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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여자의 사랑법
작가 : 서연
작품등록일 : 2016.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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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화
작성일 : 16-12-06     조회 : 403     추천 : 0     분량 : 53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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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년……. 쉴 새 없이 좌우를 돌아보느라 늘 분주하긴 했지만 어쨌든 한 여자에게 ‘내 남자’라는 착각을 붙들게 하기엔 꽤나 긴 시간이 아닐 수 없었다. 처음 다가올 때 그랬던 것처럼, 물러서는 순간에도 쉽게 스러질 것 같지 않은 보라의 존재…… 아직도 자신을 고양이라고 생각하는, 제 스스로 발톱을 빼어버린 짐승의 눈빛을 떠올리며 인혁은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어디 가냐?”

 “요 앞에.”

 “자식, 점심시간에도 짬 내서 그 짓 하지?”

 위 아래로 인혁을 훑는 태진의 얼굴에 내밀한 웃음이 감돌았다.

 “미친 놈……”

 “아무렴 너만 할까?”

 “요즘 점심시간에 어디로 사라지는 거야?”

 태진의 말은 이미 뻔한 대답을 ‘불어!’라고 말하는 것처럼 명료했다.

 “인마, 어지간히 해라.”

 “너야말로 아침에 호텔에서 바로 출근했다면서?”

 인혁에게 정곡을 찔린 태진의 입에서 바로 욕설이 튀어나왔다.

 “형민이, 이 자식!”

 “난 형민이라고 말한 적 없다. 제대로 된 부킹이었으니까 그럴 만도 했다만, 다음부터는 그러지 마라. 체면이 있지 아침까지 그러면 쓰나……”

 “갈 데 있다면서? 어서 가 봐.”

 지체처럼 붙어 다니는 친구들 덕분에 적잖게 물이 들긴 했지만, 아직까지도 노골적인 말에 얼굴을 붉히는 태진이 인혁의 등을 떠밀었다. 할 짓은 하되 그 일을 입에 올리는 일은 차마 꺼리는 그였다. 특히 자기 자신의 일에 대해서는.

 “갈이 갈래? 여자 하나쯤은 더 부를 수 있는데. 뒤풀이 한 번 할 맘 있으면 따라 오던가……”

 졸지에 대낮부터 객쩍은 짓이나 하는 놈이 되어버린 판에 순순히 물러설 이유가 없었다. 이런 식의 농담이 지루함을 조금이나마 덜어준다면 더더욱 그랬다. 예상했던 것처럼 주먹을 들어 한 대 치는 시늉을 하던 태진이 뒤도 안 보고 가 버리자 인혁은 엘리베이터를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밑도 끝도 없이 올라오는 매너리즘 덩어리의 서류와 씨름을 하느라, 몇 년 사이 더 지친 것도 같았다. 따지고 보면 자의대로 시작한 일이 아니라 일의 분량과는 상관없이 쉬이 지치는 것 같았다.

 판에 박힌 수순을 따라 유학을 마치고 돌아오자마자, 선대(先代)에서부터 이어온 그룹의 일을 맡게 된 건 어찌 보면 정해진 행로나 다름없었다. 하고 싶다, 하기 싫다 를 떠나 당연히 그래야 하는 일이었다.

 그런 인혁에게 있어 여자란 더없이 편리한 존재였다. 벗어나지 못할 운명을 점지해 준 하늘이 코딱지만 한 인심을 써 준 것인지, 그는 자신이 보편적인 남자들보다 훨씬 웃도는 외모를 가지고 태어났다는 사실을 일찍이 깨달았다. 그런 그에게 있어 여자들이란 답답함으로 일관되는 삶을 위로해주는 엽편(葉片) 소설과 같았다.

 웃어주면 알아서 손을 내밀고 괜한 말이라도 한 번 건네주면 알아서 ‘이 한 몸 아낌없이’ 바치는 여자들. 하지만 인혁은 그녀들의 눈동자에 비친 건, ‘강인혁’이라는 인격체가 아니라 대신 그룹 산하의 제과업체 ‘임페리얼’ 이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숙명이라는 말로 대신할 수 있는 순서를 따라 언젠가는 대신 그룹의 오너가 될 수밖에 없는 명함이 여자들의 눈에 비친 자신의 전부라는 사실을 그는 모르지 않았지만 부러 아는 체 하는 짓 같은 건 하지 않았다. 어려서부터 열 사람 중에 아홉 사람은 뒤를 돌아보게 만들던 수려한 외모는 자신이 등에 짊어지고 태어난 족보를 돋보이게 하는 보조적인 수단 밖에는 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달팽이의 등짐처럼 들러붙어있는 명함이 불편한 것만은 아니었다. 하나에서 열까지 크게 다를 바 없는 여자들의 속내를 깨달을 수 있기에 오히려 홀가분하게 즐길 수 있는 것도 같았다.

