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이언은 자신의 구식 자동차를 몰고 한적한 시골길을 달리고 있었다. 트렁크와 뒷좌석에는 여러 개의 이사 박스들이 꽉 차게 실려 있었다. 한참을 달리던 자동차는 갑자기 시동이 꺼져버리며 멈춰 섰다.
“아우 씨~ 이 똥차. 부숴버리든가 해야지”
브라이언은 거칠게 핸들을 ‘쾅’ 하고 쳤다. 그리곤 씩씩거리면서 자동차 보닛을 열었다. 자욱한 연기가 훅 쏟아져 나와 그의 시야를 가렸다.
‘뭘 알아야 손을 보든가 하지’
브라이언은 보닛의 여기저기 기웃거리기만 했다. 사실 그는 기계치였다. 관심도 없고 아는 것도 없었다.
만약 옆자리에 여자라도 타고 있었다면 실린더나 피스톤같이 어디서 주워들은 용어를 사용하며 허세를 부렸겠지만, 지금은 그의 허세를 들어줄 수 있는 여자도 없었다.
보닛에서 연기가 어느 정도 사라지자 브라이언은 시동을 다시 켜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였다. 앳된 목소리의 남자가 다가왔다.
“아! 냉각수가 부족해 보이네요.”
남자는 능숙하게 냉각수 보조 탱크와 라디에어캡을 열어 냉각수의 양을 체크 했다. 그리곤 자신의 손에 들고 있던 생수를 그 안에 넣어주었다.
브라이언은 이 남자의 행동을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었다.
“다 됐어요! 이제 괜찮아요. 아! 그리고 저 앞 삼거리에서 좌회전하시고 곧장 가시면 바로 골드바가 보이실 거예요.” 남자는 싱긋 웃으며 말하곤 자신의 가던 길을 재촉했다.
‘언제 봤다고 친한 척이야!’
브라이언은 이 남자의 친절에 심기가 불편해졌다. 그는 거칠게 차 문을 열고 운전석에 올라탔다. 반신반의하면서 차 열쇠를 돌리니 정말 깨끗하게 시동이 걸렸다.
‘뭐 나쁘진 않네!’ 브라이언은 룸미러로 점점 멀어져 가는 남자를 힐끗하고 쳐다보았다.
브라이언의 차는 남자의 설명대로 삼거리에서 좌회전했다. 그리고 한동안 신나게 달리다 보니 골드라는 간판의 바가 나타났다.
‘어? 잠깐만. 저 자식 내 목적지가 여기 인 줄 어떻게 알았지? 점쟁인가?’ 브라이언은 생각했다.
골드바는 중세풍의 오래돼 보이는 바였다. 그 뒤에는 저택이 있는데 바와 연결되어 있었다.
브라이언은 상당한 규모의 저택의 모습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작은 집 하나 있을 거로 생각했는데 영화에서나 나올 것 같은 외관과 정원까지 딸린 저택에 심장이 쿵쾅거렸다.
브라이언은 저택을 흐뭇한 모습으로 바라보면서 담배 하나를 꺼내 입에 물었다. 그리고 불을 붙이려는 찰나에 갑자기 새하얀 손이 쑥하고 들어와 담배를 낚아챘다.
“에이, 뭐야?” 브라이언은 담배를 채간 손의 주인공을 쳐다보았다.
25살 정도 돼 보이는 어린 여자였다. 동그란 안경을 쓰고 빤히 자신을 쳐다보는 모습이 귀여워 보이기도 하고 한편으론 깐깐해 보이기도 했다.
“우리 마을은요. 금연 시범 마을이에요. 담배 못 펴요. 이건 압수” 여자는 똑 부러지는 어조로 단호하게 말했다.
“금연 마을? 그런 게 어디 있어? 내놔.” 브라이언은 손을 흔들며 재촉했다.
“안 된다고요. 6개월은 이 마을에 사셔야 유산 상속받을 텐데…. 담배 피울 거면 여기 못 살아요. 쫓겨난다고요. 상속 포기하실 거면 피셔도 되고요.” 여자는 당돌하게 말했다.
“야! 넌 별걸 다 안다. 내 상속 얘기를 네가 어떻게 알아? 너 뭐야? 아까 남자애도 날 아는 듯해 보이던데, 이 마을 사람들은 죄다 점쟁이야 뭐야?” 브라이언의 미간이 자신도 모르게 찌푸려졌다.
