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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여자의 사랑법
작가 : 서연
작품등록일 : 2016.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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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화
작성일 : 16-12-08     조회 : 401     추천 : 0     분량 : 53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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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게, 듣고 보니 좀 그러네. 가끔 너희 집처럼 촌수가 뒤바뀐 집이 있긴 해도 호칭은 자유로운 것 같던데. 암튼 너희 부모님 정말 별나. 그렇지?”

 “부모님만 별난 게 아니야. 큰 오빠만 보면 가슴이 벌렁거려 죽겠어.”

 “왜 아니겠니? 나도 너희 큰 오빠만 보면 오금이 다 저리는데. 그나저나 일은 일이다. 그 껄끄러운 조카하고 한 동네에서 일을 하고 있으니.”

 “제가 알아서 잘한다고 했으니까 믿어봐야지.”

 “기왕에 이렇게 된 일 어떻게 하겠니. 차라리 체념해 버려. 그래야 정신건강에 좋아. 그건 그렇고 오늘 퇴근하고 한 잔 어때? 이 언니가 위로하는 의미에서 한 잔 쏠게.”

 “지금 불난 집에 기름 붓는 거지?”

 “?”

 은혜가 가늘게 뜬 눈을 한껏 치켜뜨자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가연이 다 이해한다는 표정으로 그녀의 손등을 가만가만 두드렸다.

 “이상과 현실의 간격 때문에 버거운 사람에겐 포기가 약이 된다더라. 어차피 달걀로 바위를 칠 건 아니잖아. 언니 말대로 술이나 한 잔 하면서……”

 “야, 홍가연!“

 “깜짝이야. 왜 갑자기 소리는 지르고 그래?”

 “당장 오늘부터 칼 귀가라는 거 몰라? 술 냄새라도 풍겼다간 끝장이라고.”

 “아!”

 비로소 은혜의 말뜻을 이해한 가연의 입가에 미안한 미소가 서렸다. 보면 볼수록 알면 알수록 새삼 완벽함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만드는 집안이었다.

 “너희 집 보면 병풍을 보는 것 같아. 꼼꼼하게 수를 놓은 병풍 말이야. 한 땀이라도 허튼 곳은 찾아볼 수가 없으니.”

 “그래, 병풍이지. 앞에서 보면 멀쩡한데 뒤에서 보면 온갖 실들이 흉하게 엉켜있는 병풍 말이야. 생각 같아선 그 병풍에 불이라도 확 지르고 싶어.”

 “생각만 그런 거지?”

 “라이터만 가져다 대도 그 날로 끝장인데 미쳤냐? 어휴, 생각할수록 심란해 죽겠네. 어디 용한 점쟁이 없을까?”

 “부적이라도 쓰게?”

 “그래서 된다면 그러고 싶다.”

 “내가 보기엔 네 오빠나 아버지 고집 꺾을 만한 신(神)은 없을 것 같다.”

 “밥이나 먹자.”

 이제 겨우 하루가 지났을 뿐인데 쉬지 않고 한숨을 푹푹 내쉬는 은혜를 보니 가연은 어쩐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서둘러 결혼 날짜를 잡지만 않았어도 은혜가 오빠 집으로 끌려들어가는 일 같은 건 없었을 거란 생각과 점이라면 장난삼아 보는 별점마저도 싫어하는 은혜가 얼마나 급했으면 점쟁이까지 운운했을까 싶으니, 그녀가 말한 것처럼 자신이 정말 ‘나쁜 년’은 아닌가 싶어지는 것도 같았다.

 

 오늘따라 유난히 실실대는 태진과 점심을 먹은 뒤, 서점으로 발길을 옮기던 인혁은 자신도 모르는 기대감에 가슴이 설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사는 일 자체가 싫증난 놀이처럼 느껴지는 자신에게 이런 감정이 있다는 사실이 생경스러웠고, 그 근저에 아무 것도 아는 게 없는 한 여자의 얼굴이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이 당황스러웠다.

 무료함 속에 너무 오래 동안 자신을 방치해 둔 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반듯한 규격을 지닌 일상 속에 너무 오래 방치되어 있었던 탓에 지극히 평범한 것들을 향한 일탈의 욕구가 치밀어 오르는 게 틀림없었다. 명품 숍에 걸린 옷도 아니고 도매 시장에 진열된 평범하다 못해 흔하기 그지없는 옷에 눈길을 주다니. 판에 박힌 생활에 어지간히 지친 모양이었다.

 오늘은 보라를 만나 그녀의 앳된 목소리로 ‘서프라이즈!’ 를 외치게 만들어줄 밤을 보내야겠다는 생각을 하느라 인혁은 정작 서점을 향한 자신의 걸음이 얼마나 빠르게 움직이고 있는지 전혀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의 끝에 이르기도 전에 인혁은 투명한 유리문 너머로 보이는 한 여자의 목선에 걸음을 멈추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계단을 오르내리며 자신을 뒤돌아보는 시선이 느껴졌지만, 그는 자력에 끌리는 철가루처럼 표정 없는 얼굴로 서점 안으로 들어섰다.

