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에?"
병조판서는 제 입이 벌어져 있는 것도 모른채 멍하니 영의정을 바라봤다.
어디선가 본 얼굴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이것이었구나. 그러고 보니 어떤 위악도 닿을 수 없는 고귀한 느낌, 단지 왕실의 피가 흐르고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 고귀함이 저 아이에게서 뿜어져 나오고 있다.
마치 신종대왕을 대면하고 있는 것처럼.
강력한 왕권을 확립했던 왕.
그의 앞에서 오금을 저리지 않는 이는 없었다. 천하의 영의정도 신종대왕 앞에선 숨소리조차 내지 않았다. 하지만 지병인 심통이 심해지자 병석에 눕는 일이 자자했고 그러던 어느날 왕은 무언가에 쫓기듯 세자에게 선위를 하고 당시 회임중인 중전과 함께 창격궁으로 거처를 옮겼다.
세상과는 담을 쌓듯 그의 허락없이는 누구도 창경궁으로 들어올 수도 나갈 수도 없었다. 그의 기이한 행동에 별의별 소문이 나돌았지만 왕자가 아닌 공주가 태어나자 그들의 관심 또한 사라졌다.
헌데 범할수 없는 위엄을 그대로 쏙 빼닮은 설희가 자신들 앞에 서 있다. 이미 오래전에, 아니 존재 자체부터 잊고 있었던 공주를 이 곳에서 만날 줄이야.
상상도 하지 못한 일이기에 얼떨떨한 표정을 지우지 못하는 대신들이었다.
"송구합니다. 공주마마. 소신이 마마를 알아 뵙지 못하고 무례를 범했사오니 부디 너그러이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그제야 예를 갖추며 허리를 숙이는 병조 판서를 시작으로 연회에 모인 이들이 모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황급히 허리를 숙였다.
"제가 그동안 창경궁에만 있었으니 병판께서 모를 수 밖에요. 그런데 말입니다. 알았음에도 여전히 상석에 앉아 있는 수빈을 어찌 해야할지 난감하군요."
설희는 상황이 어찌 돌아가는지 가늠조차 하지 못하고 있는 수빈을 향해 무심하게 말을 던졌다.
"수빈, 어서 내려와서 예를 갖추지 않는 것이오."
큰소리 한번 내지 않던 중전의 목소리가 오늘따라 유독 컸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얼이 빠진 수빈은 엉겁결에 몸을 일으켰다.
"공주마마를 뵈옵니다."
월대 아래로 허겁지겁 달려내려오는 수빈이 얼결에 설희에게 허리를 숙였다. 하지만 지금의 상황이 영 마땅치 않은 그녀는 새하얀 분칠 속에 감춘 지독한 가시를 애써 감추고 있었다.
뭐야? 이 어린것에게 허리까지 숙여야 한다니. 대체 왜 이것이 지금 나타난 것이야. 하필 오늘 같은 날에.
까맣게 잊고 있었던 존재의 등장은 그녀로서도 탐탁지 않았다.
"이럴게 아니라, 마마, 자리에 오르시지요."
반가운 마음에 한층 고조 된 목소리가 왕에게서 흘러나왔다.
"아닙니다. 초대도 받지 못한 제가 어찌 연회에 참석하겠습니까. 그보다 제가 이리 전하를 뵈옵는 이유는 교지를 하나 내려달라 청하러 왔습니다."
"교지라니요? 마마."
놀라움으로 그득한 왕의 얼굴에 붉은 홍등이 아른거렸다. 대신들의 얼굴에도 왕의 얼굴에 내린 붉은 기운이 금세 감돌기 시작했다.
"다른 것이 아니라, 이조 참의를 교수(絞首)하라는 교지를 내려주세요."
"그 무슨 말씀이십니까? 지금 제 오라버니를 교수하라는 말씀이십니까."
소스라치게 놀란 왕보다 새파랗게 변한 낯빛을 감추지 못한 수빈이 발끈하며 설희에게 되물었다.
"공주마마, 제 오라버니께서 무슨 잘못을 하였다고 교수라니요? 천부당만부당한 말씀이십니다."
제 귀로 듣고 있는 말이 도무지 믿기지 않는 수빈은 칼같이 찢어지는 목소리가 두서없이 쏟아져 나왔다. 가늘게 여민 눈을 독살스럽게 치켜세운 수빈은 잠시도 설희에게 시선을 떼지 않고 노려봤다.
