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갑게 식어버린 바람이 소녀를 깨우듯 매몰차게 두 뺨을 할퀴었다. 그제서야 정신을 차린 아이는 힘겹게 눈꺼풀을 밀어올렸다.
온몸을 두들겨 맞은 것 같은 통증이 밀려왔다. 아이는 몇번을 힘겹게 눈을 깜빡거리고 나서야 겨우 눈을 떴다. 눈앞이 핑핑 돌았다.
금방이라도 하늘을 가득 메운 별들이 제 눈속으로 쏟아져 들어올 것만 같았다. 살며시 머리를 든 아이는 깨질듯한 통증에 얼굴을 구겼다. 진득한 피가 흘려내리는 귓속마저도 윙윙거리는 소리만이 먹먹하게 들려왔다.
"공주다!"
어디선가 찢어질듯 울리는 단 하나의 소리에 아이는 번쩍 몸을 일으켰다.
"윽."
아이는 뼛속까지 스며든 고통에 신음을 내뱉었다.
하지만 지금의 고통 따위는 아이를 막지 못했다. 머리에서 흘려 내리는 피가 어느새 제 눈을 가려도, 코속에서 흘려나온 피로 숨조차 쉬기 버거워 헉헉거려도, 움직이지 않는 몸을 끌고 언덕을 기어올라갔다.
"안돼, 안돼."
아이의 외침은 울컥 쏟아져 나오는 선혈에 묻혔다.
한편, 또다른 소녀는 갈대숲을 헤집고 달리는 걸음을 멈췄다.
제 발아래로 이어지는 끝없는 절벽을 망연하게 내려다 보고 있었다.
깊이를 가늠 할수 없는 절벽 아래에는 무섭게 몰아치는 물살이 바위를 세차게 때리며 새하얀 물거품을 일으켰다. 현란한 소리를 내지르며 부서지는 물살은 무엇이든 삼킬 태세로 으르렁거렸다.
한동안 절벽 아래를 내려다본 소녀는 무슨 결심이라도 한듯 깊게 숨을 들어마시며 내쉬었다. 뜀박질로 엉망이 되어버린 옷매무새를 가다듬는 것도 잊지 않은 채, 제 옷을 정제했다. 흐트러진 머리도 정갈하게 뒤로 쓸어넘긴 소녀는 낯선 자의 목소리에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그만하면 됐습니다. 이젠 더는 도망 갈 곳이 없지 않습니까."
음침하게 내려앉은 목소리에 싱긋 웃는 소녀의 눈동자는 차디찬 안광으로 가득했다.
"네 이놈! 내가 누군인지 모르느냐. 아니지 누구냐? 나를 죽이라고 시킨 자가?"
"시키다니요? 보시면 모르시겠습니까. 저희들은 그 무시무시하다던 산적들이 아닙니까."
덥수록한 수염을 복면속에 감춘 사내는 비릿하게 한쪽 입꼬리를 말아올리며 웃었다.
"네가 나를 아주 우습게 본 모양이구나. 내가 공주임을 알면서도 감히 내 사람들을 죽이고 나까지 죽이려 드는 네 놈들이 산적이라? 지나가는 개가 다 웃겠다. 아무리 바보 천치라고 해도 왕족을 건드리며 어찌 되는지 알고 있거늘, 산적이라는 자들이 그걸 알지 못한다. 또한 세상 천지에 산적이 그리 좋은 가죽신을 신고 있더냐. 그것도 관리들이 신는 가죽신을. 분명 네 놈들은 나라의 녹을 먹는 무관임이 틀림없다. 어찌 왕실과 나라를 지켜야 할 네놈들이 감히 왕족을 해하려 하다니. 그러고도 하늘이 두렵지 않느냐."
소녀는 곧 다가올 제 죽음에 대해선 무심하 듯, 그들을 하나하나 응시한 채 호통쳤다.
피로 젖은 시뻘건 칼을 들고 있는 그들에게 훈계조차 서슴지 않는 어린 여자 아이는 그야말로 왕족으로서의 기품과 위엄 그리고 당당함까지 어느 하나 부족함이 없었다. 도리어 여자 아이 하나 잡겠다고 칼을 들고 달려든 자신들이 더욱 초라하게 느껴질 뿐이었다.
"하하하! 역시 신종대왕을 그대로 빼다 닮았다고 하던데, 오늘에야 그 말이 사실임을 더욱 알겠습니다. 하지만 그러면 무얼 합니까. 꼭 죽을 목숨인 것을. 그러게 쥐죽은 듯 창경궁에 처박혀 있었어야지요. 쯧쯧쯧! 세상 물정 모르시고 그렇게 날뛰시다가, 뭐 이제와 어쩌겠습니까. 마마께서 스스로 제 숨통을 끊으신거나 마찬가지시니, 원망하지 마십시오. 다 마마께서 자책한 일입니다. 해서 그 목숨 제가 거두어 가겠습니다."
