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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여자의 사랑법
작가 : 서연
작품등록일 : 2016.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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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화
작성일 : 16-12-06     조회 : 677     추천 : 1     분량 : 53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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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롤로그

 

 

 점심시간인데도 불구하고 사무실이 밀집된 지역에 자리한 지하 서점엔 꽤 많은 사람들이 드나들고 있었다.

 리더십에 대한 도서를 따로 모아놓은 곳에서 존 맥스웰의 책을 집어든 인혁의 시선은 벌써 여러 차례, 지하로 내려오는 계단과 맞닿은 자동문을 향하고 있었다. 낮게 가라앉은 날씨 때문인지 문이 열릴 때마다 들리는 둔탁한 울림소리가 가뜩이나 예민해져 있는 그의 신경을 거슬리게 만들었다. 비슷비슷한 색깔의 겉옷을 걸친 사람들이 눈이 묻은 머리카락을 털며 서점 안으로 들어서는 모습을 곁눈질하느라 그는 눈가가 아릴 지경이었다.

 ‘젠장, 누굴 가자미로 만들기로 작정을 한 건가.’

 인혁은 눈에 들어오지 않는 활자들을 성의 없이 훑어 내리며 대충 책장을 넘겼다.

 오 분 만 더…… 십분 만 더…… 사흘째 얼굴을 보지 못한 그녀를 기다리느라 말 같지 않은 변명을 늘어놓으며, 그는 근 사십 분 째 서가를 어슬렁대고 있는 중이었다. 기다려주는 법 같은 건 애당초 배운 적이 없는 시계는 밉살스럽게도 어느 새 한 시 삼십분을 지나고 있었다. 회의가 시작되는 두 시까지는 회사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을 하며 책장을 넘기던 인혁은 바지 주머니에서 몸을 떠는 작은 물체를 꺼냈다.

 [어디야?]

 “볼 일 보고 있다. 무슨 일이야?”

 [성진이랑 오후에 통화하기로 했다면서?]

 “맞다!”

 [뭐야, 생각도 못하고 있었던 거야? 야, 강인혁! 정신을 어디다 두고 다니는 거야? 내가 이사 스케줄까지 챙겨야 하는 거야? ……좋은 말 할 때 불어. 요즘 점심시간마다 어디로 사라지는 거야?]

 시끄럽긴 해도 결코 싫지 않은 태진의 잔소리에 미소를 짓던 인혁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

 “일단 끊고 들어가서 보자.”

 [보긴 뭘 봐? 어딘지 당장 말 못……]

 태진의 목소리가 묻어나는 휴대폰을 일방적으로 끊은 인혁은 언제 들어왔는지 모를 여자를 향해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영원보다 길게 느껴졌던 지난 사흘의 공백은 오직 자신만의 생각인 모양이었다. 언제나 그랬듯 요동하지 않는 눈길로 들고 있는 책을 내려다보는 여자의 모습에 인혁은 일방적인 감정이 어떤 것인지를 새삼 깨달을 수 있었다.

 문득 정체를 알 수 없는 쓴 웃음이 목젖을 간질였다. 자신이 표정 근육 몇 개만 움직이면 어지간한 여자들은 스스로 몸이 달아 애를 태우는데, 누군지도 모르는 여자의 주변을 서성이는 자신이 딱하기 그지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 어처구니없는 건 언제쯤이면 저 여자에게 감정의 절반을 나누어 갖자고 말을 할 수 있을까……하는 상상을 하는 자신이었다.

 한 번쯤 놀란 눈을 하고 자타가 인정하는 빼어난 외모에 반한 시늉이라도 해 준다면…… 서가를 벗어나는 등에 따가운 시선이라도 꽂아준다면…… 이보다 덜 안타까울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좀체 판형을 가늠할 수 없는 여자는 처음 본 그 날부터 보름의 시간이 지난 오늘까지도 강인혁이라는 남자에게 단 한 줌의 관심 따위도 내비치지 않고 있었다.

 ‘휴, 저런 목석같은 여자에게 뭘 바라고 있는 거지?’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이해가 안 되는 자신을 나무라는 순간, 인혁은 어느새 그녀를 향해 머뭇거리는 미소를 건네고 있었다. 아무래도 미소가 제대로 미친 모양이었다.

 “아!…… 그 책은 신국판이에요.”

 인혁이 들고 있는 책을 힐끔 쳐다본 여자가 상서로운 목소리로 판형을 일러주었다.

 “그렇군요.”

 먹먹한 침묵을 사이에 두고 간간히 그녀가 넘기는 책장 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말인가를 해야 할 것 같은데 마땅히 떠오르는 말이 없었다. 사흘 동안 내내 이 자리에서 당신을 기다렸다는 말을 하자니 유치하기 짝이 없었고, 오랜만이라는 인사를 하자니 새삼 그녀와 자신 사이에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아무런 코드도 없다는 사실이 짚어졌다. 하얗게 지새운 불면의 밤과는 상관없이 심드렁하게 책의 판형을 일러주는 여자에게 서운함을 느끼는 자신이 더없이 우스울 뿐이었다.

