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박...타박.....
차도 지나가지 않는 거리에 어떤 여자의 발 소리만이 들려왔다.
어딘지 모르게 무거워 보이는 발걸음은 어디론가 가고 있었다.
그 여자가 멈춘 곳은 한강을 가로지르는 다리.
'긴 다리를 건너면 겨울 지나듯 새봄이 당신을 기다리겠지요.’
다리에 써져있는 문구를 보며 수진은 아랫입술을 세게 짓이겼다.
“아니.이 긴다리를 건너도 내겐 또 다시 겨울이 오겠지. 인생의 봄? 빌어먹을!......그딴 건 내 인생에 없어."
매순간 힘이 들 때면 수진은 이 문구를 보기 위해 한강을 가로지르는 이 다리를 찾았다.
그리곤 희망을 가졌다.
언젠가는......정말 언젠가는 자신의 봄이 올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돌아보니 희망고문에 불과한 말이었다.
가로등만이 그녀를 비추던 깜깜한 밤.
그녀는 한때 자신에게 희망을 줬던 그 다리를 다시 찾았다.
주변이 고요했다 아니, 적막했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 것 같다.
세상에 남겨진 사람이라고는 자신밖에 없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녀는 한참동안 말없이 강물을 바라봤다.
세상과의 작별인사를 하는 걸까? 그도 아니면 작별인사는 고사하고 세상에 하고 싶었던 욕을 마음대로 다 퍼붓고 있는 중일까?
‘나는 억울하다. 내 인생은 정말 억울함의 연속이었다. 부디 다음 생에서는 적어도 억울하지만 않으면 좋겠다.’
첨벙.
묵직한 물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이내 세상은 다시 조용해졌다. 마치 애초에 아무도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
"헙"
갑자기 느껴지는 이상한 느낌에 선우의 숨이 멈추고 머리털이 곤두섰다.
‘이게 뭐지?’
알 수 없는 이 묘한 느낌에 선우는 정신을 집중했다.
하지만 쉽게 나오지 않아 초조함에 손가락을 입술에 가져갔다. 입술을 느릿하게 왔다갔다 하던 손가락이 멈춰섰다.
‘죽음!’
감고 있던 눈을 뜬 선우는 급하게 문을 박차고 달려 나갔다.
처음으로 드는 이상한 기분이었다. 그래서 단번에 이게 무엇인지 가늠할 수가 없었다.
집중을 한 후에서야 이 묘한 느낌은 누군가의 죽음이 다가올 때의 느낌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하지만 아무래도 이상했다. 인간들이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은 하루에도 여러 번 있기에 이젠 자신에게 오는 그런 느낌에 익숙해져있던 선우였다. 그런데 이번 ‘죽음’에 관한 이 묘한 느낌은 한마디로 설명하기 힘들었다.
그사이 선우는 하늘을 가로질러 묘한 느낌의 근원지에 도착했다.
한 여자가 서있었다.
뭘 하고 있는지 하염없이 강을 바라보고 있을뿐이었다.
그때 선우의 자켓 주머니에서 진동이 울렸다. 진연이었다.
“어. 왜?”
“너 말도 없이 어딜 그렇게 가?”
“아, 어. 느낌이 이상해서.”
“이상한 느낌이라니?”
그 순간 선우의 동공이 확장됐다.
“......”
첨벙.
결국 그 여자가 한강에 몸을 던지고 말았다.
“여보세요? 내말 안 들려? 무슨 느낌?”
“젠장. 끊어봐.”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그는 저 여자가 죽든 말든 신경을 끄고 싶었다. 자신의 의지로 죽으려는 사람까지 막기엔 일이 너무 많았으니까.
어떻게든 살아보려 아등바등 노력하는 사람에게 더 손을 뻗는 그였다.
물론 신은 삶의 끈을 놓으려는 사람도 구해주라고 말했다. 하지만 선우는 삶에 대해 냉정했다.
하지만 눈 앞에서 떨어지는 사람을 보고 있자니 양심에 찔렸다.
다급하게 전화를 끊은 선우는 급하게 날아 자신의 몸도 한강으로 던졌다.
그 당시만 해도 선우가 그녀를 보고 물에 뛰어든 것도 단지 일의 연장선에 불과했었다.
이 남자 정체가 뭘까.
**
차가운 강물에서 여자를 안고 나온 선우는 진연에게 급하게 전화를 걸었다.
“너 당장 병원 응급실에 가있어.”
“뜬금없이 나가고, 뜬금없이 전화해서 뜬금없이 나보고 병원으로 가라는 거야? 나 이제 막 퇴근한 거 알잖아.”
