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마마 어서요. 시간이 없사옵니다."
"싫다고 했지 않느냐."
"마마 어서 제 옷과 바꿔 입으셔야 합니다."
제 파란치마와 분홍저고리를 와락 움켜잡으며 소리치는 단아를 설희는 냉정하게 뿌리쳤다.
"싫다고 몇번을 말해야 해. 나는 싫어. 절대 너와 옷을 바꿔입는 일은 없을 것이다."
"마마 부디 소인의 청을 들어주시옵소서. 간곡히 이리 비옵니다."
단아는 자그마한 두 손을 맞잡으며 그렁그렁 습기로 가득찬 눈을 들어 설희를 바라보았다. 그런 단아를 더 이상 외면하지 못한 설희는 단아의 두 손을 꼭 잡았다.
설희의 커다란 눈망울이 어느새 뿌옇게 흐려졌다. 한층 뜨거워진 설희의 시선이 제 당의 위로 떨어졌다.
문양 하나없는 수수한 남색 치마와 분홍색 당의.
그러고보니 장 상궁이 부러 이렇게 입혔구나. 내가 끝까지 고집을 부리라는 것을 알고 단아가 입고 있는 생각시 옷과 비슷한 옷을 입혔어.
순간 목이 메어온 설희는 단아의 손을 부여잡은 제 손에 좀 더 힘을 실었다.
"네가 정녕 알기는 하는 것이야? 이 길의 끝이 어디로 향하는지."
"알고 있사옵니다."
"알고 있다면서 어찌 옷을 바꿔 입자는 거야. 겁도 많은 애가."
설희가 눈을 지그시 감자, 뜨거워진 그녀의 눈가에 작은 빗길이 생겼다. 소리 없이 흘려내리는 설희의 눈물이 분홍색 당의를 지나 단아한 남색치마 자락으로 떨어졌다.
"소인 너무나도 잘 알기에 바꿔 입으셔야 합니다."
"다시는 그런 말 하지마라. 이 길의 끝이 죽음임을 잘 알고 있는 내가 너와 옷을 바꿔 입는다는 것은 나 대신 너보고... 싫다. 싫어."
"마마 제 마지막 소청이옵니다.“
차마 설희 앞에서 눈물을 보일수 없는 단아마저도 더는 참지 못하고 여린 눈물을 쏟아냈다.
"단아야, 너는 내게 친구이자, 자매와 같은 아이다. 헌데 그런 너를 어찌 나 대신 죽으라고 할수가 있겠느냐. 그렇게는 하지 못한다. 아니 절대 그럴수 없어. 허니 더는 그런 말은 하지마라. 부탁이다."
"마마!"
설희에게 바짝 다가간 단아는 애원하듯 그녀를 불렸다.
한껏 젖은 단아의 눈동자 속으로 불현듯 어젯밤에 자신을 찾아온 장 상궁이 생각났다.
한동안 아무런 말없이 자신의 얼굴을 어루만지는 장상궁이 이내 고개를 떨궜다.
단아는 보지 않아도 알수 있었다.
분명 울고 있으리라.
미세하게 떨리는 몸을 겨우 추스리는 장 상궁이 힘겹게 고개를 들었다.
촉촉하게 젖은 두 눈이 빨갛게 충혈된 채 그녀는 다시 손을 들어 단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설희와 단아, 두 아이가 자라는 모습을 곁에서 지켜본 장상궁에게는 단아 역시 자신의 친딸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 단아에게 이런 말을 해야 한다는 사실에 그녀는 자신을 용서 할수 없었지만 해야만했다. 그것만이 공주를 살리는 길이다.
헌데 어찌 이리도 닮았을까.
어쩌면 이것이 너의 운명인지도 모르겠구나.
찬찬히 단아를 눈에 담는 장상궁이 조가비처럼 딱 붙은 입을 천천히 열기 시작했다.
'정말 미안 하구나. 내가 너에게 이런 부탁을 하게 되어서.'
단아의 눈조차 마주하지 못하는 장상궁과는 달리 단아는 그녀의 올곧게 바라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이미 그녀가 자신에게 하고자 하는 말이 무엇인지 아는 것처럼.
'단아야, 그러니까...'
'할게요. 하겠습니다.'
단호한 단아의 말에 장상궁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부탁할 것인지 알지도 못하면서, 그리 하겠다고 장담하는 것이야.'
