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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수초(福壽草)
작가 : 진혜이
작품등록일 : 2016.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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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모( 1)
작성일 : 16-10-01     조회 : 471     추천 : 3     분량 : 58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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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주마마! 괜찮으시옵니까?"

 

 영의정과 병조 판서 앞에서도 흔들림 없던 설희는 인적이 드문 곳이 보이자마자 갑자기 뛰기 시작했다. 커다란 느티나무가 있는 곳으로 달려간 설희는 끝내 토악질을 하고 말았다.

 

 "마마!"

 

 황급히 설희의 곁으로 달려간 장상궁이 그녀의 등을 두드렸다. 장상궁의 얼굴에도 근심이 가득했다. 이미 벌어진 일이나,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아무도 모르는 상황이다.

 

 허나 단 하나는 분명했다. 저들이 절대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라는 걸.

 

 저녁내 먹었던 것을 토해낸 설희는 힘겹게 고개를 들어올렸다. 제 소맷자락에서 재빨리 하얀 목면 손수건을 꺼낸 장상궁이 설희의 입을 조심스럽게 닦았다.

 

 "하아!"

 

 텅 비워진 속에서 나오는 한숨은 씁쓰름하기만 했다. 설희는 한 손으로 나무를 짚었다.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설희는 어디인지 모를 곳을 한층 메마른 눈동자로 바라보았다. 그 눈빛마저도 마냥 위태로워 보였다.

 

 설희 역시 여린 소녀일 뿐.

 

 눈앞에서 펼쳐졌던 끔찍한 광경은 도무지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설희는 무심코 손을 올려 제 목을 쓰다듬었다. 새빨간 손자국이 부풀어 올랐다. 여전히 그가 자신의 목을 조르고 있는 것만 같았다.

 

 장 상궁이 조금만 더 늦게 왔다면 난 자의 손에 죽어겠지.

 

 또다시 한숨을 내쉬는 설희는 생각에 잠긴 듯 지그시 두 눈을 감았다.

 

 지독한 악몽을 꾸는 것처럼, 좀 전의 일들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역겨운 이조 참의의 시선을 끝까지 피하지 않은 채 마지막 숨을 힘겹게 몰아쉬고 있을 때였다.

 

 어디선가 상기된 궁녀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내금위장, 내금위장이시다.'

 

 8척의 장골에 검붉은 구군복을 입은 내금위장을 보자마자 궁인들의 눈빛이 일순간 기대감으로 일렁거렸다. 그는 왕의 유일한 측근이었고 강직한 성품 또한 그들에게 실낱같은 희망을 품게 했다.

 

 곧이어 장 상궁의 입에서 공주마마에게서 떨어지라는 불호령이 떨어지자. 그들의 두 눈에 시뻘건 섬광이 번쩍였다.

 

 죽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저자를 죽일 수 있을지도. 아니 죽여야 한다. 부디 짐승보다 추악한 이조 참의를 죽여 주시옵소서.

 

 광기 어린 그들의 원성을 설희는 똑똑히 들었다. 아니 보았다. 그가 죽기만을. 하나같이 턱이 빠질 만큼 이를 깨물며 그의 숨통이 제발 끊어지기만을 바라는 간절하고 절박한 눈빛을 설희는 보았다.

 

 그들도 알고 있다. 지금이 아니면 그는 자신이 가진 권세로 이 상황조차 무마해 버릴수 있다는 것을,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그가 가진 권력이라는게 그랬다.

 

 설희는 지금 제 목을 조르고 있는 그보다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열망과 분노가 뒤엉켜 있는 저들의 눈빛이 너무나도 두렵고 무서웠다.

 

 하여 설희의 입에서 저도 모르게 가느다란 음성이 떨어졌다.

 

 ‘죽여라!’

 

 설희의 명에 내금위장은 서슴지 않고 손에 쥐고 있던 환도를 빼내어 들었다. 하늘 높게 치켜든 환도는 눈 깜짝할 사이에 푸른 달을 갈랐다.

 

 그들은 단말마의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핏덩어리를 토해내며 죽어 가는 이조참의를 제 눈으로 담 고나서야 서서히 입가에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더없는 만족감.

 

 누구 하나 숨김없이 드러난 미소는 무엇보다 광기 어린 붉은 밤을 더욱 짙게 만들었다.

