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 - 전야제(2)
"새는 더 이상 날지 못한다."
***
"들어와, 하사."
반쯤 열린 문틈 너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그는 노크하려던 손을 멈췄다. 그제서야 집으로 돌아온 느낌에 크로멜은 반갑게 문을 밀었다. 익숙한 담배 냄새와 함께 거센 바람이 갑작스레 그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 바람에 여기저기 쌓여있던 서류가 흩어지고 벽난로의 불씨가 훅하면서 죽어버렸다.
"제가 떠날 때부터 줄곧 열어두신 겁니까?"
"답답한 건 죽어도 싫어서 말이지."
어이없는 대답으로 크로멜의 말문을 막은 남자는 열린 창문 아래에 서있었다. 가느다란 눈매가 인상적인 그는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생각보다 빨리 도착했더군. 급행선이라도 타고온거야?"
"그런 종류의 마차는 있더라구요. 밤새 달려온 참입니다."
"어디서부터?"
"탈롯사에서 내려서 갈아탔어요."
"엄청 비쌀텐데?"
"제가 안 낼꺼니 탔죠."
크로멜이 어깨를 으쓱이며 답하자, 남자는 그답다는 생각에 소리내어 웃었다. 그러고보니 저 멀리 경시청 건물 앞 도로변에서 마부 하나와 제복입은 사내 하나가 다투는 모양세가 보였다. 익숙한 얼굴이였고, 익숙한 성격이었기에 대번에 누군지 알아볼 수 있었다.
"테오 녀석이군."
"그 거리에서 뭐가 보이기나 해요?"
경악스럽다는 크로멜의 질문에 남자는 웃어보이면서 말꼬리를 돌렸다.
"봉급도 많이 타는 놈이 짜게 굴기는, 네 후임한테 저러고 싶냐?"
"제가 감봉처분된게 언제인데요. 돈 없습니다."
"그거야 네 탓이지. 그래, 첫 외박 감상은 어땠냐?"
몸을 돌린 사내는 한켠에 놓인 소파를 가리켜보며 물었다. 그때까지 방문 앞에 서있던 크로멜은 몸을 옮겨 소파에 털썩 주져앉았다. 단추를 끄르고, 턱을 문지르자 그때까지 쌓아둔 피로감이 물밀듯이 밀려들어왔다.
"그나마 작은 수확이 있었으니 견딜만 했습니다."
"다음 번에도 꼭 시켜달라는 소리로 들리는데?"
"…말을 말지요."
"수확했다는 것은 다음에 듣고, 물건은?"
크로멜은 서류가방에서 필사본을 꺼내 그의 상사에게 건넸다. 내용은 미리 전보로 전달받았었기에 가볍게 훑어보기만한 그는 식어버린 벽난로로 문서를 던져넣었다.
"아크리사-"
왼손에 낀 반지에 속삭이듯이 말하자, 순식간에 불길이 되살아나면서 종이를 집어삼키었다.
힘들게 가져온 문서가 흔적도 없이 재로 변하는 걸 지켜보자 크로멜은 입맛이 썼다.
"언제봐도 부러운 능력이네요. 살면서 난방비 내보신 적 없죠?"
"비아냥거리기는. 환복할 옷은 가지고 왔냐?"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크로멜은 씩 웃으면서 대답 대신 들고 온 서류가방만을 툭툭 쳐보였다.
"급히 오느라 짐은 집으로 전부 부치고 들고 온 건 저게 다입니다. 어쩌죠, 다음 임무는 못 나가겠네요."
"그래? 그럼 아쉬운 대로 내꺼라도 빌려입고 가야겠네."
남자는 방 안을 가로질러 옷장 앞으로 가더니 몇 벌의 정장을 뒤로 던졌다. 한 방 얻어맞은 크로멜은 멍한 표정으로 테이블 위에 쌓이는 정장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방금 왔는데 또 어딜 보내시려구요?"
"결혼식."
"하지만 저 이제 교대시간입…"
"너 오늘 오전부로 경시청 소속으로 바뀌어서 임무기록 백지됬다. 축하해, 경위님. 이제 다시 신나게 일해야지?"
그 말을 듣자 크로멜은 그대로 소파 위로 쓰러졌다.
"경위, 지금 뭐하는 거야?"