이 어린것이 미쳤나. 지금 누굴 죽이겠다는 거야. 네년이 창경궁에 처박혀 있더니 세상이 어찌 돌아가는 지 모르는 모양인데 내 오늘 친히 가르쳐주마.
"마마께서 아직 연치가 어리시어 모르시고 계신 것 같사옵니다만 녹을 먹는 관료를 그리 쉽게 교수하라는 교지를 내릴 수 없을뿐더러 더구나 계집은 정사에 관여 할 수 없습니다.“
“수빈은 말을 삼가하라.”
왕의 언성이 수빈의 두 귀를 사정없이 내리쳤다.
공주에게 계집이라 칭하고 있는 걸 모르는 이가 여기에 있겠는가.
“소첩이 어디 틀린 말을 하였사옵니까?”
부릅뜬 눈으로 자신을 노려보는 왕의 시선조차 두려워하지 않는 수빈은 더욱 고개를 뻣뻣이 쳐들었다.
"수빈."
왕의 언성이 조금 더 높았다. 감히 일국의 공주를 계집이라고 칭하는 수빈의 언사에 오늘만큼은 쉬이 넘어가지 않으려는 듯 다시 입을 여는 순간 설희가 그를 막았다.
“전하. 아닙니다. 수빈의 말이 맞지 않습니까. 헌데 수빈께서는 참으로 재미있는 분이십니다. 자신의 흠을 그리 아무렇지 않게 내뱉는 걸 보면요."
"그것이 무슨 말씀이옵니까?"
치욕이나 다름없는 제 말에 오히려 빙긋 웃는 설희는 나이가 무색할 만큼 근엄한 목소리로 말을 했다.
"수빈의 말대로 게집은 정사에 관여 할수 없습니다. 그것도 후궁 나부랭이는 더더욱 아니되지요.”
설희는 말이 끝나기도 전에 수빈에게 한 발짝 다가갔다. 아직 성숙한 여인 만큼은 자라지 않은 설희였지만 앙칼지게 올라간 수빈의 시선을 놓치지도 피하지도 않았다. 도리어 저보다 한 자나 더 큰 수빈이 설희의 기를 눌러 은근슬쩍 뒷걸음을 쳤다.
“지금 뭐라 하셨습니까. 후궁 나부랭이... 말씀이 지나치십니다.”
“지나치다. 그건 내가 아니라 그대의 오라비 같은데. 참, 일을 어찌합니까? 수빈. 이미 그대의 오라비를 참했는데 말입니다."
“그게 말이 된다고 보십니까. 조정 관료를 아무리 마마라고 하셔도 함부로 사람을 죽일 수가....”
차츰 말끝을 흐리는 수빈의 시야로 무표정한 설희의 얼굴이 점점 파고들었다. 거짓이 아니라고 하는 것처럼 올곧게 자신을 올려다보는 설희는 눈동자는 단 한번의 흔들림도 없었다.
“진정 그리하신... 겁니까?”
아닐 거라며 애써 부정하는 수빈의 긴 속눈썹이 파르르 떨었다.
"설마 제가 오늘같이 좋은 날에 그런 농을 하겠습니까."
옅은 웃음기마저 설희의 입가에 덧대어지자, 경악으로 물든 수빈은 제 몸을 가누지 못하고 주춤거렸다. 그녀의 옆에 있던 상궁과 궁녀들이 부축하지 않았다면 벌써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두 여인의 날선 대화를 묵묵히 경청하던 영의정의 눈에 순간 섬뜩한 안광이 차올랐다. 하지만 그의 입에선 아무런 말도, 한숨 소리 조차 나오지 않았다. 이미 미친듯이 울리는 병조판서의 음성이 가장 먼저 인정전을 가득 메웠기 때문이다.
"공주마마!"
허겁지겁 뛰어나오는 그의 발에 술상이 걸렸다. 와장창하는 소리가 울리는 동시에 술상이 뒤엎어졌지만 그는 돌아볼 겨름도 없이 설희에게 달려갔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이미 참 하였다니요."
"듣는 그대로 입니다."
"마마, 사실 이십니까? 진정 제 자식놈을 죽이신 겁니까. 어찌 그런 무도한 일을 벌이 실 수 있단 말입니까."