 

 "이제야 알겠어. 아바마마께서 창경궁 밖으로 나가지 말라고 명하신 이유를 조금이나마. 왜 영의정의 자제와 정혼까지 시키셨는지."

 

 한탄이 섞인 되뇜이 가슴속 깊은 곳에서 울려 퍼졌다. 설희는 힘겹게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창경궁에서 늘 보던 하늘이건만 오늘따라 눈에 비친 하늘은 이다지도 무겁기만 하는 걸까.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는 구렁텅이 같은 까만 하늘에, 하염없이 빨려 들어갈 것만 같은 설희는 순간 몸을 앞뒤로 흔들며 휘청거렸다.

 

 "공주마마!"

 

 장상궁이 설희의 팔을 황급히 붙잡았다.

 

 "마마!"

 

 "괜찮다. 조금 어지러운 것뿐이니까."

 

 살며시 이마를 짚는 설희는 몸을 바로 세우며 서서히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내딛는 발걸음마저도 무겁기만 했다. 거대한 추라도 달았는지 한 발 내딛는 고통이 못내 온몸을 휘어 감았다.

 

 "단아는 괜찮으냐?"

 

 가득 가라앉는 설희의 목소리가 고요한 밤하늘에 울렸다.

 

 "괜찮습니다. 이미 창경궁으로 옮겼으니 지금쯤이면 치료가 끝났을 겁니다."

 

 조용히 설희의 뒤를 따르는 장 상궁이 말을 했다.

 

 "나 때문에 단아가 고생이구나."

 

 "별말씀을 하십니다. 아랫것이 상전을 모시고 살피는 것이 당연한 직무이거늘,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상전을 잘못 만나서 그렇지."

 

 "알기는 하시는 모양입니다."

 

 장 상궁의 말에 딱딱하게 굳어 있는 설희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그려졌다.

 

 "헌데 장 상궁, 왜 아무 말도 하지 않느냐?"

 

 "무얼 말씀이시옵니까?"

 

 "오늘 일 말이다. 그리 가만히 있으니 더 겁이 나는구나."

 

 "어찌하겠습니까. 이미 엎질러진 물인 것을요."

 

 장 상궁은 더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동강 난 한숨을 내쉬었다.

 

 "내 너의 잔소리를 들을 줄 알았는데."

 

 소리 없이 떨어진 설희의 고개가 애꿏은 바닥만 뚫어지라 바라보았다.

 

 "무얼 잘못 하셨는지 알고는 계십니까?"

 

 "당연히 알지. 내 어찌 모르겠느냐. 아바마마의 명을 어기고 창경궁 밖으로 나간 죄. 보지도 말고 듣지도 말고 말하지도 말라는 어마마마의 유지를 어긴 죄. 만약 하나 일이 생길 시 그저 눈 한번 딱 감고, 참고 넘기라고 누누이 말하던 자네의 말을 듣지 않은 것까지. 그러고 보니 내가 그 모든 걸 다 어긴 모양이구나.“

 

 "그리 잘 아시는 분이 왜 그리하셨습니까?"

 

 "그러게 말이다. 내가 왜 그랬을까. 그분을 생각해서라도 참아야 하는데. 장 상궁, 이젠 그분과의 인연은 이것으로 끝이겠지."

 

 씁쓸한 미소를 입가에 머금는 설희는 중얼거리듯 말을 했다.

 

 "아니, 잘하셨습니다. 공주마마 덕분에 궁에서 억울하게 죽어간 원혼들이 이제야 이승을 떠날 수 있게 되지 않았습니까. 궁에도 이러한데 저 궐 밖은 또 얼마나 억울한 원혼들이 많을꼬."

 

 높다란 궐 담장을 바라보는 설희와 장 상궁 너머로 잠시 정적이 흘렸다.

 

 창덕궁이 울릴 만큼 요란스러웠던 풍악 소리도, 하하 호호 웃어젖히는 왁자한 웃음소리도 어느 한 가지도 들리지 않았다. 스산한 바람 소리, 이름 모를 풀벌레 소리만이 간간이 들릴 뿐, 죽음의 경계에 발을 들인 것처럼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아직 겨울이 오기에는 이른데 온몸을 가르는 듯한 한기에 가냘픈 설희의 몸이 바르르 떨었다. 앞으로 다가올 제 죽음 때문은 아니다. 어쩌면 저 원혼들을 달래기 위해 제 손에 지독한 무언가를 묻혀야 할 날이 올까 봐 설희는 두려웠다.