 어쩌면 우연이 아닌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심코 스쳐가는 사람들이 고개를 돌리고 쳐다볼 만큼 출중한 자신의 외모가 저 여자에게도 비슷한 작용을 하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자 피식 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언제부터 기다리고 있었던 걸까? 그러고 보니 머리가 꽤나 좋은 것 같은데. 단 한 번의 우연을 가지고 내가 이곳에 다시 올 거라 생각한 걸 보면.’

 굳어진 확증을 돕듯 가까운 곳에 서 있는 사람들의 시선이 자신에게 꽂히는 것을 느끼며, 인혁은 보다 느긋해진 마음으로 늘 그래왔듯 경영에 대한 책들이 진열된 서가로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그런 자신의 생각이 몽매하도록 대단한 착각이라는 걸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여자가 이 책 저 책을 뒤적이며 들고 있는 노트에 무엇인가를 열심히 쓰고 있는 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한 건 인혁 자신이었다. 어제와는 다르게 코트까지 걸치고 온 여자는 들고 있는 책과 노트에서 눈을 떼거나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린 적조차 없었다.

 ‘저 여자 혹시 선수 아닐까? 무관심이 남자를 환장하게 만든다는 사실을 파악하고 있는 게 분명해.’

 여자의 무관심을 사실 그대로 인정하기 힘든 마음은 그럴듯한 추측을 일으켰고, 인혁은 고수의 직감으로 선수의 수준을 판단하기 위해 그녀가 서 있는 서가를 향해 다가갔다. 하지만 아사다 지로의 소설을 손에 들고 있는 여자는 그가 바짝 곁으로 다가선 순간에도 고개조차 돌리지 않았다.

 ‘여자야, 남자의 관심을 끌기 위한 무관심은 무시가 아니라고. 튕기는듯하면서도 잡아당기는 무언가가 있어야지. 대뜸 너 같은 건 안중에 없다. 라고 무시하는 태도는 결코 남자의 관심을 끌지 못하지.’

 그가 어정쩡하게 여자의 주변을 서성이는 사이에도 출입구 쪽에 자리한 계산대에 서 있는 여직원들의 수줍은 시선이 인혁의 뒷목을 간질였다.

 “저……”

 여자를 향한 목소리가 귓전에 닿고 난 뒤에야 인혁은 그것이 자신의 입에서 새나간 소리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황당하기가 그지없었지만 그는 기민하게 자신의 행동에 대한 구실을 찾아냈다.

 강 인혁의 인생에 ‘작업’이란 말 따위는 그야말로 언어의 도단이었다. 굳이 작업이라는 걸 할 이유도 없었고, 그럴 만한 가치를 지닌 여자는 세상 어디에도 없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일찍 깨달은 자신이었다. 태연을 가장하고 작업을 하고 있는 여자에게 자신은 어설픈 선수의 포지션을 조언해 주려는 친절한 마음을 갖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런 식의 작업은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다는 귀한 조언을 해 주기 위해.

 하지만 의아한 표정으로 자신을 돌아다 본 여자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인혁은 머릿속이 온통 하얗게 비는 것을 느꼈다. 아, 이런 목소리였구나…….

 “무슨 일이시죠?”

 “아, 실례가 아니라면 제가 들고 있는 이 책의 판형이 어떤 건지 묻고 싶어서요.”

 “신국판이네요.”

 인혁의 질문에 힐끔 그가 들고 있는 책을 내려다본 여자가 짧고 간단하게 판형을 들려주자 그는 어안이 벙벙했다. 처음 보는 여자…… 그것도 평범하기 그지없는 여자에게 대뜸 책의 판형을 물은 자신의 행동을 스스로에게 설명할 길이 없었다. 무엇보다 익히 잘 알고 있는 길을 일러주듯 여상하게 판형을 대답해 주는 여자의 모습이 신비스럽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런 그의 멍한 생각에도 불구하고 여자는 여전히 들고 있는 책에 눈길을 줄 뿐이었다.

 “고맙습니다.”

 “천만에요.”

 마땅히 할 말을 찾지 못한 인혁이 궁색한 인사를 던진 순간에도 여자는 그저 고개를 까딱하며 의례적인 답인사를 건네 왔을 뿐, 그에 대한 어떤 관심도 드러내지 않았다. 머쓱한 표정으로 계산대를 향해 걸음을 옮길 즈음에야, 인혁은 자신이 비참해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반쯤 넋이 나간 얼굴로 내민 책과 카드를 받아드는 여직원에게 미소를 지어보이며 인혁은 생각했다. 여자는 평범을 무기로 앞세운 대단한 고수이거나, 아니면…… 가엾게도 석녀(石女)이거나…… 둘 중 하나였다.

