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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여자의 사랑법
작가 : 서연
작품등록일 : 2016.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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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화
작성일 : 16-12-08     조회 : 425     추천 : 0     분량 : 53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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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기……조카씨!”

 한 손으로 이마에 묻어난 식은땀을 닦는 은혜의 목소리가 눈에 띄게 부드러워져 있었다.

 “왜?”

 “우리 되도록이면 점심시간에 미리 전화하자.”

 “같이 먹게? 그럼 회사에서 눈치 보일 텐데…… 하긴 가끔은 그것도 괜찮긴 하겠다.”

 미쳤니, 내가 너랑 고모씨 조카씨 해가면서 그 동네에서 밥을 먹게. 적어도 난 회사에선 정상인이다. 누군가 알면 당장 ‘세상에 이런 일이!’ 라는 프로그램 담당자에게 제보 전화를 하게 될 비참한 과거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단다. 알겠니, 덩치만 산 같은 인간아.

 “그게 아니라 먼저 나가는 사람이 어디로 가는지 전화를 해 주면, 같은 장소 피해갈 수 있잖아.”

 “?! 푸하하하, 그러니까 고모씨 말은 창피하다 이거네?”

 “조카씨도 썩 좋은 일은 아니잖아?”

 “고모씨 하는 거 봐서 그래 줄 용의도 있긴 해.”

 이 자식이 어디서 뭘 하다 왔길래 이렇게 느물거리는 거야. 적어도 제 할아버지나 아버지랑은 다른 과(科) 같아서 좋긴 한데, 이건 너무 오버하잖아.

 “그래서 말인데 고모씨 올해 나이가 어떻게 되지?”

 “조카 나이에서 둘 빼.”

 “저런 꽉 찼네. 친구 많지?”

 “아니……”

 “위너북에 예쁜 여자 직원 많다고 하던데?”

 “우리 부서엔 없어. 내가 제일 나아.”

 “푸하하하. 에디터들은 면접 안 봐?”

 속에서는 빨래를 삶을 때 일어나는 거품 같은 것이 부글부글 끓어대는데, 은혜는 꿈쩍도 할 수가 없었다. 끌려 들어온 주제에 첫날부터 나이 많은 조카에게 폭언을 행사할 수는 없었다. 나이를 떠나 남자는 하늘 여자는 무조건 그 아래라는 이 집안의 전통이 뼈에 사무친 그녀였다.

 “그러지 말고 괜찮은 여자 있으면 소개시켜주라.”

 웃기는 집안이었다. 아들들은 연애를 해도 무방하고 딸들이 그러면 당장 난리 법석이 나는 집안. 서기가 가리키는 오늘은 분명 이천 사년을 지나고 있지만, 유서 깊은 정씨 가문만큼은 18세기 말의 시제(時制)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럼 점심 때 미리 전화로 약속해 줄 수 있어?”

 “그럼?”

 “괜찮은 여자는 책임 못 지고, 중간은 해 줄 수 있어.”

 “리얼리?”

 “대신 전화 약속 한 달 동안 이행하는 거 봐서.”

 “!”

 아무 것도 모르고 야, 너 하며 툭탁거리다 어른들께 된 야단을 맞던 시절에도 그랬지만, 어린 고모는 만만한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지방에 있는 대학을 졸업하고 서울에 취업을 했다고 하면서도, 호된 아버지의 눈을 교묘할 정도로 잘 피해 다닌 고모였다. 얼마나 교묘했으면 바로 옆 건물에 있으면서 이 날까지 서로 까맣게 모르고 지낸 셈이었다. 어쨌거나 그런 고모의 만만치 않은 성격도 대쪽 같은 아버지 앞에선 어쩔 수 없는 모양이었다. 결국 제대로 발목을 잡힌 걸 보면.

 “명함 줘 봐. 내일부터 전화할게.”

 “장난 전화 하면 죽……”

 “죽여.”

 은혜가 차마 다 하지 못한 말을 태진이 완성시키며 다시 키득대기 시작했다.

 “고모씨야 말로 장난 전화 하지 마. 특히 조카씨 같은 그런 소리 하기 없기다, 알았지? 이래 뵈도 내가 밖에 나가면 한 인기 하거든.…… 아, 물론 인기가 많다고 해서 사귀는 여자가 있다는 건 아니야. 썸바디는 주관적으로 선택하는 거니까. 오케이?”

 보편적이지 않은 가계도(家系圖)가 마음에 들지 않는 건 피차 같은 모양이었다. 하긴 당장 보고 듣는 이의 웃음을 자아낼 호칭이 마음에 드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싶었다.

 “여기 있어. 내일 점심 때 꼭 전화 해.”

 서둘러 다이어리에서 명함을 꺼낸 은혜는 태진에게 다시 한 번 신신당부하는 걸 잊지 않았다.

 “오케이. 그럼 지금부터 방 정리를 해 볼까요? 참 내 명함은 방에 있어. 내일 전화하면 번호 찍힐 테니까 저장해.”