"감봉처분을 연장하시던 다른 징계를 내리시던 카밀란 경감님 마음대로 하세요. 지금은 도저히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하겠다구요."
카밀란은 어처구니 없다는 듯이 소파에 드러누운 크로멜을 바라보았다. 크로멜은 그와 눈이 마주치자 눈을 감고 아예 그에게서 등을 돌려버렸다. 카밀란은 골머리가 아프다는 듯이 이마를 짚으며 소리쳤다.
"경위, 장난칠 시간 없어! 지금 당장 마차를 타도 아슬아슬하다구!"
"정 그러시면 테오 녀석이나 데려가요. 아마 그런 자리가면 신나할텐데."
"테오를 보내기에는 판이 너무 커. 경험도 부족한 그 녀석이 가봤자 흠이나 잡힌다구."
"저희가 더 떨어질 이미지나 있습니까?"
"이번 일은 실수했다간 이미지고 나발이고 너랑 내 목이 먼저 날라갈 일이거든."
크로멜은 신음소리를 내면서 쿠션 밑으로 얼굴을 숨기었다. 그도 알고는 있었다. 카밀란의 말대로 이번 일은 사소한 실수라도 엄청나게 큰 여파를 몰고 올 수 있는 자리였으니까.
"…그런 거창한 자리는 제 취향이 아닙니다. 당장에 실수로 하객들 발이라도 밟으면 목 날아갈지도 모르는 곳을 누가 가고싶어합니까?"
"다들 가기 싫어하니까 우리같은 연줄없는 말단들이 가는거지."
"전 우리가 빽은 없어도 굉장히 고급인력이라고 생각했는데요."
"고급진 자리기는 하니까 얼추 들어맞긴하네. 자꾸 말 돌리지 말고 일어나, 경위! 너 아니면 그런 자리에 데리고 갈 부관도 없다고!"
"예예, 카밀란 경감님은 저 없으면 밥도 못 드실 양반이시죠."
"이 자식이, 버릇없기는!"
"이렇게 가르치신 사람 탓입니다."
카밀란은 밀려드는 두통에 머리가 새하야지는 것을 느꼈다. 어찌된 놈이 나이를 먹을수록 한 마디도 안 지는데다가 더 유치해지고 있었다. 상관이 그러던말던 꿈지럭거리며 게으르게 일어선 크로멜은 길게 하품을 늘어뜨렸다.
"하암-, 반푼이 놈들 왔다고 싫어하겠네요."
"반푼이니까 이런 일 맡는거지. 1과 놈들이 그런 곳에 배치될 일은 없으니까."
"참내, 비싸기들도 하셔라. 똑같은 돈 받고 일해도 누구는 특급, 누구는 뒤치닥거리라니."
"그 비싼 몸들 덕분에 오늘 저녁은 호화롭게 공짜로 먹으니 다행아니겠니."
"전 어제부터 다이어트 중인데요."
"…다음 임무 뺑뺑이 돌리기 전에 입 다물고 양복이나 챙겨서 내려와."
협박성 짙은 말을 남긴 카밀란은 크로멜을 한 번 쏘아보고는 먼저 집무실을 나섰다. 크로멜은 궁시렁거리면서도 테이블 위에 널린 옷가지를 대충 집어들고 카밀란의 뒤를 쫓았다. 그러나 계단을 내려가면서도 불만에 가득찬 크로멜의 입은 쉴 생각이 없었다.
"저희는 휴가도 없습니까?"
"당연한 사실 나한테 묻지마, 경위. 준전시상태에 휴가는 무슨 휴가야?"
"그렇다고 저희가 공무원이지 군인은 아닌데요. 복지관련으로 상부에 보고하면 경감님 짤리십니까?"
"그러면 뒤 봐줄 사람 없어진 경위는 곧바로 최전선 차출이겠지. 알아들었으면 이제 좀 조용히하고 따라와줄래."
나선형 계단을 돌아내려온 둘은 홀을 가로질러서 뒤쪽으로 나섰다. 그 곳에는 경시청 문양이 그려진 사륜마차 한 대가 대기하고 있었다. 카밀란이 다가서자 제복 차림의 마부가 경례를 올리고는 마차의 문을 손수 열어주었다.