“와~ 두 분 벌써 만나셨네요? 이쪽은 리사 양입니다. 골든 바 매니저 겸 사장 대리인 그리고 저택 관리자입니다. 쉽게 설명하면 실권을 꽉 잡고 있는 사람인 거죠. 저도 리사 양의 눈치를 보거든요.” 뒤에 변호사 조셉이 어느새 다가와 있었다.
“6개월 동안 이곳에서 생활하시면서 리사 양의 도움을 받으셔야 할 겁니다. 그러니 잘 보이시는 편이 나을 거예요.”
조셉은 리사를 바라보며 살짝 고개를 끄떡였다. 잘 부탁한다는 표시였다.
“도움은 무슨? 딱 봐도 잔소리꾼 같은데….” 브라이언은 6개월이 상당히 귀찮아질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브라이언은 리사의 안내를 받으며 골드 바 안으로 들어갔다. 내부 전체가 나무 엔틱으로 꾸며져 있어서 상당히 고급스러워 보였다. 한쪽 벽면은 위스키부터 럼, 맥주 등 다양한 주류들이 가득 채우고 있었다. 이 술들에 브라이언은 마음을 홀딱 빼앗겨 버렸다.
“와~ 이거 장난 아닌데? 이거 설마 윈스턴 처칠이 즐겨 마셨던 그 위스키?”
브라이언은 가운데 진열된 위스키 병을 꺼내려 했다. 그러자 리사가 브라이언의 손을 ‘딱’ 쳤다.
“그건 만지는 것 아닙니다. 절대 안 되요. 여기서 제일 비싼 거라고요.” 리사가 장식장의 유리문이 잘 잠겼나 확인하며 말했다.
‘6개월 뒤에 유산 상속받고 처분할 때 저 위스키는 내가 가져가야겠다.’
브라이언은 매의 눈으로 바의 구석구석을 살펴보았다. 또 다른 사냥감이 있나 찾는 것이었다. 그런 그의 눈에 커다랗게 쓰인 ‘골드’라는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이 이름 좀 바꿔! 골드가 뭐야? 촌스럽게” 브라이언은 한껏 찌푸려진 얼굴로 말했다.
“안 돼요. 이건 이 바를 설립한 사람의 영혼이 담긴 아주 뜻 깊은 ”
리사의 잔소리가 길어질 것 같자 브라이언은 단번에 말을 잘라 버렸다.
“알았어. 안 바꿔! 됐지?”
브라이언은 여전히 까칠했다. 뭐가 그리 마음에 안 드는지 리사에게 내내 툴툴거렸다.
리사는 바와 연결된 통로를 통해서 저택 안으로 안내했다.
“한동안 비워져서 냄새가 날 거예요. 2~3일이면 다 사라질 거니깐 너무 걱정하진 마시고요. 사장님께서 쓰실 방은 이방. 미리 다 치워 놨으니깐 편하게 지내세요.” 리사는 서재 옆에 있는 가장 큰 방문을 열면서 말했다.
“이게 치운 거야? 완전 먼지 구덩이인데?”
“맘에 안 들면 직접 치우던가. 그리고 저기 있는 저 옷으로 갈아입고 오세요. 골드 바 유니폼!” 리사는 싱긋 웃으면서 방문을 닫고 나갔다.
브라이언은 가지고 온 짐을 우선 내려놓았다. 그때 휴대전화에 문자 하나가 들어왔다. 존이었다.
[잘 도착했어? 공기 좋은 곳에서 한 6개월 쉬다 온다 생각해!]
‘쉬긴 뭘 셔? 완전 똥 밟은 느낌인데’
브라이언은 서둘러 답문을 보냈다.
[여기 완전 미쳤어. 금연 마을이래. 나 이제 담배도 못 펴! 가져온 담배도 다 뺏겼어. ]
브라이언의 투정에 존의 답문은 빛의 속도로 도착했다.
[그러니까 골초인 네가 금연을 한다고? 풋~하하하하하하하하하!]
브라이언은 휴대전화를 침대 위로 던져 버렸다. 글이었지만 옆에서 배를 잡고 웃는 존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
브라이언은 시골 마을 힐덴에서의 일주일을 생각보다 잘 보내고 있었다. 시골이 다 보니 바에 와서 술을 마시는 사람도 적어서 할 일도 별로 없었다. 간간이 술 들어오는 날 리사가 무지하게 부려먹을 때를 빼고는 가게 한쪽에 앉아서 맥주만 홀짝거리는 게 그의 일 전부였다.
