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장(序章)-척후병(斥候兵)
1368년 태조(太祖) 홍무제(洪武帝)에 의해 명왕조가 개창된 지 140여 년이 지났다.
명왕조 중흥의 성군(聖君)으로 이름 높았던 10대 홍치제가 36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한 뒤 제위를 이은 11대 무종(武宗) 정덕제(正德帝)는 방탕하고 무능한 인물이었다.
그가 등극하자 기다렸다는 듯 환관들이 국정을 농단하였고 목민관들은 백성의 고혈을 쥐어짰다.
과중한 세금을 피하여 경작지를 버리고 떠도는 유민이 헤아릴 수 없이 늘었으며 더러는 살기 위해 도적떼가 되었다.
불과 몇 년 사이에 산하는 온통 도적떼들로 들끓었고, 거리 곳곳에는 버려진 아이들의 울음소리가 그칠 날이 없었다.
그러자 크고 작은 난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났으니, 그 중 명사(明史)는 정덕(正德) 5년(1510)에 발생한 유육(劉六), 유칠(劉七)의 난을 주목하고 있다.
그들이 득세할 무렵에는 무리가 20여 만에 이르러 강소와 안휘, 호북 삼개 성에 걸쳐 세력을 떨쳤다고 하니 나라의 꼴을 알고도 남음이 있다.
한 때 토벌군을 물리치며 위세를 떨치던 유 씨 형제는 결국 변방을 지키던 정예군인 요동의 대군이 투입되자 비로소 섬멸 당하고 말았다. 정덕(正德) 7년(1512), 발호한 지 2년 만의 일이다.
이 이야기는 바로 이 무렵에서 시작된다.
***
어둠 속이었다. 제법 드센 바람이 날카로운 소리를 내고 숲을 헤집으며 지나갔지만 초가을의 밤기운은 서늘할 뿐 어깨를 웅크리게 하지는 않았다.
활동하기 좋은 날씨였다. 사도치(司道治)는 어둠 속에 코를 내밀고 가볍게 숨을 들이쉬었다.
머리 위에서는 만도처럼 날카롭게 휘어진 그믐달이 한 조각 구름에 밀리고 있었다.
‘좋아.’
사도치의 입가로 실낱같은 웃음이 매달렸다. 우측 어둠 속으로 시선을 주었다. 한 길 남짓한 크기의 잡목이 빽빽한 그곳에는 바람에 몸을 떠는 나뭇잎들의 서걱거리는 소리만 있을 뿐 아무 기척도 없었다.
‘놈도 느끼고 있겠지.’
사도치의 입이 야무지게 닫혔다. 눈빛이 물기 머금은 칼날처럼 번들거린다. 바람 속에 묻어온 것은 희미한 땀 냄새, 그리고 더 희미한 쇠붙이 냄새였다.
그건 멀리서 맡으면 물 냄새 비슷하지만 조금 덜 비리다는 점에서, 그리고 조금 더 차갑다는 점에서 구분이 된다.
땀 냄새와 함께 쇠붙이 냄새가 맡아진다는 건 눈앞의 이 언덕 너머에 초병이 매복해 있다는 의미다.
지난 석 달 동안 밤을 낮 삼아 강소성에서부터 이곳 호북까지 뒤쫓아 온 놈들이다. 제대로 씻었을 리가 없다.
조정에서 보낸 참장(參將) 원표(袁彪) 휘하의 토벌군은 기병 삼천에 보병 일만이었다. 그들을 상황(上荒)에서 쳐부순 게 다섯 달 전이었다.
그때 얻은 말과 군량, 병장기들은 부족한 아군의 군비를 채워주기에 충분했다. 그 전과로 아군의 사기는 충천해 있었다.
그러나 원표의 토벌군은 단지 자신들의 발목을 잡아두기 위한 것에 불과할 뿐, 정작 주적은 따로 있다는 걸 알았을 때는 상황이 달랐다.
상대는 요동의 주둔군이었다. 그들은 정예 중의 정예로 이름나 있는 군사들이다.
몽골의 오이랏트와 변경을 마주하고 싸우면서 실전 경험으로 단련된 군대인 만큼 군기가 엄정했고, 이름난 용장들도 수두룩했다.
닥치는 대로 지방군들을 끌어 모아 만든 조정의 토벌군 따위와는 비교되지 않는다.
비록 세를 불렸다고는 하나 어디로 보나 초적의 무리에 불과한 자신들과는 상대가 안 되는 것이다. 요동군이 도착했다는 소식을 듣자 초적군의 동요가 눈에 띠게 심해졌다.