말을 마친 사내는 긴 장검을 빼 들었다. 날카로운 금속이 긁어내는 기분 나쁜 소리가 절벽 아래로 떨어졌다. 이미 숱한 목숨을 빼앗아간 검날에는 진득한 핏덩어리가 검을 휘어 감고 있었다.
"병조 판서!"
소녀의 입술 끝에서 나지막하게 흘려나온 한 마디말에 건장한 사내들이 움찔거렸다. 표정 하나 없이 차갑게 굳어진 얼굴만큼이나 서늘한 목소리였다.
검을 뽑는 사내의 눈썹이 아래로 일그러졌다. 소녀를 담은 그의 눈동자가 까마득히 어두웠다.
"이제야 네놈의 음흉한 목소리가 기억나는구나."
묘한 비아냥이 섞인 웃음이 소녀의 입술 사이로 새어 나왔다.
"날 죽이기 위해 이런 일도 서슴치 않고 벌이다니 그 배짱 한번 두둑하구나. 그래 아들의 복수를 하고 싶었겠지. 허나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죄를 지었으면 응당 벌을 받아야 함은 당연한 것. 하여 국법이 있는 것이다. 헌데 나에게 복수를 하겠다. 그러는 네놈들은 죄없는 백성들을 짐승처럼 도륙하였다. 그 죄가 얼마나 무겁고 두려운 것인지 알고는 있는 것이냐.“
“쯧쯧쯧. 그러니 마마께서는 죽을수 밖에 없는 겁니다. 방금 국법이라 하였습니까? 그건 힘없고 보잘것 없는 저 버러지 같은 백성들에게만 적용되는 것이지요. 저와 같이 기득권과 권력을 손에 쥔 사대부는 아닙니다. 그것이 조선이라는 나라입니다. 아시겠습니까?”
“그건 썩어빠진 네놈의 생각일 뿐. 이 나라 조선은 결코 네놈이 생각하는 나라가 아니다. 결단코 네놈이 그리 만들 수 있는 나라 역시 아니다."
소녀는 병조 판서를 올곧게 응시하며 서늘하게 가라앉은 얼굴로 호통쳤다.
"헌데 어찌합니까? 마마께서 그리 말씀하시는 조선은 이미 이 사람의 손안에 있습니다. 이 나라 조선도, 이 나라 임금 역시 다 제 것입니다. 제 말이 국법이며 제 뜻을 어기는 자 또한 대역죄인이지요. 당연히 마마께서는 대역죄인이십니다. 감히 내 아들을 죽였으니 말입니다."
"네놈이 제정신이 아니구나."
"제정신이 아닌 건 제가 아니라, 마마가 아닙니까. 곧 죽은 사람이 그리 큰소리를 칠 정신이 있습니까."
"내 제정신이 아닐 이유가 무엇이더냐. 죽음이 두려웠다면 네놈의 아들을 죽이지 않았을 것이다. 두고 보아라. 기필코 지엄한 이 나라 국법 앞에서 너를 처단할 것이며, 수많은 원혼을 만들어 낸 그 검 때문에 비참한 최후를 맞을 것이다. 내 끝까지 네놈의 마지막을 지켜볼 것이야. 또한, 조선이 어떤 나라인지 만백성에게 보여 줄 것이다. 네놈이 말한 조선이 아님을 똑똑히 보여줄 것이다.”
“하하하! 그런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하십니까. 지금 이 자리에서 죽는 건 공주마마이십니다. 어찌 소인의 죽음을 지켜보신다고 하십니까.”
“내 죽어서라도 지켜 볼 것이다. 아니 다시 돌아올 것이다! 내 다시 돌아와 네놈의 죄를 단죄 할 것이야!”
죽음 앞에서 의연함을 잃지 않은 소녀는 표독스럽게 날이 선 눈으로 그의 온 몸을 도려내는 듯 섬뜩하게 노려보았다.
역시 보통내기가 아니다. 훗날 자신들에게 크나큰 해가 될게 분명하다.
"그래. 돌아오거라. 그때에도 이 검으로 네년의 목을 칠테니."
그는 스산한 살기를 흩뿌리며 피로 얼룩진 검을 높이 들었다. 칠흑같은 어둠을 가르고 울리는 소리가 깊은 산골짜기에 울려 펴졌다.
병조판서의 칼날 아래 여린 소녀 하나가 제 몸을 맞기고 있을때, 힘겹게 언덕을 기어 올라온 아이는 울음을 토해내며 갈대숲을 달렸다. 오직 자신과 닮은 소녀를 향해.