 하지만 제 아무리 재미난 일이라 할지라도 습관이 되고 난 뒤에는 자연적으로 타성을 낳는 법이었다. 인혁은 몇 년 사이 습관이 되어버린 유희에 서서히 흥미를 잃어가는 자신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오히려 요사이 그는 점심시간을 틈타 가까운 거리에 있는 지하 서점에 들르는 일에 재미를 붙여가고 있었다. 욱하고 치밀어 오른 화를 누르지 못해 무작정 회사를 뛰쳐나온 김에 우연히 들리게 된 곳치고, 한 낮의 서점 산책은 어느 새 그에게 한적한 숲 속을 거닐고 있는 듯 편안함을 가져다주고 있었다.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리더십에 대한 책이 진열돼 있는 서가를 서성이던 그의 눈에 낯익은 제목이 들어왔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인혁은 짙은 쑥색과 등황색이 섞인 표지의 책을 집어 들었다.

 꿈이라는 말에…… 꿈이 있다는 말에…… 가슴이 움직거려보긴 처음인 것 같았다. 일생을 폭력에 항거하는 데 바쳤던 사람치곤 비참한 죽음을 맞이한 마틴 루터라는 사람의 꿈이 무엇인지 새삼 궁금해졌다. 어쩐지 그의 삶은 자신과는 달리 지루하거나 답답할 겨를이 없었을 것 같기도 했다. 이미 수없이 들어서 아는 것처럼 여겨지지만, 정작 마틴 루터가 말하는 꿈에 대해 아는 바가 전혀 없다는 생각을 하며, 그는 띠지가 둘린 책을 들고 계산을 하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

 아침 미팅에서 지나치게 스트레스를 받을 탓일까. 난데없이 꿈이라는 단어에 가슴이 설레 두꺼운 책을 선뜻 집어 들게 만들더니, 이젠 눈에 헛것까지 보이는구나 싶었다. 살아있는 인영(人影) 하나가 가슴으로 뛰어 들어오는 것 같은 착각에 걸음을 멈춘 인혁은 고개를 들어 눈앞에 서 있는 여자를 쳐다보았다. 조금 전 자신의 속으로 들어온 것 같은 여자는 일정한 보폭으로 서가를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믿을 수 없을 정도의 감탄을 집어삼키게 만든 것치고 여자의 모습은 실망스러울 정도로 평범하기 그지없었다. 어깨를 살짝 덮는 생머리로 봐선 대학 이학년이나 됐을까 싶었고, 얇은 카디건에 스커트를 입고 편안한 슬리퍼를 신고 있는 것으로 봐선 근처에 직장을 둔 여자인 것도 같았다.

 생각이 많으면 어느 순간 착각도 느껴지고 착시 현상도 일어난다고 하더니 그 말이 맞는 듯 했다. 터진 시루가 콩나물을 토해놓듯, 출퇴근 시간이면 무서울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쏟아져 나오는 강남역 입구에서 봤다면, 어디서 제대로 여물지 못한 콩나물 하나가 튀어 나왔게거니 하면서 지나쳤을 정도로 작고 마른 여자였다.

 ‘후후후. 강인혁, 이젠 지루한 일상에 용트림을 하는 데도 한계를 느끼는구나. 사람이 네 안으로 들어오는 착각까지 일으키고……’

 허탈한 기분을 이기지 못한 인혁이 씁쓸한 웃음을 흘리는 순간, 누군가 책을 떨어뜨렸는지 둔탁한 소리가 고즈넉한 서점 안을 울리고 지나갔다. 반사적으로 인혁이 고개를 돌린 곳엔 걸치고 있는 카디건만큼이나 하얀 피부를 가진 여자가 바닥에 떨어뜨린 책을 줍고 있었다.

 

 

 저항, 지나친 유교적 전통의 산물(産物)

 

 

 혼자라는 게 이런 건가 싶었다.

 뭐가 그리 급할 게 있다고 선을 보자마자 두 눈에 발그레한 홍조를 불과 한 달 만에 결혼 날짜를 잡은 건지. 결혼 날짜를 잡고 난 뒤로 아무래도 시계 바늘이 거꾸로 가는 것 같다며 수시로 시계를 들여다보는 가연이 새삼 원망스러웠다. 10월 중순에 선을 본 남자와 1월 중순에 결혼을 하기로 작정한 친구의 속내가 궁금하기도 하고 걱정스럽기도 했지만, 운명의 남자에게 반쯤 정신이 나가있는 그녀는 들은 체 조차 하지 않았다.

 고향 친구랍시고 서울에 올라온 뒤에도 단짝처럼 붙어 다니던 가연이 밤이면 밤마다 제 짝과 함께 있으니, 추운 밤중에 갈 곳이 시원찮았다. 그녀가 옆에 있다면 둘이 오만 데라도 다 갈 수 있을 텐데.

 책이라도 읽을까 싶은 마음에 카페를 찾은 은혜는 종업원이 연신 눈치를 주는 탓에, 그조차 편하게 읽지 못하고 밖으로 나온 뒤, 벌써 세 시간이 넘게 길에서 오들오들 떨고 있는 신세에 짜증이 났다.