"지금 저보고 무도하다고 하셨습니까. 그 말 역시 병판이 아니라, 제가 할 말입니다. 감히 어도(御道)를 그것도 평교자(平轎子)를 타고 궁에 들어오다니요. 하물며 내관을 제 마음대로 쳐 죽였습니다. 그리고 왕의 여인인 궁녀들까지, 이것만으로도 죽음을 면치 못하는데. 감히 나를 해하려 했어요. 이것이 무슨 죄에 속하는 것입니까? 그대가 잘 알고 있을 터."
울부짖는 그와는 달리 차분한 말투, 무심하기 그지없는 설희의 표정에 병조판서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제 아들이 공주를 죽이려고 했다니, 도무지 설희의 입에서 나온 말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한참 동안 멍하니 설희를 바라보던 그는 겨우 숨을 고르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
"소신은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제 자식이 어찌 마마를 해하려 했단 말입니까. 뭔가 오해가 있는 듯 하옵니다."
"이걸 보고도 오해라고 하십니까."
그의 말에 설희는 저고리 동정을 살짝 젖혔다. 설희의 목에 붉은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사람의 손자국이 분명했다.
순간 휘청거리는 몸을 바로잡는 그는 눈앞이 아득하게 멀어지는 것 같았지만 이대로 물러설 수는 없었다.
"그것이 어찌 제 아들이 한 것이라고 하십니까. 소신은 믿을 수가 없사옵니다.“
"허면 지금 내가 거짓을 고한단 말이오. 그 자리에는 나뿐만 아니라 수많은 궁인도 있었습니다. 그들의 증언 역시 거짓이라고 할 것이오. 아니면 그들을 죄다 잡아 와 입을 막을 겁니까.“
“무슨 말씀을 그리하시옵니까. 소신은 다만 너무나도 엄청난 일이라, 아니 제 아들 녀석이 그런 짓을 했을 것이라고는 믿을 수가 없사와.”
“병판, 손을 들어 해를 가릴 수 없는 법입니다. 증좌와 증인이 있음에도 더는 아니라고 하지 마세요. 그보다 내 하나 묻겠소. 감히 왕족을 해하려는 자는 어찌 되는지 병판이 말해 보시오."
"마땅히 참하는 것은 당연할 뿐더러, 삼족을 멸하게 되어 있습니다."
제 입으로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가늠도 하기 전에 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무언가를 그는 애써 삼켰다.
"아주 잘 알고 계십니다. 그럼 영의정 대감께 묻겠습니다. 제가 그자의 손에 죽어야 했습니까? 이 나라의 공주이며 다름 아닌 대감의 며느리가 될 제가요. 그것도 대감의 외조카 손에 죽어도 되냐고 묻습니다."
또랑또랑 울리는 설희의 목소리에 영의정은 3년 전 일이 불현듯 생각났다.
제 죽음은 감지한 신종대왕이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갑자기 그를 불렸다. 그를 부른 연유는 단 한가지, 자신의 하나뿐인 아들인 휘와 설희를 거의 강제적으로 정혼시켰다.
그 사실을 아는 이는 극히 일부였기에, 다들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병조판서 역시 예외는 아니다. 무덤덤한 표정을 짓는 영의정을 핏발 가득한 눈으로 노려보는 병조판서의 눈빛이 희번덕거렸다.
"당치도 않으신 말씀이십니다."
숙이는 고개만큼 영의정의 얼굴 역시 점점 어두워졌다.
"그럼 다시 묻겠습니다. 왕족을 시해하려는 자를 그 자리에서 참한다고 한들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없사옵니다."
잠시 영의정에게 닿았던 설희의 시선이 다시 병조 판서에게 옮겨갔다.
"마지막으로 병판대감에 묻지요. 이조 참의로 끝을 보시겠습니까? 아니면 삼족을 당하시겠습니까?“
병조 판서는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그의 눈동자가 어디를 향하는지 모른 채 산산이 부서졌다. 하지만 그와 달리 그의 입가엔 알 수 없는 옅은 웃음기가 돋았다. 두 물음의 답은 누가 보더라도 하나였기 때문이다. 어느 쪽을 선택하듯 왕족을 시해하려고 했다는 것을 명백하게 인정하는 것이니.
"또한 제가 무얼 가졌는지도 잘 상기해 보시는게 좋을 겁니다."
병조 판서에게 한 발짝 다가간 설희는 살짝 몸을 숙이며 오직 그만이 들을 수 있게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간담을 서늘하게 만드는 설희의 차디찬 음색에 병조판서의 등줄기로 소름이 돋았다.
