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록 초적의 무리라고는 하지만 이십여 만의 대군이고 보면 그 중에 쓸 만한 놈들도 더러 있을 것 아닌가.
삼엄한 매복과 경비를 뚫고 이곳까지 숨어 들어왔다가 다시 발각되지 않고 돌아갔다면 솜씨가 꽤 좋은 놈들일 것이다.
어쨌거나 이 밤중에 병사들을 두드려 깨우고, 추적대를 편성해 뒤쫓는 따위의 소란은 오히려 사기만 떨어뜨릴 뿐이다. 그래가지고 꼭 놈들을 잡을 수 있다는 확신도 없다.
“그대로 둬.”
잠깐 두원표에게 눈길을 주었던 왕중석이 다시 흐린 불빛아래 펼쳐진 지도로 시선을 돌렸다.
머지않아 벌어질 결전에 대한 작전계획이나 한 번 더 검토해 두는 게 더 나으리라고 판단한 것이다.
그는 이 싸움이 마지막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궁지에 몰린 반군들의 저항도 그 어느 때보다 거셀 것이다.
이 시점에서 놈들의 척후가 본진을 염탐하고 돌아갔다고 해서 달라질 건 없다.
왕중석은 오히려 그들이 무사히 돌아가서 저의 자랑이자 자부심인 요동군의 엄정한 군기를 본 대로 보고하는 게 나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지난 석 달간의 숨 쉴 틈 없었던 싸움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흐트러지지 않고 있는 토벌군의 엄중한 군세와 절도를 전해 들으면 도적의 무리가 더욱 위축될 것이니 그렇다.
그러나 총사령의 군막을 나온 두원표는 분을 삭일 수 없었다.
오늘밤의 매복과 경계를 총 지휘한 것은 제가 아닌가. 제가 직접 지휘한 야간 경계에 구멍이 뚫렸다는 걸 스스로 용서할 수 없었다.
게다가 그 건방진 초적의 척후들은 초병 셋을 잔인하게 죽이기까지 했다. 이대로 묵과한다면 그건 자신의 전력(戰歷)에 흠이 가는 일이다.
그런 생각으로 군막에 돌아온 중랑장 두원표가 탁자 위에 거칠게 군도를 벗어 던졌다. 당직을 서고 있던 군관들이 바짝 긴장하여 부동자세를 취했다.
저희들이 모시고 있는 이 불같은 성격의 젊은 중랑장은 언제나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의자에 던지듯 몸을 실은 두원표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막충과 고여해를 불러라!”
큰 소리로 복명한 군관 한 명이 뛰듯이 군막을 나갔고, 조금 지나자 같은 군관 복장의 마르고 뚱뚱한 사내 두 명이 군막의 포장을 젖히고 들어왔다.
그들은 다른 군관들에게는 시선도 주지 않은 채 두원표 앞에 공손히 한쪽 무릎을 꿇고 군례를 올렸다. 그들을 바라보는 두원표의 눈에 비로소 만족한 기대감이 서렸다.
“놈들의 척후가 본진 깊숙이 들어와 염탐하고 갔다.”
의외의 사실이라는 듯 마른 사내가 처음으로 고개를 들어 두원표를 바라보았다.
“한 식경 쯤 전의 일이다.”
이제는 뚱뚱한 사내까지 두원표의 얼굴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그들은 이 젊은 장군이 무얼 원하는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저희들이 해야 할 일은 바로 그런 것들이었다.
“사로잡아 오기를 원하십니까?”
마른 사내 막충이 서툰 한어로 물었다.
“여의치 않으면 죽여도 좋다. 단 목은 가져와라.”
서슴없는 두원표의 명령에 그들이 다시 한 번 군례를 올리고 군막을 나갔다. 여전히 다른 군관들에게는 눈길 한 번 주지 않은 채였다.
두원표가 비로소 긴장을 풀고 기지개를 켰다. 여진인인 막충(幕忠)과 고여해(高如海)는 고수들이었다.
해서(海西) 여진의 하다부(哈達部) 소속인데, 죄를 짓고 쫓기던 것을 두원표가 구해준 이후 그의 객장(客將)이 되어 진중에 머무르고 있었다.
막충의 비도술은 두원표를 감탄시키기에 충분했고, 고여해는 뚱뚱한 몸에도 불구하고 강차(鋼叉)를 다루는 솜씨가 눈부신 바 있었다.
게다가 그들은 여진 특유의 사냥꾼적인 감각을 가지고 있어서 추적과 야습에 일가견이 있다.
두원표는 그들을 위사(衛士)처럼 부리면서 몇 번이나 오이랏트와의 싸움에서 공을 세웠다.
아무리 어려운 임무를 맡겨도 막충과 고여해는 매번 두원표의 기대를 충족시켜 주었던 것이다.
