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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수초(福壽草)
작가 : 진혜이
작품등록일 : 2016.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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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6-10-02     조회 : 434     추천 : 3     분량 : 7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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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실 그게 딱히 어찌 할 방도가 없지 않습니까. 빼도 막도 못하게 왕족을 시해하려고 한 것이 명백하니, 내금위장처럼 트집을 잡으려고 해도 그게 영 마땅치도 않고."

 

 "동부승지!"

 

 겨우 입을 연 동부승지가 몇 마디 말을 건네다가 도리어 병판의 노호성에 '흡'하고 내뱉던 숨을 다시 들이켜 마셨다.

 

 "그리 화부터 낼게 아닙니다. 동부승지의 말대로 작은 흠이라도 있어야지 파고들지요. 상대는 이 나라의 공주입니다. 그것도 왕실 최고의 어른인 왕족이 아닙니까. 창경궁에 갇혀 살다시피 한 어린 계집에게 또 무슨 흠이 있고 틈이 있겠습니까. 그렇다고 해서 가만히 있을 우리도 아니니, 확실하게 보낼 방도를 찾을 때까지 섣불리 나서는 건 좋지 않을 듯합니다."

 

 조용히 관망한 공조판서는 하얗게 늘어진 눈썹을 쓸어내리며 차분하게 말을 했다.

 

 "그래서 조용히 숨죽여 있자는 말씀입니까. 언제부터 육조의 수장이라는 분들이 어린 계집 하나에 벌벌 떨고 계셨답니까."

 

 "그럼 어찌하면 좋겠는가?"

 

 병조판서가 내놓는 쓴소리를 묵묵히 듣고 있는 영의정이 그를 넌지시 바라보며 물었다.

 

 "거야 죽여야지요."

 

 서슴지 않고 내뱉은 병조판서의 말에 그들은 한동안 입을 굳게 다물었다.

 

 "하긴 그 날 보았지만 보통 계집은 아니였습니다. 범상치 않은 그 눈빛이 영락없이 신종대왕을 닮았어요."

 

 긴 침묵 속에서 먼저 말을 꺼낸 호조판서가 혀를 끌끌찼다. 아직도 그의 눈앞에 선한 신종대왕, 불같은 그의 성정에 몸서리쳤던 적이 한 두번이 아니었다.

 

 "허면 어찌 죽일 셈입니까? 아무래도 쉽지는 않을 듯 한데요."

 

 느물거리는 시선으로 방안에 있는 자들의 눈을 일일이 마주치는 동부승지가 물었다.

 

 "어떻게 죽인다? 우리가 사주한 것을 모르게 죽여야하는데."

 

 공조판서의 가느다란 눈매가 생각에 잠겼는지 길게 늘어졌다.

 

 "간단한 일을 뭘 고민하는가."

 

 그토록 원했던 해답이 누군가의 입에서 나오자, 모두의 시선이 그쪽으로 쏠렸다. 미묘한 미소를 지으며 느른하게 팔짱을 낀 좌의정의 눈매가 차가운 안광으로 가득했다.

 

 사람 좋은 얼굴로 푸근한 미소를 짓는 좌의정이 저렇게 웃기도 하는 사람인지 놀라워하는 그들이 잠시 당황하는 사이, 그의 두툼한 입술이 서서히 벌어지기 시작했다.

 

 "궁 안에서는 여러모로 보기에도 좋지 않고, 우릴 의심하는 눈도 있고 하니, 적당히 혼을 내준 연 후에, 궁 밖으로 쫓아내서...“

 

 그가 부러 다음 말을 삼키며 똬리를 튼 뱀처럼 차갑고 섬뜩한 미소를 입가에 담았다.

 

 "어떻게 말입니까?"

 

 성질 급한 동부승지는 동그랗게 커진 눈을 깜빡거리며 불쑥 얼굴을 내밀었다.

