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각자의 새 가정
다음 날 아침, 한수진은 일찌감치 퇴원수속을 부탁했다.
고향에 계신 시댁 어르신들이 올라와서 얼른 집에 가야된다며 자꾸 보채는 통에 간호사 오혜순은 좀 짜증이 났다.
조원장은 퇴원을 빨리 해주는 사람이 아니다.
그녀는 강순해에게 원장님이 지금 바빠서 오후나 되어야 가능하다란 말을 하라고 시켰다.
“ 어떻게 거짓말을 해요?”
“ 얘, 원장님이 퇴원 바로 시켜주는 거 봤니? 알면서 그래?”
뽀루퉁해지면서 한수진병실로 올라가는 강순해.
자리에 남은 오혜순은 책상위에 놓여져있는 차트를 대충 훓어보았다.
‘한수진과 같은 날 낳은 애 엄마가 있었는데...누구였더라. 아, 그래 김영옥이지’
퇴원얘기가 나올 법한데. 안그래도 어제 병원비를 물어보는 게 넉넉지않아보여.
그러고보니 김영옥의 보호자를 한 번도 본 적 없잖아...
차트에는 보호자란에 신진수라는 이름이 적혀있었고 주소는 저 아래 지방이었다.
왜 이렇게 멀리 온거지?..
친정동네로 온건가.
그런데 왜 애 아빠는 한번도 안보일까?
‘가봐야겠어. 병원비도 대충 알려줄겸. 퇴원을 한다치면 같이 차트를 밀어넣어야겠지'
오혜순은 김영옥의 차트를 들었다가 그녀의 병실이 윗층에 있는 게 기억났다.
에이 귀찮아. 이따 강순해오면 또 시켜야겠다싶어서 차트를 내려놓은 오혜순.
잠시 후 병원에 일어날 일은 상상도 못한채.
한수진은 한시라도 빨리 집으로 가고싶어 짐을 챙겼다.
‘ 침대는 불편해. 삐걱소리도 싫고. 내집에서 편하게 쉬어야지.’
그러면서 시댁어르신들이 한꺼번에 올라온다란 생각에 침대에 털석 앉았다.
‘이런 때 친정엄마가 오시면 좋을 텐데....’
장사를 하시는 친정부모님이라 산후조리를 부탁할 수가 없다. 길게 한숨이 나온다.
그러면서 한수진은 가방에서 임신 기간 내내 아이를 생각하며 분홍색과 하늘색으로 수놓은 속싸개 겉싸개를 꺼냈다.
아들인지 딸인지를 몰라 두 색깔의 실을 사용했던 곱디 고운 싸개에서 좋은 냄새가 났다.
잠시 후 간호사가 데리고 온 아기는 그새 뽀얀 살이 올라온 듯했다.
아이들은 하루에도 열 두번도 넘게 변한다란 말을 들어와서 그런가..
어제는 아랫배가 뻐근한데다 젖먹이는 게 익숙치않아 아기가 울고 칭얼대는 것만 보아서 아이 얼굴을 자세히 뜯어 볼 겨를이 없었다.
오늘은 어째 조용히 잠만 잔다. 간간히 한숨을 쉬기도 하고. 배내웃음도 짓고.
‘아이 이뻐라. 누굴닮아서 이렇게 이쁠까?’
강순해가 윗층에서 내려오자 또 다시 심부름을 시키는 오혜순
“ 순해야, 한 살이라도 젊은 니가 또 갔다와야겠다. ”
“ 어디요?”
말소리가 달라지는 강순해다. 신참이라고 이것 저것 다 시키는 오간호사가 일은 잘하지만 가끔 얄미울 때가 있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오혜순은 자신을 쳐다보지도 않는다.
“ 김영옥씨한테.”
“ 아휴, 금방 내려왔는데... 알았어요. 차트주세요.”
궁시렁 궁시렁 혼잣말을 해가며 한 층 위로 올라간 강순해.
김영옥의 병실을 여는 순간 어안이 벙벙해진다.
“ 어라, 여기가 아닌가? 왜 병실이 비어있지? 옆방인가?”
옆방은 또 다른 산모의 이름이다.
“ 이상하네. 분명히 이방인데... 어디 화장실에 갔나?”
방안을 둘러 본 강순해는 뜨악했다.
병실안에는 그녀의 흔적이라고는 단 한 개도 없었다.
“ 오간호사님. 오간호사님...!:
헉헉거리며 계단을 내려오는 강순해를 오혜순은 한 번 째려보았다.
“ 왜그래.. 병원에서 좀 조용해라. 귀신이라도 본거니?”
“ 없어요 없어..”
“ 뭐가 없다는 거야?”
“ 저기, 저기 산모가 없어요.없다구요. 사람도 없고 가방도 없고 아무것도 없어요.”
이윽고 뛰어 올라간 두 사람, 두 사람은 침대 밑, 커텐뒤까지 샅샅이 뒤져본다.
정말 한 개도 없다. 어제까지 사람이 그것도 산모가 있었던 병실인가?