 “이런 망할 놈의 계집애. 날도 추운데 무슨 데이트를 이렇게 오래 하는 거야?”

 정작 원망을 해야 할 대상은 따로 있지만, 나오는 거라곤 가연에 대한 서운함이었다. 허공에 대고 꽁꽁 곱은 손가락을 비비던 은혜의 눈이 어느 순간 반짝하고 빛을 발했다.

 허름한 포장이 쳐진 노점을 보자 불현듯 만고의 진리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우울할 땐 따뜻한 걸 먹어라!’

 알맞게 덥혀진 손바닥으로 시린 코를 몇 번 비빈 은혜는 오뎅이며 떡볶이를 파는 리어카를 향해 빠른 걸음으로 걸어갔다.

 “아저씨, 이거 얼마예요?”

 “두 개 천 원이예요.”

 “국물 좀 주세요.”

 기다랗게 생긴 것과 쪼글쪼글하게 주름을 잡아놓은 것 중에 어떤 것을 먹을까, 생각하던 은혜는 대뜸 서로 다르게 생긴 어묵 두 개를 양손에 집어 들었다. 한 손으로 연인의 어깨를 감싸 안은 채, 어묵을 먹던 남자가 품에 안긴 여자가 눈을 맞추며 키득대는 소리가 들렸지만, 은혜는 상관없다는 표정으로 따끈한 국물까지 마셔가며 네 개의 어묵으로 허기진 자신의 신세를 위로했다.

 “젊은 아가씨가 참 맛있게도 먹네요.”

 천 원짜리 지폐 두 장을 내고 손등으로 입가를 훔치는 은혜를 보며 주인 남자가 시원스럽게 웃어보였다.

 

 시계를 보니 열 한 시 사십 분. 설마 이 시간까지 가연이 계집애가 집에 안 들어왔을 리는 없겠고…… 고래 힘줄처럼 끈질긴 노인네가 버티고 있을 리도 없고…… 지금쯤 들어가면 별 소란 없이 침대 속으로 뛰어들 수 있을 것 같았다. 뜨거운 국물이 들어갔다는 사실조차 잊었는지, 아파트 단지 안에 있는 벤치에 앉아있는 내내 오장육부가 다 얼어붙는 것 같았다.

 “젠장, 추워 죽겠네. 날은 왜 이렇게 추운 거야. 이거야 원 갈 데 없는 신세를 아는지……. 열, 아홉, 여덟……제발 갔어라…… 일곱, 여섯, 다섯……이 시간까지 있으면 진짜 사람도 아니다……넷, 셋, 둘…… 내일은 제발 오지 마라, 응?……하나, 땡!”

 영험한 주문을 외우듯 앉은 자리에서 열을 센 은혜가 차가운 벤치에서 벌떡 일어섰다. 따뜻한 물에 꽁꽁 얼다시피 한 몸을 녹일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살갗이 간지러운 것 같았다. 할 짓은 아니지만 그래도 오늘 하루를 무사히 넘겼다는 안도감이 발갛게 언 그녀의 얼굴에 환한 미소를 짓게 만들었다.

 “정은혜, 오늘 하루도 너의 승리다. 이제 들어가서 따끈한 장판 위에서 편히 쉬자고!”

 근 두 달째 매일처럼 반복되는 밤거리 순회를 마치고 집으로 들어서는 은혜의 걸음이 빨라지고 있었다.

 

 “왜 이렇게 늦게 들어와?”

 “말도 마라. 추워 죽겠다. 내 얼굴 언 거 안 보여? 대체 이 짓을 언제까지 해야 하는 건지 모르겠다. 내일은 내복 두 개 입고 나가야지. 동태 되는 줄 알았네. 나쁜 것, 갑자기 시집은 가고…… 너 때문에 내가 이게 뭔 고생…… 왜?”

 거실로 올라가기 위해 슬리퍼를 신던 은혜는 자꾸만 팔을 꼬집어 대는 가연을 이상한 눈으로 올려다봤다. 거의 사색이 된 가연의 눈초리가 거실 복판을 가리키고 있는 것 같아 저도 모르게 그녀의 시선을 좇던 은혜의 입에서 놀란 신음이 터져 나왔다.

 “헉!”

 “여태 이러고 살았던 게냐?”

 “큰 오빠!”

 저 아저씨가 왜 여태 여기에 있나 싶었다. 어떻게든 안 보려고 길에서 온갖 궁상을 떨어가며 버틴 보람도 없이. 어제까지만 해도 열 한 시가 되면 돌아가곤 했다는 큰오빠 내외가 떡하니 소파에 앉아있는 모습에, 은혜는 눈앞이 캄캄해지는 것 같았다.

 아버지, 어머니 그 연세에 무슨 기운이 있다고 저를 낳으셨나요……. 나오는 건 마흔이 넘은 나이에 자신을 낳아준 부모님에 대한 원망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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