 

 "이렇게 하면 되지 않겠는가."

 

 좌의정이 살짝 고개를 숙이자 대신들도 덩달아 고개를 숙여졌다. 이윽고 그의 잇새로 빠져 나오는 말들이 뜨겁게 달구어진 방안의 공기를 단숨에 얼려버렸다.

 

 "아주 좋습니다. 좋아요. 하하하!"

 

 그의 말이 끝난 후, 환한 웃음을 짓는 병조판서의 통쾌한 웃음소리가 난데없이 초상집에서 울려 퍼졌다.

 

 "어떻습니까? 영의정 대감."

 

 마지막 결정을 기다리듯 좌의정이 넌지시 영의정을 바라보며 물었다. 자신이 생각해도 꽤 괜찮은 방법이기에 그에게 칭찬 한번 받아볼 양 그의 눈꼬리가 얍삽하게 올라갔다.

 

 "그리 하게."

 

 "그럼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은근히 피어나는 영의정의 미소에 한껏 들뜬 좌의정이 눈웃음을 지었다. 늦은 밤 괴이하게 흩어지는 호롱불의 불빛이 귀면처럼 좌의정의 얼굴에 덧입혔다. 스산한 살기마저 감도는 그의 입가에 여전히 싸느란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알지 못했다.

 

 병판의 사랑채에 모인 자신들의 운명을.

 

 제 앞날에 드리워진 차디찬 죽음의 그림자를 누구도 알아채지 못한 채, 호탕한 웃음소리 만이 가득한 그날 밤은 그렇게 저물어 갔다.

 

 

 

 

 ***

 

 

 창경궁의 양화당.

 

 간소하게 차려진 소반이 설희 앞에 놓여 있다.

 

 "어서 기미를 하지 않고 무얼 하는 것이야."

 

 단호하게 호통을 치는 장상궁 옆에 궁녀 하나가 바르르 떨며 제 손에 들려진 그릇 안을 멍하니 들여다보고 있었다.

 

 "어허, 어서 하지 않고."

 

 장상궁의 노호에 그녀를 흘끗 흘겨본 궁녀는 젓가락을 들어 그릇 안에 있는 나물을 집어 들었다. 서서히 제 입에 가져다대는 순간, 궁녀가 갑자기 포복을 하며 울부짖기 시작했다.

 

 "마마, 마마! 살려 주십시오. 소인은...소인은...죽기...싫습니다."

 

 "뭐라? 방금 무어라 했느냐? 감히 기미를 보지 않겠다는 것이야. 내 당장 네 년을..."

 

 "장상궁 그만하게."

 

 "하오나 마마."

 

 "그만 하래도. 저 아이가 무슨 죄가 있느냐. 너는 그만 나가 보거라."

 

 "황공하옵니다. 마마."

 

 장 상궁의 눈치를 슬쩍본 궁녀는 설희의 명이 떨어지자마자 부리나케 방안을 빠져 나갔다.

 

 "공주마마, 어쩌시려고 이러십니까?"

 

 "됐네."

 

 "마마."

 

 "장 상궁, 나 때문에 저 아일 죽게 할수 없지 않는가."

 

 "기미 또한 저들의 일이옵니다. 허니 다시 부르겠사옵니다."

 

 "이미 기미를 보다가 피를 토하며 쓰러진 아이가 한둘이 아니지 않느냐. 다행히 죽지는 않았지만 여태껏 깨어나지 못하고 있으니. 다들 두렵겠지."

 

 설희는 제 앞에 놓인 소반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수차례 조사를 하였지만 독을 탄 궁인들만 잡아들일 뿐, 그 배후는 알아내지 못했다. 아니 배후가 누구인지 모르는 자가 있겠는가.

 

 다만 배후를 안다한들 확실한 증좌 없이 잡아들이지 못하는 나날이 길어질수록 설희 앞에 엎드려 살려달라며 울부짖는 궁인들만 늘어갈 뿐이다. 언젠가는 불어 닥칠 줄은 알았지만 이런 식으로 자신을 괴롭힐 줄이야.

