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무연이 어깨에 두른 쇠사슬을 쩔렁이며 옆으로 뒹군 것과 동시에 사도치도 칼을 쥐고 허공으로 튀어 올랐다.
피웃-!
어둠을 찢고 날카로운 휘파람소리가 들리더니 그들이 있던 자리에 두 자루의 비도가 꽂혔다.
도무연은 개울에 허벅지까지 담근 채 어느새 어깨에 두르고 있던 쇠사슬을 풀어 들고 있었고, 사도치는 그와 삼 장 여 떨어진 바위 곁에 서서 칼을 뽑아 겨누고 있었다.
“겨우 여기서 노닥거리고 있었군, 쥐새끼들.”
어둠 속에서 마르고 뚱뚱한 두 인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막충과 고여해다. 사도치와 도무연의 눈이 허공을 격하고 서로 얽혔다.
‘어떻게 여기까지……?’
그것이 두 사람의 공통된 의아함이었다. 조금의 흔적도 남기지 않기 위해 애쓰며 조심스럽게 여기까지 피해 오지 않았던가. 오랜 사냥 생활 속에서 저절로 단련된 두 사람의 몸놀림이었다.
절대로 흔적이 남았을 리 없다. 그런데도 군관 복장의 저 두 놈은 자신들을 쫓아 왔다. 그것도 불과 반시진여 만에 이곳까지 추적해 온 것이다. 중간에 흔적을 놓쳐서 맴돈 적이 없다는 결론이 된다.
놈들은 마치 눈으로 보며 뒤를 쫓아오듯, 이 어둠 속에서 보이지 않는 자신들의 행적을 한 순간에 읽으며 뒤쫓아 왔던 것이다. 대단한 놈들이다.
사도치가 그런 생각으로 긴장할 때 도무연도 눈을 끔벅거리며 막충과 고여해를 바라보고 있었다. 긴장하고 있는 기색이 완연히 느껴진다.
막충이 앞으로 나섰다. 그의 껑충한 키가 꺼져가는 모닥불 빛을 받아 휘청거리고 있었다.
“겨우 두 놈이었나?”
막충의 눈이 웃고 있었다. 이쪽에 대한 철저한 무시다. 사도치는 입술을 악물었다.
다시 뚱뚱한 자가 느물거리며 어둠을 밀고 다가왔다. 놈은 자신의 상대는 이미 도무연으로 정해져 있었다는 듯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사도치에게 등을 보이고 있었다.
사도치는 다시 한 번 무시당했다는 느낌에 입술을 비틀었다. 자존심이 상한 것이다.
“곱게 따라 갈 테냐, 아니면 머리를 내줄 테냐?”
마른 자가 서툰 한어로 말을 던졌다.
“변방의 오랑캐 놈이었군.”
사도치가 씹어뱉듯이 말을 받았다. 뱃속 깊은 곳에서부터 끌어올린 음성이다.
막충의 눈 꼬리가 매섭게 치켜져 올라갔다. ‘변방의 오랑캐’ 라는 말에 싸늘한 살기가 일어선 것이다. 죽여서 목을 들고 가리라고 작정했다.
“좋아.”
막충이 차갑게 웃었다. 사도치를 노려보는 그의 눈은 더욱 차갑게 빛나고 있었다.
‘만만히 볼 자가 아니다.’
사도치는 본능적으로 그렇게 느끼고 있었다. 이놈들은 단순한 병사들이 아닌 것이다. 고도의 수련을 쌓은 무서운 자들이라는 걸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말로만 듣던 무림이라는 곳의 고수인지도 몰랐다.
‘그런 놈들이 어떻게 진중에?’ 하는 의문을 곱씹고 있을 여유는 없다.
‘무림의 고수…….’
사도치는 전신을 꿰뚫고 지나가는 짜릿한 흥분을 느꼈다. 심장이 무섭게 뛰고, 칼을 쥔 손의 근육이 경직되며 잔 경련을 일으킨다.
두 손으로 힘주어 칼을 쥐고 혀로 입술을 핥으며 이 흥분의 정체가 무엇인가 생각했다. 그건 맹렬한 투지였다.
“간다!”
막충의 마른 몸이 와락 다가들었다. 그의 두 손에는 비도가 가득 잡혀 있었다. 어둠 속에서도 요기처럼 새파란 한기를 뿌려대는 것들이다.
사도치는 흥분으로 인해 심장이 터져버릴 지경이었다. 팽팽하게 긴장된 혈관이 아프게 느껴졌다.
이런 느낌을 무어라고 표현해야 하는 건지 알 수 없었지만 지금의 이 순간이 미치도록 좋았다.
저보다 강할지도 모르는 상대를 만났을 때마다 척추를 쪼개며 온 몸을 달리던 이 제어할 수 없는 짜릿한 긴장과 흥분.