적진에 숨어들어가 수장의 목을 벌써 몇 개인가 가져다주었고, 특히 야간의 침투와 수색에 탁월한 솜씨를 보였다.
그 공으로 그들은 두원표에게 보호받는 식객의 신분에서 벗어나 많은 급료를 받는 용병으로 변해 있었다.
그들이라면 동이 트기 전에 그 괘씸한 척후 놈들의 목을 가져오리라. 두원표는 느긋한 심경으로 당직 군관이 가져다 준 차를 마셨다.
***
날이 밝으려면 아직 두 시진은 있어야 한다. 사도치와 도무연은 작은 개울가에 화톳불을 지펴놓고 감자를 구우며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정탐은 성공이었다. 어둠에 잠긴 놈들의 본진을 휘젓고 다녔지만 아무에게도 발각되지 않았던 것이다.
사량부(沙粱部)에 자리잡고 있는 본대의 목책까지는 이제 삼십여 리 길이었다. 별빛 아래 시커멓게 웅크리고 있는 저 산등성이만 넘으면 된다.
여기쯤이면 안심이었다. 요동군의 진영에서도 멀리 떨어진 안전지대인 것이다.
그들은 이곳에서 주린 배를 대충 채우고 한기를 녹이며 휴식을 취한 후 목책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좀 서운하지 않냐?”
뜨거운 감자를 우물거리며 도무연이 입을 열었다. 입 주위가 숯 그을음으로 시커멓게 칠해져 있어서 강철 침 같이 빼곡히 돋아난 수염과 어우러져 그의 얼굴을 더욱 곰처럼 보이게 했다.
“뭐가?”
역시 감자를 우물거리며 사도치가 시치미를 뗐다. 그는 도무연이 무얼 말하려는지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정서장군이라나 뭐라나 하는 그자 말이야. 목 값이 꽤 나갔을 텐데…….”
“미친 놈. 우리가 자객이냐?”
사도치는 손을 바지에 쓱쓱 닦으며 별이 촘촘한 하늘을 보았다. 그들은 총군사령 왕중석의 군막 가까이 접근해 갔었다.
군막에 불이 켜져 있고, 군관들이 수시로 드나드는 걸로 보아 왕중석은 그 안에 있는 게 분명했다.
도무연이 어둠 속에서 어깨를 움찔거리며 치고 들어가자는 시늉을 했고, 사도치는 깜짝 놀라 그의 항아리 같은 팔뚝을 꽉 쥐고 놓아주지 않았었다.
군막 주위에 둘러서서 호위를 서고 있는 위사들만 해도 이십여 명이었다. 일견하기에도 그들은 하나같이 무시할 수 없는 자들이었다. 고도의 훈련을 받았음은 물론, 실전으로 단련된 일당백의 용사들일 게 틀림없다.
게다가 저희들이 몸을 숨기고 있는 곳은 삼만의 대군이 숙영하고 있는 적진 한 가운데 아닌가.
호랑이 굴에 들어와 있는 것이다. 위사들과 격돌하는 동안 소나기처럼 떨어지는 포승줄에 멧돼지처럼 꽁꽁 묶이거나, 아니면 고슴도치처럼 온몸에 화살을 꽂고 뒹굴어야 할 것이다.
운 좋게 왕중석의 머리를 들고 나올 수 있다 할지라도 삼만의 정병들을 헤집고 달아날 수는 없다.
엄중한 경계를 뚫고 침투해 들어가서 적정을 탐색했고, 다시 그보다 몇 배의 위험을 넘기며 여기까지 무사히 빠져 나온 것만 해도 기적과 같은 일이었다.
“그래, 아무래도 무리였겠지?”
다시 한 개의 감자를 으적거리며 도무연이 풀죽은 소리로 웅얼거렸다. 잠시 그들 사이에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깊은 적막 속에서 어둠을 무서워하듯 조심스럽게 졸졸거리며 흐르는 개울물 소리가 청승맞게 들려왔다.
“그나저나 네 생각은 어때?”
한참 후에야 사도치가 입을 열었다. 도무연이 그를 힐끗 바라보았을 뿐 꺼져 가는 모닥불 앞으로 두 손을 내밀기만 했다.
“되겠어?”
다시 묻지만 여전히 묵묵부답이다. 며칠 후면 이 작은 야산을 끼고 있는 벌판에서 최후의 결전이 벌어질 것이다.
사도치는 그 결과를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면서도 물어본 건 스스로에게 다시 한 번 확인시켜 주고 싶어서였다.
“썩을 놈, 잘 알면서 뭘 물어.”
도무연이 따스해진 손을 비비며 퉁명스럽게 말을 받았다. 이십만에서 이제 오만이 남아 있을 뿐인 반군과, 삼만의 토벌군이 이곳에서 아비규환을 연출하며 생사의 대전을 벌일 것이다. 그리고 그 싸움이 마지막이 될 것이다.