 

 "공주마마, 허면 소인이 기미를 하겠사옵니다."

 

 "아니, 제가 하겠습니다"

 

 제대로 된 식사 한번 하지 못해 핼쑥한 설희를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보는 장상궁이 젓가락을 들고 기미를 하려고 하자, 단아가 재빨리 젓가락을 빼앗아 들어 나물 하나를 입에 가져댔다.

 

 "단아야, 아니 된다."

 

 설희가 단아의 손을 냉큼 내리쳤다.

 

 쨍그랑.

 

 곧이어 그릇과 나물이 바닥에 나뒹굴었다.

 

 "마마, 기미를 하지 않으며 어찌 드실 수 있겠사옵니까. 허니 소인이 하겠습니다."

 

 "해서 내 앞에서 네가 피를 토하고 쓰러지는 것을 보고 있으라는 말이냐."

 

 단아가 다시 젓가락을 집어 들자 설희가 그녀의 손을 와락 잡아챘다.

 

 "공주마마. 이러시면 아니 되십니다. 소인들이 기미를..."

 

 이번에는 장 상궁이 설희를 설득하기 위해 조금 더 그녀에게 다가갔다. 바로 그때, 문밖에서 들리는 궁녀의 말에 장 상궁의 말이 뚝 끊겼다.

 

 “마마, 세자 저하 드셔 사옵니다.”

 

 “강이 왔다고. 어서 뫼시어라.”

 

 설희의 하명이 떨어지자 문이 열리며 방안으로 세자 이 강이 들어왔다. 강의 등장에 한층 상기된 두 뺨을 떨구는 단아가 번뜩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인이라며 한번 보는 것만으로도 제 심장을 가눌 길이 없을 만큼, 매끄러운 옥을 깍아놓은 듯 했다. 반듯하게 솟은 눈매와 그 아래로 떨어지는 오뚝한 콧날과 부드러운 붉은 입술, 티끌 하나 없는 깨끗한 피부에 묘하게 미소를 머금은 그는 누가 보아도 천하의 잘난 사내였다.

 

 올해 열여섯이 되는 강은 시간이 자날수록 더욱 남자다운 풍모를 풍겨 궐안의 궁녀들의 마음을 하나같이 애타게 흔들어 놓으니 상상병에 몸져 누운 궁녀가 허다했다.

 

 마침 동창으로 들어오는 햇살마저 한웅큼 움켜쥔 강은 여인의 마음을 설레게 할 만큼 준수 했지만 그의 검은 눈동자만은 깊은 그림자로 가득했다.

 

 "세자 저하께서 어인 일로 이 곳까지 행차 하였사옵니까?"

 

 "장상궁, 먼저 상 위에 있는 것들 부터 치워주게. 그리고 자리 또한 비켜 주게나."

 

 그의 등장에 놀란 장상궁이 뭐라 하기도 전에 위엄에 찬 강의 목소리가 내려앉았다.

 

 "아, 알겠사옵니다."

 

 장상궁과 단아가 상을 정리하고 나가자, 설희와 강 사이엔 빈상만이 우두커니 놓여져 있었다.

 

 "건욱아."

 

 "네, 저하."

 

 강의 내관인 건욱이 짧은 부름에 답하며 들고 온 찬합을 열었다. 설희는 가지런히 놓여 있는 음식을 하나하나 정성스럽게 상 위에 올리는 건욱을 바라보다 다시 강에게 시선을 옮겼다.

 

 "이게 다 무엇입니까?"

 

 "창덕궁 수라간에서 가지고 온 것입니다. 안심하고 드시옵소서. 이미 기미도 하였습니다."