밤을 빌어 몰래 대열을 이탈하는 자들이 많아져서 아침에 점호를 해 보기가 두려울 정도였다.
진중은 무리를 해산하고 잠시 흩어져 목숨을 보존하자는 쪽과, 끝까지 싸우자는 쪽의 두 패로 나뉘어 연일 소란스러웠다.
그 끝없는 논쟁에 쐐기를 박은 것은 반란군의 수장 중 한 명인 유칠(劉七)이었다. 그가 서둘러 하간(河間) 부근까지 진격해갔던 일만 여의 대군을 되돌려 이끌고 진중에 도착한 것이다.
그는 갑주를 쩔렁이며 군막을 젖히고 들어서자마자 결론을 내지 못하고 있는 형 유육(劉六) 곁에서 분연히 칼을 뽑아들었다.
“여기서 쓰러지면 영웅이 되지만 흩어져 다시 초적으로 돌아간다면 민초들의 비웃음을 살뿐이다!”
유칠은 부전을 주장하던 장수 셋의 목을 단칼에 쳐 그 수급을 탁자 위에 던졌다.
“초적의 무리로 일어섰지만 민초들에게는 끝까지 정의군으로 기억되고 싶다!”
그의 일갈로 논쟁은 끝났다. 그러나 투지만으로 싸움에 이길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돌이켜보면 요동군을 맞이했던 지난 석 달 동안은 지옥이 따로 없었다.
그들의 철기(鐵騎)에 철저히 유린당하며 쫓기느라고 뒤돌아 볼 새도 없었던 낮과 밤이었던 것이다. 잠시 정신을 차리고 돌아보면 어느 새 놈들의 철기가 코앞에 닥쳐들곤 했다.
사도치는 지난 석 달간의 악몽을 떨쳐 버리려는 듯 한 번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선택을 해야 할 때인 것이다.
매복을 돌아서 지나가느냐, 아니면 해치우느냐 둘 중의 하나가 있을 뿐이다. 돌아서 지나가면 그뿐이다. 들키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저 잡목 속에 몸을 숨기고 있는 놈도 그럴 것이다.
바람 속에 옷깃 스치는 소리를 숨기고 한 마리 영활한 뱀처럼 땅에 배를 착 붙인 채 조금씩 전진해 간다면 풀벌레들도 눈치 채지 못할 것이다. 문제는 언덕 아래에 흐르고 있는 개울을 건너는 일이었다. 낮은 물소리가 들리는 것으로 보아 그리 깊지는 않겠지만 차가울 것이다. 한밤중에 찬물에 옷을 적시는 건 여간 불쾌한 일이 아니다.
‘좋아, 해치우는 거지 뭐.’
그의 결정은 언제나 빨랐고, 행동은 더욱 그랬다. 사도치가 편안하게 기대고 있던 바위를 등으로 밀어내고 신속하게 잡풀들을 헤치며 전진하기 시작했다.
의외라는 듯 우측의 잡목 숲이 조금 버석거렸으나 곧 시커먼 인물 하나가 역시 어둠 속으로 선뜻 나섰다. 해치우기로 작정한 이상 들킬 것을 염려하지 않아도 좋다. 최대한 빨리, 그리하여 적이 본진에 연락하기 전에 쳐야 한다는 것만 염두에 두고 있으면 된다. 사도치는 날듯이 구릉을 달려 내려갔다.
매복을 서고 있는 초병이 몇 놈인지 따위는 이제 문제가 아니었다. 하나이든 열이든 별 차이가 없다고 생각한다.
‘요동 놈들에게 이 사도치의 칼 맛을 제대로 보여 주는 거야.’
바람에 날리는 덤불처럼 가볍게 내달리며 등 뒤에 메고 있던 칼을 뽑아들었다. 손안에 꽉 차오는 묵직한 느낌이 좋다.
팔뚝의 근육이 팽팽한 긴장을 싣고 떨렸다. 그 느낌이 또 상쾌하다. 선두를 다투듯 잡목 숲에서 빠져 나온 사내는 일견하기에도 팔 척이 넘어 보이는 장신에 곰 같은 체구를 가진 자였다.
그가 몸을 내던지듯 하며 구릉을 달려 내려가고 있었다. 서너 장 간격 저쪽이다. 사도치가 힐끗 거구의 사내를 바라보고 씩 웃었다. 든든했다. 사내는 손에 쇠사슬을 들고 있었다.
그것은 굵은 강철 고리들을 길게 연결한 것으로써, 무려 일장(一丈) 여에 달하는 길이에 무게만도 일백 근이 넘는 엄청난 것이었다.