 

 "공주마마! 한동안은 창경궁에서 조용히 지내야 할 것 같습니다. 저들이 가만히 있지는 않을 겁니다. 그러니 적어도 저희도 만만의 준비를 해야 할것 같습니다."

 

 "무얼 준비를 하겠느냐. 이 나라가 저들 손에 있거늘, 나 하나쯤 죽이는게 뭐가 대수라고."

 

 "마마!"

 

 "걱정하지 말아라. 이미 각오한 일이다. 죽음 따위는 두렵지 않다. 차라리 혼자인 것이 더 두려울 뿐이지."

 

 묘하게 말끝을 흐린 설희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창경궁으로 곱게 이어진 길이 바람 따라 흔들리는 등롱의 붉은 빛으로 얼룩졌다.

 

 이조 참의의 몸에 서슬 퍼런 칼날이 박히던 그 순간부터, 자신이 가는 길은 오로지 저런 핏빛으로만 가득 할 거라고 말하는 것처럼.

 

 설희의 예감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 날의 치욕과 울분을 갚기 위해 온갖 술수를 동원한 그들은 먼저 내금위장을 삭탈관직시켜 귀양을 보냈다. 그나마 왕이 끝까지 반대하지 않았다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을 것이다.

 

 이제 자신의 차례라는 걸 설희도 알았다. 아니 궁 안의 모든 이들이 알았다.

 

 

 

 

 ***

 

 

 

 밝은 달 아래, 언제나 왁자지껄한 소리로 가득했던 병조판서의 저택이 오늘은 구슬프게 우는 귀뚜라미의 울음소리만이 청승맞게 들려왔다.

 

 며칠 전만 해도 문지방이 닳을 정도로 수많은 사람이 드나든 곳이었지만 거짓말처럼 개미 새끼 한 마리도 얼씬거리지 않았다.

 

 그런 병조 판서의 사랑채에 은밀히 모인 이들이 있었다.

 

 상석에 자리한 영의정을 비롯한 몇몇 대신들이 매서울 정도로 날카로운 병조판서의 시선을 마주하지 못한 채 좌불안석이었다.

 

 "이리 가만히 계실 겁니까? 하루아침에 제 생떼 같은 아들을 잃었습니다. 대역죄인 이라면 장례도, 상복도, 곡소리조차 낼수 없다고 하지 않습니까. 왜 다들 꿀 먹은 벙어리라도 되신 겝니까. 어찌하실 것인지 다들 말을 해보세요. 말을!“

 

 심장을 마구 난도질당한 사람처럼 고성을 지르는 병판은 두 눈을 부릅뜨며 끊임없이 대신들을 찔러댔다.

 

 “진정하세요. 그러다 대감마저 쓰러지시겠습니다.”

 

 가슴을 쿵쿵 내리치는 병조판서를 걱정스러운 눈으로 호조판서가 바라봤다. 그의 위로에 잠시 격한 감정을 추스른 병조판서는 슬쩍 눈을 돌리며 영의정을 쳐다보았다.

 

 서안위에 한결같이 올려진 제 두손을 그가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오늘도 아무런 말 없이 입을 꾹 다물고 있는 모습조차 눈에 거슬리는 병조판서가 그를 향해 입안엣소리를 했다.

 

 “제 애미의 뱃속에 있었을때 죽여서야 했어요. 계집이라고 해서 살려두는게 아니였단 말입니다.”

 

 “그거야 일이 이리 될줄 누가 알았습니까. 사내가 태어나며 유일한 적통 대군이 되니 필히 우리에게 위해가 될거라 여겨, 준비를 만만히 해 두었는데, 다 죽어가던 능구렁이가 하루 아침에 선위를 하고 창경궁에 처박혀 있을 줄이야. 명줄은 또 얼마나 긴지 오늘 내일 하면서 자그마치 10년을 살았어요. 그 바람에 손 쓸 틈조차 없지 않았습니까. 여전히 그를 따르는 인물이 제법 있으니 말입니다.”

