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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수초(福壽草)
작가 : 진혜이
작품등록일 : 2016.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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핏빛 그림자
작성일 : 16-09-25     조회 : 406     추천 : 3     분량 : 4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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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웬 년이냐?"

 

 난데없는 설희의 등장에 화들짝 놀란 늙은 내관이 휘둥그레진 눈을 굴리며 설희를 위아래로 훑었다. 설희는 그런 내관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설희의 시선은 처음부터 끝까지 이조 참의에게 가 있었다.

 

 "네 이놈, 감히 사람의 생명을 앗아가고도 그리 천하태평이라니. 그러고도 하늘이 두렵지 않느냐!"

 

 "뭐라? 하하하. 이런 맹랑한 것을 보았나. 좋은 말 할때 썩 꺼지지 못할까!"

 

 자그마한 생각시가 눈을 부릅뜨고 자신을 향해 호통을 치고 있자 어이가 없는 이조 참의는 박장대소를 하며 웃어젖혔다. 한동안 이어지는 그의 거만한 웃음소리는 설희의 당찬 음성에 이내 사라졌다.

 

 "이 나라에는 엄연히 국법이 있거늘, 응당 잘잘못을 따져 그에 합당한 처벌을 받아야 함인데, 왕을 모시는 내관을 멋대로 죽여 놓고도 어찌 저리 뻔뻔하단 말이냐."

 

 "아니, 저 어린 년이 지금 뭐라고 한게야. 어디서 감히, 아니 되겠다. 내 저 년을 당장 물고를 낼 것이다. 다들 뭣하고 있는 게야. 정신이 번쩍 나도록 저것을 패지 않고!"

 

 그는 치밀어 오른 화를 참지 못한 채 부르르 떠는 손가락을 들어 설희를 가리켰다.

 

 "영감, 지금 이럴 시간이 없사옵니다. 수빈 마마께서 기다리고 계시지 않습니까. 저 년은 제가 나중에 아주 버르장머리를 고쳐 놓을테니, 어서 가시지요."

 

 이러다 새파랗게 어린 생각시까지 죽어나갈 판이니.

 

 남몰래 혀를 끌끌 차는 내관은 설희를 향해 슬쩍 눈짓을 했다. 어서 이 자리를 피하라는 눈짓이었지만 설희는 아랑곳 하지 않았다. 도리어 내관을 향해 거침없이 쏘아댔다.

 

 "네놈의 눈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것이냐. 어찌 이 자를 발고할 생각은 하지 않고 뭐라? 무얼 고쳐 놓겠다고."

 

 자신이 저를 살려주기 위해 나서고 있음을 알지 못하고 있는지, 설희는 서슬 퍼런 눈동자를 부라리며 내관을 노려봤다. 제대로 기가 찬 내관은 입만 뻐끔뻐끔 거리다 헛웃음을 지었다.

 

 그때까지 평교자에 앉아있던 이조 참의는 시커먼 눈썹을 매섭게 치켜세우더니 몸을 벌떡 일으켰다. 내관이 말릴 사이도 없이 그는 쏜살같이 설희에게 달려갔다. 금방이라도 잡아 먹을 듯이 달려든 그는 예상과 달리 눅직한 목소리로 말을 했다.

 

 "네년이 아직 어려 내가 누구인 줄 모르나 모양인데, 알고 난뒤에도 그리 나오는지 두고 보자. 내가 바로 하늘의 새도 떨어뜨린다는 병조 판서의 자제이며, 수빈마마가 내 아우이다. 나 또한 정 3품 이조 참의이며 그리고 외숙부가 바로 영의정이시다. 어떠냐? 이젠 알겠느냐?"

 

 어린 아이 앞에 장승처럼 선 그는 허리에 손을 올린 채 유치할 정도로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그의 웃음소리가 짙어질수록 역한 술 냄새가 진동했다.

 

 기분 나쁜 술냄새에 설희는 살짝 미간을 찌푸렸지만 그를 노려보는 눈빛 만큼은 변하지 않았다.

 

 어둠이 내리기전, 제 살을 태우는 저녁 노울과도 같은 눈빛.

 

 칠흑 같은 어둠마저도 거부하는 노을처럼 어둠이 내리기 직전의 노을은 더욱 선명한 핏빛을 내기 마련이다.

 

 설희의 눈빛이 더욱 거슬린 이조 참의는 허리를 살짝 숙이며 아이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툭툭 건들렸다.

 

 "오늘은 수빈마마의 탄신일이라 불길하게 피를 보지 않으려 했으나, 이미 본 것을 또 어찌하겠느냐. 물론 좀 더 피를 본들 달라지는 건 없지 않을까한데, 뭐 살려달라고 매달린다면 내 생각을 좀 해볼수도 있음이야."