겨우 13살밖에 되지 않는 어린 계집에게서 이런 위압감을 느끼게 될 줄이야.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모멸감에 치를 떠는 그는 불현듯 떠오르는 생각 하나에 정신이 바짝 들었다.
은밀히 나돌았던 소문.
신종대왕께서 승하하시기 전에 설희 공주에게 주었다는 밀지.
밀지 속에 무엇이 적혀 있는지 아무도 모른다. 그리고 또 하나 오래전에 사라진 태조 대왕의 옥새.
무학대사의 건의로 한양을 수도로 삼을 당시 하늘로 승천하는 용이 태조 대왕에게 주었다는 여의주. 바로 그것으로 만든 것이 태조 대왕의 옥새이다. 그렇기에 태조 대왕의 옥새는 다른 왕들의 옥새와는 다르다. 이 나라 조선의 건국이념과 만백성, 그리고 왕권을 상징하는 크나큰 신물이다.
하지만 행방이 묘연하연진 지 오래다. 결코 무시할 수 없는 두 가지가 설희에게 있다는 소문이 신종대왕이 승하한 시점에 은밀히 나돌기는 했지만, 그것이 실제로 있는 것인지 역시 아무도 모른다.
백성들의 더없는 추앙과 사랑을 받았던 신종대왕의 밀지 또한 자신들에게 크나큰 타격을 줄 수도 있는 상황인데, 태조 대왕의 옥새까지 나타난다면 그야말로 지금의 왕도, 조선의 쥐고 있는 영의정과 병조판서도 설희 앞에서 무릎을 꿇어야 한다.
만에 하나 밀지 속에 자신들의 목을 치라는 내용이 적혀 있다면, 그것이 세상에 알려진다면, 장담하건대 형장에서 망나니의 손에 목이 떨어지기 전에, 분명 백성들의 손에 먼저 죽을 것이다.
이것이 실제 자신의 손안에 있는 것처럼 조용히 병조 판서의 귓가에 속삭이는 설희.
그 한마디에 병조판서는 설희앞에 부복하며 엎드렸다.
"공주마마의 성은에 감읍할 따름이옵니다."
그의 대답으로 모든 것이 끝났다.
바닥에 엎드려 머리가 땅에 닿을 정도로 고개를 숙인 병조판서는 처음으로 맛본 모멸감과 수치심, 일그러진 분노로 거친 숨을 쉴 때마다 온 몸의 피가 거꾸로 쏟아지는 것 같았다.
가득 쥔 주먹이 금방이라도 터져 나갈 듯 핏기 한 점 없이 새하얗게 변해갔다. 자식을 하루아침에 잃은 슬픔조차 나타낼수 없는 그는 아랫입술을 바뜩 깨물며 울분을 참아야 했다.
“오라버니께서...”
설희의 한 마디 한 마디에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듣던 수빈은 파르르 떠는 몸을 겨우 추스리며 설희를 잡아먹을 듯이 노려봤다.
그런 그녀에게 설희는 고운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
"참, 오늘이 수빈의 탄신일이 아닌가. 이리 왔으니 선물 하나 주어야겠지."
이 와중에 자신에게 줄 선물이라니. 어린 것이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이야.
무섭도록 몸서리치는 수빈의 생각도 잠시 설희가 한 손을 들어 까딱거리자, 거적으로 덮어져 있는 들것이 연회장 안으로 들어왔다. 이내 병조판서와 수빈 사이에 놓인 들것 옆으로 피로 물든 손 하나가 툭 하고 빠져나왔다.
"까아아악!"
수빈이 찢어질 듯 비명을 지르며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 죄가 무겁기에 당연히 효수(梟首)하여 성문에 매달아야 하나, 오늘 수빈을 봐서 목은 그대로 붙여 놓았습니다. 거기에 시신까지 돌려주니 이만한 선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아니 그렇습니까?"
흥겨웠던 연회가 한순간 아수라장이 되었다.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 여인들의 비명과 새퍼렇게 질린 얼굴을 숨기지 못하는 대신들의 낯빛은 그렇게 화려하던 연회의 색을 점점 깊어가는 어둠보다 더욱 짙게 만들었다.
"제가 아무래도 초대받지 않은 곳에 너무 오래 있었나 봅니다. 그럼 이만 돌아가지요."
"마마!"
냉정하게 돌아서는 설희의 뒤로 왕의 목소리가 들여왔지만, 지옥으로 변해버린 그곳에서, 그의 목소린 실바람처럼 희미하게 사라질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