진연이 다짜고짜 나오라는 선우의 부름에 짜증을 냈다.
“이 여자 거의 다 죽어가. 지금 너 아니면 살릴 사람 없어. 급하니까 일단 나와.”
"여자? 무슨 여자?"
"말하자면 길어."
거친 숨을 몰아쉬며 헉헉대며 말했다.
선우의 헉헉 거리는 숨소리에 진연은 비로소 심각한 일임을 깨달았다.
“알았어.”
병원에 도착한 진연은 급하게 가운으로 갈아입고 응급실로 갔다.
그와 동시에 물에 젖은 선우가 물에 흠뻑 젖은 여자를 가슴에 안고 뛰어 들어왔다.
“뭐야,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진연은 당황스런 표정으로 여자의 목을 짚었다. 아직 살아있다. 그런데 보아하니 삶의 의욕이 없는 사람이었다.
“일단 침대에 눕혀.”
“이 여자 삶을 이미 놓아버린 여자야. 나도 장담은 못하는데 일단 시도는 해볼게.”
진연은 여자의 이마에 손을 올려놓았다. 그리곤 눈을 감고 주변의 모든 소음들이 들리지 않게 차단했다.
그리곤 낮아진 체온부터 올렸다. 쉬운 일 같아 보여도 쉬운 일이 아닌 것이었다. 모든 정신을 집중해야하는 그런 힘든 일이었다.
더군다나 삶에 대한 의지를 모두 놓아버린 사람에게 삶의 끈을 다시 쥐어주어야 하는 일은 더더욱 쉽지 않은 일이었다. 아마 그래서 선우가 진연을 불렀을 것이다.
빛 한 점 없는 캄캄한 곳이 보였다. 여자의 정신 세계였다. 그 어느 곳에서도 삶의 끈이 보이지 않았다. 진연은 한 참을 그렇게 그녀의 의식 속을 헤맸다. 너무 오랫동안 힘을 쏟았는지 점점 진연의 힘이 풀리며 정신이 흐트러졌다.
"못 찾겠어. 보통 인간이라면 삶에 대해 아쉬운 게 하나라도 있어야 하는데 이 여자는 정말 아예 없어. 나 치유력도 다 떨어졌는지 이 여자 의식에 들어가기도 힘들어."
진연의 절망스러운 표정으로 선우를 돌아봤다.
"비켜봐."
'이 여자 살리고 싶다. 내가 이렇게 힘을 썼는데 못 살리면 나한테 부끄러울 거 같아.'
선우는 진연을 밀어내고 그의 손을 여자의 이마에 올렸다.
아까와 똑같이 어둠이 깔려있었다. 뭘 어떻게 살았기에 미련이 남는 게 하나도 없는 것인지.
자꾸 흐트러지려는 정신을 간신히 붙잡으며 그는 그녀의 의식 어딘가를 뒤졌다.
그렇게 몇분을 돌아다녔을까. 저쪽 어딘가에서 작은 빛이 보였다.
'찾았다.'
드디어 찾아낸 작은 빛이 있는 곳으로 그의 의식도 옮겨갔다.
꺼져가는 불처럼 소멸할 듯이 빛나고 있던 그 지점에 찾고 찾던 삶의 끈이 떨어져있었다.
선우는 그 끈을 들고 그녀의 캄캄한 의식에 단단하게 묶었다.
단단하게 묶인 그 끈에서 나온 빛은 점점 더 밝은 빛을 내며 그녀의 의식을 환하게 밝혀가기 시작했다.
"하. 됐다."
기어코 여자를 살린 선우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신의 사자인 천사. 그리고 라파엘. 천사의 여러 종족 중 하나로 ‘치유’를 담당하고 있다. 그들은 신의 사자로 많은 이들의 몸과 마음을 치유하기 위해 여러모로 애쓰고 있었다.그들은 인간의 모습이기에 우리는 그들이 천사인지 모르고 그들을 대면하고 있다.
다만, 그들이 인간과 다른점이 있다면 치명적이게 매력적이라는 점과 우리가 갖지 않은 능력들이 많다는 점이었다.
“너 괜찮냐?”
진연은 선우가 이 여자를 살리기 위해 그가 얼마나 많은 힘을 썼을지 눈에 보였다.
라파엘 종족이 가진 치유력은 삶의 끈을 놓아버린 사람에게 쓰려면 라파엘 한 명의 치유력으로는 부족했다. 엄청난 에너지 소모로 천사인 그들도 쓰러지게 만드는 그런 일이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살았으나 아직 눈을 뜨지 않은 여자를 보며 선우는 의자에 쓰러지듯 털썩 주저앉았다.