 불과 몇 마디를 했을까……. 태진의 말투가 어느 새 반말이 되어있었다.

 그래, 네 마음대로 해라. 학교에서나 회사에서 만났으면 꼼짝없이 오빠 내지는 선배라고 불렀어야 했을 테니까……. 아군인지 적군인지는 모르지만 빡빡한 집안에 또래가 비슷한 이들이 있다는 게 어쩌면 잘 된 일이라고 생각하면서 은혜는 하루 사이에 옮겨져 온 짐을 하나씩 풀기 시작했다.

 

 

 선수 생애 최초의 찜

 

 

 점심시간이 가깝도록 태진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오지 않자, 은혜는 자신도 모르게 엉덩이가 들썩거렸다.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게 생긴 오빠와는 사뭇 다르게 장난기로 똘똘 뭉친 조카의 눈빛이 영 심상치 않게 느껴졌다. 지극히 사적인 일로 지금껏 멀쩡하게 다닌 회사에서 조롱거리가 된다는 건 상상만 해도 소름이 끼치는 일이었다.

 울리지 않는 전화기와 책상 앞에 놓인 시계를 번갈아 노려보던 은혜는, 아침나절 태진이 건네준 명함을 지갑에서 꺼냈다.

 (주) IOU 기획실 대리 정 태진…… 이라는 글자가 찍힌 명함을 한참 동안 만지작대던 은혜는 수화기를 들고 그의 휴대폰 번호를 힘껏 눌렀다.

 [기획실 정태진입니다.]

 조카가 아니라 업무상 알게 된 사람이라면 백점 만점에 구십구 점은 줄 수 있을 것 같은 목소리였다.

 “나야.”

 [아!]

 “뒷말 생략하고 오늘 점심 어디서 먹어?”

 [하하하. 뒷말 생략은 내가 원하는 거야.]

 “잔말 말고 대답이나 해.”

 [이거 보기보다 과격한 걸?…… 사소한 일로 당황하게 만들지 마. 당황하면 무슨 말이 튀어나올지 나도 모르니까.]

 “알았으니까 묻는 말에 대답이나 해.”

 [아직 모르겠는 걸.]

 “……”

 [그건 그렇고 그 쪽은 오늘 어디로 갈 건데?]

 그 쪽? 아버지나 오빠가 들었으면 대뜸 뒤통수를 맞을 소리를 저토록 태연하게 내뱉다니. 나이를 떠나 항렬 상 분명 위아래가 정해져 있는데도 불구하고, 느물거리며 ‘그 쪽’이라고 부르는 태진의 말에 은혜는 묘한 반감을 느꼈다.

 이 자식, 은근히 즐기는 분위기잖아. 하지만 상대가 이쪽을 가지고 놀려고 할 때는 요동해서는 안 되는 법이었다. 짓궂은 남자애들이 장난을 할 때, 소리를 지르거나 울면 그 애들은 더 신이 나서 날 뛰는 법이었다. 아무리 머리에 띠를 두른다고 해도 뿌리 깊은 정씨 집안의 전통을 훌훌 내던지지 못했는지, 은혜는 은근히 부아가 오르는 자신을 인정하며 주먹을 힘껏 쥐었다.

 하지만 수화기를 타고 흘러나가는 그녀의 목소리는 침착하다 못해 다감하게까지 느껴졌다.

 “허수아비에 갈 생각이야.”

 [우체국 건너편에 있는 일식집?]

 “응.”

 [알았어. 거기만 피해가면 되지?]

 “사방 오십 미터 접근 금지.”

 [하하하. 그건 좀 심하다.…… 노력은 해 볼 테니까, 알아본다고 한 거 신경 써서 잘 알아 봐. 알았지?]

 그녀가 아는 한 남자란 존재는 하나 같이 똑같은 족속들이었다. 제 집 여자들이 짧은 치마를 입은 모습에 길길이 날뛰다가도, 밖에 나가서는 어디 눈요기라도 할 여자가 없을까 싶어 고개를 기웃거리는 속물들. 굳이 먼 데서 모델을 찾을 필요조차 없었다. 환갑이 지난 나이에 읍내 다방 마담과 한 차례 입소문에 올랐던 아버지가 그랬고, 집안에서는 권위주의의 냄새를 물씬 풍기면서도 정작 초등학교 동창 모임에서 고등학교 동기 모임까지 두루두루 호인소리를 듣는 큰오빠가 그랬다. 하긴 끈끈한 피의 흐름이 멀쩡하게 생긴 조카를 피해간다는 것 자체가 우스운 일인지도 몰랐다.

 “정은혜씨, 이번 분기 리스트 언제 올릴 거야?“

 수화기를 내려놓던 은혜는 맞은편에서 들려온 팀장의 목소리에 정신이 퍼뜩 들었다. 그녀가 몸담고 있는 위너 북은 일반 인터넷 서점과는 다르게, 두 달을 주기로 분기(分期)마다 에디터들이 추천한 도서를 인터넷과 오프라인의 카탈로그를 통해 회원들에게 공급하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십일 월 달 내내 시중에 나와 있는 도서들의 시장성과 내용을 검토해서 리스트를 뽑아 올리면, 그것들이 내년 일 월에 판매할 도서가 되는 셈이었다.

