된 머리모양을 정성껏 만들어냈다. 이미 어제 결심했지만 굳이 기를 쓰고 이상하게 보일 필요는 없는 노릇이었다. 몸에 직접 향수까지 뿌리지는 않았지만 내가 전날 방안에 뿌려두어서였을까 내 몸에선 이미 향수를 내뿜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주스 한 잔과 잉글리시머핀 한 조각을 아침으로 먹었다. 때맞춰서 멕시코출신의 친구 미구엘이 출근하며 나를 데려다 주기 위해 찾아왔다. 미구엘에게 주스 한 잔을 권하고는 그의 차를 타고 도로로 나갔다. 우리나라였으면 친구라고 하기도 미안한, 미국인 여자과 결혼한 미구엘은 나이가 40에 가까웠지만 그곳에서 나이는 친구가 되는 데에 어떤 지장도 되지 않았다. 오히려 미구엘은 가장 이해심 많고 마음을 틀 수 있는 친구가 돼주었다. 목적지에 도착하자 미구엘은 퇴근하면서 데리러 와주겠다고 하였고, 나는 그러면 미안하지만 부탁한다는 인사를 하고 그 아이의 집 앞에 내렸다.
역시나 그날도 나는 가장 먼저 도착했다. 숨을 크게 들이쉬고 그 집으로 들어갔다. 함박웃음을 짓고 내 이름을 부르며 그 아이가 달려왔다. 선생님도 보였고 나는 자동적으로 허리를 숙이며 인사를 했다. 이윽고 아이들이 오기 시작했다. 혼혈소년에게선 가족이 아파서 올 수 없다고 연락이 왔다.
나에겐 도저히 알아듣기 힘든 수업이 시작되었다. 이따금 선생님이 나에게 영어로 힘들다면 한국말로 하라고 했다. 좀 지나자 아예 한국말을 해보라는 것이었다. 그때야 나는 내가 학교에서 경상도에서 전학 온 친구에게 사투리 좀 써보라고 했을 때의 그 친구의 심정을 알 것 같았다.
오전을 어찌어찌 마치고 점심시간이 되었다. 그날은 사람이 좀 빠져서인지 선생님이 직접 요리를 하셨다. 선생님은 본인이 만든 파스타와 샐러드 중에서 고르라고 했다. 파스타는 속이 울렁거리는 흰 치즈로 범벅이었고 샐러드마저 가루치즈로 몽블랑이 되어있었다. 난 별로 먹을 생각이 없었고 그냥 식탁에 같이 앉아주기만 했다. 식사도중에 각자의 혈통에 대한 대화가 오갔다. 흑인여자아이가 아이보리코스트에서 왔다고 하자 내가 불어로 코트디부아르가 맞냐고 물었는데, 그러자 자신의 나라를 아느냐고 굉장히 기뻐했다. 또 한 여자아이는 인도계라 하였고, 고수머리 여자아이는 그녀의 아버지가 히스패닉계 혼혈이라고 했다. 내가 선생님과 에바를 쳐다보자 선생님은 여기 사는 거의 모든 백인들과 마찬가지로 자신들은 독일계 백인이라고 대답하곤 나에게 혈통을 물었다. 사실, 그들에겐 어디 붙어있는지도 모르는 나라인데 더욱이 단일민족국가라는 사실은 알아야 할 털끝만큼의 여지도 없었지만 나는 조금 어이없다는 식으로 물론 다른 어떤 피도 섞이지 않은 한국인이라고 당당하게 말했다. 나의 그런 태도가 이상했는지 선생님이 물었다.
“음…, 그래? 그럼 너희 부모님은 네가 만약 다른 나라의 여자와 결혼하겠다고
하면 어떻게 하실까?”
“물론 저는 그 여자와 함께 생매장을 당하지 않을까요?”
나의 극단적인 유머에 한바탕 웃음바다가 됐다. 결코 나는 웃기려고 한 말이 아니었고 정말 어머니라면 그렇게 하실 것 같아 한 말이었다.
“너 정말 재밌구나. 그럼 우리 딸이라면 어떻겠니?”
에바는 눈을 크게 뜨고 웃으며 속으로 ‘엄마!’를 외치듯 어머니를 쳐다봤다. 나는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부끄러운 척 볼을 감쌌다. 그러자 고수머리 소녀가 나를 가리키며 웃었다.
“얘 좀 봐! 부끄러운가봐. 너무 귀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