 풍덩하는 물소리와 함께 지독할 정도로 평범하게 생긴 여자가 가슴으로 들어서고 난 뒤, 인혁은 거의 매일처럼 여자에게 책의 판형을 물어보곤 했다.

 어쭙잖은 수법이라고 해도 할 말이 없었지만 따지고 보면 삼류 선수 따위가 일삼는 행동은 결코 아니었다.

 그는 정말 궁금했다. 생김으로 따진다면 수다한 여자들과 별다를 바 없을 것 같으면서 여느 여자들과는 다르게 전혀 그 갈피를 헤아릴 길이 없어 보이는 그녀의 판형이 알고 싶었다.

 하지만 ‘같은 남자’가 ‘같은 말’을 그토록 반복하는데도 불구하고 여자의 태도는 늘 한결같았다. 뭐하는 짓이냐고 따져 묻지도 않았을 뿐더러, 누가 봐도 정상을 비껴나 보이는 인혁 자신을 피하거나 애써 외면하지도 않았다. 그저 간결하게 묻는 말에 대꾸를 해 주거나, 오늘처럼 묻기도 전에 대답을 해 주는 게 전부였다.

 “저……”

 한 번이라도 그녀의 목소리를 더 들어야 할 것 같은 마음에, 아무 책이나 집어든 인혁의 귓가에 잔잔한 여자의 소리가 닿았다.

 “그 책은 사륙판이에요. 문고판이라고 하죠.…… 그럼.”

 인혁이 미처 정신을 차릴 사이도 없이 여자는 고개를 까딱하고 몇 권의 책을 손에 든 채, 카운터 쪽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계단과 맞닿아있는 유리문 너머로 보이는 굵은 눈발을 보자 불현듯 다시는 그녀를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쏟아지는 눈 속으로 그녀를 보내고 나면 우연을 빌미삼아 그래온 날들이 끝날지도 모른다는 불안한 생각이 인혁의 등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거짓말처럼 작게 느껴지는 여자의 어깨가 눈 속으로 멀어지는 것을 보며, 인혁은 들고 있던 책을 서가 위에 아무렇게나 내려놓은 채 급한 걸음으로 자동문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자신이 궁금해 하는 건 이깟 종이로 만든 책이 아니라 당신이란 여자의 판형이라는…… 그 말을 해야 할 것 같았다.

 

 

 선수, 여자들이 만들어 낸 산물(産物)

 

 

 “가서 인사라도 해 볼까?”

 “뭐라고 하게?”

 “안녕하세요? ……그럼 이상할까? 좀 이상하긴 하다.”

 “그러다 저 쪽에서 그런데요? ……하면 어쩌려고?”

 “아, 오늘도 뒷모습만 바라보다 끝이 나는구나……”

 기계적으로 반복되는 오전 미팅을 마치고 회의실을 빠져나온 인혁은 등 뒤에서 들려오는 작은 목소리에 피식 웃음이 새나왔다. 본인을 발치에 두고 귀엣말을 하는 여자들의 소위가 괘씸하긴 했지만, 이른 시간 서류 파일을 손에 든 여자가 발을 동동 구르는 모습을 모른 체 하는 건 예의가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웃는 모습에 행복해진다는 수다한 여자들의 말에 소명감마저 느끼는 인혁이었다. 지루한 회의에 얼핏 짜증을 느끼던 차에 마침 잘 된 일이지 싶었다.

 삶이 사람을 진지하게 만드는 건지, 아니면 사람이 삶을 진지하게 이끌어가는 건지 알 수 없지만, 어쨌거나 진지한 것들은 이미 그 자리에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인혁에게 있어 삶이란 진지한 것들로부터 잠시 벗어나는 데서 희열을 맛보는 것이었기에.

 “좋은 아침입니다!”

 크림색 셔츠의 소매를 보기 좋게 걷어 올린 그의 서글서글한 목소리에, 복도에 서 있던 여자의 얼굴에 대번 복사 빛 물이 들었다.

 여자들은 거의가 같은 판형의 책 같았다. 표지와 제목이 다를 뿐, 규격이나 그 안에 담긴 활자의 분량은 거기서 거기였다. 한 번 싱긋 웃어주는 것을 가지고 저 남자가 나에게 관심을 보이는 구나…… 라고 생각하는 것에서부터, 무료한 마음에 별 생각 없이 손이라도 한 번 잡아주기라도 하면, 대번 ‘내 남자’ 로 착각하는 것까지. 두 어 페이지쯤 읽고 나면 대충 어떤 내용인지를 가늠할 수 있는 것도 비슷비슷했다.