수적으로는 아직도 우세하다고 하나 반군의 사기는 그 동안의 싸움에서 충분히 맛본 요동군의 위세로 인해 떨어질 대로 떨어져 있었다.
변경을 지키는 정예군이라는 이름이 부끄럽지 않게 요동군의 군세는 엄중했고 치중(輜重)은 견고했다. 특히 그들의 철기병은 무서웠다.
온몸을 철갑으로 감싼 채 장창을 휘두르며 평원을 내닫는 그들의 말밥굽 아래 반군은 놀란 메뚜기들처럼 이리 뛰고 저리 뛰며 달아나기에 바빴던 것이다. 그것이 강도 높은 훈련을 받고 실전에서 단련된 군사와 그렇지 않은 군사와의 숨길 수 없는 차이였다.
전투력에서 그들은 이미 하늘과 땅의 차이를 보이고 있었던 것이다. 사도치는 마음이 무거워졌다. 헐벗은 고향을 등지고 도무연과 함께 반군을 따라 나선 지 벌써 이 년째였다.
언제까지나 촌구석에서 무지렁이로 눌러 살면서 업신여김을 당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었다.
난세에 영웅이 태어나는 법 아니던가. 적어도 저와 도무연의 힘이라면 이 난세에 충분히 빛을 발휘할 수 있으리라고 믿었다.
유비를 보아라. 돗자리 장수에 불과했던 그가 나라를 얻은 게 어디 우연이었던가. 난세에 떨치고 일어나 뜻을 창천에 두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나라고 못 될 것이 무어냐. 나라는 아니더라도 입신양명하여 천하에 이름을 날리고, 부귀영화를 누리기에는 이 난세보다 좋은 시절이 없다.
이렇게 마음을 다지며 도무연을 설득해 고향을 등진지 두 해. 반군에 가담하여 몸이 으스러지도록 싸우고 또 싸웠다.
싸우는 곳마다 이기고, 사기가 하늘을 찌르던 반군의 위세는 곧 대명 천하를 뒤엎고 새 왕조라도 세울 것 같았다. 그러면 저도 그곳에서 적어도 장군의 직첩은 받게 될 것이라고 믿었다. 그리고 조금 더 노력하면 대신도 되고, 승상도 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러나 그런 꿈은 요동군이 진군해 오면서 박살나고 있었다. 한때 북경의 조정을 두려움에 떨게 하던 반군이 그들과 접전하면서부터 지리멸렬해 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건 애초부터 승산이 없는 일이었다. 차라리 풀죽을 쑤어먹고 나무껍질을 벗겨먹을 망정 고향 땅이나 지키고 있을 걸, 하는 후회가 없지 않았다.
하지만 이미 올라탄 호랑이 등 위였다. 갈 때까지는 가 봐야 한다. 이곳에서의 접전이 어쩌면 마지막 전투가 될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생각이 더욱 짙어진 것은 도무연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유육과 유칠 형제가 아무리 용을 써도 반군은 이 벌판에서 끝장이 나고 말 것이다.
그러니 일찌감치 군진을 벗어나 달아난 자들이 차라리 현명했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어떻게 할래?”
사도치가 무심을 가장하며 다시 한 번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지금이라도 진영으로 돌아가지 않고 달아나 버린다면 아무도 모를 것이다.
슬그머니 고향으로 돌아가 ‘내가 언제 나갔었수?’ 하며 국으로 눌러앉아 버리면 끝나는 것이다. 도무연이 그 곰 같은 얼굴을 돌려 사도치를 직시했다.
“너 설마…… 정말 달아나자는 건 아니겠지?”
“그럼 그냥 여기서 죽을래?”
“…….”
도무연이 난감한 표정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라고 달리 뾰족한 수가 있는 건 아니지 않은가.
두 사람 사이에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개울물 소리가 점점 더 커져가는 것 같은 침묵이 얼마나 지났을까, 사도치가 귀를 쫑긋 세웠다.
‘무언가 있다.’
그의 직감이 뒤통수를 때리며 그렇게 속삭였다.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느낌에 몸이 떨리고 뻣뻣해진다.그가 슬그머니 곁에 놓아두었던 투박한 칼을 잡았을 때 도무연도 무언가 낌새를 챈 모양이었다.
육중한 덩치답지 않게 그의 육감도 미모사의 촉수처럼 발달해 있었다. 오랜 사냥꾼 생활로 몸에 밴 야성의 본능이다. 도무연이 사도치를 바라보았다.
‘뭐가 있지?’
그의 눈이 그렇게 묻고 있었다. 사도치가 보일 듯 말 듯 가만히 턱을 끄덕이며 힘주어 칼자루를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