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얏”
한 꼬마 아이가 정처 없이 걷던 브라이언과 부딪혀 넘어졌다. 하지만 브라이언은 너무 집중해서 생각하는 나머지 자신이 누군가와 부딪히는지도 몰랐다.
“저기요 아저씨”
꼬마는 브라이언의 옷자락을 붙잡아 세웠다.
“어?” 브라이언은 그제야 슬쩍 돌아보았다.
“이거 떨어뜨리셨어요. 이거요” 꼬마는 열쇠 하나를 주워 전해주었다.
“아, 그래 고맙다.” 브라이언은 무신경하게 열쇠를 받아들었다.
‘이건…. 아까 서재를 열었던 열쇠?’ 브라이언은 본능적으로 이 열쇠가 중요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형사의 감이었다.
“이걸 내가 떨어뜨렸다고?” 브라이언은 소년을 쳐다보며 물었다.
“네, 저와 부딪치면서요.”
브라이언은 소년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자신의 심장이 쿵 하고 떨어지는 것 같았다. 똘망똘망한 눈망울, 오른쪽 코 옆으로 있는 작은 점, 턱에 난 작은 상처까지 사진의 모습과 똑같았다.
“너 혹시 이름이?” 브라이언이 물었다.
“마이클이요, 마이클 엘리엇”
브라이언은 자리에 털썩하고 주저앉아 버렸다.
브라이언의 머릿속에는 ‘약속대로 내 아들을 살려줘’라는 2016년 골드바에서 만난 여자의 목소리와 ‘마이클 엘리엇한테나 집중해! 잘못하다가는 늦어 버릴 거야’ 방금 전화 속 1992년의 남자의 목소리가 뒤엉켜 계속해서 외쳐대고 있었다.
‘내가 정말 마이클을 구하기 위해서 여기 왔단 말이야? 1992년도 과거로?’
브라이언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마이클은 어느새 사라져 버렸다. 하지만 브라이언은 찾지 않았다. 그의 머릿속에는 마이클에 대한 모든 정보가 새겨져 있었다. 집 주소, 학교, 사체 발견 장소, 범행 추정 시간 등등의 정보를 기억하고 있었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브라이언을 이상한 듯 쳐다보기 시작하자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거리 한복판에서 철퍼덕 주저앉아 있으니 누가 봐도 이상해 보였다. 엉덩이의 먼지를 툭툭 털고 고개를 들었을 때 브라이언의 눈에 양복을 쫙 빼입은 두 명의 남자가 보였다.
그들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브라이언의 모든 감각이 경보를 울려대기 시작했다. 그들에게서 벗어나야 한다고, 도망쳐야 한다고 온 머릿속이 소리를 질러대는 것 같았다.
‘저것들은 또 뭐야? 아이씨’ 브라이언은 왜인지도 모른 채 갑자기 막 달렸다.
브라이언이 달리기 시작하자 양복 입은 남자는 쫓아오기 시작했다. 브라이언은 우선 사람이 많은 인파에 들어가야 몸을 숨겨야 한다고 생각했다. 다행히도 근처 고등학교에서 학생들이 쏟아져 나오는 것이 보였다. 그는 고민 없이 학교를 향해서 내 달렸다. 항상 범인의 뒤를 쫓기만 했던 브라이언이 누군가에게 쫓기니 심장이 터질 듯 쿵쾅거렸다.
브라이언은 학교 2층으로 올라가 창문 아래 자리 잡고 앉았다.
‘여기가 좋겠어. 여차하면 뛰어내려야지. 밑에 잔디밖에 없으니 다치지도 않겠고. 근데 난 왜 도망을 가는 거야? 저것들 경찰은 아닌 것 같고. 그러고 보니 경찰에서 날 쫓을 이유도 없잖아. 내가 여기서 한 게 아무것도 없는데’ 브라이언은 슬쩍 슬쩍 창문 밖으로 상황을 확인했다.
양복의 남자들은 학교 앞에서 서성거리고 있었다. 그 둘은 뭔가 말을 주고받더니 한 명은 학교 맞은편 길을 수색하기 시작했고 나머지 한 명은 학교 안으로 들어왔다.
‘제길, 학교는 왜 들어오고 그래’
브라이언은 학교 안으로 남자가 들어오는 것을 확인한 후 마음이 급해졌다. 그래서 철제 캐비닛 옆의 작은 공간 속으로 몸을 숨기기로 했다. 하지만 공간이 너무 좁아 캐비닛을 살짝 앞으로 옮기고 나서야 들어갈 수 있었다.