 이런 저런 논문과 보고서를 성의 없이 짜깁기해 놓은 프리젠테이션에 벌컥 화를 내고 나온 그는, 선 자리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하는 여자에게 자판기 커피를 한 잔 마시기에 더없이 좋은 날이라는 말을 할까 하다 그만 두기로 했다. 회의가 길어진 바람에 지금쯤 사무실엔 ‘내 남자’를 찾는 여자들의 전화가 정신없이 울려대고 있을 터였다. 일일이 다 헤아리지 못하는 리스트를 굳이 늘릴 이유까지는 없었다.

 “저……”

 “스카프가 아주 잘 어울리는군요.”

 여자들의 순진함이, 말간 뺨을 복사 빛으로 물들이는 그 순진함이 얼마나 믿을 수 없는 것인지를 일찌감치 터득한 그였다. 인혁은 머뭇거리는 두 여자에게 싱긋 미소를 지어보이고 기획실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자동 응답기를 채운 여자들의 서로 다른 목소리를 다 세기도 전에, 책상 위에 올려둔 그의 휴대폰이 날카롭게 몸을 떨어댔다.

 [인혁씨!……]

 무서울 정도로 ‘내 남자’에 대한 기득권을 주장하는 당찬 여자의 목소리에 인혁의 입매에 웃음이 그려졌다.

 “어제는 미안.”

 언제나 어휘는 두 번째였다. 제 아무리 무성의한 말도 그것을 어떤 목소리에 담느냐에 따라 수용의 정도가 달라지는 법이었다. 물론 그에게 어휘보다 말투가 우선이라는 걸 일깨워준 이는 여자들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쇠꼬챙이처럼 날카롭던 여자의 목소리가 이내 투정으로 모습을 바꾸고 있었다.

 [약속해 놓고 안 오면 어떻게 해? 연락도 안 되고.]

 그물처럼 얽힌 약속들 중에 오늘은 어떤 약속을 깰 것인지 생각하느라 그랬지. 어떤 약속이 그나마 덜 식상한 것인지를 가늠하느라.

 “깜박 잠이 들었어. 요즘 일이 많다 싶더니 피곤했었나봐.”

 [어머! 몸살 난 거야?]

 사실 착한(?) 물이 강수처럼 흘러넘친다는 클럽에서 친구 녀석이 부킹한 여자와 진한 밤을 보내느라 몸살이 걸릴 시간 같은 건 없었다.

 [자기, 혹시 나 몰래 다른 여자 만난 건 아니지?]

 “하하하. 보라야, 넌 아직도 널 그렇게 못 믿어?”

 [자기가 못 믿게 하는 건 생각 안 하지?]

 “날 믿지 말고 널 믿으라고 했잖아. 너 같은 여자를 두고 딴 짓을 할 남자가 있다고 생각해? 정답은 네가 가지고 있는 거야.”

 다른 여자들과 달리 고양이의 발톱 같은 걸 가지고 있어서, 그나마 질리지 않고 만날 수 있었던 여자가 보라였다. 하지만 그녀 역시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스스로 제 발톱을 뽑아 목걸이를 만들어 인혁을 실망시켰을 뿐이었다. 아무런 매력도 느끼지 못하게 만드는 우스꽝스러운 목걸이를 매만지는 그녀를 볼 때면, 차라리 처음부터 둥근 앞발을 가진 강아지가 나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발톱이 빠진 고양이의 퀭한 눈빛이 자아내는 눈빛. 아무런 매력도 회복할 무엇도 없는 앙상한 눈빛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얼마간의 연민을 자아내게 만든다는 사실을 이 여자는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보라야, 이젠 일 할 시간이야. 열 시 이후엔 사적인 전화 거절이란 거 알지?”

 [호호호. 그게 자기 매력이잖아. 열 시부터 여섯시까지는 사적인 전화도 사절하고, 일에 몰두하는 거. 난 자기 그런 모습이 제일 든든하더라. 어젠 아파서 그런 거니까 용서해 줄께. 대신 아프지 않겠다고 약속해.]

 지루함을 벗어나기 위해 손을 댄 것들이 지루함을 가져다주는 것처럼 짜증스런 일은 없었다. 사소한 즐거움을 바라고 손을 내민 것들이 짜증을 가져다준다는 건 일종의 모반이자 반역이었다.

 사회에 나온 뒤 사석(私席)에서 우연히 만난 대학 동기 보라의 당당한 눈길이 이 년 사이 점점 지루함이 되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떠올리며, 인혁은 자신도 모르게 치켜 올라간 입 꼬리를 손으로 가볍게 문질렀다. 한두 달 사이에 슬며시 그림자처럼 밀어낸 여자들을 생각하면, 그녀에게 허락한 시간이 꽤나 길었다는 생각도 들었다.

조한나 19-02-11 08:41
 
* 비밀글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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