 하지만 하루가 멀다 하고 봇물같이 쏟아져 나오는 책 중에서 팔릴 만한 책을 컨택하는 일은 생각처럼 쉬운 일만은 아니었다. 주관적으로 봤을 때 감흥이 남다른 책이 독자들에게서 외면을 당하는 일도 잦았고, 무엇보다 단시일 안에 승부를 보는 베스트셀러의 경우에는 한 달이란 간격을 기다려주지 않을 때가 많았다. 어제까지만 해도 베스트셀러의 대열에 끼어 있던 도서가 막상 분기별 추천도서에 오르고 나면 급격한 사양화를 향해 달리고 있기도 했다.

 지난 분기에 생각했던 것 보다 좋은 성과를 거두지 못한 은혜로서는 다음 분기 도서 선정에 적지 않은 부담을 느끼는 것도 사실이었다.

 “이번 주까지 제출 하도록 하겠습니다.”

 “시간에 쫓기지 말고 제대로 된 걸 추천하도록 해요. 알겠죠?”

 질(質)적으로 우수한 도서를 추천하는 직업인 줄 알고 선뜻 에디터의 길에 뛰어들었던 그녀를 매번 딜레마에 빠지게 만드는 팀장의 목소리가 기다렸다는 듯 날아들자, 은혜는 살짝 미간을 찡그렸다.

 에디터 생활 삼 년.

 좋아하는 책을 원 없이 읽고 다른 사람에게 권해 줄 수 있다는 생각으로 뛰어들었던 직장생활은, 정작 그녀에게 한 시도 놓을 수 없는 긴장과 마치 책장사가 된 듯한 비참한 기분만을 남겨주었다.

 추천한 도서의 매출이 바닥을 때릴 때마다 안목이라곤 눈곱만큼도 없는 에디터 취급을 받아야했고, 분량에 밀려 할 수 없이 아무렇게나 집어넣은, 내용으로나 질적인 면에서 가치가 없어 보이는 책의 매출이 높을 때에는 최상의 에디터 취급을 받곤 했다. 오로지 매출에 의해 책에 대한 혜안(慧眼)을 검증받는다는 사실은 비단 은혜 자신에게만 버거운 일은 아닌 모양이었다. 열 명 남짓한 에디터들이 시간만 나면 저마다 비슷비슷한 애환들을 토로하곤 하기에 급급해 하는 걸 보면.

 신간이 나오기 무섭게 출판사에서는 보도 자료와 함께 책을 보내왔지만, 가장 확실한 방법은 직접 서점에 나가 독자들의 선택 코드를 파악하는 것이었다. 주관적으로 봤을 때 아무리 마음에 와 닿는 글이라 할지라도 독자들에게 외면당한 책을 리스트에 올렸다간 찌그러진 양은 주전자가 될 뿐이었다. 오늘도 서둘러 점심을 먹고 인근에 있는 서점에 나가 시장조사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은혜는 마케팅 팀에 근무하는 가연에게 함께 식사를 하러 나가자는 말을 하기 위해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샌님 태진 오빠 말하는 거야? 하하하.”

 질긴 고무조각을 씹듯 잘게 썬 히레가스를 우물거리는 은혜를 보며,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뜬 가연이 이내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생각할수록 우습기 그지없었다. 어린 시절 명절 무렵이나 방학 때가 되면 서울에서 내려오던 태진과 그의 여동생을 가연도 잘 알고 있었다. 집성촌과 다름없는 동네에서 정(丁)씨 문중의 어른들은 하나 같이 어린 태진 남매와 은혜의 호칭을 귀담아 듣고 있다가, 또래의 아이들답게 이름이라도 나올라 치며 어김없이 호통을 치곤했다. 그나마 터울이 좀 있는 태희는 앙증맞은 목소리로 ‘고모’ 소리를 곧 잘 했지만, 주위를 살피며 ‘은혜야’ 하고 제 고모를 부르다 된통 혼이 나곤 했던 태진을 떠올리자, 가연은 새나오는 웃음을 주체하지 못하고 들고 있던 포크를 내려놓았다.

 “그렇게 웃겨?”

 “그 생각나?”

 “뭐?”

 “중학교 땐가…… 크리스마스 때 너희 집에서 놀다가 태진 오빠가 너한테 ‘은혜야’ 그러는데 네가 ‘왜 오빠?’ 그러다 둘 다 엄청나게 깨진 일. 난 그 날 너희 아버지 혈압 터져서 쓰러지시는 줄 알았어. 얼굴이 딸기처럼 변하시는 게…… 하하하.”

 “휴. 지금이 딱 그 꼴이잖니. 하루 이틀도 아니고 어떻게 계속 이러고 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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