산중에서 며칠을 두고 뒤쫓던 호랑이나 표범과 드디어 마주쳤을 때, 더욱이 도와줄 아무도 없고, 퍼렇게 살아 으르렁대며 위협하고 있는 그놈의 눈과 정면으로 마주하고 섰을 때의 느낌. 바로 그런 것이었다.
엄습하는 두려움과 망설임. 그러나 그 밑바닥에서부터 서서히, 때로는 갑작스럽게 고개를 쳐드는 오기와 투지.그것이 이성을 억누르고 매번 다스릴 수 없는 무모한 광기(狂氣)로 그를 몰고 갔다.
그러면 온몸과 정신으로 부딪치는 것이다. 그게 호랑이든 표범이든 그 때만큼은 아무 상관도 없었다.
그건 야성의 분출이라든가 하는 그런 정도가 아니었다. 차라리 억눌려 있던 마성(魔性)의 폭발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 순간 그는 오직 미친놈이 될 뿐이었으니 그렇다. 오랫동안 잊어버리고 있었던 그 짜릿한 느낌에 사도치는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이대로 죽어도 좋다는 쾌감이었다. 살아 있다는 건 바로 이런 거라고 생각하며 사도치도 마른땅을 걷어차고 힘껏 몸을 날렸다.
어둠을 가르고 흰 빛줄기가 어지럽게 쏟아져 내린다는 생각이 번쩍, 하고 스쳐갔다.
한 움큼 뿌려진 막충의 비도들이 모닥불 빛을 받아 반짝이며 유성처럼 흐르고 있었다. 피할 수 없다.
사도치는 이를 악물었다.
‘그렇다면!’
그가 칼을 휘둘러 종횡으로 어둠을 베어내며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쨍강거리는 날카로운 금속성과 함께 손안에 짜릿한 자극들이 전해져왔다.
순간적이었지만 그것이 네 번이라는 걸 헤아릴 수 있었다. 치명적인 급소를 보호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나머지는 심각한 게 못 된다. 그렇다면 무시해 버려도 그만이다.
사도치는 자신의 도약력을 믿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언제나 그의 믿음을 충족시켜 주었다. 지금도 그랬다. 비록 허공중에서 몸을 틀고, 칼질을 하느라고 도약하던 순간의 힘이 많이 소실되기는 했지만 여전히 거대한 박쥐처럼 소리 없고 날카롭게 막충의 전면을 향해 공간을 접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놀라고 있는 막충의 얼굴이 크게 다가왔다. 그는 처음 의아했고, 그리고 이내 경악했다.
‘놈은 시시한 척후병 따위가 아니다.’
막충은 눈앞에 쳐들어오고 있는 자가 여명(黎明) 직전의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자신의 비도들 중 네 개를 정확히 쳐냈다는 걸 믿을 수 없었다.
믿을 수 없을 만큼 놀라운 안력(眼力)과 칼솜씨를 보여준 자.
그자가 조금의 망설임도, 두려움도 없이 곧장 삼장 여의 공간을 뛰어넘어 도약해 들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단순히 각력(却力)에만 의존한 도약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위력적이고 빨랐다.
저울질하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어느새 사도치의 칼이 정수리 위로 떨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막충이 ‘치잇!’ 하는 휘파람소리를 내며 힘껏 뒤로 몸을 뺐다.
사도치의 숨소리가 이마 위에 느껴지고 있었다. 등줄기를 타고 서늘한 느낌이 달려 내려간다.
뒤로 몸을 빼며 다시 비도를 뽑아 든 막충의 눈에 사도치의 어깨와 팔뚝, 다리 등에 박혀 있는 비도 몇 개가 눈에 들어왔다.
‘그러면 그렇지. 곧 놈의 기력은 떨어지고, 살에 맞은 멧돼지처럼 움직임이 둔해질 것이다. 그러면 마지막이다.’
막충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 그러나 제가 있던 자리에 내려선 사도치가 다시 땅을 박차는 걸 목격한 순간 그 미소는 하얗게 탈색되었다.
‘저럴 수가!’
막충은 믿을 수 없었다. 한 순간 머릿속이 혼란해졌다. 사도치의 허벅지에는 분명히 비도가 박혀 있었다. 막충은 그걸 이해할 수 없었다.
그 상태라면 적어도 근육 조직들이 마비되어가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떻게 처음보다 더 빠르고 맹렬하게 움직일 수 있단 말인가. 비도들은 아직 손을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사도치는 이미 거대한 그물이 되어 소리 없이 머리 위로 덮쳐들고 있었다. 막충의 눈에 절망이 어렸다.
너무 얕잡아 보았다고 생각해 보지만 언제나 칼끝에 목숨을 맡기고 살아가는 무림인으로서는 초라하고 궁색한 변명일 뿐이다.