동시에 서로를 바라보는 두 사람.
“ 어떻게 해...어떻게 해요?”
“...야, 신생아실 좀 가봐. 아기는 그대로 있냐?”
“ 아까 한수진아기 데리러 갔을 때 봤어요. 자고 있었어요.”
“ 그래도 가봐.!”
강순해 말이 맞았다. 아기는 그대로 있었다. 그게 더 문제였다.
이 아기는 어떻게 하라는 거야
조원장은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머리가 천장에 닿을만큼 화를 냈다.
산부인과 오픈한 이래 아기를 두고 가는 산모는 한 명도 없었다. 병원비는 둘째치고였다.
“왜 이렇게 퇴원얘기가 없지?”
한수진은 초조해졌다.
“ 얼른 집에 가고싶은데.”
회사에 가있는 남편을 대신해서 여동생이 오자 발을 더 동동거리는 한수진
“ 언니, 내가 한 번 내려 가볼까?”
“ 그럴래? 아기 잠들어 있을 때 얼른 가야지. 깨면 어떻게 감당하니?”
한수진의 여동생이 아래층으로 내려왔을 때 원장실쪽에서 큰 소리가 났다.
누군가 야단맞는 거 같기도 하고...화가 났는지 소리를 질렀다.
‘뭐야, 병원에서..환자들 불안하게.’
잠시 후 얼굴이 벌개져서 나온 간호사들
“저기요. 한수진씨 퇴원수속 아직도 멀었나요?”
“ 아, 예. 얼른 해드릴께요.”
늦어질 것 같던 퇴원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얼굴이 벌개진 두 간호사는 혼이 나간 사람들마냥 멍한 표정으로 한 말을 또 하고 또 한다.
“ 그래요. 어머니, 잘 키우시고... 예... 어머니. 다 되었어요.. ”
병원을 나서는 한수진 자매는 바같 바람에 아기를 꼭 감쌌다.
보드라운 촉감에 아이특유의 젖냄새에 한수진은 날이 추운것도 바람이 차가운 것도 몰랐다.
“ 그럼 이 사태를 어떻게 해야 해?!”
조원장은 씩씩거렸다.
“ 아니, 산모가 오늘 나간거야? 어제 나간거야? ”
“....잘 모르겠습니다. ”
“ 아니, 산모가 나갔을 때 귀신처럼 소리도 없이 나갈 수 있어? 있냐고? 아기가 분명히 울었을 것 아냐? 젖달라고 울었을 것 아냐 최소한 한 번은 산모를 찾았을 거 아냐?”
얼굴이 울그락 불그락 거리면서도 또박또박 말하는 오혜순과 달리 강순해는 울고 있다.
산모가 아기를 두고 간다는 게 말이 되는가. 도망 간 산모도 무섭지만 고아가 된 저 아기는 어쩌란 말인가...조원장의 야단보다 고아된 아이가 불쌍해서 더 눈물이 났다.
진료차트에는 김영옥, 초산 21세, 주소는 지방으로 되어있다. 전화번호도 없다.
왜 그 주소를 보고 궁금해하지않았냐.. 왜 이렇게 멀리 왔는지 안물어봤냐,
보호자는 왜 안보이냐...
단 하나의 대답도 못하는 간호사들.
일이 이렇게 되려니 평소 안하던 행동을 한거다.
조원장은 이 동네로 온 지 얼마 안되었지만 나름 인지도가 높은 병원장이었다.
20년 가까운 의사생활 중 고아를 받기는 처음이었다.
신생아실에 있는 아기는 서서히 배가 고픈지 칭얼대다가 얼굴이 빨개지면서 울어댔다.
우유병이 싫은지 밀어냈다.
“ 어떻게든지 찾아봐. 사람이 들어오고 나갔는데 흔적하나 없을 리가 없어, 일단 경찰서에 연락해서 사람 좀 찾아달라고 하고. 조용히 소문나지않게 정리해. 소문나면 안돼.”
조원장은 무서운 표정으로 마치 마지막 경고를 하듯 그렇게 지시를 내렸다.
“ 아니, 이게 말이 되냐고...참 나 원. 아니 이게 무슨 일이냐고”
씩씩거리는 조원장의 눈을 피해 두 간호사는 조용히 진료실을 나왔다.
조원장은 분이 삭히지않은지 책상위에 있는 서류를 들었다 놓았다했다.
‘이제는 돈을 먼저 내고 아기를 낳으라고 해야겠어. 이거 원, 병원에서 이런 일이 있다니..’
김영옥이 병원을 들어섰을 때는 이미 자궁이 한참 열려서 금방이라도 아기가 나올 급한 상황이었기에 본인의 인적사항을 자세히 받아적지못했다.
두 간호사가 생각해보니 이상한게 한 두개가 아니다.
분만 때 보호자가 없었던 것,
식사를 갖다줄 때마다 혼자 있던 산모, 병원비를 물어보던 산모, 아, 물론 병원비야 물어볼 수도 있겠지만...어린 나이였으니 한번정도는 의심할 수도 있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