“위스키 한 잔만 마시면 안 돼? 아니 애초에 내가 왜 너한테 허락이란 걸 받아야 하는 거야? 어차피 이게 다 내껀데….”
브라이언의 목소리는 처음 힐덴 마을에 올 때와는 사뭇 다르게 부드러워져 있었다. 강력계 형사의 거친 성미를 리사의 잔소리가 눌러버린 것이었다.
“6개월 뒤에 마시세요. 지금은 맥주!” 리사는 맥주 한 병을 브라이언 앞에 내려놓았다.
“6개월 뒤에 보자. 내가 어떻게 하나? 여기 있는 거 다 팔아 버릴 거야. ” 브라이언은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브라이언은 취하지도 않는 맥주를 들이켜며 리사의 눈치를 살살 살폈다. 처음 힐덴으로 이사 온 후부터 계속해서 묻고 싶었던 질문이 있는데 그 동안 이런저런 이유로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내가 막 핏줄에 목메고 그러는 스타일은 아닌데…. 갑자기 외삼촌이 생기니까 좀 궁금해지긴 하더라. 외삼촌에 관해서 이야기 좀 해봐.” 브라이언은 관심 없는 듯 말을 툭 내뱉었지만 속으로는 잔뜩 긴장하고 있었다.
“전 사장님이요? 음…. 멋지셨어요. 신사답고 똑똑하고 자상하고, 아! 자상하진 않았다. 그리고 위스키를 그렇게 좋아하셨죠.” 리사가 웃으며 말했다.
“나랑 술 취향은 같네. 사진은 없어? 내가 서재부터 집을 싹 다 뒤져봐도 사진 한 장이 안 나오더라.”
“없어요. 사진! 전 사장님 바쁘셨어요. 그래서 여기 오셔도 아주 잠깐 있었어요. 이 마을에서 사장님 얼굴 제대로 본 사람은 나 밖에 없을 걸요?”
“그래? 무슨 일을 하셨는데?”
“골드 바 경영? 그리고…. 다른 일은 뭐하셨는지는 모르겠네요.”
“사진 없다. 직업도 모른다. 도대체 아는 게 뭐냐?” 브라이언은 짜증을 냈다.
“왜 나한테 짜증이야? 짜증나게!”
아무도 없는 바에서 브라이언과 리사가 아웅다웅하는 사이 한 중년의 여성이 바의 문을 조심스럽게 열고 들어왔다. 수수한 옷차림에 핏기 하나 없는 얼굴, 너무 말라서 불쌍해 보이기까지 한 그 중년의 여성은 바를 ‘쓱’하고 훑더니 바로 브라이언을 향해서 곧장 걸어왔다.
“당신의 말대로 했어요. 2016년 3월 24일 당신을 찾아왔다고요. 그러니 제발 내 아들을 살려줘요!” 중년의 여성은 브라이언의 손을 잡으며 진지하게 말했다.
“무, 무슨 말입니까? 나 알아요?” 브라이언은 당황한 얼굴로 손을 ‘확’ 빼 버렸다.
“난 오늘을 24년 동안 기다렸어요. 당신이 내 아들을 살려주겠다는 그 한마디를 믿고 끝까지 기다렸다고요. 그러니 제발 약속을 지켜줘요. 내 아들을 살려 달라고요!” 중년 여성의 눈에는 눈물이 맺히기 시작했다.
“저기요. 뭔가 착각하셨어요. 난 그쪽이 찾는 사람이 아닙니다.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네” 브라이언은 이 불편한 상황을 피하려 자리에서 일어났다.
“24년 동안 당신 얼굴만 떠올렸어. 당신 목소리만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되뇌었다고! 착각? 자식의 목숨이 달렸는데…. 착각할 수 있을까? 당신 맞아. 내가 24년간 기다려온 사람은 당신이 확실해!” 중년의 여성은 브라이언의 팔을 잡고 매달렸다.
브라이언은 자신도 모르게 여성의 팔을 뿌리쳤고 여성은 그대로 바닥에 곤두박질쳤다.
“아줌마! 내 나이 서른셋입니다. 서른셋! 24년 전에는 9살이었고요. 날 봤다고요? 9살의 나를? 날 키워준 고아원 원장도 지금의 날 몰라보는데 아줌마가 날 알아봤다는 게 말이 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