'이렇게 늦은밤에 장 상궁마마님께서 저를 찾아오셨다는 것은 공주마마를 위한 일 아닙니까. 공주마마를 위하는 일이라면 저는 무엇이든 하겠습니다. 효성 왕후마마와 공주마마께서 제게 내리신 은혜가 얼마나 큰지 제가 어찌 모르겠습니까. 두분이 아니였다면 저는 벌써 죽을 목숨이었습니다. 이제라도 갚을 수가 있어 다행입니다.'
'단아야 미안하구나.'
안타까운 마음에 목이 메인 장상궁은 다음 말을 잇지 못했다.
'장상궁마마님 전 괜찮습니다. 정말 괜찮아요. 그러니 말씀해 주세요. 제가 무얼 하면 되나요?'
단아를 제 품에 와락 껴안고 우는 장상궁을 도리어 달래는 단아는 들썩거리는 그녀의 등을 토닥거리며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물었다.
"단아야 내일 동이 뜨기 전에 공주마마께서 타실 가마에 몰래 숨어 있거라. 공주마마께서 가마에 타시면 옷을 바꿔 입어야 한다. 네가 공주 마마가 되고 공주께서 네가 되는 것이다. 알겠느냐?'
'네. 알겠습니다. 헌데 장 상궁 마마님 그럼 지금이라도 제가 옷을 바꿔 입고 내일 아침에 가마에 타면 되지 않을까요?'
'그리한다 해도 공주마마께서는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저들은 마마께서 이 창경궁을 비우는 순간, 머릿니를 찾 듯이 궐을 뒤집어 놓을 것이야. 그들이 찾고자 하는 것을 찾을때까지 말이다. 또한 작은 불씨 하나라도 남겨두지 않기 위해 창경궁안에 있는 궁인들 역시... 특히 마마와 같은 또래의 아이들을 모두 잡아 조사를 할 것이고 만약 신분이 불분명하다면 가차없이 죽일 것이다. 그리고 이미 창경궁을 몇겹으로 둘러싸고 있는 병사들 때문에 궐밖으로 도망갈 수도 없구나. 그러니 공주마마를 지키기 위해서는 지금의 방법밖에 없을 것 같다. 단아야! 할수 있겠느냐?'
'물론입니다.'
길게 땋은 댕기머리를 살갑게 쓰다듬는 장상궁이 재차 단아에게 물었다. 혹여 제 말뜻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게 아닌지.
'지금 내가 너에게 부탁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겠느냐?'
"잘 알고 있습니다. 공주마마를 위해서라면 제 목숨 따위 아깝지 않습니다. 허니 걱정마시어요. 마마님의 말씀대로 꼭 하겠습니다.'
차분하게 떨어지는 단아의 목소리가 한 밤의 차가운 기운마저 힘겹게 만들었다.
'그래. 고맙구나. 만약 다음 생이 있다면, 그땐 내가 너를 아끼고 지켜주겠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말이다."
달빛마저 숨어든 밤.
장 상궁의 작은 파문과 같은 음성이 조용히 메아리를 치자, 사라진 달빛을 대신하 듯 환하게 웃는 단아의 미소는 더욱 그녀의 가슴을 아프게 후벼 팠다.
그렇게 짙고 짙었던 밤이 지나갔다.
“마마 시간이 없사옵니다. 어서요.”
어젯밤 길고 긴 밤을 지새우면 다짐한 단아는 두 주먹을 꽉 쥔 채 설희를 응시했다.
"싫어. 싫다고.“
"공주마마!"
백성들의 통곡소리에 이내 묻힌 두 소녀의 실랑이는 길을 가는 동안 계속 이어졌다.
어느덧 도성을 빠져 나온 행렬은 깊은 산길로 향했다. 산 비탈길을 오르는 가마가 위아래로 흔들렸다. 두 아이의 길이 마냥 위태로울 것이라고 하는 것처럼 흔들리는 가마는 점점 깊은 산속으로 들어갔다.
"빨리 움직여라. 이러다 야산에서 야영을 하게 생겼다."
때마침 머리 꼭대기에 있던 태양이 느슨하게 서쪽 능선으로 향하자, 행렬의 걸음을 재촉하는 군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서 서둘러라."
군관의 말에 내관 하나가 뒤를 돌아보며 큰소리로 외쳤다.
그렇게 얼마쯤 걸었을까.
걸음을 더욱 재촉하는 행렬 앞으로 희뿌연 안개가 요사스러운 뱀처럼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스산한 바람까지 더불어 살갗을 두드리니 절로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간간이 늦가을이 주는 정취를 느낄 새도 없이 스산하게 파고드는 바람에 옷깃을 여미는 사람들의 걸음은 더욱 빨라졌다.
