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점 무르익어가는 연회의 밤은 흥겨운 풍악과 낭자한 웃음소리로 가득했다. 춤을 추는 무희들의 춤사위 또한 짙게 내린 어둠처럼 깊어갔다.
인정전의 월대 위.
붉은 비단으로 두른 세개의 탁자 중 가장 왼쪽에 앉아 있는 수빈 김씨는 무언가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잔뜩 이맛살을 찌푸리며 눈을 흘겼다.
"대체 오라버니는 어디에 계신 게야. 연회가 시작한 지가 언제인데. 쯧쯧쯧!"
월대 아래로 길게 늘어져 앉아 있는 조정 대신들 사이에 여전히 이조 참의의 자리는 비워져 있었다.
괜스레 치솟는 짜증에 수빈은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꾹꾹 눌리며 슬쩍 고개를 돌렸다. 왕과 중전이 보였다.
어쩔수 없이 연회에 참석했다는 듯이 왕과 중전은 탐탁지 않는 표정을 지우지 않은 채 씁쓸한 입맛을 독한 술로 달래고 있었다. 수빈의 붉은 입술이 한층 더 치켜올라갔다.
"그러고 보니 세자 저하께서 보이지 않습니다."
심사가 제대로 비틀린 수빈은 중전 바로 아랫자리에 있는 세자빈 윤씨를 슬쩍 내려다보며 말을 했다. 표정하나 없이 차갑게 굳은 얼굴만큼이나 목소리 또한 싸늘했다.
"세자 저하께서 몸이 미령하시어 나오시지 못하였습니다."
다소곳하게 앉아있는 세자빈이 고개를 살짝 숙이며 조곤조곤 대답했다.
"그래요. 거참, 어제만 해도 그리 펄펄 날뛰시던 분이 하필 오늘 그리 아프실까."
고개를 모로 튼 수빈은 집채 만한 가체를 어루만지며 비아냥거렸다.
"수빈이 이해하게. 세자가 어제 늦게까지 용무를 보다가 감환(感患)이 들었다고 하네. 어쩔수 없이 오지 못하게 된 것이지 다른 뜻이야 있겠는가."
수빈의 성정을 모를 일 없는 중전은 그녀를 달래주 듯, 옅은 미소를 지으며 나긋하게 말을 이었다.
"그리 건강하신 분도 감환(感患)이 드시는가 봅니다. 그것도 하필 오늘 감환이라니 참 묘하지 않습니까."
"수빈!"
왕의 짧은 부름에 수빈은 입꼬리를 느릿하게 말아내리며 헛기침을 했다.
감환이라. 내가 그 속을 모를 줄 아십니까. 꼴 보기 싫은 거겠지요. 세자, 나를 그리 무시하다가 장차 어찌하시려고 그러십니까. 다음 보위는 바로 내 아들인 지산군이 오를 겁니다. 그때 어찌 내 얼굴을 보시려고 그러시는 건지.
그런데 누굴 닮아서인지 빈틈 하나 없는 세자는 수빈에게 어떤 틈도, 기회도 주지 않았다.그렇다 보니 점점 불안한 쪽은 수빈이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깊어지는 초조함에 그녀는 속이 뒤틀려 죽을 판이었다.
거기다가 요즘 왕까지 자신을 무시하는 것 같아 붉은 당의 사이로 불끈 주먹을 쥔 수빈은 표독스러운 눈으로 제 아비인 병조 판서를 노려봤다.
도대체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나며 병조 판서를 향해 성난 눈짓을 하자 뽀쪽하게 솟은 눈썹을 꿈틀거리는 그는 조금만 기다리라며 환하게 웃었다.
그 기다리라는 말을 언제부터 하신지 아십니까?
그저 웃고만 있는 아비조차 마음에 들지 않는 수빈은 토라진 듯 아랫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휙 돌렸다. 여전히 오라버니의 자리가 비워져 있자 수빈은 제법 앙칼진 목소리로 궁녀들을 다그쳤다.
"도대체 오라버니를 모시려 간 내관은 어떻게 된 거야!"
"송구하옵니다. 수빈 마마, 곧 오실 겁니다."
궁녀 하나가 허리를 반쯤 숙이며 쩔쩔매고 있을 그때, 궐안을 가득 메우던 풍악소리가 갑자기 뚝하고 끊겼다. 놀란 무희들이 어찌해야 할지 몰라 갈팡질팡 하고 있는 사이 모든 이들의 시선을 사로잡는 이가 하나 있었다.