 

 

 실제 상황

 

 

  “고모, 아버지께서 내려오래요.”

 노크와 함께 고개를 들이민 태희의 말에 은혜는 잠시 동안 가라앉았던 가슴이 다시 벌렁질을 시작하는 걸 느꼈다. 돌아오는 전철 안에서부터 벌렁대던 가슴이 겨우 가라앉나 싶었는데 다시 또 이러다니……. 이대로 간다면 몇 달을 버티지 못하고 요절을 할 게 뻔했다. 부모님을 앞세워 세상을 떠나는 죄가 가장 큰 불효라지만 이런 갑갑증을 안고 일생을 사는 것보다는, 제 명을 다 채우지 못하고 요절을 하는 게 어찌 보면 복(福)일 것도 같았다.

 타고난 체력이 있으니 일 년이야 어떻게든 버티겠지 싶으니 처량 맞은 눈물이 눈시울을 적시는 것 같았다. 불쌍한 인생, 스물일곱의 겨울을 채우기도 전에 황천길을 가게 되다니…….

 “고모, 저녁 먹은 거 소화 잘 안 돼요?”

 얘는 어쩜 저렇게 고모 소리며 존댓말을 입에 착착 달라붙게 할 수 있을까. 은혜는 걱정스런 눈길로 자신을 쳐다보는 작은 조카에게 애써 미소를 지어보이곤, 아래층으로 내려하기 위해 방문을 나섰다.

 문중 모임에 익숙한 큰오빠는 집에서도 가족회의를 하는지, 거실엔 오빠 부부와 태진까지 함께 자리를 하고 앉아있었다.

 “앉아.”

 “네.”

 남들이 보면 화기애애한 가족의 모습이라고 하겠지만, 당사자인 은혜에겐 철근 콘크리트 기둥이 가슴을 짓누르는 듯한 답답함이 느껴질 뿐이었다. 도대체 이 아저씨가 무슨 말을 하려고 가족들을 다 한 자리에 모아 놓은 거지…….

 “태진이 회사랑 네 회사가 바로 이웃이라는 게 사실이냐?”

 “아!”

 은혜가 불끈 쥔 주먹으로 하고 태진을 쏘아보기도 전에, 비굴한 표정을 한 그가 고개를 숙이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왜 대답을 못 해?”

 “멀지는 않아요.”

 “바로 옆 건물이라는데 멀긴 뭐가 멀어?”

 “……”

 “내일부터 같이 출근하고 같이 퇴근해.”

 “오빠!”

 “아버지!”

 태진 역시 이건 아니다 싶었는지 제 아버지의 말에 대뜸 반기를 드러냈다.

 “요즘이 어떤 세상인 줄 알아? 니들은 젊은 애들이 신문도 안 보고 살아? 아침이면 지하철에서 치한들이 여자들을 희롱하고, 저녁이면 멀쩡한 규수들을 납치해서 욕보여서 카드빚을 갚는 세상이야. 인간의 탈을 쓴 금수들이 널을 뛰고 다니는데 태진이 넌 사내가 되서 고모 걱정 안 돼? 그리고 은혜 넌 언제까지 그렇게 철없이 날뛰고 다닐 생각이야? 세상이 다 네 마음 같은 줄 알아? 만일 너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내가 아버님 얼굴을 어떻게 뵐 수 있겠니?”

 “저기요, 오빠. 저 여태 무사히 잘 다녔거든요.”

 “사고라는 게 미리 예견하고 찾아오는 게 아니야. 여태 잘 다녔다고 앞으로도 계속 그러리란 보장이 있어?…… 그러게 자고로 여자란 때가 되면 제 짝을 만나 집안 살림이나 하면서 살아야 하는 법인데, 쯧.”

 “고모, 오빠 말씀 들어요. 고모가 몰라서 그러는데 고모 밖에서 지낼 때, 오빠 하루도 한숨 덜 날이 없었어요. 우리가 왜 큰 손해를 보면서까지 아파트 처분하고 이리로 이사를 왔게요. 아가씨도 알죠? 아파트 살 때 들어간 돈만이라도 찾아보려고 삼 년을 기다린 거. 이제 와서 하는 말이지만 그 일 때문에 오빠랑 백번도 더 싸웠어요. 난 조금만 더 기다려보자고 하고, 오빠는 그깟 돈 몇 푼 때문에 아가씨가 한 데서 지내는 걸 지켜보냐고 뭐라 하고. 오빠가 하도 성화를 하는 바람에 시세가 바닥인 데도 불구하고 아파트 판 거 모르죠? 공치사가 아니라 아가씨가 하도 오빠 마음을 모르는 것 같아 얘기하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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