 

 겨우 노기를 참고 있다는 듯이 푸푸거리며 뜨거운 숨을 내쉬는 그는 한겨울 서리보다 짙은 미소를 지었다. 한쪽 입꼬리를 더욱 비릿하게 끌어올린 그는 설희의 이마를 좀 더 세차게 손가락으로 밀었다.

 

 울음보라도 터뜨리며 살려달라고 할 줄 알았는데 도리어 피식 웃는 설희는 그의 손을 매몰차게 내리쳤다. 찰싹거리는 소리가 무겁게 내려앉은 공기를 가르며 빠르게 퍼져나갔다.

 

 "이, 이 년이 정녕 죽고 싶어서 환장을 한 모양이구나. 오냐. 그리 원한다면 죽여줘야지."

 

 광기가 어린 그의 눈이 설희를 향해 번뜩였다.

 

 여린 아기새 마냥 조그마한 설희는 다른 이의 손을 빌릴 필요 없다는 듯, 제 소맷자락을 둘둘 말아 올리는 그였다.

 

 설희의 멱살을 잡으려고 그가 손을 뻗는 순간 내관이 황급히 말렸다.

 

 "영감 고정하시옵소서. 오늘 같이 좋은 날에 수빈 마마께서 아시면 어쩌시려고 그러십니까. 부디 아량을 베푸소서."

 

 "에이. 귀찮은 놈 같으니, 저리 비키지 못해."

 

 이미 제정신이 아닌 그는 내관을 힘껏 밀어냈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바닥에 나뒹군 내관은 허리조차 제대로 펴지 못한 채 끙끙거렸다.

 

 "이를 어쩌나. 나 역시 이리 좋은 날에 피를 보고 싶지 않는데. 허나 어찌 하겠느냐. 그리 죽고자 하니 어쩔수 없지. 헌데 말이다. 그 피는 누구의 것 일거라 생각 하느냐?"

 

 울고불고 매달려도 모자랄 판에 서슴지 않고 그에게 다가서는 설희는 여태껏 보지 못한 미소를 머금었다.

 

 온갖 권세를 쥐고 있는 이조 참의와 정작 아무것도 없는 어린 궁녀와의 기싸움은 기이하게도 팽팽하게 당겨진 줄처럼 어느 한족으로도 치우치치 않았다. 아니 오히려 생각시에게 밀리는 듯한 그의 모습에 보는 이들의 가슴이 두서없이 뛰었다.

 

 대소신료조차 함부로 그에게 나서지 못하며 쩔쩔매건만 어느 하나 흔들림없이 또박또박 제 할 말을 다하는 아이는 그의 매서운 시선을 피하기는 커녕 도리어 또렷히 맞받아쳤다.

 

 제 앞에서는 누구도 이리 대들지 못하거늘, 여린 듯 하면서도 부러지지 않는 당찬 기개로 가득한 설희의 눈이 더욱 마음에 들지 않는 그는 더는 참지 못하고 차갑게 식어버린 손을 들어 설희의 목을 순식간에 움켜쥐었다.

 

 "윽."

 

 "이제야 겁이 나는 모양이구나. 그래. 그래야지. 어서 '살려달라' 애원해 보거라. 어서 울고불고 매달려 보란 말이다. 허면 내 한번은 생각해 볼테니 말이다."

 

 말은 그리 하였으나 처음부터 설희를 살려줄 생각이 없던 그는 불같이 치솟는 눈길로 설희를 여지없이 집어 삼켰다.

 

 이 정도로 겁박을 하였으면 응당 비명부터 지르고 발버둥을 치는 것이 당연한 일인데.

 

 설희는 점점 목이 옥죄어 올수록 소리조차 지르지 않고 그를 싸늘한 시선으로 응시할 뿐이다.

 

 너무 맑아서 날카롭기까지 한 눈빛에 그는 일순간 가슴이 뜨끔했다.

 

 뭐 이런 계집을 보았나.

 

 설희의 당당한 기세에 그의 손안이 느슨해졌다.

 

 하지만 어린 계집에게 밀려 물러선다면 두고두고 저들의 입방아에 오를 것이 분명하다. 소문은 순식간에 조선팔도에 퍼지겠지.

 

 결코 그리 될수는 없지. 내가 누구인가. 이조 참의가 아닌가. 이 조선이 내 발아래 있거늘. 웃음거리가 될 수 없지.

 

 잠시 느슨해졌던 그의 손은 설희의 목을 금방이라도 부러뜨릴 것 같이 잔뜩 힘을 주었다.