분홍빛 치마와 꽃술이 수 놓아져 있는 상앗빛 당의를 입은 소녀.
화려하지는 않지만 고귀함을 드러내는 자태로 한 걸음 한 걸음 걸음을 떼며 연회장으로 들어서는 아이는 수많은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높다란 월대를 향해 걸어갔다.
그 당당함에 무희들이 바닷물이 갈라지 듯 길을 내어주었고, 누구 하나 아이를 호통치거나 말리는 이도 없었다. 연회의 주인공이 수빈이 아닌 바로 이 아이인 것 같아 그저 입만 벙끗거릴 뿐 선뜻 나서는 자가 없었다.
월대 바로 밑에까지 다가간 소녀는 위를 올려다보며 나직하게 그를 불렸다.
"오래간만입니다. 전하."
어린 아이의 입에서 나온 뜻밖의 말에 대소신료들의 눈이 튀어 나오듯 커졌다.
감히 이 나라의 왕을 저리 친근하게 부르다니, 자신이 왕의 윗사람인양 느긋하게 왕을 부르는 아이의 모습은 누가보더라도 당당하기 그지 없었다.
잠시 미묘한 표정을 짓던 왕의 눈빛이 심상치 않게 흔들렸다.
술기운 때문인지, 아니며 못마땅한 자리에 어쩔 수 없이 앉아 있기 때문인지, 길게 늘어져 있던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더니 서서히 위로 올라갔다.
뭔가에 놀란 사람처럼 흐릿했던 왕의 눈동자에 와락 생기가 퍼졌다.
그리고 또 한 사람.
연회 내내 아무런 표정없이 술잔을 기울이며 무심히 앉아 있던 영의정 임 서훈.
강인한 턱선이 유독 눈에 띄는 그의 표정에 처음으로 변화가 일었다. 천천히 고개를 들어올리는 그는 혹한의 서릿발 같이 차갑기 그지 없는 표정으로 아이를 찬찬히 훑었다.
열서너살 정도로 보이는 여자 아이.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한치의 흐트러짐 없는 자태. 누구에게도 굴하지 않는 기백이 넘치는 풍모와 그와 대조적인 사슴같은 동그란 까만 눈망울, 반듯하게 선 코, 앙증맞은 붉은 입술.
저 자태와 용모, 불현듯 그의 머릿속에서 스치는 한 사람이 있었다. 영의정은 자신도 모르게 한쪽 입술을 비틀었다. 싸늘하게 말려 올라간 그의 입가에 알수없는 실소가 새어나왔다.
"그동안 잊고 있었군."
다시 고개를 떨구는 그는 한모금의 술을 삼키며 중얼거렸다.
헌데 갑자기 술맛이 변한 것인가.
조금전만해도 참으로 달짝지근한 술이 왜 이렇게 쓰디쓴 술이 되었는지, 목구멍으로 넘어가지 않고 입안에서 알싸하게 퍼지는 감촉이 썩 내키지 않았다.
"뭐 저, 저런 계집을 보았나. 여기가 어디라고. 저 년을 당장 끌어내지 않고 뭣들 하고 있는 것이야!"
누군가의 외침에 그제서야 정신을 차린 대신들이 온갖 욕설을 하며 아이에게 삿대질을 했다. 하지만 그들의 거침없는 목소리는 이내 아이의 말에 사정없이 묻히고 말았다.
"역시 소문대로 입니다. 아니 소문이 쫓아가지 못할 만큼 참 대단합니다. 하늘을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병조 판서의 여식인 수빈의 생일연을 인정전에서 열다니. 내 눈으로 보지 않았다면 믿지 않았을 겁니다."
연회장에 가득 메운 사람들을 일일이 훑어보는 아이는 혀를 쯧쯧차며 조소를 머금었다.
"참, 그래도 그렇지. 한낱 후궁의 생일연에 당상관들이 다 모여 있다니. 부끄러운 줄은 알고 계십니까."
"저런 미친 년을 보았나. 대체 저런 년이 여길 어떻게 들어온 것이야."
버럭 소리를 지르는 병조 판서는 시퍼렇게 독이 오른 눈빛으로 아이를 노려봤다.
그런데 어디서 본듯 한 얼굴이다. 갑자기 왜 그런 생각이 드는지 그조차 알지 못했지만 지금은 그것이 문제가 아니다.
저 발칙한 것이 감히, 뭐 어째.
병조 판서는 굵은 눈썹을 이리저리 치켜세우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곧이어 계속 되는 그의 언성에 내관들이 우르르 몰려와 아이를 막 끌어내려고 하는 찰나였다.