잠시 후 교실의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브라이언의 팔에 소름이 쫙 돋았다. 브라이언은 살짝 얼굴을 내밀어 누가 교실로 들어왔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하지만 들켜버릴까 봐 엄두도 못 냈다. 다만 온 정신을 귀에 집중했다. 작은 소리 하나라도 놓치지 않으려 신경을 곤두세웠다.
‘또각또각’ 여자 하이힐 소리가 들렸다.
“선생님이 분명 오늘까지 제출하라고 했을 텐데…. 톰! 미안하지만 규칙은 규칙이야! 그럼 내일 보자!” 젊은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선생? 선생인 건가?’ 브라이언은 긴장이 풀렸다.
여선생은 그대로 교실로 들어와 자신의 책상에 앉는 소리가 들렸다. 브라이언은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너무 좁은 장소에 꽉 껴 있으니 다리로 피가 통하지 않는 것 같아 살짝 움직여 볼까 생각하는 그 순간 누군가 문을 여는 소리가 다시 들렸다.
“누구시죠? 어떻게 오셨나요?” 여선생의 견제하는 듯 한 목소리에 브라이언은 놈이 온 것임을 느낄 수 있었다.
“실례했습니다.” 묵직한 남자의 목소리가 교실 안에 퍼졌다. 그리고 ‘드르륵’ 문 닫기는 소리가 들렸다.
‘간 건가? 안 들킨 거지? 다행이야, 후~’ 브라이언은 안도의 한숨을 작게 내뱉었다.
한 3초 정도 시간이 흘렀을까? 다시 문이 ‘드르륵’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 소리는 좀 전보다 더 크고 가까이서 들렸다. 교실 뒷문이 열린 것이었다.
“이봐요? 당신 누군데 여길 함부로 들어오는 거야? 경비를 부르겠어. 당장 나가요!” 여선생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심상치 않음을 알려 주고 있었다.
‘젠장 들켰다. 놈이 내가 여기 있는 걸 알아 챈 거야.’
브라이언은 타이밍을 가늠하기 시작했다.
‘정확하게 내 앞에 설 때까지 기다린다! 한 방에 보내 버려야 해!’ 브라이언은 초조하게 발소리에 집중했다.
‘툭 툭’ 남자의 발걸음이 브라이언의 캐비닛 앞에 멈추는 그 순간 브라이언은 캐비닛을 힘껏 밀어버렸다.
그러자 캐비닛의 문이 열리며 쓰러졌고 그 속의 물건들이 양복의 남자 위로 쏟아지기 시작했다. 브라이언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미리 열어둔 창문으로 몸을 날렸지만 뛰어내릴 수가 없었다. 양복 입은 남자가 한 손으로 브라이언의 발목을 잡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놔! 이거 노라고!”
남자는 브라이언은 발목을 비틀어 버렸고 브라이언은 교실 쪽으로 몸이 구르며 떨어졌다. 이 과정에서 다행히 남자의 손이 풀어졌지만 곧이어 남자의 주먹이 브라이언의 얼굴을 향해서 곧게 날아오는 것이 보였다.
브라이언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살짝 숙이며 남자의 팔을 잡고 바닥으로 내다 꽂아 버렸다. 순간적인 큰 충격이 폐부를 찌른 듯 양복의 남자는 ‘헉’ 하는 소리와 함께 얼굴이 심하게 일그러졌다.
“내가 유단자야, 너 같은 건 한 손으로 상대할 수 있어. 내가 도망 다닌다고 우스워 보이냐? 어디서 이런 시답잖은 실력으로 덤벼, 덤비길” 브라이언은 신발로 남자의 팔을 ‘툭툭’ 차며 말했다.
“꺅! 까야야야약!”둘의 싸움을 지켜보던 여선생은 고래고래 질러댔다.
“제가 이상한 사람이 아니거든요. 아닌데…. 아이씨”
브라이언은 어찌할 줄 몰라 당황하다가 창문으로 몸을 날렸다. 사람들이 몰려오면 더 곤란한 상황이 펼쳐질 걸 예상해 도망가기로 한 것이었다. 창문 밑의 잔디 위로 낙법을 치며 ‘툭’ 하고 브라이언이 떨어지자 주위의 학생들은 갑자기 소리를 지르며 놀랬다.
“캭~~사람이 떨어졌어!”
“괜찮아. 괜찮아. 안 죽어, 뭘 이런 걸 가지고 놀래?” 브라이언은 학생들 앞에서 먼지를 툭툭 털어내며 일어났다. 그리곤 2층 창문에서 뛸까 말까 고민하는 양복 입은 남자를 향해 손을 흔들어 주었다.
