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을 임신시킨 사람은, 아니 이렇게 말하면 너무 일방적이다.
오히려 자신이 병신같아진다.
아이의 아빠는 직장동료인 신진수란 총각이다.
자신보다 여섯 살이 많지만 워낙 동안인데다 얼굴이 허여멀건한게 꼭 대학생처럼 보였다.
대학을 가봤어야 대학생이 어떻게 생겼는지 잘 아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그의 외모는 여자들을 설레게 했다.
말수도 없고 조용조용히...위장취업한 대학생이란 말까지 나왔던 그는 대학의 문턱은 커녕
고등학교 교문도 열어본 적이 없는 ...그냥 허우대만 멀쩡한 남자였다.
물론 그 때문에 더 좋아했지만 말이다.
그래도 그와 여기까지 오게 될 줄 알았는가...
지방에서 올라와 나름 삶의 계획이 알차게 있었던 김영옥에게 연애는 나중일이었다.
결혼은 더더욱 먼 얘기였다. 연애경험도 전무했던 김영옥이 신진수와 어쩌다 엮였을까.
혼자 있다보니 외로워서였겠지. 잘해주니 좋았고 그의 스킨쉽이 싫었다면 거짓말이다.
손잡으니 뽀뽀하고싶고 뽀뽀하니 더 안고싶어지는 건 못말리는 남여관계.
그래도 임신까지는 가지말았어야했다.
무지다. 무지.
김영옥이 아는 주변의 연애사만해도 그렇다.
얼마나 야물딱지게 하는지. 자신처럼 첫사랑도 아니고 남자하고 잠자는 것도 그리 큰일도,
쉬쉬할 일도 아닌 듯 말했다.
얼마나 재고 또 재는지 연애따로 결혼따로라며 까르르 웃던 가시나들.
처음엔 저래도 시집갈까싶더니 이제 생각해봄 그것들이 똑똑한 가시나들이다.
신진수도 처음부터 악한 인간은 아니었지.
처음 임신 소식을 알렸을 때 신진수는 순간 놀란 표정을 지었지만 오히려 잘되었다고 자신의 손을 잡아주었잖아.
자기도 이제 결혼해서 안정을 하고싶다고 말했는데.
그런데 어느 날부터 더 벌어야한다는 등 다른 회사를 알아본다면서 거리를 두더니
낙태를 할 수 없는 오개월이 되어서야 자식을 키울 자신이 없다고 했으니 날벼락이 따로 없었다,
결혼하기엔 너무 이르다는 말까지 한 나쁜 놈.
아이를 지울까란 생각을 하면 미칠 것처럼 아이에게 미안해졌다.
낳을까 생각하면 눈앞이 캄캄했다.
어떻게 애를 키울 것인가...부모님에게 알리면 그 자리에서 혀깨물고 죽으라고 할 게 뻔했다.
절망적인 마음으로 병원에 갔을 때 의사는
"산모가 어려서 그런지 아이도 건강하게 잘 자라고 있네요.."라고 매우 긍정적으로 말했다.
낙태는 물 건너갔다.
영옥은 그제서야 뱃속에서 발길질하는 아이를 향한 강한 모성에 아이를 꼭 낳아야하겠다란 결심 비슷한 게 생겼다.
그러나 다시 자신의 자취방으로 돌아오면 김영옥은 턱까지 오는 현실감에 미칠 것 같았다.
"결혼하자. 응? 결혼하자구 "
달콤한 신진수의 말에 적이 당황하면서도 좋아했던 자신이 병신같았다.
내심 나몰라라하면 어쩌나했는데 결혼얘기까지 해주는 신진수가 고마웠는데....
아이의 아빠...신진수...대학생 어쩌구 저쩌구... 회사에 위장취업해서 어쩌구..저쩌구...
그는 그냥 개새끼였다.
배는 점점 불러왔다. 펑퍼짐한 옷으로 가리는 것도 한계가 지났다.
영옥은 사표를 냈다. 독해지지않으면 안되겠다싶었다.
아이용품도 하나씩 하나씩 준비했다.
아이를 낳으면 아버지로써 자식을 설마 안보겠나란 생각도 했다.
어쩌면 아이가 신진수란 남자를 붙잡을 수 있는 마지막 끈과 같은 절박함으로 남은 시간을 견뎠다.
하지만 신진수는 역시나 무책임했다. 몇 번을 속고도 또 속다니..
영옥의 눈을 피해 요리조리 빼더니 산달이 가까워서는 도망치듯 직장을 그만두고 연락도 끊었다.
나쁜 새끼.
이제 울 눈물도 없다. 나오는 건 한숨이다.
힘찬 울음소리로 태어난 여자아이....혼자 아이를 낳았다란 대견함도 없다.
김영옥은 아이를 보았다. 계속 잠만 자는 통에 누구를 닮았는지 모르겠다.
그저 확실히 아는 건 아기가 자신과 같은 B형 혈액형을 가지고 있다는 것.
발그레한 얼굴에 먹고 살겠다고 젖을 빠는 게 안쓰러웠다.