세상에서 그런 물건을 무기로 쓰는 자는 도무연(都武然)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는 저 무지막지한 자 하나 뿐일 것이다.
사내가 땅을 구르듯이 쿵쿵거리며 뛸 때마다 쇠사슬이 쩔그렁거렸다. 숨죽이고 있던 어둠이 그 소리로 인해 여지없이 깨져버렸다.
‘무식한 놈.’
사도치가 혀를 차며 발에 더욱 힘을 실었다. 어둠 속에서 당황하고 있는 초병들의 기척이 느껴졌다. 그리고 곧 귓가에 그들의 숨결이 잡혔다.
몇 놈인지 가늠하고 있는데 허공을 가르며 묵직한 쇠사슬이 먼저 날았다.곁을 스쳐 날아가고 있는 그것에서 위잉- 하는 파공음이 일었다.
다시 한 번 혀를 찬 사도치가 왼발로 땅을 박차고 도약했다. 막 칼을 들고 일어서던 초병 하나가 어둠 속에서 날아든 도무연의 쇠사슬 끝에 이마를 찍히고 쓰러졌다.
머리통이 자기(瓷器) 병처럼 산산이 부서져 형체를 잃었다. 세 명이었다.
박쥐처럼 소리 없이 그들의 머리 위로 날아들고 있는 사도치의 눈에 막 머리통이 부서지고 있는 한 명과, 호각을 꺼내 들고 있는 한 명 그리고 칼을 겨누고 있는 마지막 초병의 모습이 갑자기 다가왔다.
사도치가 힘껏 칼을 뿌렸다.
씨익, 하는 휘파람소리와 함께 호각을 입에 물던 자의 목이 떨어졌다. 칼은 그자가 뿌리는 피보다도 빠르게 허공을 돌아 비로소 초점을 맞추어 오는 자의 어깨에 사선으로 틀어박혔다.
어깨에서 가슴까지 비스듬히 쪼개진 자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서서히 무너졌다. 사도치가 가볍게 바닥에 내려선 것과 동시에 도무연도 도착했다.
“내가 빨랐지?”
거칠어진 숨을 씩씩거리며 의기양양하게 말한다. 쓰러진 초병의 옷깃에 칼을 닦고 있던 사도치가 그를 힐끗 바라보았다.
“그러면 뭐해, 난 두 명이다.”
도무연이 어깨에 쇠사슬을 두르며 사도치에게 베인 두 명의 주검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언제나 놈에게 한 발씩 뒤지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가 거구를 쭉 폈다. 어둠 속에서 검은 곰 한 마리가 불쑥 일어선 것 같은 모습이었다.
“썩을 놈.”
탁한 가래침을 뱉은 도무연이 등을 돌렸다.
제1장 접전(接戰)
막장 두원표가 거칠게 군막을 젖히고 들어섰다. 그는 오늘 밤 진중의 경비를 책임지고 있는 수군감(守軍監)이었다.
총군사령 왕중석은 아랑곳없이 흐린 불빛 아래 지형도를 펼쳐놓고 들여다보고 있었다. 요동에서 혁혁한 무명을 떨친 지 십여 년.
금의 잔존세력인 건주(建州) 여진을 아우르고, 오이랏트를 막아낸 공으로 조정으로부터 정서장군(正西將軍) 영평후(英平候)의 관작까지 하사받은 무장이었다.
비록 막북으로 쫓겨났다고 하나 아직 흉포한 기세가 남아 있는 몽고의 오이랏트와 대적하며 변경을 잘 지켜내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선대의 영종제는 토목보에서 그들에게 사로잡혀 끌려가는 수모까지 겪지 않았던가.
왕중석은 자신이 직접 대군을 이끌고 대륙의 남방으로 출정하게 되리라고는 생각하지도 못했었다.
전해들은 바로는 군세 이십여 만의 반군이라고 하나 그 근본은 하찮은 초적의 무리일 뿐이다.
지방군만으로도 충분히 제압할 수 있어야 했다. 그런 일에 변방을 지키고 있는 정예군을 투입한다는 건 망신이다. 어쩌다가 나라꼴이 이 지경이 되었는지 생각하면 한숨부터 나왔다.
“장군, 놈들의 척후가 본진을 염탐하고 돌아갔습니다.”
탁자를 짚으며 두원표가 씩씩거렸다. 왕중석이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추적대를 풀어 놈들을 잡아야 합니다.”
하필 제가 수군을 서고 있는 밤에 적의 척후가 숨어들었다는 것이 못내 불쾌한 모양이었다.
전선에서 잔뼈가 굵은 그로서는 수치를 느끼는 게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