“먼저 간다.”
브라이언은 우선 자신을 쫓는 자에게서 멀어지자는 생각이었다. 무작정 달렸다. 얼마나 그리고 어디로 달렸는지 브라이언은 알지 못했다. 다만 거친 호흡이 그가 얼마나 필사적으로 도망을 쳤는지 알려주고 있었다.
‘와! 범인 쫓는 것만 하다가 이렇게 쫓겨보니 이거 장난 아니네. 헉 헉 헉’
브라이언은 길가에 벤치에 앉아 숨을 고르고 있었다. 너무 지친 나머지 지금 그 남자가 쫓아온다고 해도 더는 도망갈 힘도 없었다.
‘후~이게 도대체 무슨 일인지. 나 돌아갈 수는 있는 거겠지? 만화 같은데서 보면 미션을 수행하면 돌아가고 그러던데…. 그럼 난 마이클을 살려야 하는 건가?’
브라이언은 범인 쫓는 것보다 오늘이 더 힘들다고 느꼈다. 과연 돌아가 수 있을 까는 하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저기요. 여기 어디에요? 여기서 마리엔 거리까지 먼가요?” 브라이언이 지나가는 남자에게 물었다.
“마리엔가요? 가까워요. 저기 보이는 길을 따라서 한 15분 20분 정도 가면 돼요.
브라이언은 20분을 터덜터덜 걸어서 마이클의 집이 있는 마리엔 거리에 도착했다. 마리엔 거리는 주택들만 들어선 마을이었다. 조용하고 한적한 곳이었다.
‘마이클 엘리엇의 집은 마리엔 거리 14번지. 이 집인가 보군.’
마이클의 엄마가 건넨 사건 파일을 꼼꼼히 본 효과가 나타나고 있었다. 기억력이 그리 좋은 편이 아닌 브라이언이었지만 웬일인지 지금은 모든 것이 머릿속에 저장된 것처럼 필요한 때 딱딱 기억이 떠올랐다.
브라이언은 슬쩍 그 집 앞을 지나쳐 걸었다. 거실로 보이는 1층에 불이 켜있고 사람의 그림자가 지나다니는 것으로 보아 누군가 집 안에 있었다.
‘사체가 발견된 시간이 새벽 2시. 사인은 질식사. 범행시간은 10시에서 11시 사이. 아이가 사라진 시간이 7시 이후. 지금 시각은….’
브라이언은 자신의 손목시계를 바라보았다. 그의 시계는 막 10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시간이 안 맞는다. 뭐 하나 멀쩡한 게 없어!’
브라이언은 주위 집들을 하나하나 자세히 보기 시작했다. 창문을 통해서 집안의 시계를 보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집 대부분이 커튼을 쳐 놓아서 내부가 보이지 않았다.
그때 한 집의 불이 켜지는 것을 보았다. 집주인이 막 집에 들어온 모양이었다. 다행히 그 집의 창문에는 커튼이 쳐있지 않아서 내부가 훤히 다 보였다.
‘오케이! 지금 시각 6시’ 브라이언은 재빨리 자신의 손목시계 시침을 바꿔놓았다.
‘마이클은 7시에 친구 집에 가서 비디오테이프를 빌려오겠다고 나갔어. 그러하면 아직은 집에 있다는 건데…. 좋아! 1시간 동안 범인이 저지를 경우의 수를 예측해 놓아야 해. 그래야 내가 범인을 막을 수 있어!’
브라이언은 먼저 동네를 한 바퀴 돌면서 사체가 발견된 쓰레기통을 찾아보기로 했다.
‘분명 집 근처라고 그랬는데….’
아무리 둘러봐도 사체가 발견된 쓰레기통이 보이지 않았다. 사진에서 보았던 파란 뚜껑의 큰 철제 쓰레기통은 어디에도 없었다.
브라이언은 수색 범위를 넓혀서 옆 동네까지 살펴보았지만, 사진에서 보았던 그 쓰레기통은 없었다.
‘수사할 거면 제대로 해 놓던가! 사체가 발견된 장소조차 제대로 조사를 안 해 놓고 뭐하는 거야. 일을 이따위로 하고 밥이 넘어가?’
브라이언은 괜히 당시 경찰들에게 성질을 내보였다. 갑자기 와 있는 1992년도, 자신을 쫓는 양복 입은 남자들, 그리고 잠시 후 살해될 꼬마 아이. 지금 벌어지는 이 모든 황당한 상황에 분풀이할 대상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