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첫 번 째 단추가 꼭 시작은 아니다
1982년 11월 8일. 아직은 가을임에도 날씨는 마치 겨울 어느 날처럼 쌀쌀하다.
서울의 S동. 조용한 동네다.
네온사인이 하나둘씩 꺼져가는 늦은 저녁이다.
그렇게 번화한 곳이 아닌 이 곳에 병원의 초록색 간판등이 희미하게나마 켜져있다.
병원이름은 조용래산부인과.
몇년전까지만해도 조산원이었던 자리였다.
남자 의사가 탯줄을 자른다며 어떻게 남자앞에서 애를 낳냐며 부끄럽다던 소문은 얼마안가 뱃속의 딸 아들도 기가 막히게 맞히는데다 힘을 내기도 전에 애를 낳게 해준다는 소문으로 바뀌어 여자들이 모여들기 시작한 곳이다.
그런데 오늘은 이상하리만치 조용하다.
조용하다못해 낮게 깔려있는 긴장감이 병원주변은 물론이고 병원안에까지 가득 채우고 있다.
분만실 복도에는 단 한명의 남자가 앉아있다.
아마도 산모의 남편인듯하다.
얼마나 지났을까.. 길고 긴 적막을 깨는 소리.
“ 응애 응애...” 아이의 울음소리.
복도에서 서성이던 남자는 더더욱 안절부절한 얼굴로 분만실 문이 곧 부러져나갈듯이 째려보고 있다.
“ 한수진씨 보호자님, 한수진씨 보호자님”
까랑까랑한 여간호사의 목소리.
“ 네, 네.네 저, 접니다.”
“ 11월 8일 저녁 8시 20분, 한수진씨가 2.8킬로 여자아이를 순산하였습니다.
산모도 아이도 건강합니다.”
“흐흐흑...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한수진의 남편 강을남은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남자는 세 번 눈물 흘려야한다고 배웠는데...그런게 무슨 소용일까
주변의 시선도 간호사의 시선도 중요하지않다.
간호사에게 몇 번이고 아내가 괜찮은지를 물어본다.
눈물때문인지 시야가 뿌옇다.
공부하느라 이렇게 저렇게 미룬 결혼. 친구들중에 제일 늦은 결혼한 강을남,
안타깝게도 첫 아이는 임신입니다란 말과 동시에 계류유산되었고 이번에도 잘못되면 어떻하나
아빠가 늙어서 그런가 싶어 열 달내내 마음졸였던 자식이었다.
산모도 건강하다란 말은 들었지만 직접 눈으로 봐야 할 것 같았다.
아내도 아내지만 자신의 새끼를 너무나도 보고싶었다.
딸이든 아들이든 성별은 전혀 중요하지않다.
간호사가 막지않았으면 강을남은 분만실로 바로 들어갈 뻔했다.
" 아 잠시만요. 들어오시면 안됩니다. 지금은 다른 산모가 분만중이거든요 "
그로부터 일이분이 지나지않았까. 또 다른 울음소리가 복도를 채운다.
“ 김영옥씨 보호자님, 김영옥씨 보호자님”
아까와 다른 간호사가 서너번 더 이름을 불렀지만 대답하는 사람은 없다.
강을남은 자신말고 누군가 이 분만대기실에 앉아있었나를 떠올려보았지만 딱히 생각나는 사람이 없다.
'내 기억에 누가 앉아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아닌것 같기도 하고.'
하지만 아는체 하지않았다.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이내 분만실안으로 다시 들어가는 간호사.
“ 김영옥씨, 밖에 보호자님이 안계시네요.”
방금 여자아이를 낳은 산모는 김영옥, 스물한살이다.
대답대신 산모는 울고 있다.
2.8킬로의 여아를 순산한 산모의 눈물은 아파서라기보다 감격때문이라는 걸 알기에 간호사는 잠깐 한숨을 쉬었다.
“ 11월 8일 저녁 8시 25분, 김영옥씨가 여아를 순산했습니다. 아이는 건강합니다.
산모가 너무 많이 울면 지쳐요. 아이보여드릴께요”
김영옥은 아이를 천천히 바라보았다. 발그레한 얼굴에 뭐가 그렇게 화가나는지 응애 응애 울어댄다.
“ 손가락 발가락 열개 다 있나요?”
" 네 그럼요. 건강하고 이쁘네요. 오늘 저녁에 낳은 두 신생아가 모두 이쁜 딸이네요."
간호사의 목소리가 명랑하다.
오늘 아이를 낳을 것 같은 산모는 더 이상 없다.
일단은 쉴 수 있다란 생각에 어떤 좋은 말도 다 해줄 수 있었다.
임신했다란 걸 안 순간부터 오늘까지 아이에게는 미안함뿐인 김영옥이다.
가진 걸 후회하고 원망하고 열달 내내 마음졸이면서...
낳을까 말까....저절로 지워지면 얼마나 좋을까...어떻게 생겼을까...잘 키울 수 있을까...
하루에도 열 두번씩 더 바뀌던 생각, 지워 말어. 감기약을 먹었던 것이 죄스럽기도 하고
누구에게 들키면 어떻하나 배를 졸라매기도 했었던...
그렇다. 보호자가 대답을 하지않은 산모 김영옥은 미혼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