"결혼식에 이런 딱딱한 마차가 가도 되는 겁니까?"
"없는 것보다야 낫지."
둘이 자리를 잡고 앉자마자 마차는 곧바로 출발했다. 포장된 도로 위를 빠르게 달려나가자 창문 밖으로 잿빛 경시청 건물이 멀어져갔다.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던 크로멜은 한숨을 내쉬었다.
"테오가 부럽기는 처음이네요. 모처럼 쉬나 싶었는데."
"그 녀석은 군부로 다시 출장이야, 쉬기는 무슨."
"여기저기 인력난이네요."
"300년 동안 숨죽였던 제국이 하나로 합쳐지고 있다. 좋던 싫던 간에 큰 파장을 불러일으킬 일이니 나라 안팍으로 모두가 주목하고 있으니까. 이런 기념비적인 장면에 어린애는 출연불가니 국경선으로나 보내는거지."
"기념비적인 것 치고는 너무 소소군요. 대성당이나 성도 아닌, 고작 방계 가문인 팔치틴 가문의 별장에서라니. 뭐가 '세기의 결혼식'인지."
"다분히 정치적 의도만 가득하지, 신랑신부 축하하면서 열어주는게 아니잖아."
크로멜은 의자에 등을 기대었다.
대가문들.
황실의 피를 잃은 제국을 제 입맛대로 이끌어온 더러운 다섯 족속들이였다. 천성적으로 마나와 친숙한 엘프라는 특성 하나로 마법사를 정규적으로 배출해온 그들은 적이 많은 제국에게는 환영받는 자들이였다.
더러운 작자들, 크로멜은 그리 생각하며 코웃음을 쳤다. 황제가 없는 제국이 과연 제국이라 할 수 있을까?
"기어코 왕좌에 앉을 생각이겠군요."
"앉는게 아니라 앉히는거지. 꼭두각시 하나 앉혀놓고 입맛대로 갈아치우는 것은 일도 아닐꺼야."
"황제를 '사육'한다는 것처럼 들리네요."
크로멜의 말에 카밀란은 옷 아래로 징그러운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혐오스러운 단어였다, 하지만 그만큼 적당한 것은 또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앞에 앉은 젊은 경위를 바라보았다. 하나뿐인 눈동자는 깊게 가라앉아있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뷰리사네 가의 실각은 불씨가 됬어어야했는데, 그들에게는 기회이자 희망의 불씨로 보였나보다."
"혁명의 불씨가 전란의 불씨가 되버렸지요."
카밀란은 입맛이 썼다. 공들여 준비했던 거사가 성공했는데도 결과는 그들의 예상과는 정반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5가문 중 하나인 뷰리사네를 정치적으로 죽여놨더니 그들은 황제라는 카드를 꺼내든 것이다.
"그래, 가짜 황제건 진짜 황제건 누군가가 저 왕좌에 앉는다면 다시금 전쟁이 벌어질꺼다."
전쟁과 황제.
크로멜은 이질스러운 단어라는 생각이 들었다. 모두가 사람들에게서 잊힌 단어였다. 대확장전쟁 이후, 휴전과 황제의 붕어로 사람들에게서 잊혀졌던 단어가 다시금 국민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었다. 그건 마치 그들이 멀리서 돌아온 것같은 느낌이였다.
크로멜은 전날 밤을 떠올렸다. 갑판 위에서 누이의 이름을 듣자마자 분노하던 소년은 아직 어렸다. 그리고 소년만큼이나 그의 누이, 다음 황제를 낳게 될 소녀도 어릴 것이다.
"이네스 뷰리사네."
"뷰리사네 가의 현 가주, 세기의 신부님, 차기 황제의 어머니."
카밀란은 창 밖을 보면서 툭툭 말을 쏘아냈다. 그답지 않게 차가운 어투였다. 고개를 돌린 카밀란은 크로멜을 쏘아보았다.
"동정심이라도 드나, 경위?"
"꼭두각시만큼 불행한 것도 없으니까요."
"상황에 따라선 언제 죽여야할지도 모르는 사람이다. 괜한 동정심 때문에 일 그르치지마."
크로멜은 대답없이 허리에 찬 검을 붙들며 조용히 눈을 감았다. 서늘한 금속의 냉기가 그의 손아귀로 천천히 스며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