 

 묵직하게 내려앉은 강의 말에 건욱이 슬쩍 그를 바라보다 설희와 눈이 마주쳤다. 그러자 건욱이 길쭉한 얼굴을 더욱 늘어뜨리며 볼멘소리를 쏟아냈다.

 

 "마마, 그게 말입니다. 세자 저하께서 망측하게도 수라간에 드셔서, 나인들의 행동 하나하나를 지켜보셨습니다. 그런 일은 소인이 해도 될 것인데. 혹여 저하께서 수라간에 드신 일이 알려지면 대신들의 입에 한동안 올려질게 분명한데 말입니다."

 

 건욱이 걱정 섞인 눈으로 강을 바라봤다. 조금의 틈만 보여도 승냥이떼처럼 달려드는 그들이 아닌가.

 

 살얼음판이나 마찬가지인 세자의 자리를 언제 빼앗기게 될지 모르는 일이다. 강 역시 그의 마음을 알고 있지만 설희 앞에서 괜한 말을 했다며 슬며시 건욱을 노려봤다. 그의 시선에 괜스레 섭섭해진 건욱이 입술을 쭉 내밀며 조용히 고개를 떨구었다.

 

 "왜 그리 하신 겁니까? 사가에서도 사내가 부엌에 드나드는 것이 크나큰 흉이거늘, 궁에서 그것도 왕세자께서, 법도에 어긋나는 일이 아닙니까."

 

 "제 눈으로 직접 봐야지 믿을 수 있기에 그리하였습니다."

 

 "아무리 그렇다고 하나 다시는 그리하지 마세요."

 

 "알겠사옵니다."

 

 짐짓 노한 척, 어른인 척 하는 설희의 모습이 강의 눈에는 그저 귀여운 아이 같았다. 설핏 입가에 맺힌 미소를 숨기며 강이 건욱에게 시선을 돌렸다.

 

 "건욱아. 너도 물러나 있거라."

 

 "네. 저하."

 

 조용히 뒷걸음치는 건욱이 방을 나가자 닫히는 문을 살며시 본 설희가 몸을 바짝 앞으로 숙였다.

 

 "왜 또 여길 와? 지금 창경궁에 쏠린 눈이 얼마인데."

 

 조금전 나누는 말과는 사뭇 다른 친근감이 어린 설희의 말에 강이 싱긋 웃었다.

 

 “소손이 언제 다른 이들의 눈을 두려워 한적이 있었습니까.”

 

 "그러니 하는 말이지. 이러다 너까지 저들이 눈 밖에 나며 어쪄려고 그래."

 

 "저들의 눈에 나면 달라지는 거라도 있사옵니까. 이미 저들의 눈에는 제가 그리 곱게 보이지 않을 겁니다."

 

 그의 잔잔한 미소와 다르게 말속에 담겨진 지독한 외로움이 설희에게 전해졌다. 자신도 그 역시도 피할 수 없는 질긴 운명처럼 궁에서 태어난 자들의 외로움은 벗어 날 수 없는 존재이다.

 

 왕의 자리에 가까울수록 더욱 그러할뿐.

 

 "저와 함께 창덕궁으로 가시지요. 설마 창덕궁에서도 저들이 이리 패악한 짓을 하겠습니까."

 

 "싫다."

 

 "왜 싫다고 하십니까? 혹 저와 주상전하 때문이십니까."

 

 잠시 머뭇거리는 설희가 씁쓸한 눈빛으로 강을 바라보았다.

 

 "내가 창덕궁으로 가면 어찌 될 것 같아. 저들이 가만있을 거라고 생각해. 아니 저들은 내가 어디에 가든 끝까지 날 죽이려 할 거다. 지금처럼 말이야. 창경궁의 궁인들은 짧게는 몇 해에서 길게는 수십년을 이곳에서 보낸 자들이다. 나 때문에 거의 감금 된 것이나 마찬가지인 궁인들을 하루아침에 제 사람으로 만들어 음식에 독을 넣게 만든 자들이야. 그럼 창덕궁은? 저들의 끄나풀들이 창덕궁에는 없을 것 같아. 내가 창덕궁으로 가면 그들은 분명 창덕궁 수라간도 손을 쓸거야. 자칫 잘못하여 너와 주상께서 먹게 되면 내가 이 나라 종묘사직을 위험에 빠뜨린 것과 무엇이 달라. 그러니 가자는 말은 더 이상 하지마."