 

 영의정을 향한 쓴소리임을 모르지 않는 이조 판서가 그를 대변하듯 턱수록한 수염을 쓸어내며 대답 했다.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십니까. 하긴 신종대왕의 적녀이시고 왕실의 최고 어르신이니 딴 마음을 먹은 분이 당연히 계셔겠지요. 그런 분을 며느리로 들이는건 가문의 영광이긴 합니다. 아니 그렇습니까? 영상 대감! 허나 섭섭합니다. 그래도 명색이 휘의 고모부인데 저에게는 말씀을 하셨서야지요.”

 

 자신의 아들을 잃은 마당에도 영의정의 처사에 잔뜩 불만인 병조판서가 비뚜름하게 올라간 입꼬리를 비틀며 비아냥과 냉소를 퍼부었다.

 

 그 일이 보통일 인가. 그런 중차대한 일을 자신에게 언질조차 주지 않았다는 사실에 그는 내심 화가 났다.

 

 “내가 내 하나뿐인 아들을 부마로 만들상 싶은가. 해서 자네에게도 말을 하지 않은 것뿐이니 오해하지 말게.”

 

 별일 아니라는듯 영의정이 무덤덤하게 말을 꺼내자 병조판서의 굵은 눈썹이 휙하고 올라 붙었다.

 

 “네네. 그러시겠지요. 제가 깜빡했습니다. 대감께서 하시는 일을 제게 고할 이유는 없을뿐더러 제가 감히 감 놔라 배 놔라 할수도 없지요.”

 

 그가 대놓고 영의정에게 통박을 주자 못다 못한 이조판서가 다시 입을 열었다.

 

 "병판 대감, 그만 하세요.“

 

 “왜요? 제가 못할 말이라도 했답니까?.”

 

 "그게 아니지 않습니까. 좀 진정하시라는 말입니다."

 

 "제가 지금 진정하게 생겼습니까. 하긴 이조판서가 되신지 얼마되지 않으셨으니 얼마나 공사다망 하시겠습니까.“

 

 병조판서의 특유의 비아냥거림이 그의 말끝에 가득 묻어났다.

 

 “뭐, 이조의 속아문이 한둘이 아니니 두루두루 살펴 볼것이 많긴 하지요.”

 

 그걸 모르지 않는 이조판서가 이맛살을 찌푸리며 시큰둥하게 대답을 했다.

 

 “그러십니까? 제가 아는 것과는 많이 다릅니다. 이판, 내 충고 하나 하지요. 적당히 하세요. 적당히. 그리 뒷돈을 챙기시다가 그 자리에서 쫓겨 날수도 있어요. 그리 끝나면 다행이겠지만.”

 

 “뒷돈이라니요? 말씀이 과하십니다.”

 

 “뭐가 과하다 말입니까. 벌써부터 사저의 문턱이 닳아 없을 정도로 사람들이 드나든다고 하는데 아니라고 하실겁니까. 그러려면 대감께 뒷돈을 주고 조정관직에 앉은 사람들의 그 입부터 막으세요... 그리 챙기느라 바쁘신 분이니 제 자식 죽든 말든 무슨 상관이시겠습니까. 굴러 들어온 재물에 정신을 못 차리고 계시는데 말입니다.”

 

 “병판!”

 

 “그만들 하게. 이리 모인 연유도 이 일을 어찌 처리 할지를 논의하기 위함이니, 쓸데없이 우리끼리 티격태격 할 필요가 있겠는가.”

 

 바닥을 꾹 찌르는 이조 판서의 고성에 좌의정이 그 둘을 말렸다.

 

 "그러니까! 대책을 내놓던지. 그 계집을 어찌 할 것인지. 방도를 내놓으란 말입니다!"

 

 제대로 된 방책 하나 내놓지 못하자 머리끝까지 화가 난 병조 판서의 음성이 쇠소리 마냥 더욱 갈라졌다.

에이바 16-10-02 10:15
 
잘 보고 갑니다, 진혜이님. 건필하세요~
진혜이 16-10-02 21:19
 
네. 에이바님도 건필 하세요.
이브비버 16-10-17 06:22
 
* 비밀글 입니다.
  ┖
진혜이 16-10-18 12:39
 
* 비밀글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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