막충은 사도치의 칼이 희고 싸늘한 살기를 뿌리며 떨어지는 걸 멍하니 보고 있었다.
‘베었다!’
손안에 묵직하고 익숙한 느낌이 가득 전해져왔다. 칼날이 뼈에 닿은 듯 찰나의 단단한 저항이 느껴졌으나 그것 뿐, 사도치의 칼은 진흙을 베어내듯 썩둑, 방해물을 가르며 거침없이 쳐 내려갔다.
그리고 비로소 발이 땅에 닿았다. 허벅지 안쪽에 저르르한 통증이 느껴졌다. 가볍게 휘청거린 사도치가 곧 바로 서서 상대를 노려보았다.
깡마르고 차갑게 생긴 놈의 어깨가 쩍 벌어져 뻘건 속살을 내보이고 있었다. 워낙 빠른 칼질이었으므로 피도 솟구치지 않았다.
눈을 부릅뜬 놈의 상체가 휘청하더니 마른 장작처럼 뒤로 넘어갔다. 곧이어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등이 땅에 닿았고, 그 충격으로 상처가 더욱 벌어졌다.
비로소 놀란 핏줄기가 왈칵 뿜어져 나와 어둠 속에 흩뿌려진다. 사도치가 인상을 찡그리며 한 발 뒤로 물러섰다. 어쨌든 베인 놈의 피를 뒤집어쓰는 건 기분 나쁜 일이었던 것이다.
“쳇, 별 거 아니었잖아?”
사도치는 그렇게 중얼거려 보았다. 아직도 혈관을 거칠게 달리고 있는 걷잡을 수 없는 흥분과 긴장을 가라앉혀 보기 위해서였다.
숨을 한 번 크게 쉬고 나자 그제야 깨진 쇠종을 연달아 두드리는 것 같은 날카로운 소리가 귀에 들려왔다. 아직 뚱보 한 놈이 남아있고, 지금 도무연이 그놈과 맞붙어 있는 중인 것이다.
개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온 몸에 난 크고 작은 상처들로 인해 도무연의 거구는 온통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다.작고 뚱뚱한 사내는 체구와 전혀 어울리지 않게 아주 가볍고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도무연은 긴 쇠사슬의 양끝을 짧게 잡고 정신없이 휘두르고 있었다. 삼절곤을 쓰는 것과 비슷한 모양이었는데, 뚱뚱한 사내는 두 자루의 강차를 매섭게 휘두르며 그런 도무연의 쇠사슬을 상대하고 있었다.
바람소리를 내며 들이치고 맴돌아 빠져나가는 모습이 매끄럽다. 그런가 하면 어느새 찍어오고 정신없이 후려쳐대는 쇠사슬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드나들며 강차를 찔러 넣기도 했다.
그런 사내의 모습은 마치 줄에 묶어 밀고 당기는 허풍선이 인형처럼 가볍고 날렵해 보였다. 사도치가 쩝, 하고 입맛을 다셨다.
도와줄까? 하고 생각해 보았지만 이내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저 무지하고 자존심만 센 놈은 오히려 눈을 부라릴 게 뻔하기 때문이다.
“어떻게든 알아서 하겠지.”
중얼거린 사도치가 꺼져가는 모닥불에 나무토막 몇 개를 다시 던져 넣고 그 앞에 쭈그려 앉았다. 비릿한 피 냄새가 맡아졌다.
모닥불 건너에 넘어져 있는 깡마른 사내의 몸에서 아직도 더운피가 뭉클뭉클 흘러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죽은 자의 모습은 그게 누구이든 끔찍하고 징그럽다.
입맛을 다신 사도치가 애써 시선을 돌렸다.뚱뚱한 사내, 고여해의 몸놀림이 신중하고 조심스러워졌다.
그는 오랜 동료였던 막충이 믿어지지 않게도 초적의 한칼에 당한 것을 알고 한풀 사기가 꺾여 있었다.
게다가 막충을 벤 놈은 이쪽의 싸움 같은 것에는 관심도 없다는 듯 모닥불을 지피고, 타버린 감자를 집어들어 으적으적 먹어대고 있는 중 아닌가. 그게 더 신경에 거슬렸다.
‘이런 무지한 초적 놈들에게 놀림감이 되다니.’
고여해는 사도치에게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언제 놈이 막충을 벤 칼을 다시 잡고 싸움판에 뛰어들지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러기 전에 이 무지한 곰 같은 놈을 처치해 버려야 했지만 그게 또 처음 마음먹었던 것과 같지 않았다. 무식한 시골 머슴 같이 생겨먹은 놈은 어찌된 건지 시간이 갈수록 힘이 더 솟구치는 것 아닌가. 싸우면 싸울수록 힘이 난다는 여포가 이와 같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