 

 "허나 소손은 기필코 마마를 창덕궁으로 모실 겁니다."

 

 "강아."

 

 "마마, 그리 고집부리실 때가 아닙니다. 저와 창덕궁으로 가시지요."

 

 "아니 간다고 했다."

 

 얼굴을 모로 튼 설희는 강의 부탁을 냉정하게 거절했다.

 

 "허면 소손의 청을 들어주셔야겠습니다."

 

 “청이라니?”

 

 “세 번의 내기에서 제가 이기면 무슨 청이든 들어주시겠다고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설희는 강의 말에 문득 예전에 한 내기가 생각났다.

 

 세번의 내기.

 

 생각시 옷을 입은 자신과 단아를 구별 할 수 있는지를 내기로 하였다. 장 상궁 이외에는 구분조차 하지 못하는 것을 강은 세번 모두 설희를 찾아냈다.

 

 어떻게 알았냐는 질문에 강은 그저 싱긋 웃기만 했다.

 

 “소손의 청은 마마께서 창덕궁으로 가는 겁니다.”

 

 “그것 말고 다른 것으로 해.”

 

 “마마, 저들이 또 무슨 짓을 할지 알 수 없사옵니다.”

 

 강의 언성이 한층 높아졌다.

 

 "강아, 나 배고파."

 

 그의 말을 막듯이 살짝 치켜뜬 동그란 눈을 새끼 고양이 마냥 깜빡거리는 설희였다.

 

 “송구하옵니다. 어서 드시지요."

 

 더는 재촉하지 말라는 설희의 장난기 섞인 행동에 강이 옅게 웃었다.

 

 강의 언성이 한풀 꺾이자 설희는 훈김이 모락모락 나는 국을 한 수저 떠먹었다.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밥을 입 안으로 넣으며 히쭉 웃는 설희 밥 위로 강이 고기 한 점을 올렸다.

 

 "입맛에 맞으십니까?"

 

 "응, 맛있어."

 

 강이 가져 온 음식들을 하나하나 입안에 넣고 요리저리 음미하는 설희의 모습이 왜 이렇게 가슴을 아릿하게 만드는지, 그만 고개를 떨구는 강이었다.

 

 설희 앞으로 그릇 하나를 미는 강은 무겁다 못해 질질 끌리는 제 가슴 한쪽을 그녀 몰래 쓸어내렸다.

 

 아무 힘도 없는 자신이 오늘따라 이리도 쓸모없게 느껴진 적이 있었던가.

 

 “천천히 드시옵소서.”

 

 한층 야윈 설희, 그녀를 바라보는 강의 눈빛에 무력함만이 가득했다. 하지만 그럴수록 무슨 일이 있더라도 설희를 지켜야 한다는 결심은 더욱 굳어갔다. 처음 설희를 보았을 그때처럼.

 

 벌써 8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사소한 것 하나까지 다 기억이 났다.

 

 신종 대왕마마의 부름에 아바마마와 함께 처음으로 창경궁에 갔을 때였다. 강은 새하얀 눈밭 위에서 뛰노는 한 아이를 만났다. 새하얗다 못해 투명한 빛처럼 반짝이는 아이.

 

 아이는 강을 향해 어느 봄날의 꽃보다 해사하게 웃었다. 누구도 자신을 향해 저리 웃어주지 않았는데.

 

 어떤 것도 바라지 않는 해맑은 미소 지으며 한 손에 쥔 당과를 수줍게 내미는 아이를 보는 순간 강은 알았다.