이미 부러진 듯한 다리를 질질 끌며, 뚝뚝 흘려내리는 시뻘건 피를 토하내는 아이는 갈대숲을 지나 한층 노란빛을 쏟아내는 은행나무 아래에서 쓰러졌다. 이마에서 흘려내린 피로 초점마저 흐릿해진 아이는 고통은 잊은 채 제 눈을 가리는 피를 아무렇지 않게 쓱쓱 닦아냈다. 하염없이 누군가를 찾는 아이의 눈동자가 가파른, 끝도없이 떨어지는 절벽끝에 닿았다.
그 순간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두 아이의 시선이 마주쳤다.
서로를 바라보는 두 아이의 눈빛속에 함께했던 소중한 기억들이, 아득하게만 느껴지는 옛추억들이 한장의 그림처럼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똑같은 시간, 똑같은 공간속에서 함께 했던 만큼 너무나도 닮은 두 아이의 기억은 이미 둘이 아닌 하나였다.
한떨기 하얀 목련같은 소녀가 절벽에 선 채, 환하게 웃었다. 누구에게도 아닌 저 멀리 나무 그늘 아래에 있는 자신에게.
"나는 돌아 올 것이다. 죽어서라도 분명히 나는 다시 돌아올 것이다!"
죽음을 앞둔 소녀에게서 발하는 고귀한 자태와 달빛에 젖은 미소는 눈이 시릴만큼 아름다웠다.
활짝 핀 꽃잎처럼 소녀는 서서히 두 팔을 벌렸다. 환한 미소를 잃지 않은 채, 여전히 영롱한 눈동자는 저 너머 자신에게 향한 채 소녀는 가날픈 몸을 작은 바람에 맡겼다.
어린 새가 절벽 아래로 첫 날개짓을 하는 것처럼, 깊고 깊은 아래로.
하지만 날개짓 한번 제대로 하지 못한 아기새는 세차게 휘몰아치는 물거품속으로 사라졌다.
얼마나 삼켜야지 끝없는 욕망을 채울수 있을까. 인간의 욕심과 욕망이 그리 만들었는지 모른다.
굽이굽이 흐르는 강물은 제 몸을 세차게 부딪치며 작은 새마저 집어삼켰다. 여전히 벌린 입을 벌린 채 이것으로는 부족하다는 듯이 쩍 버린 입안으로 하얀 물거품을 토해냈다.
"안돼, 흡!"
은행나무 옆에서 가슴을 쥐어짜는 아이의 목소리는 누군가의 손에 의해 막혔다.
"공주마마 소신이옵니다. 전(前) 내금위장 권 화운. 주상전하의 명을 받고 공주마마를 모시러 왔습니다. 더 일찍 오지 못하여 송구하옵니다."
제 손을 마구 두드리며 발버둥 치는 아이를 찬찬히 바라본 내금위장이 며칠 전에 받은 왕의 밀지를 생각했다. 어떻게든 귀양지에서 벗어나 공주를 구하라는 명이었다. 밀지에는 공주가 생각시 옷을 입고 있을 거라고 했다.
짙은 어둠 속이였지만 분명 자신의 품안에 있는 아이의 옷은 생각시 옷이었다. 그럼 공주가 틀림없다.
"공주마마 고정하시옵소서. 이미 저 아이는 마마를 위해 제 목숨을 바쳤습니다. 부디 저 아이를 위해서라도, 죄없이 죽어간 원혼들을 위해서라도 마마께서는 살아남아야 하십니다."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는 그의 손안으로 아이의 피와 눈물이 스며들었다.
제 눈 앞에서 한 떨기 꽃처럼 절벽 아래로 몸을 던진 소녀의 미소와 텅비워진 눈동자속에서 메아리치는 소녀의 처절한 목소리를 담고 또 담는 아이의 눈빛은 사람의 것이 아니다.
세상 그 무엇보다 잔인한 색을 품었다.
그래. 난 다시 돌아올 것이다. 다시 돌아 올 것이야. 기다려라. 내가 돌아 올때까지 단 한 놈도 죽어서는 아니 된다.
터져 나오려는 울음을 단번에 삼켜버린 아이는 공포가 아닌 지독한 분노와 슬픔의 열기로 녹아내리는 얼음처럼 화운의 몸에서 한순간 무너져 내렸다.
"공주마마!"
의식을 잃어버린 아이를 그가 번쩍 안아 들었다. 그의 품에 안긴 아이마저 잠들자, 삶과 죽음으로 치열했던 세상은 거짓말처럼 조용했다.
때마침 내린 완연한 어둠의 세상, 그 어둠 속으로 두 사람은 유유히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