"무엄하다. 감히 어딜 손을 대려고 하는 것이야."
월대 아래로 허겁지겁 달려내려오는 왕이 설희에게 다가가며 소리쳤다.
그 광경에 어이가 없어 말문이 막힌 수빈은 잔뜩 입매를 비틀며 왕과 설희를 번갈아보며 헛웃음을 지었다. 그녀 못지 않게 놀란 대신들도 마찬가지였다. 꼴사나울 정도로 어린 아이에게 굽실거리는 모양새에 기가 막혀 턱이 빠질 정도로 입을 벌리고 있는 이들도 한둘이 아니였다.
이번에는 중전까지 다급하게 내려와 아이에게 가볍게 목례까지 하자 여기저기서 괴상망층한 소리와 혀 차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전하, 도대체 무얼 하고 계십니까? 아니 중전마마께서도 나 원참, 두 분 다 술을 너무 과하게 드셔나 봅니다."
술잔을 거칠게 내려놓는 수빈은 두 사람의 행동이 기가 찬지 조소를 머금은 채 냉랭하고 오만한 시선으로 그들을 내려다보았다.
보통때라며 그런 그녀의 행동에 눈치를 보느라 여념이 없을 대신들과 궁인들이었지만 누구도 신경쓰지 않았다. 이미 그들의 시선은 수빈이 아닌 영의정에게 가 있었기 때문이다.
여태껏 말 한마디 하지 않고 꿈쩍도 하지 않았던 영의정이 노쇠한 몸을 슬금슬금 일으키며 아이에게 다가갔다. 사람들 앞에 나서지 않는 영의정인데, 몇마디 말로 끝날 일을 굳이 몸을 일으켜 어린 아이에게 다가가는 모습은 보는 이들에겐 괴이하게 보일 정도였다.
아이 앞에 선 영의정이 주름진 양손을 앞으로 공손히 모으며 허리를 숙였다.
"공주마마, 그동안 강녕하셨는지요?"
느닷없이 그의 입에서 튀어 나온 말에 인정전에 모여 있는 대신들의 안색이 순식간에 새파래졌다.
"공주마마라니?"
그의 말에 동그래진 눈을 연신 치켜뜨는 병조 판서는 영의정을 쳐다보며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렸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저 나이 또래의 공주는 없다.
지금 주상의 여식은 정순 옹주 한뿐인데, 그녀 역시 이미 출가한 지가 오래다.
공주라니? 도대체 자신이 모르는 공주가 있단 말인가.
연회에 모인 자들의 의문 역시 병조판서와 같았다. 그들의 머릿속에도 저 나이의 공주는 없기 때문이다.
그런 그들의 의문을 더욱 증폭시키는 아이의 태도는 그들로 하여금 더욱 의구심을 자극했다.
"역시 영의정 대감께서는 저를 알아보시는 모양입니다. 한 번도 저를 본 적이 없으신데도 말입니다."
차가운 기운마저 감도는 설희의 말에 영의정이 엷게 웃었다.
"어찌 모를 수가 있겠습니까. 소신이 신종대왕마마를 모신 세월이 얼마인데요. 공주마마께선 효성왕후 마마를 참으로 많이 닮으셨습니다."
"그렇습니까. 역시 눈썰미가 보통이 아니십니다."
설희가 가볍게 웃음을 자아내자 영의정은 고개를 옆으로 돌리며 대신들을 향해 조용히 읊조렸다.
"뭣들 하고 계십니까? 공주마마께 예를 갖추지 않으시구요. 신종대왕마마의 적녀이시며 왕실의 적통으로서, 왕실 최고의 어른이신 설희 공주마마 이십니다."
영의정의 한마디에 궐내의 모든 이들의 눈과 표정은 놀라움으로 그자체였다. 그들의 시선이 다시 설희에게 향했다.
어린 나이임에도 태고적의 아름다움을 지닌 아이는 새하얀 눈꽃처럼 빛이 났다. 아니 온 세상을 새하얀 제 색으로 덮어버릴 것 같은 영롱한 빛을 가졌다.
해서 아이의 이름을 설희(雪熙)라고 지었다.
또한 영의정의 말대로 지금의 왕은 설희의 조카이며 후궁 정빈의 소생이다. 왕손이 귀한 지금 생존해 있는 왕실 종친들은 몇 되지 않았고, 말 그대로 몇 촌인지 가늠조차 힘든 종친만 몇 남아 있을 뿐이다.
그렇다 보니 설희가 현존하는 왕실 최고의 어른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