이 여자 때문에 엄청난 에너지를 쏟은 까닭에 서 있기도 힘든 선우였다.
“응.”
짧은 대답을 하며 누워있는 수진을 바라보고 있었다.
“도대체 이 여자 누구야? 왜 네가 갑자기 집에서 뛰쳐나갔는지도 모르겠고. 왜 안하던 행동을 하고 그래?”
“몰라. 그냥 느낌이 이상했어. 이상한 느낌이 들어서 갔는데 이 여자가 있었어.”
선우는 마른 세수를 하며 의자에 등을 기댔다.
'당신, 도대체 정체가 뭐야?'
**
수백번의 오디션, 여러번의 단역, 조연생활, 계속되는 무명생활.
......지쳤었다.
“안녕하십니까 응시번호 00626 이수진입니다.”
그 날의 난 내 생애 마지막 오디션을 봤다.
그리고 그날은 감독에게 좋은 평가를 들었던 유일한 날이었다.
'왠지 이번엔 영화 오디션에 합격을 할 것 같다.'
이런 느낌이 드는 날이었다.
그날 저녁 내게 한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영화 주인공 오디션에 합격했다는 관계자의 전화였다. 구름을 타고 올라가는 느낌이란 게 이런 건가 싶었다. 드디어 내 인생도 빛을 보는구나하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그 다음날 바로 전화가 왔다.
“저기 이수진씨 주인공을 다른 여자로 바꾸어야할 거 같아요. 다른 영화 알아보시는 게 좋겠어요.”
통보였다. 갑자기 왜 내 배역이 날아갔는지, 갑자기 왜 또 오디션에서 떨어져야 했는지 알 길이 없었다.
눈앞이 안개가 낀 것처럼 뿌옇게 변했다.
그리고 내 인생도 다시 앞이 보이지 않을 만큼 뿌옇게 변했다.
역시나 봄은 오지 않았다. 앞으로 내가 더 살아간다고 해도 봄은 오지 않을 것이다. 나는 확신한다.
"흐으윽 흑흑 흐으으"
선우는 옆에서 들리는 수진의 흐느끼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아직도 잠에 빠져있었다.
"꿈을 꾸나?"
"흐으윽 흐으윽"
수진의 눈가를 타고 눈물이 흘러 베개를 적셨다.
선우는 그녀의 꿈이 나쁜 꿈이든 좋은 꿈이든 깨우고 싶지 않았다. 자신의 역할은 살린 거로 다라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그녀의 우는 소리가 그의 마음을 거슬리게 했다.
“이봐요, 일어나봐요.”
선우가 수진의 팔을 잡고 살짝 흔들었다.
수진이 일어날 기미가 없자 선우는 수진의 팔을 좀전보단 세게 흔들었다.
“이봐요! 일어나.”
눈이 살며시 떠지기 시작했다.
끔벅끔벅. 수진은 느리게 자신의 눈을 감았다 떴다를 반복했다.
자신의 눈앞에 한 남자가 보였다. 아름다운 남자였다. 콧대는 높았으며 눈썹 뼈가 도드라져서 남성적인 느낌이 물씬 났다. 남성적인 이 느낌을 아름답게 중화시키는 것은 그의 진갈색 눈동자와 눈썹 그리고 머리였다. 부드러워 보이는 그의 앞머리는 눈썹을 가릴 듯 말듯한 길이였다. 그는 남성적이면서 아름다웠다.
‘뭐지 이 남자?’
수진은 몽롱한 기운에 자신이 있는 곳이 어디인지 조차 인식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렇게 잘생긴 남자가 내 앞에 있는 거 보면 천국인가.’
멍한 상태의 그녀를 지켜보던 선우는 그녀의 잠을 완전히 깨워야겠다고 생각했다.
“정신 좀 차리지?”
그리곤 그녀의 볼을 톡톡 건드렸다.
잘생긴 남자의 손가락이 그녀의 볼을 톡톡 스치자 그녀는 정신이 바짝 들었다.
수진은 제 두 손을 볼에 가져갔다.
"......감각이,감각이 있어!'
"그럼 감각이 없겠어?"
선우는 팔짱을 낀 채 누워있는 수진을 한심한 듯 내려다봤다.
‘뭐야 나 살아있어?’
죽었을 거라 생각한 수진은 살아있는 자신을 보자 숨이 막혀오기 시작했다.
‘지긋지긋한 삶에 다시 돌아왔다고? 왜 나는 죽지도 못하는 거지? 죽는 것도 내 마음대로 안 되는구나......'
허탈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나 왜 살아있는거죠?”