그런 행렬 앞으로 잘익은 벼 이삭처럼 누런 갈대밭이 드넓게 펼쳐졌다. 여인들의 키를 훌쩍 가릴만큼 제법 큰 갈대들이 바람결에 넘실거렸다.
갈대밭 사이로 은밀하게 파고드는 안개와 어느새 내려앉은 능소화빛 노을이 묘하게 엉켜들었다.
어디서 불어오는지 알수 없는 바람이 또다시 세차게 불었다. 서걱서걱거리며 제 살을 비벼대는 갈대의 소리가 음산하게 울려 퍼졌다.
마치 귀기의 울음소리처럼 을씨년스러운 소리가 들려오자, 괜히 뒷골이 당기는지 어깨를 움츠리는 행렬이 막 갈대밭 사이로 난 길을 반쯤 접어들 때였다.
"잠시 행렬을 멈추어라."
선두에 선 군관의 목소리가 드높게 울렸다. 어두워진 하늘과 뿌연 안개가 너무 짙어져서 코앞조차 보이지 않게 되자, 행렬이 잠시 멈췄다.
약속이라도 한 듯 멈춘 행렬을 항해 세찬 돌풍이 휘몰아쳤다. 거센 돌풍에 몸조차 제대로 가눌 수 없는 사람들이 순간 휘청거렸다.
"갑자기 웬 바람이야."
고개를 숙이며 옷깃을 여미는 사람들이 어떻게든 바람을 피하려고 애쓰는 그때였다. 눅눅한 공기를 가르고 빠르게 질주하는 요란한 소리들이 빗발처럼 그들을 향해 날아들었다.
휘이익. 탁탁탁.
"으아아앗!"
안개를 뚫고 날아온 그것은 화살이었다. 날카로운 화살촉이 사정없이 사람들의 몸속으로 파고들었다. 생의 기운 조차 느끼지 못할 만큼 적막했던 행렬이 처음으로 살아있음을 알리 듯 단말마의 비명들이 여기저기서 터져나왔다.
"습격이다. 공주마마를 호위하라."
군관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검을 빼드는 군졸들이 가마 주위를 에워쌌다. 날아들어오는 화살을 막아내기는 역부족이었다.
마지막을 향해 치닫는 것처럼 검게 타오르는 노을속에 그들의 붉은 피가 더해졌다. 끔직한 아우성과 선명한 선혈이 깊은 땅속으로 빨려들어갔다.
"와아!"
해가 지는 서쪽 능선을 따라 우렁찬 환호성이 메마른 땅을 흔들었다. 곧이어 수많은 사람들이 쏟아져 내려왔다. 산짐승의 가죽을 덮어 쓴 그들은 검은 복면까지 하고 있었다. 소문으로만 듣던 산적떼가 틀림없었다.
"한 놈도 살려두지 말고 모두 죽여라."
산적들의 두목인 듯한 자가 검을 높이 빼들고 소리치자, 더욱 커지는 함성소리와 함께 저마다 손에 든 무기를 들고 행렬을 향해 무섭게 달려들었다. 먹잇감을 노리는 짐승처럼 시뻘건 눈을 부리리며 달려드는 그들 앞으로 점점 차디찬 비명들이 깊어갔다.
"까악!"
"제발 살려...주세요. 윽!"
살려달라며 무릎을 꿇고 비는 궁녀를 서슴지 않고 검을 내리치는 사내의 얼굴에는 결코 인정이라는 것은 없었다. 그저 포악한 짐승일뿐이다.
살기 위해 도망치는 이들을 끝까지 쫓아가 단칼에 베어버리는 그들은 살육을 즐기는 것처럼 어떤 두려움도 거리낌도 연민도 없었다. 한순간에 아수라장이, 지옥이나 다름없는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공주마마 괜찮으시옵니까?"
장상궁이 쓰러진 사람들을 헤집고 다급하게 가마의 문을 열었다. 이미 화살에 맞은 가마꾼이 휘청하는 바람에 가마는 바닥으로 나뒹군 후였다.
"장 상궁!"
"어서 어서 피하십시오."
장상궁의 외침에 가마에서 황급히 내리는 설희와 단아는 다행이 특별히 다친 곳은 없었다.
하지만 두 아이를 바라보는 장 상궁의 눈매가 잠시 가늘어졌다.
"저, 아니 옵니다. 일단 여길 피해야겠습니다."
장상궁이 설희와 단아의 손을 황급히 잡고 갈대밭으로 달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