작은 손으로 자신의 손을 본능적으로 꼭 잡고서는 젖을 빨다가 잠이 들었다가 또 다시 움찔하면 눈도 뜨지않은 채로 젖을 향해 다가오는 작은 입.
" 여자애들은 잘 안떨어진다더라. 여자애들이 그렇게 악착같아."
아이가 저절로 지워졌으면 하는 바람을 임신사실을 아는 유일한 친구에게 내비췄을 때 그녀거 말했다.
뱃속에서 자연유산되는 애들은 대부분 남자아이라고.
' 그래서..너도 살려고 이 세상에 나왔구나. 악착같이...엄마가 그렇게 나쁜 생각했는데도..'
미안함에 말랐던 눈물이 또 다시 흐른다.
병원비도 어떻게 내야 할지 막막할뿐이다.
배가 갑작스레 아파서 집 근처의 병원으로 온 건데...
나이 스무살씩이나 쳐먹고 뭐했을까.
남자 보는 눈도 없고 임신만 덜컥 해놓고.
삼일 후면 퇴원을 해서 나가야 하는데.
일을 못해서 모아놓은 돈도 없는데.. 김영옥은 도데체 어떻게 해야하는지 머리가 정지된 느낌이다.
방법이 생각나지않아.
김영옥보다 십분 일찍 여자아이를 낳은 한수진은 아이가 너무 신기해서 손가락 발가락을 세보고 또 세보았다.
살짝 만지면서 그 보드라운 감촉에 전율했다.
너무나 사랑스럽고 예쁘고 어떤 말로도 표현키어려웠다.
첫 아이는 계류유산으로 만나지도, 만져보지도 못하고 떠나보냈다.
남들에게는 그렇게 쉬운 임신과 출산이 그렇게 어려울 수가 있을까
영영 엄마가 되지못하는 건 아닌가싶었는데 다행히도 1년이 지나서 다시 임신을 했다.
행여 또 잘못될까...얼마나 마음 졸였던 10개월이란 시간인가.
세상에 태어나 제일 잘 한 게 바로 아이낳은 거란 생각이 들었다.
조금 전 이가 바득바득 갈리게 아프고 잔인했던 마치 지옥을 다녀 온듯한 산통은 기억조차 없었다.
남편 강을남도 마찬가지다.
아버지가 이런 느낌일까. 진정한 내 것. 꼬물거리는 생명체에 대한 안쓰러움과 신비로움.
감격, 감격 그 자체다.
아내 몰래 흐르는 눈물을 닦았다.
한수진은 젖이 잘 나오지않아 애를 먹었다.
아이는 계속 짜증을 내면서 칭얼대었다.
급한 대로 분유를 젖병에 타서 먹이면서도 젖병이 싫은가 분유가 싫은지 입을 삐죽거리는 아기가 안쓰러웠다.
산모 김영옥은 조금전 아이를 신생아실에 데려다놓고 나올 때 바로 옆에 서있던 부부를 떠올렸다.
안경너머로 얼마나 아이를 사랑스럽게 바라보는 지 남자의 얼굴은 연신 웃음이었다.
“ 아기가 싫어하겠어요. 그만 만져요” 라고 여자가 말하자 그 남자는
“ 내 새끼 내가 만지는데 누가 뭐래”
아기를 보면서 “ 그렇지 그렇지 허허허”
사랑이 절절 흐르는 목소리.
책임감이 묻어있는 목소리.
저 집의 아이는 무슨 복이 있어 저렇게 고운 엄마, 자상한 아빠를 두었을까
신진수도 있었다면 그랬을거다. 자기 자식을 보고 좋아하지않을 사람이 어디있겠는가.
김영옥은 고개를 저었다.
나쁜 놈, 자식도 버리는 놈, 내가 미친년이지 그 자식이 좋다고 매달리다니....
설마 아직도 미련이 있는거니. 도데체 첫 남자가 뭐길래 이렇게까지 미련을 가져야하는걸까
엄마가 되기엔 아직 이른 스무살,
회사에 있던 친구들은 자신이 갑자기 그만둔 이유를 모른다.
딱 한 명, 제일 친했던 금옥이. 자신의 이름 영옥과 비슷해 회사에서도 자매란 소리를 들었던 친구다.
신진수가 아기 아빠라는 것을 알고 얼마나 화를 내던지 부끄럽고 무안했었다.
“ 그 미친 놈, 너까지 그런거야? 박광자도 건드렸는데..너, 설마 그것 몰랐어?”
몰랐던 얘기다. 머리속이 하야니 주변에서 무슨 소리를 해도 들리지않았으리라.
금옥이는 임신초기부터 아이를 지우라고 성화였다.
그 새끼는 절대 책임질 인간이 아니라고 했다.
자신이 아는 집이 있다면서 함께 가서 수술하자고 했다.
그 때 그녀의 말을 들었어야 했다.
금옥은 신진수를 개새끼 소새끼 뭔놈의 새끼라고 욕지거리를 했다.
가난하지만 젊은 두 사람이 행복하게 아이를 키우는 모습을 상상했던 자신.
헛웃음이 나왔다.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팔자가 되었다.
미혼모... 미혼모...처녀가 애를 낳아도 할 말이 있다고 했는데 자신은 할 말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