 

 자신이 이 아이를 지켜야 한다는 것을. 또한, 훗날 신종대왕의 유조이기도 했다.

 

 그 후로 강은 어명을 어기는 것은 역모와 같다며 펄쩍 뛰는 건욱을 달래며 창경궁으로 남몰래 갔다. 사실 영의정과 병판의 감시가 어딜 가나 그를 쫓아다니니, 갑갑한 동궁전이나 고리타분한 시강원보다는 철저하게 버려진 창경궁이 그들의 눈도 피할수 있으니 일거양득이었다.

 

 언제나 고요함만을 차지하고 있는 창경궁의 느른한 밤은 어느 순간부터 달라졌다. 강과 설희, 그리고 건욱과 단아는 권모술수와 음모로 가득한 곳을 떠나 원 없이 뛰어놀며 마음껏 웃었다. 그렇게 웃다 지치면 풀밭에 털썩 주저앉아 은실로 수놓은 하늘을 조용히 바라보곤 했다. 궁의 법도와 신분의 차이는 아이들만의 세상에서는 존재하지 않았다.

 

 헌데 지금에 와서 설희를 지키지 못한다면 세자라는 자리에 더 이상 앉아 있을 이유가 없었다.

 

 차라리 명분만 있는 세자 자리를 버려서라도 설희만큼은 지켜야했다. 문득 쥐어진 두 주먹을 불끈 쥔 그는 다시 한 번 목소리를 높였다.

 

 "마마, 창덕궁으로 가시지요. 소손이 모시겠사옵니다."

 

 "가지 않는다고 했잖아. 그리고 더는 여기에 오지마."

 

 수저를 내려놓는 설희의 목소리가 차갑게 내려앉았다.

 

 목소리와는 달리 뜨겁게 달구어진 설희의 눈동자를 강이 바라보았다. 그는 차마 무슨 말을 해야할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저 눈을 어찌 바라봐야 하는지도. 그저 피하고만 싶었다. 무게조차 알수없는 거대한 짐을 혼자 지려고 하는 어린 소녀를 강은 더는 바라볼 수 없어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오늘은 그만 물러가겠사옵니다. 허나 마마께서 창덕궁으로 옮겨 가시는 날까지 매일 찾아올 겁니다.”

 

 아무것도 해 줄수 없는 무력함에, 이미 마음을 굳힌 설희를 더 이상 설득할 수 없는 한심함에 자신을 탓하는 강은 힘겹게 걸음을 옮겼다.

 

 강이 돌아간 후, 시간은 빠르게 흘려갔다.

 

 끝까지 견뎌내야 한다는 장상궁의 위로에도 제 앞에서 쓰러져 가는 궁인들을 설희는 더는 지켜볼수 없었다. 결국 하루하루가 다르게 야윈 설희를 피접 보내야한다는 대신들의 빗발치는 상소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왕에게 올라갔다.

 

 대신들의 협박이나 다른 없는 상소에 힘없는 왕, 이미 왕권이 무너진 지 오래인 지금, 어떻게든 버텨 내려는 왕에게 설희가 먼저 찾아가 읍소했다.

 

 피접을 가겠노라고, 그러니 보내달라고. 하염없이 흘려 내리는 눈물로 설희가 왕에게 간청하고 간청했다.

에이바 16-10-03 08:51
 
계절이 바뀌었습니다. 더욱 힘내시어 줄기차게 전진하시길 바랍니다, 진혜이님.
진혜이 16-10-03 14:22
 
감사합니다. 한번씩 글이 막힐때마다 에이바님의 응원에 힘을 냅니다. 오늘도 좋은 하루 되세요~^^
이브비버 16-10-17 06:25
 
글이 시원시원하고 너무 좋습니다.
  ┖
진혜이 16-10-18 12:41
 
앞으로도 많은 조언 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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