선우를 까칠하게 바라보는 수진의 두 눈엔 금세 눈물이 고였다.
“내가 구했으니까.”
이 여자를 살리기 위해 저가 얼마나 많은 체력 소모를 했는데 깨어나자마자 여자는 저를 왜 원망하고 있는 것인가. 기가 막혔다.
열심히 살려놓은 보람이 없어지는 순간이었다. 허망하고 허탈하기까지 했다.
“......당신이 뭔데?”
수진이 선우를 흘기며 물었다.
“니가 뭔데 나를 살리냐고? 내 삶의 결정권은 당신이 아니라 나한테 있는데 왜 살려 왜 살리냐고!”
수진은 선우에게 소리를 질렀다. 그리곤 손등에 붙어있는 링거 바늘도 떼어 버리고 병실 문을 뛰쳐나갔다.
'내가 결정한 일에 왜 끼어들고 난리인지. 내가 살려줬다고 하면 고마워할 줄 알았나보지?
틀렸어. 나를 죽게 내버려두는 게 나를 살리는 길이야. 어차피 현실이 지옥인데 뭐.'
그녀가 나간 문을 바라보던 선우의 미간이 좁혀졌다.
정말 피곤하게 만드는 여자였다. 자신의 치유력을 쏟아붓고 정성을 다해 살려뒀더니 다시 죽겠다고 나갔다.
'저걸 살려,말아.'
아무래도 그는 그녀를 그냥 지나칠 수 없을 것 같았다.
"피곤하게 됐군."
곧바로 수진을 뒤쫓아 갔다.
수진은 옥상에 서서 아래를 바라봤다. 아래를 보니 아찔함에 속이 메슥거리고 현기증이 났다.
막상 뛰어내릴 수 있을 것 같아서 올라왔는데 또 다시 겁쟁이가 되어버린걸까. 그녀는 겁이 났다.
수진은 강물에 뛰어들때의 그 짧은 시간을 기억했다. 무서웠다. 그녀도 사람이기에 떨어지는 그 순간 괜한 선택을 했구나하고 후회도 잠깐했다. 이 모든 게 그녀의 기억에 생생하게 남아 더더욱 겁이 났다.
선우는 옥상에 서있는 수진의 팔을 무섭게 잡고 그녀를 돌려 세웠다.
“내가 왜 그쪽을 살렸는지 나도 모르겠는데 그냥 살아.”
선우는 숨을 헐떡이며 그녀에게 말했다.
"내가 당신 살린 거 후회하지 않게 해."
수진은 선우에게 꽉잡힌 손목을 내려봤다.
손목에 느껴지는 그의 힘에 그녀는 작은 위로를 받았다.
'이 남자만 나를 끝까지 잡아주는구나......'
“내가 그쪽 살리려고 얼마나 고생한 줄 알아?”
사실 그는 그날 수진을 살리고 나서 모든 체력이 소진되면서 하루내내 누워있어야했다.삶에 대한 의욕이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그가 그렇게 뻗어있을 일은 없었을 것이었다.
“당신이 뛰어든 그 차가운 물에 나도 같이 뛰어들었고 그 덕분에 하루 종일 나도 침대에 누워있어야했다고.”
차마 치유력에 관한 이야기는 못하겠고 그저 물에 빠져서 고생했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었다.
‘강에 같이 빠졌다고?......그렇게까지 해서 당신에게 남는 게 뭔데?’
솔직히 처음 눈을 뜨고 아직도 시궁창 같은 현실이라는 것을 알았을 땐 그가 자신을 다시 시궁창으로 끌어왔다는 생각에 그가 미웠다. 하지만 얼굴도 모르는 자신 때문에 하루 종일 누워있었다니 한편으론 미안해지기도 했다.수진은 그의 눈을 차마 마주하지 못했다.
“내가 당신 살렸으니까 적어도 내 눈앞에서 죽을 생각 하지 마.”
선우는 수진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살짝 힘을 주어 어깨를 움켜쥐었다.
“아니다. 내 눈 앞이 아니어도 죽을 생각 하지마.”
'네가 마음 속으로 물었지? 나한테 남는 게 뭐냐고? 궁금증을 풀어야겠어. 너에게서 느껴졌던 묘한 느낌의 원인을 찾아야할 거 같아.'
그의 한쪽 입꼬리가 매력적으로 올라갔다.
'내가 당신 살렸으니까 함부로 죽으면 안되지. 네가 죽으면 내가 되게 찝찝할 거 같거든.이런 마음 가지면 안되는데...... 당신 목숨은 이제 내 거야.'
자신의 앞에서 죽지말라고 말하는 남자.
'이 남자. 뭘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