 

 "네년의 그 눈, 진작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 요망한 눈을 어찌 해줄까. 지금이라도 파 주랴."

 

 근육이 경직 될 정도로 새하얗게 변해가는 설희의 낯빛에 광기어린 그는 괴기스럽게 입꼬리를 틀었다.

 

 "당돌한 년, 끝까지 살려달라는 말 한마디 하지 않다니. 좋다. 그럼 이제부터 제대로 한번 놀아보자."

 

 한줌도 되지 않는 설희의 목은 그의 손안에서 장난감처럼 이리저리 흔들렸다.

 

 "그 손 치우십시오. 이 분이 뉘신지 아십니까.“

 

 이조 참의에게 달려든 단아는 있는 힘껏 소리를 질렸다.

 

 "당장 놓으십시오."

 

 이조 참의의 손을 때리고 할퀴고 잡아당겨도 설희를 놓아주지 않자 단아는 턱이 빠진 만큼 입을 벌려 그의 손을 물어뜯었다.

 

 "끄아악! 이것이."

 

 제 손에 벌겋게 핏물이 올라오는 것을 본 그는 한 손으로 단아의 머리채를 단단히 틀어쥐고는 아이를 집어던졌다.

 

 힘없이 떨어지는 낙엽처럼 바닥으로 고꾸라지는 단아는 단말마의 비명을 지르며 거친 신음을 토했다. 땅에 얼굴이 갈려 아랫입술이 터지고 온몸을 강타하는 통증에도 단아는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몸을 일으켜 그에게 달려들었다.

 

 "이 년이!"

 

 "허억!"

 

 그에게 닿기도 전에 복부를 세차게 걷어차인 단아는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눈앞이 핑핑 돌았다. 숨이 턱 하니 막혔다. 숨을 쉬려고 해도 쉬어지지 않았다. 점점 몸 안의 공기마저 사라지는 것 같자 단아는 컥컥거리며 몸을 비틀었다.

 

 고통을 삼키려 이를 악문 단아는 새우처럼 등을 구부리며 발버둥을 쳤다. 순간 설희의 까만 눈동자에 불꽃이 일었다.

 

 "네놈이... 감히 단아를."

 

 억센 그의 손아귀에서 고개조차 돌릴 수 없는 설희였지만 제 옆에서 한번도 보지 못한 얼굴을 한채 힘겨워하는 단아를 설희는 똑똑히 제 눈으로 담았다.

 

 "이 년들이 쌍으로 죽고 싶어서 환장을 했구나."

 

 피가 철철 나는 손을 보며 부르르 떠는 그는 붉은 달을 삼킨 짐승처럼 맹렬하게 설희를 노려봤다.

 

 "걱정 말거라. 내 그리 해줄테니."

 

 반쯤 올라간 입꼬리를 슬며시 비트는 그는 두 손으로 설희의 목을 조르기 시작했다.

 

 "저 , 영감. 어린 것이 철이 없어서 그러는 것이니. 부디 한번만 아량을 베풀어... 헉, 그러다 죽겠습니다."

 

 보다 못한 궁녀 하나가 부들부들 떨며 그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그러나 이미 이성을 잃은 그에겐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제 손 안에 쥐어진 가냘픈 어린 새를 무참히 으깨어 버릴 생각뿐. 그의 음침한 미소가 점점 깊어질수록 설희의 몸은 더욱 차갑게 식어갔다.

 

 "멈춰라!"

 

 바로 그때였다.

 

 어디선가 날카로운 고성이 울렸다. 내관과 궁녀들은 일제히 소리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네놈이 감히 누구의 몸에 손을 대는 것이야!"

 

 불호성을 내지르며 달려오는 장상궁 뒤로 긴 그림자 하나가 드리웠다.

 

 어느 궁녀가 차츰 짧아지는 그림자를 알아본 듯, 불쑥 튀어나온 그녀의 한마디에 수많은 시선이 화살촉처럼 그에게 꽂혔다.

진혜이 16-09-25 16:21
 
설희의 운명이 어떻게 변해 가는지 끝까지 지켜봐 주세요~^^
에이바 16-09-25 22:06
 
제 살을 태우는 저녁 노을과도 같은 눈빛... 진혜이님의 표현력에 절로 고개가 숙여집니다.
행복한 주말 보내세요~
이브비버 16-10-17 05:55
 
필치가 더 이상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좋습니다..홧팅!
  ┖
진혜이 16-10-18 11:36
 
감사합니다.~^^
happydream 16-10-23 01:30
 
좋군요!
  ┖
진혜이 16-11-11 12:19
 
재밌게 봐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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